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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2 18:57:40

오가작통

오가작통제에서 넘어옴
1. 개요2. 역사3. 유사 제도
3.1. Frankpledge/Tithing3.2. 도나리구미
4. 현대5. 변질 과정

1. 개요

오가작통()은 과거 동아시아 국가들(중국, 조선, 일본 등)이 시행한 연좌제성 행정제도로 오가작통법 혹은 오가작통제라 부르기도 한다.

한자를 그대로 해석하면 5(五) 가구(家)를 묶어 하나의 통으로 편성(作統)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단순히 5가구를 하나의 통으로 구성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5개의 통을 묶어서 리(里)를 구성하였으며, 3 ~ 4개의 리를 묶어서 면(面)을 구성하였다. 통에는 통주(統主), 리에는 이정(里正), 면에는 면임(面任) 또는 권농관을 임명하여 이들을 통제하고 관할하게 했다. 즉, 조선에서 만든 체계화된 행정구역 성격을 띤다.

2. 역사

원래 이 제도는 중국 진(秦)나라 때의 법가 변법가인 상앙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그 목적은 감시였다.[1]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춘추전국시대 당시 진(秦)나라의 재상이던 상앙은 백성에 대한 통제를 대대적으로 강화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2인 이상 성인 남성으로 구성된 집안의 경우 분가를 의무화한 것이었다. 그는 5인 가족을 표준으로 삼은 뒤 백성을 다섯 집 단위(伍)로 묶어 이웃 간에 서로 감시토록 하는 ‘십오제(什伍制)’를 실시했다.

이후 동양 사회에선 5인 가족과 다섯 집을 기본단위로 삼아 촘촘하게 감시사회를 구축하려는 시도가 잇따랐다. 진(晋)나라의 ‘삼국오비제(參國伍鄙制)’와 북위의 ‘삼장제(三長制)’, 에도시대 일본의 ‘고닌구미(五人組)’는 모두 다섯 가구를 기본 묶음으로 국가가 통제했던 제도였다. 조선시대의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이나 북한이 1958년 만든 ‘오호담당제(五戶擔當制)’도 동일한 골격을 유지했다. 출처 그외 전한에서도 진나라의 정책을 계승하여, 가정 다섯 집을 (린)이라 부르며 행정구역의 최소 단위로 취급해왔다.
오가작통은 다섯 민호를 한 통씩 묶던 인보[2] 조직으로서 시행되었다. 이 제도는 납세, 병역, 요역 등의 근거로 이용되었음은 물론 지역 사회 복지 기능에 활용됨으로써 견제와 통제, 복지의 기능을 함께하였다. 이 기능들은 주민들이 서로 가까이 살면서 감찰하여 간위, 사기를 방지하고 아울러 지역사회복지기능과 호구 조사의 편의를 도모한 동시에 정치적인 공동 책임과 공동 담보의 활동 단위로서 형성된 것이었다. 따라서 오가작통을 통해서 농삼을 함께하고 질병을 상구하고 환난에 서로 돕게 할 뿐만 아니라 통패를 작성하여 서로 출입을 감시하고 내력이 불명하고 행지가 의심스러운 자를 보고하게 하였다. 이처럼 오가작통은 강한 응집력과 의무에 대해 연대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작통된 5호는 서로 이웃하고 있어야 함이 무엇보다 필요한 일이었으며, 지역 공동체 안의 세원 확보와 질서 유지, 복지 증진하고 이에 대해 연대 책임을 짐으로써 지역사회복지기능을 수행하였음에 그 의미가 있다.
- 조선조 오가작통의 지역사회복지기능에 관한 연구, 한국행정사학지, 2008, vol., no.22, pp. 119-141 (23 pages), 곽효문

이렇듯 진나라의 상앙으로 부터 유래한 해당 제도는 이후 동북아의 대부분 국가와 왕조들에서 꾸준히 시행되어 왔었는데 가령 유가성리학을 받아들인 조선에서도 대민통제용으로 이 정책을 계승했었다. 그리고 이 당시 명나라에서도 이갑제라는 꽤 비슷한 제도를 똑같이 시행했는데 이는 오가작통이나 십오제보다도 더 복잡한 제도였다.

이 오가작통법은 원래 세조 대에 한명회가 면리제와 함께 창안하여 세조에게 건의했고 이후 성종 16년(1485년) 한명회가 다시 구황(救荒) 대책으로 주청한 제도이다. 성종도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논의를 지시하였고, 다른 대신들도 효과적인 구황 대책으로 인정하여 곧 받아들여졌다. 다만 제도를 도입했어도 제대로 정착이 되지 않아 중종 때는 이지방에 의해 십가작통(十家作統)이 제안되기도 했고출처, 효종, 현종 때도 제대로 시행하자는 상소와 논의가 있었을 정도로 완벽히 자리잡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숙종 시절에 오가작통의 사목 21조를 제정한 이후로 앞선 시절처럼 상소가 올라오거나 시행하자는 논의는 사라졌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구황대책으로 시작된 제도이고 면을 관할하는 관리가 권농관이란 명칭을 고려하면 구황을 위한 농업권장 성격이 내포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후로는 호패제도를 보조하는 목적으로 활용됐다. 이를 토대로 부역동원, 징세관리에 활용하기도 했고, 오가작통에 따라 취합된 호구정보를 바탕으로 범죄자를 색출하고 체포하기 위한 제도로도 써먹었다. 하지만 후기로 갈수록 세금이나 부역을 피하기 위해 호적에 이름을 올리지 않고 유랑하는 백성들이 늘었고, 도적들이 증가하면서 이들을 색출하고 처벌하는 목적이 더욱 강화되었다.

그럼에도 백성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하자 결국 누군가가 호적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거나, 세금을 안 내거나, 부역을 기피하거나, 범죄자가 되면 1통에 묶인 다섯 집에 연대책임을 물어 처벌하는 제도로 변질되었다. 이러한 연대책임제도를 적용한 사례가 순조헌종 시절에 이루어진 천주교 박해였다. 만약 어떤 집에서 천주교 신자가 적발되면 그와 묶인 다른 4집도 세트로 처벌당했다. 1839년에 있었던 기해박해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기해박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3. 유사 제도

3.1. Frankpledge/Tithing

중세 유럽, 특히 잉글랜드에는 10가구/10결(; Hide)을[3] 묶어서 편성한 십호반이 있었는데, 앵글로색슨시대에는 Tithing이라 불렸고 노르만시대에는 Frankpledge라고 불렸다. 십호반은 십일조 납부와 자체 치안유지, 벌금이나 납세에 관한 연대책임 등 의무를 공동부담하였다. 사법권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장원 내 일에 관한 민·형사는 장원 법정에서, 가벼운 민·형사 및 공동체 간 송사는 헌드레드 법정에서,[4] 중범죄는 샤이어/카운티 법정에서 담당하였다.

3.2. 도나리구미

참고로 오가작통법은 중국이나 조선 뿐만 아니라 같은 동북아의 한자문화권인 일본에서도 이와 유사한 제도가 똑같이 존재하였는데 바로 에도시대 때 부터 시작하여 일제시대까지 시행된 도나리구미(隣組)라는 제도이다. 이 제도 또한 진나라의 상앙이 처음으로 주장한 '십오제'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으며 5가구를 묶은 것을 고닌구미, 10가구를 묶은 것을 쥬닌구미라고 불렀다. 도나리구미는 그 성격상 묶여진 가구들 끼리 상호 감시를 하는 성격이 강했으며 심지어 메이지 유신 이후 일제시대때 까지도 적극적으로 시행되었다. 당연하지만 해당 제도는 일제의 식민지들에서도 시행되었고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에서도 똑같이 시행되었다가 일제의 태평양 전쟁 패전 후인 1947년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해 사라지게 되었다.

4. 현대

일제강점기 당시는 물론, 일제시대의 잔재가 남아있는 현대 한국에서도 이 오가작통(정확히는 조선시대)의 흔적이 여전히도 남아있다. 우선 아직까지도 정식행정구역은 아니라도 이란 개념이 남아있고 편성된 통에 대한 각종 잡무를 책임지는 통장이 있고, 면리란 행정구역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규모가 큰 지역의 경우 리사무소[5]가 설치되는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마을이장은 자주적이고 자율적으로 봉사하는 사람이며 공무원으로 인정되지 않는다.[6] 반면 읍·면·동사무소를 관할하는 읍·면·동장은 기관장이며 공무원(5급, 지방행정사무관)으로 분류된다.

북한 역시 조선의 오가작통법과 일제의 도나리구미 제도를 그대로 본뜬 '5호 담당제'라는 이름의 비슷한 제도가 있다. 다만 미그 19기를 타고 귀순이웅평 대령의 말에 따르면 역시 현실적으로 오가작통(도나리구미) 수준은 아니라고 한다. "5호 담당제는 교사지식인이 낙후한 농촌문화를 도시화시키기 위해 5명을 책임(!)지고 도와주는 것일 뿐"이란 것이다. 사실 북한에서 동네단위로 통제를 담당하는 곳은 '인민반'인데 여기도 기본단위는 20~40호 수준이다. 진짜로 5호씩 묶든지 하는것은 국가단위에서 하기에는 너무 심하게 세분화되어서 짝이 안 맞기 때문이다.[7] 물론 하는 일은 비슷하다.

5. 변질 과정

상앙이 설립한 당시부터 수천 년 동안 늘 공식적인 취지는 좋은 제도였다. 그러나 실제 목적과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중국의 수많은 왕조와 조선, 일본 등에서 꾸준히 활용했는데, 주민 통제기구로 변질되는 것은 늘 마찬가지였다.

그 이유는 '겨우' 자조조직을 행정력을 들여서 만들 이유도 없고, 그럴 효용도 없기에, 통제목적이 있어야만 제도의 행정적 효율성이 존재할 수 있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자유당 시절에는 통반장 조직을 선거나 마을통제의 목적으로 잘 써먹다가 인권의식의 발달로 쓰지 못하자 사실상 통반장 제도 자체가 유명무실해져버린 한국을 생각해보면 알 것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한묶음으로 묶는다는 것 자체가 연좌제로의 변질 우려가 컸다. 다만 어쨌거나 오가작통은 기초적이고 간편한 편에 속하는 행정단위 시스템인 만큼 진나라는 커녕 동아시아 전체와도 연원이 없는 남미의 잉카 제국에서도 오가작통과 비슷한 제도를 시행하기도 했었고[8] 고대 스파르타 역시도 피디티온[9]이라는 비슷한 제도가 있었다. 소설인 유토피아에서도 비슷한 제도가 나온다.[10]

[1] 춘추시대 정나라의 자산이 나라를 다스리면서 오가를 하나로 묶어 서로 보호하는 제도를 두었다고 한 것에서 시작된 것일 수도 있다.[2] 鄰保. 조선 초기, 향촌을 통제하고 호적을 작성하기 위하여 10호 또는 여러 호를 하나로 묶었던 편호 조직.[3] '하이드'(Hide)란 1가구를 부양할 수 있는 토지면적으로 정의되는 토지단위 겸 가구단위이다. 프랑스어에서는 '망스'(manse)가 같은 뜻으로 쓰였으며, 한국사에서는 '결'(結)이 상통하는 말이다.[4] 100가구/100결을 묶어 편성한 단위로, 샤이어의 하위 구역이었다. 오해와는 달리, 잉글랜드 왕국에서는 영역제후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백작령이나 공작령 등으로 나뉘지 않고 '샤이어(Shire)-헌드레드(Hundred)/도시(borough)-십호반(Frankpledge)'으로 일정한 행정구역이 설정되어 있었다.[5] 사실 그냥 좀 큰 마을회관이다.[6] 헌법재판소 판결 2009헌마127 참조.[7] 게다가 인구도 그 시절에 비하면 크게 늘었다. 또 기술적 발달로 크게 묶는다고 해도 큰 문제는 없을거고...[8] 10개의 가구를 푸릭, 10푸릭을 파차카 쿠라카 10파차카 쿠라카를 와랑가 쿠라카 10와랑가 쿠라카를 우누 쿠라카라 하였다.[9] 스파르타에서 기본적인 전투조로 나이나 빈부 관계없이 15명이 한 조가 되었다.[10] 유토피아에서는 30가구에 한명씩 관리 1명을 선출한다. 그리고 이 관리 200명이 도시 의회를 이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