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222><colcolor=#fff> FRS FRSE 오귀스탱루이 코시 Augustin-Louis Cauchy | |
출생 | 1789년 8월 21일 |
프랑스 왕국 파리 | |
사망 | 1857년 5월 23일 (향년 67세) |
프랑스 제2제국 오드셴 | |
직업 | 수학자 |
학력 | 에콜 폴리테크니크 국립고등교량도로학교 |
가족 | 배우자 자녀 2명 |
종교 |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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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수학자. 미분적분학의 엄밀한 기초를 마련한 업적으로 유명한 수학자다.2. 생애
16세 때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입학하여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였던 그는 그 후에 토목기사로 일하면서 수학을 연구하였다. 그러다 1815년에 드디어 수학자로서의 업적을 인정받아 모교인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교수가 되었고, 이듬해에 과학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그러나 1830년, 프랑스 7월 혁명으로 인해 7월 왕정의 루이필리프 1세가 왕위에 즉위했을 때 개인적으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에 국왕 샤를 10세에게 충성을 다하는 보수적인 왕당파였던 그는 새 국왕 루이필리프 1세에게 충성서약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일절 공직 취임이 금지되면서 이탈리아 토리노로 피신했다. 이후 나폴레옹 3세가 즉위하면서 다시 복귀하여 소르본 대학의 교수로 취임해 사망할 때까지 소르본 대학의 교수를 역임했다.
생몰년에서 보듯 그는 프랑스 혁명기에 유년기를 보낸 후 프랑스 제1제국과 부르봉 왕정복고, 7월 혁명 및 7월 왕정, 2월 혁명과 프랑스 제2공화국의 출범, 다시 프랑스 제2제국의 수립 등 험난하고 혼란스러웠던 19세기 프랑스 역사의 한복판을 살았던지라 그 역시 이런 풍파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코시의 대부분의 수학적 업적은 이탈리아 망명기에 나온 것들이라고 한다. 당시 하도 학회에 발표하는 논문이 많자 학회에서는 코시에 대한 논문 분량 제한도 있었을 정도였다.
사실 이는 어릴 때부터 마찬가지였다. 코시는 말 그대로 수학을 하기 위해 태어난 인간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로 어릴 때부터 수학에만 극도의 흥미를 보였고, 심지어 그의 아버지가 이대로 크다가는 모국어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될까봐 수학 공부를 금지시키기도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그에게도 한가지 흑역사가 있으니 바로 갈루아의 논문을 망각해버리고 발표하지 않은 것이다. 이로 인해 갈루아는 살아생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고 그가 죽은지 10년 뒤에야 논문이 발굴되어 비로소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다만 갈루아 건은 그만의 문제가 아니고 야코비나 가우스 같은 다른 대수학자들도 해당사항이 있었다.
그가 남긴 명언으로 '사람은 죽어도 그의 행적은 남는다'는 말이 있다.
3. 업적
대충 근대수학에서 코시의 영향력은, 오일러 이후로 더 이상 수학의 발전은 없을 거라 생각하던 수학계에 가우스가 튀어나왔고, 오일러와 가우스 이래로 수학의 발전은 없을 거라 생각하던 시기에 코시가 튀어나와 상황을 반전시킨 수준의 영향력이라고 보면 된다. 특히 오일러-가우스의 주 역할이 기존 수학에 산재하던 문제를 풀어내던 것이었다면, 코시의 가장 큰 업적은 기존에 산재하던 수학문제를 푸는 것이 아닌, 엄밀성이라는 반대의 영역으로 수학계의 관심을 돌려버린 패러다임 전환에 있다. 코시 수열을 이용한 수열과 급수의 수렴에 대한 연구, 연속함수에 대한 엄밀한 정의, 평균값 정리, 엡실론-델타 논법을 이용한 극한의 엄밀한 정의 같은 것이 이러한 흐름 속에서 나온 결과물.[1] 이러한 업적을 바탕으로 기존의 미적분이 해석학으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든 사람이라고 보면 된다. 특히 복소해석 쪽에서는 코시가 이 분야의 창시자라고 보아도 무방한 정도로, 복소해석을 처음 공부하다 보면 코시의 이름이 들어가지 않은 부분을 찾기 힘들 정도이다. 복소함수의 미분가능성을 판단하는 데에 쓰이는 코시-리만 방정식에도 코시의 이름이 들어간다.수학 외적인 분야에서도 몇몇 업적을 남겼는데, 대표적으로 선형 탄성학, 정확히는 연속체에 대한 이론을 정립하였다. 기계공학에서 나오는 코시 응력 텐서가 이분의 작품. 본인이 만들다시피 한 복소해석을 이용하여 유체역학 등에서의 미분방정식을 푸는 방법을 제안하기도 하였다.[2] 이 외에도 천체역학, 광학 등에서 업적을 남겼으며, 그답게 대부분의 연구는 수학적으로 엄밀한 모델을 만드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중고등학생 입장에서는 대표적인 업적으로 코시-슈바르츠 부등식(Cauchy-Schwartz 공식)[3]이 있는데, 임의의 실수 [math(a, b, x, y)]에 대하여
[math((a^2+b^2)(x^2+y^2)\ge(ax+by)^2)]
가 성립한다는 공식이다. 절대부등식의 증명과 관련되어 있다.
위 부등식은 변수의 수가 많아져도 성립하는 부등식이며 [math(n)]차원 공간에서 두 벡터의 내적이 두 벡터의 길이 곱보다 같거나 작다는 사실을 이용하거나 임의의 실수 [math(t)]에 대해 [math((at+b)^2)] 를 같은 수의 [math(a, b)]에 대해 합한 값의 [math(t)]에 대한 2차 함수로 생각했을 때 판별식이 [math(0)] 이하라는 점을 사용하면 증명할 수 있고 그 외에 여러 증명법이 있다. (제곱의 합은 [math(0)] 이상이기에 2차 함수의 판별식은 [math(0)] 혹은 허근의 경우 음수 밖에 될 수가 없다.)
이 부등식의 위력은 주변에 수학올림피아드를 공부하는 친구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다. 중등부 KMO는 100% 산술기하 부등식과 코시 부등식으로 해결되고, (물론 다른 방법으로 풀거나 지저분하게 풀수도 있지만 이 두가지로 풀 수 있는 방법이 반드시 존재한다.) 고등부 KMO 및 IMO 조차도 정말 복잡하게 풀거나 지저분하게 풀어놓고 봤더니 정말로 절묘하게 이 부등식을 적용해서 깔끔하게 두줄 세줄 풀이가 존재하여 학생들을 농락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우스갯소리로 코시보다 코시 부등식을 잘 쓸 정도여야 한다고 한다.
코시 함수 방정식이라는 것도 있는데, 함수방정식 풀이에서 매우 유용하게 쓰인다. 이것도 올림피아드 준비를 하다 보면 알 수 있다.
복소해석학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방정식인 코시-리만 방정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사람이기도 하다. 코시-리만 방정식은 장바티스트 르 롱 달랑베르가 유체역학을 연구하던 도중에 발견한 방정식이지만, 이를 오일러가 해석함수에 연관지어 연구하기 시작했고, 후에 코시가 해석학을 발전시켜가면서 이 방정식을 체계적으로 정리, 베른하르트 리만이 이 방정식을 논문에 사용했기 때문에, 코시와 리만의 이름이 붙게 되었다.
4. 주요 저술
1821년 <Cours d'Analyse>(직역:해석 과정) - 미적분학 교과서[4]1846년 <calcul INTÉGRAL>(직역:적분 계산) - 그린정리를 구체적으로 제시한 논문[5]
1827년 <De la pression ou tension dans un corps solide>(직역:고체의 압력 또는 장력) - 코시 스트레스 텐서를 주요하게 게제한 저술[6]
[1] 단, 이 논법 자체는 코시가 아닌 동시대의 카를 바이어슈트라스가 제안하였다.[2] 나비에-스토크스 방정식를 정리해서 기본형을 만들었다.[3] 코시가 정리했고, 슈바르츠는 훗날 이 공식을 수정해 이름이 함께 붙었다.[4] 정식 명칭은 Cours d'Analyse de l’École Royale Polytechnique; I.re Partie. Analyse algébrique (직역:해석 과정, 왕립 폴리 테크닉 학교, 제1부 대수 분석) #[5] COMPTE RENDU DES SÉANCES DE L'ACADÉMIE DES SCIENCES. SÉANCE DU LUNDI 6 JUILLET 1846. calcul INTÉGRAL -Sur les intégrales qui s'étendent à tous les points d'une courbe fermée(적분 계산-폐곡선의 모든 점으로 확장되는 적분) P252~255#[6] A. L. Cauchy. De la pression ou tension dans un corps solide (Ref 1823). Ex. de Math. 2, 42-56, 1827# P68,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