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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000> 스페인 펠리페 5세의 왕비 파르마의 엘리사베타 공녀 Principessa Elisabetta di Parma | ||
이름 | 이탈리아어 | 엘리사베타 파르네세 (Elisabetta Farnese) |
스페인어 | 이사벨 데 파르네시오 (Isabel de Farnesio) | |
출생 | 1692년 10월 25일 | |
파르마 공국 필로타 궁전 | ||
사망 | 1766년 6월 11일 (항년 73세) | |
스페인 아란후에스 | ||
배우자 | 펠리페 5세 (1714년 결혼 / 1746년 사망) | |
자녀 | 카를로스 3세, 마리아나 빅토리아, 펠리페, 마리아 테레사 라파엘라, 루이스, 마리아 안토니아 페르난다 | |
아버지 | 파르마의 공세자 오도아르도 파르네세 | |
어머니 | 팔츠노이부르크의 도로테아 조피[1] | |
형제 | 알레산드로 이그나치오 | |
종교 |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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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의 두번째 왕비이며 카를로스 3세, 포르투갈의 왕비 마리아나 비토리아, 프랑스의 도핀 마리 테레즈 라파엘, 파르마 공작 필리포 1세의 어머니다.모계쪽으로는 요제프 1세,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총독 마리아 엘리자베트, 카를 6세와 이종사촌이다.[2]
2. 생애
1692년 10월 25일 엘리사베타는 파르마의 공세자 오도아르도 파르네세와 노이부르크의 도로테아 조피 사이에서 태어났다. 1693년 오빠 알레산드로와 아버지 오드아르도 공세자가 연이어 사망하면서 숙부인 프란체스코가 파르마 공작위에 올랐지만, 그가 자신의 어머니와 재혼한 뒤에도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엘리사베타가 파르마 공국의 잠재적인 후계자로 여겨졌다.아버지와 오빠가 사망한 뒤 엘리사베타는 파르마 공작 궁전에 있는 아파트에서 은둔 생활을 하며 자랐지만, 어머니 도로테아 소피아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숙부 파르마 공작 프란체스코에게는 깊은 헌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라틴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말하고 쓸 수 있었고 철학, 지리학 및 역사학 등을 교육을 받았지만 엘리사베타는 자신의 연구에 관심이 없었고 지적 관심도 부족했다. 오히려 무용에 더 능숙했고 피에트로 안토니오 아반치니 밑에서 그림을 공부했으며 음악과 자수를 즐겼다. 그리고 치명적인 천연두 창궐에서도 겨우 살아남았다.
2.1. 결혼
1714년 9월 16일 그녀는 파르마에서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와 결혼했다. 결혼은 파르마 대사인 알베로니 추기경이 주선했고, 스페인의 왕궁의 시녀 위르생 공비도 동의했다. 엘리사베타는 파르네세 가문의 상속자였으며, 이탈리아반도에 대한 전통적인 스페인의 이해관계 때문에 펠리페 5세에게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파르마 대사는 엘리사베타가 수공예와 자수에만 익숙한 소박한 성격의 소유자이며, 이전 왕비의 대체자로서 통제와 지배가 용이하다고 설득하였고, 막강한 권력을 가진 위르생 공비가 결혼에 결정적인 동의를 하도록 설득했다. 동시에 알베로니는 엘리사베타에게 왕이 다른 사람들에게 지배받는 것을 원하며, 빨리 권력을 잡지 않으면 불행한 왕비가 될 것이고, 위르생 공비가 이끄는 프랑스 당의 영향력을 제거하면 스페인 사람들에게도 호감을 가질 것이라고 말했다.
12월 23일, 자드라케에서 엘리사베타는 펠리페 5세를 만나기 전에 자신을 소개하고 싶어했던 위르생 공비를 만났다. 위르생 공비는 스파이를 파견하여 엘리사베타가 사실 통제하기 쉬운 소심한 사람이 아니라고 보고했다. 엘리사베타는 위르생 공비를 맞이하여 그녀와 사적으로 이야기할 것을 요청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위르생 일행의 격렬한 언쟁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후 위르생 공비는 체포되자마자 해고되었고 즉시 국경을 넘어 프랑스로 추방되었다. 알베로니는 펠리페 5세에게 엘리사베타가 자신의 가장 큰 이익을 가지고 행동했다고 알렸다. 12월 24일, 펠리페는 과달라하라에서 엘리사베타를 만났을 때, 전 왕비 마리아 루이사처럼 첫 눈에 빠졌다.
2.2. 왕비
결혼 이후 엘리사베타는 스페인어 이름 '이사벨'로 개명하였다. 그녀는 사냥을 즐기는 동안 남성 승마복을 입었다. 뛰어난 사격과 기수로 묘사되었고, 남편과 함께 사냥을 자주했다. 이사벨은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위해 사치스럽게 소비했다. 그녀의 측근은 간호사 로라 페스카토리와 이탈리아 출신 의사 세르비와 스코티 후작을 제외한, 나머지 측근들로 구성되었다.이사벨은 16~17세기의 이탈리아 작품들을 수집했는데, 코레지오와 귀도 레니, 프란체스코 살비아티, 플란데런의 걸작들이 포함되었으며, 안토니 반 다이카와 같은 유명한 예술가들과 브뤼겔 가문들도 포함되었다.
처음에 이사벨은 데 위르생 공비를 해고하면서 스페인을 프랑스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해준 구세주처럼 보여서 인기가 있었지만, 왕비가 된 이후부터 남편이자 국왕인 펠리페 5세를 쥐고 흔들며 권력을 휘둘러서 곧 데 우르신스만큼 인기가 떨어졌다. 또한 이사벨은 공식적인 스페인 에티켓 궁정 생활의 쇠퇴로 스페인 귀족들 사이에서도 지지를 받지 못했다. 당시 "스페인 당"의 팜플렛은 이사벨에 대해 국왕을 노예 상태로 만들고 외국인들에게 혜택을 퍼다주며 의붓아들들[3]을 죽이려 했다고 비난했다.[4]
알베로니와 추기경 주디체의 조언으로 이사벨은 남편의 측근이 되었고 법정에서 프랑스파 세력을 제거했다. 그들은 이탈리아 간호사 로라 페스카토리의 도움으로 만들어진 고객과 지지자들로 구성된 네트워크를 통해 자신의 추종자들로 대체되었다. 이사벨은 수석 고문은 알베로니였는데, 그녀는 자신과 파르마의 이익을 보호하는 방법에 대해 그녀를 안내했지만, 그 자신은 외국인으로서 의 권력을 위해 그녀만 의지할 수 있었다.
이사벨은 남편에게 빠르게 완전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사벨은 결단력을 갖고 있었으며 총명하고 대화가 가능하고 행복하며 유쾌하고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또한 영광, 승인, 인기에 대한 야심도 있었다. 프랑스 대사 생테낭 공작에 따르면, 이사벨 왕비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고 믿게 했고, 왕의 취향과 별난 것들을 공유했다. 또한 우울한 에피소드들은 종종 펠리페 5세가 마비되어 공무를 처리할 수 없게 되었고, 그 동안 이사벨이 그 일을 처리했다. 이러한 시기는 1717년, 1722년, 1728년, 1731년, 1732–33년 그리고 1737년에 발생했다.
1724년 의붓아들 루이스 1세에게 왕위를 양보한 남편의 재고를 간청했지만, 실패했고, 남편 펠리페 5세는 라 그란하 산 일데폰소 궁전으로 은퇴했다. 또한 1724년에 이사벨은 그를 위해 오데스칼치 가문으로부터 산 일데폰소 그룹을 인수했다. 루이사 이사벨 왕비의 재임 기간 동안 이사벨은 권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7개월 후, 루이스 1세의 요절로 펠리페 5세는 복위했다. 교황청과 신학자들, 그리고 그녀의 연락망을 통해 장관들의 보좌관들과 함께 그에게 왕관을 다시 쓰라고 압력을 넣은 인물은 이사벨이었다.
이사벨은 국내 정책에 관심이 없었고, 외교 정책을 선호했다. 그녀의 목표는 이탈리아반도에서 스페인의 입지를 강화하는 것이었고, 처음에는 의붓아들 때문에 스페인에서 성공할 것으로 예상되지 않았던 자신의 아들에 대한 야망과 결합되었다. 이사벨의 영향력은 알베로니의 정책을 지지하는 데 전적으로 발휘되었는데, 그 중 하나의 주요 목표는 스페인의 옛 이탈리아 영토를 회복하는 것이었고 실제로 사국 동맹 전쟁에서 스페인 해군은 사르데냐와 시칠리아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그녀는 매우 적극적으로 이 정책에 착수하여 프랑스군이 피레네 산맥으로 진격했을 때 자신을 스페인 군대의 한 사단의 선두에 두었다. 1719년 4월, 이사벨은 프랑스 침공에 대비해 펠리페 5세와 함께 전선에 나섰고, 파란색과 은색 옷을 입은 그녀는 말을 탄 군대를 지속적으로 검토하고 격려했다.
하지만 이사벨의 야망은 몹시 실망스러웠다. 삼국 동맹은 영국군이 비고를 습격했을 때 그녀의 계획을 좌절시켰고, 1720년에 동맹국은 알베로니의 추방을 평화 조건으로 삼았다. 결국 시칠리아와 사르데냐도 반환했다.[5]
남편 펠리페 5세가 거의 늙어가고 있을 때, 이사벨은 자신의 아들들을 위해 이탈리아에서 왕좌를 확보하기 위해 스페인의 전체 정책을 지휘했다. 1731년에 이사벨은 자신이 선호한 계획에 따라 빈 조약에서 자신의 장남 돈 카를로스가 파르마 공국을 물려받는 것이 인정되었고, 1738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을 끝낸 빈 조약 이후 카를로스가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을 받은 것에 만족했다. 그리고 1748년 차남 필리포는 파르마 공작이 되었다.
2.3. 말년
1746년 남편 펠리페 5세가 사망하고, 의붓아들 페르난도 6세가 즉위하면서 이사벨의 통치는 끝났다. 페르난도 6세가 아버지의 정부 사업을 아내 바르바라 왕비에게 맡겼을 때, 프랑스 대사는 "페르난도 6세가 부왕의 뒤를 잇는 것보다는 이사벨을 뒤를 잇는 사람은 바르바라 왕비였다."라고 말했다. 이사벨은 왕대비가 되긴했지만 이미 즉위 시점부터 성년인 페르난도 6세를 어찌할수 있는 명분이나 실권은 없었다.이사벨이 마지막으로 정치에 참여한 것은 1759년 의붓아들 페르난도 6세가 사망한 이후였다. 페르난도 6세가 사망한 후 스페인 왕위는 자신의 장남 카를로스 3세가 물려받았다.[6] 페르난도 6세의 차남 돈 펠리페가 파르마 공국의 주인이 되었고, 자신의 거주지가 될 리오프리오 왕궁을 지었다.
나중에 라 그란하 데 산 일데폰소 궁전과 아란후에스 궁전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1766년, 이사벨은 73세로 아란후에스 궁전에서 세상을 떠나고, 남편 펠리페 5세가 안장된 라 그란하 데 산 일데폰소 궁전 예배당에 묻혔다. 사후 그녀의 광범위한 미술 컬렉션은 그녀의 세 아들에게 나누어졌다.
3. 가족관계
3.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파르마의 엘리사베타 공녀 (Princess Elisabeth of Parma) | <colbgcolor=#fff3e4,#331c00> 파르마의 공세자 오도아르도 파르네세 (Odoardo Farnese, Hereditary Prince of Parma) | <colbgcolor=#ffffe4,#323300> 파르마 공작 라누치오 2세 파르네세 Ranuccio II Farnese) | |
파르마 공작 오도아르도 파르네세 (Odoardo Farnese, Duke of Parma) | |||
마르게리타 데 메디치 (Margaret de'Medici) | |||
모데나의 이사벨라 (Isabella of Modena) | |||
모데나 공작 프란체스코 1세 데스테 (Francesco I d'este, Duke of Parma) | |||
파르마의 마리아 공녀 (Princess Maria of Parma) | |||
팔츠노이부르크의 도로테아 조피 (Dorothea Sophia of Palatinate-Neuburg) | |||
팔츠 선제후 필리프 빌헬름 (Philip William, elector Palatinate) | |||
팔츠 선제후 볼프강 빌헬름 (Wolfgang William, Elector Palatinate) | |||
바이에른의 막달레네 (Magdalena of Bavaria) | |||
헤센다름슈타트의 엘리자베트 아멜리 (Elizabeth Amalie of Hesse-Darmstadt) | |||
헤센다름슈다트의 변경백 게오르크 2세 (George II, Landgrave of Hesse-Darmstadt) | |||
작센의 조피 엘레오노레 (Sophia Eleanor of Saxony) |
3.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1남 | 카를로스 3세 (Charles III) | 1716년 1월 20일 | 1788년 12월 14일 | 작센의 마리아 아말리아 슬하 6남 3녀[7] |
1녀 | 포르투갈의 왕비 마리아나 비토리아 (Mariana Victoria, The Queen of Portugal) | 1718년 3월 31일 | 1781년 1월 15일 | 주제 1세 슬하 4녀[8] |
2남 | 파르마 공작 필리포 1세 (Philip I, Duke of Parma) | 1720년 3월 15일 | 1765년 7월 18일 | 프랑스의 루이즈 엘리자베트 슬하 1남 2녀[9] |
2녀 | 프랑스의 도핀 마리 테레즈 라파엘 (Maria Theresa Raphaela, Dauphine of France) | 1726년 6월 11일 | 1746년 7월 22일 | 프랑스의 도팽 루이 슬하 1녀 |
3남 | 친촌 백작 루이스 왕자 (Infante Louis, Count of Chinchón) | 1727년 7월 25일 | 1785년 8월 7일 | 마리아 테레사 데 발라브리가 슬하 1남 2녀 |
3녀 | 사르데냐의 왕비 마리아 안토니아 페르디난다 (Maria Antonia Ferdinanda, Queen of Sardina) | 1729년 11월 17일 | 1785년 9월 19일 |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 슬하 5남 5녀[10] |
[1] 팔츠 선제후 필리프 빌헬름의 딸이며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 엘레오노레 막달레네, 스페인의 왕비 마리아 아나의 자매다.[2] 큰이모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 엘레오노레 막달레네의 자녀들.[3] 펠리페 5세가 첫번째 왕비 마리아 루이사에게서 낳은 루이스 왕자, 펠리페 페드로 왕자, 페르난도 왕자.[4] 실제로도 이사벨은 루이사 소생의 왕자들을 견제하고 박대하여 관계가 나빴다. 왕세자인 페르난도는 이사벨한테 하도 시달려서 펠리페 5세가 죽고 나서 국왕으로 즉위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이 자신이 싫어하는 계모 이사벨과 그녀의 자식들의 직위와 권한을 박탈하고 궁전에서 추방한 것이다. 특히 이사벨은 신하들을 매수하여 페르난도의 즉위를 방해했고 대놓고 페르난도를 모욕하고 다녔기에 페르난도는 그녀에 대한 원한이 많이 쌓인 상황이었다. 그래서 페르난도는 이사벨을 붙잡아 라 그란하 데 산 일데폰소 궁전에 감금시키고는 사실상 감옥 생활을 하게 만들었다. 사실 페르난도는 마음 같아선 자신을 핍박한 이사벨을 죽여버리고 싶지만 엄연히 적모이자 왕대비인 이사벨을 처형할 수 있는 명분이 특별히 없었기에 감금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때 이사벨의 인망이 워낙 나쁜 터라 페르난도가 그녀를 핍박하는 것을 스페인에서는 모두가 기뻐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이사벨은 12년 동안 라 그란하 데 산 일데폰소 궁전에 감금당했는데 그것도 페르난도가 죽고 자신의 아들 카를로스가 왕으로 즉위해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5] 다만 시칠리아는 합스부르크 제국으로, 사르데냐는 사보이아 공국으로 서로 바뀌어 반환되었고 사르데냐를 받은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사르데냐 왕국을 선포했다.[6] 페르난도 6세 사망 1년전에 바르바라 왕비가 먼저 죽었기 때문에 이사벨은 그대로 유일한 왕실 최고 어른이자 왕대비로 남았다.[7]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 마리아 루도비카, 카를로스 4세, 페르디난도 1세 등[8] 마리아 1세 등[9] 오스트리아의 대공비 이자벨라, 파르마 공작 페르디난도 1세, 스페인의 왕비 마리아 루이사[10] 카를로 에마누엘레 4세, 프로방스 백작부인 마리 조제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 카를로 펠리체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