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1] | 에르빈 귄터 니츠 (Erwin Günter Nyc) |
출생 | 1914년 5월 24일 |
사망 | 1988년 5월 1일 (향년 73세) |
국적 | [[폴란드| ]][[틀:국기| ]][[틀:국기| ]] |
출신지 | 독일 제국 카토비츠 |
포지션 | 하프백 |
신체조건 | 180cm | 76kg |
소속팀 | 포곤 카토비체 (1929-1935) 폴로니아 바르샤바 (1935-1939) 포곤 카토비체 (1939) LSV 퓌르슈텐발데 (1940-1941) LSV 마르커스도르프 (1942-1943) 포곤 카토비체 (1945-1947) |
국가대표 | 11경기 0골 (1937-19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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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의 전 축구 선수.2. 생애[2]
2.1. 이름
니츠의 원래 이름은 에르빈 귄터 니츠(Erwin Günter Nytz)였다. 1936년에 성을 폴란드식 표기로 바꾸도록 해서 Nytz가 Nyc로 바뀌었고, 1945년 11월에 제정된 법령으로 1948년에 이름까지 폴란드식으로 바꿔서 에드바르트 피오트르 니츠(Edward Piotr Nyc)가 되었다.2.2. 선수 생활
2.2.1. 클럽
2.2.1.1.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니츠는 포곤 카토비체에서 데뷔했다가 1935년에 군복무로 인해 폴로니아 바르샤바에서 뛰게 되었다. 니츠는 군복무 시절 방공부대에서 복무했고 군복무를 마친 후에도 국영은행에서 일했다. 그는 전쟁이 터지기 전까지 폴로니아에서 계속 뛰었다.2.2.1.2.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면서 바르샤바에 있던 그의 아파트가 루프트바페의 공격으로 파괴되었다. 니츠 역시 독일 국방군에 포로로 잡혔지만 며칠 후 풀려났고 다시 실레시아에 왔다. 실레시아에 돌아온 니츠는 실레시아에 있던 다른 동료들과 함께 독일 국민 리스트에 서명했고 제프 헤어베어거에게 훈련을 받기도 했다.니츠는 1940년 9월에 루프트바페에 징집되었고 퓌르슈텐발데(Fürstenwalde)에서 복무하다가 1942년에 바르샤바로 부대가 이전했다. 폴로니아에서 같이 뛰었던 니츠의 전 동료들은 니츠가 전쟁 기간에 자신들과 접촉했다고 했는데 이는 독일 국방군인들에겐 명백한 금지행위였다. 그리고 그는 나치 체제에 명백하게 반감을 보였다.
니츠는 마르커스도르프(Markersdorf)의 공군 기지로 전출되었다가 다시 몇달 후에 퓌르슈텐발데로 복귀했고 전쟁이 끝났을 때 영국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났다.
2.2.2. 국가대표
1937년 9월 12일, 폴란드와 덴마크의 경기가 니츠의 대표팀 데뷔 경기이고 폴란드의 3대1 승리로 끝났다.니츠는 1938년 월드컵에 유고슬라비아와의 지역예선 2경기, 브라질과의 1라운드 경기에 모두 참가했다.
1939년 6월 4일, 스위스와의 1대1 무승부에서 니츠는 폴란드 국가대표로 11번째이자 마지막 국제 경기를 치렀다.
2.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난 니츠는 다시 카토비체로 돌아왔고 친정팀 포곤 카토비체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전쟁 때 실레시아에 있었던 다른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니츠도 UB(Urząd Bezpieczeństwa)에 자신의 행적을 조사받아야 했다. 여기에서 니츠는 폴로니아 전 동료들의 탄원과 그들과 폴란드 지하 조직에 물질적인 지원을 해줬음이 밝혀져 풀려날 수 있었다. 하지만 니츠에게는 출국 금지 조치가 내려졌고 축구 협회가 니츠를 폴란드 대표팀을 위해 뛰게 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선수 은퇴 이후, 니츠는 여러 클럽에서 코치로 일했지만 큰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