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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6 22:11:51

에르브슈타인 에르뇌

에르브슈타인 에르뇌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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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rbstein Ernő.jpg
이름 에르브슈타인 에르뇌
(Erbstein Ernő)
생년월일 1898년 5월 13일
사망년월일 1949년 5월 4일 (향년 50세)
국적 파일:헝가리 제2공화국 국기.svg 헝가리 제2공화국
출신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너지바러드
포지션 윙 하프
신체조건 미상
소속팀 부다페슈티 AK (1915-1924)
CS 올림피아 피우메 (1924-1925)
LR 비첸차 (1925-1926)
브루클린 원더러스 FC (1926-1928)
감독 SSC 바리 (1928-1929)
ASG 노체리나 (1929-1930)
칼리아리 칼초 (1930-1932)
SSC 바리 (1932-1933)
루케세 1905 (1933-1938)
토리노 FC (1938-1939)



1. 개요2. 생애
2.1. 선수 생활2.2. 감독
3. 수상
3.1. 감독
3.1.1.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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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헝가리의 전 축구 감독.

2. 생애[1]

2.1. 선수 생활

에르브슈타인은 그가 2살 때 너지바러드를 떠나 부다페스트로 이사했다. 에르브슈타인은 1915년에 데뷔한 후 선수 생활 대부분을 부다페슈티 AK에서 보냈다.

에르브슈타인은 1924년에 CS 올림피아 피우메에서 이탈리아 축구를 접했고 1925년에는 LR 비첸차에서 1시즌을 보냈다. 이때 에르브슈타인은 그의 아내가 될 욜란다 헌터러를 만나 결혼했고 딸 수잔나를 얻었다.

이후 에르브슈타인은 이탈리아의 외국인 선수 제한 정책으로 인해 미국에 건너가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2.2. 감독

에르브슈타인은 선수 은퇴 이후 바로 SSC 바리의 지휘봉을 잡게 되었다. 비록 그는 바리의 강등을 막지 못해 1시즌 만에 바리를 떠나게 되었지만 그의 팀이 펼치던 특유의 빠른 템포의 축구는 이탈리아 팬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에르브슈타인의 감독 시절 중 최고의 성과를 냈던 때는 루케세 1905 시절이었다. 에르브슈타인은 5년의 임기 동안 루케세를 세리에 A에까지 승격시켰고 다시 루케세가 세리에 B로 강등당할 때까지 루케세의 감독직을 맡았다. 원래 루케세는 강등에도 불구하고 에르브슈타인의 연임에 큰 불만이 없었지만 파시스트 인종법이 그들의 동행에 발목을 잡았다. 에르브슈타인의 두 딸이 학교에 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에르브슈타인은 딸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던 토리노로 건너가 토리노 FC에서 1년간 감독직을 맡았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면서 그와 가족들의 신변에 더 크게 위협이 닥쳤다.

에르브슈타인은 전쟁때 이탈리아를 떠나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의 감독직 제안을 받고 네덜란드로 가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에게 남은 선택은 친척들이 남아있는 헝가리에서 지내는 것 뿐이었다. 에르브슈타인은 페루초 노보의 도움을 받아 헝가리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이탈리아 축구계에 비공식적으로 조언[2]을 했다.

그러나 독일 국방군이 1944년, 헝가리를 침공했고 에르브슈타인도 체포되어 부다페스트 근처의 수용소에 보내졌다. 그는 1944년 12월,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에 보내지기 전에 구트먼 벨러와 함께 수용소에서 탈출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노보가 마련해준 은신처에서 보냈다.

전쟁이 끝나고 에르브슈타인은 토리노에 돌아와 토리노의 디렉터로 일했고 당시 세리에 A를 주름잡던 그란데 토리노의 기틀을 다졌다. 그러나 에르브슈타인도 1949년 5월 4일, 다른 그란데 토리노의 멤버들과 함께 수페르가의 비극으로 사망했다.

3. 수상

3.1. 감독

3.1.1. 클럽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2] 이당시 토리노에 에르브슈타인이 했던 중요한 조언중 하나가 바로 발렌티노 마촐라의 영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