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0-27 15:58:31

엔노 오즈누

엔노오즈누에서 넘어옴
파일:external/syukubo-blog.com/DSC00295.jpg

役 小角 (えん の おづぬ)

1. 개요2. 설명
2.1. 젠키와 고키
3. 대중문화 속의 엔노 오즈누4. 관련 문서

1. 개요

고대 일본의 종교인으로, 음양도불교를 조합한 슈겐도(修驗道)의 창시자. 아스카 시대 사람이라고 전한다.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생몰년은 634 - 701년. 일본에서는 엔노 오즈누, 엔노 교자(役 行者)라고도 부른다. 한국에선 우리 식으로 한자를 읽어 역소각, 역행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2. 설명

엔노 오즈누는 귀신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하늘을 나는 등 놀라운 신통력을 지녔기 때문에 이 방면에서도 유명하다. 유명세로 따지자면 아베노 세이메이와 함께 일본의 술자 가운데 쌍벽. 보통 일본 설화에서는 길고 흰 수염을 기르고 두건을 쓰고 석장과 경전 두루마리를 쥔 늙은 승려의 외모를 하고 젠키(前鬼)와 고키(後鬼)라는 귀신들에게 시중받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전설에 따르면 634년에 카모노 에키미(賀茂役君)라고 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 씨족은 율령제에서 부역의 의무를 지닌 역민(役民)을 관장하던 집안이었기에 성을 에키(役)라고 하였다.

엔노 오즈누는 태어날 때 어머니의 뱃속으로부터 꽃을 들고 태어났고 울음소리가 남달랐는데 이를 보고 어머니가 두려운 마음에 산 속에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새들이 날아와 먹을 것을 주고 보호하는 모습을 보고 보통 아이가 아님을 알고 다시 데려왔다고 한다.

엔노 오즈누는 어렸을 때부터 혼자서 산에 들어가 명상을 하거나 배운 적이 없는 범어를 쓰는 등의 기이한 일을 하다가 17세 때(650년) 나라현의 간고지라는 에서 공작명왕의 주법을 배웠다, 이 주법을 배운 힘으로 본격적으로 산악 수행을 거듭한 끝에 미노오(箕面)의 폭포에서[1] 용수보살에게 보배구슬을 받는 환시를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이러한 산악 수행의 인연으로 슈겐도에서는 엔노 오즈누를 슈겐도의 개조(開祖)로 모시고 있다.[2]

이 외에도 일본에서 악귀나 산신[3]을 잡아 부리는 등 강력한 주술로 이름을 떨치나, 조정에서도 그의 강력한 법력을 경계하여 몇 차례 실패 끝에 어머니를 볼모로 삼아 699년에 엔노 오즈누를 잡아 이즈섬[4]에 귀양을 보냈다.[5] 혐의가 풀린 이후에도 계속해서 수행하다가 유배가 끝나 풀려난 뒤[6] 2년 후(701) 자신이 깨달음을 얻었던 미노오산 정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는데, 입적하였다는 설과 조정에게 찍혀 당나라로 건너갔다는 설이 전한다.

입적하였다는 설에서는 사후에 신선이 되어, 한반도로 날아왔다고 한다. 비슷한 시대를 산 일본의 법상종 승려 도쇼가 견당사로 가던 도중 신라에 잠시 머물렀는데, 신라의 산중에서 호랑이 5백 마리에게 법화경을 설법하던 도중 웬 사람이 호랑이 사이에서 질문을 하고 이야기를 주고 받은 뒤 알고 보니 그 사람이 엔노 오즈누였다는 일화가 있다. 근데 사료를 통해 보면 그때는 653년(도쇼가 당으로 떠날 때) ~ 660년(일본으로 돌아올 때) 동안인데, 그때 신라에서는 그 유명한 원효의상대사, 대안대사를 비롯한 수많은 고승들이 활동할 시기라 그냥 신라에 잠시 머물면서 신라 승려들을 만났거나 신라에서 유학하던 일본 승려들과 만났던 것이 와전된 듯.

사후 약 1천여 년이 지나 1799년 조정으로부터 진벤다이보사츠(神變大菩薩)이라는 칭호를 추증받았다.[7] 참고로 일본 조정으로부터 보살의 칭호를 받은 이는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백제계 도래인이었던 교키 스님이고 또 한 사람은 요 엔노 오즈누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진벤다이보사츠 혹은 엔노 교쟈(役行者)라고 부른다.

2.1. 젠키와 고키

엔노 오즈누가 부리는 시키가미인 두 귀신, 정확히는 오니로 부부 사이라고 한다. 젠도키(善童鬼)와 묘도키(妙童鬼), 또는 젠키는 기카쿠(義覚)/기가쿠(義学), 고키는 기겐(義玄)/기켄(義賢)이라고 불리기도 한다.[8] 그림에서 주로 남편 젠키는 양을 상징하여 도끼를 들고 입을 벌린 채로 엔노 오즈누의 앞을 가로막는 것을 막기 위해 서 있는 붉은 오니, 아내 고키는 음을 상징하여 영력이 있는 물인 이수(理水)가 든 물병을 손에 들고 곡식들의 씨앗이 들어간 궤짝을 짊어진 입은 다문 푸른 오니로 그려진다.

젠키는 나라현 요시노군 시모키타야마촌, 고키는 나라현 요시노군 아마노가와촌 출신이며 원래는 이코마 산지에서 살면서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재앙을 일으키며 그들을 괴롭히고 있었으나 엔노 오즈누가 쓴 부동명왕의 비법에 의해 포획당했다고 한다. 또는 둘의 다섯 아이 중 막내 아이를 숨기고 자식을 살해당한 부모의 슬픔을 통해 둘을 설득하였다고 한다. 결국 둘은 개심하여 엔노 오즈누를 따르게 되었다. 후에 젠키는 일본 8대 텐구나 48텐구 중 大峰山前鬼坊(那智滝本前鬼坊)이 되었단 전승이 있다.

젠키와 고키가 낳은 다섯 아이들[9]은 오귀라고 불리는데 이들은 엔노 오즈누의 5대 제자[10]와 동일시되기도 한다. 또한 오귀들은 수행자들을 위한 숙방(宿坊, 참배자가 묵는 절의 숙사)을 다섯 곳(행자방行者坊, 삼본방森本坊, 중지방中之坊, 소중방小仲坊, 부동방不動坊) 열었으며 고키츠구(五鬼継), 고키구마(五鬼熊), 고키죠우(五鬼上), 고키죠(五鬼助), 고키도우(五鬼童)라는 다섯 가문의 시조들이 되었다. 이들은 서로 혼인 관계를 가지면서 대대로 숙방을 계속 했으며 가문 남자들은 모두 의(義)자가 들어가는 이름을 썼다고 한다.

나라현 요시노군 텐가와촌에 존재하는 텐가와벤자이텐샤(天河弁財天社), 통칭 텐가와(天河)신사의 궁사를 맡고 있는 가계는 이 부부의 자손이라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3. 대중문화 속의 엔노 오즈누

파일:attachment/엔노 오즈누/Example.jpg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4. 관련 문서



[1] 현재 오사카부 미노오시(箕面市)소재.[2] 이 때 천하의 재난을 구할 본존으로 소환한 자오곤겐슈겐도주존이 되었다.[3]고사기》에도 나오는 카츠라기산 신령 히토코토누시를 술법으로 옭아매어 자주 부렸다고 한다.[4] 오늘날 도쿄도 오시마정(大島町) 이즈대도(伊豆大島)를 말한다.[5] 이때 그가 주술로 반역을 꾀한다는 무고를 받았다고 하는데, 누가 무고했는지는 전하는 기록마다 다르다. 한반도 출신 제자인 가라쿠니 히로다리(韓国広足)라고도 하고, 혹은 산신이면서도 인간에게 부림받음을 굴욕으로 여긴 히토코토누시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즈섬에 유배된 뒤에도 밤마다 신통력으로 후지산까지 날아가서 수행하고 새벽에 돌아왔다고.[6] <일본영이기>는 엔노 오즈누를 히토코토누시가 밀고했다고 설명하는데, 이 책에 따르면 영이기를 집필하는 시점(822년)까지도 히토코토누시는 엔노 오즈누가 자신에게 걸었던 술법을 풀지 못했다고 한다.[7] 그 전까지는 호키보다이보사츠(法起坊大菩薩) 또는 엔노 교쟈(役行者)라고 불렸다.[8] 실제 인물인지는 알 수 없으나 엔노 오즈누의 제자들이란 전설이 있는 기카쿠, 기겐과 동일시되기도 한다. 혹은 엔노 오즈누가 개심한 둘에게 기카쿠, 기겐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고도 한다.[9] 이름은 각각 신기真義, 기츠구義継, 기죠우義上, 기타츠義達, 기겐義元[10] 앞에서 언급한 기카쿠와 기겐을 포함하여 기신義真, 쥬겐寿玄, 호우겐芳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