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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목/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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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계 속의 역사2. 일본3. 한국4. 중국5. 유럽6. 현황

1. 세계 속의 역사

오목의 기원은 중국의 황하유역이라는 설이 유력하며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4천년 전으로 추정되고 있다. 오목에 관한 중국의 가장 오래된 기록은 BCE 2세기경 후한시대의 역사가 반고가 저술한 한서(漢書)라는 역사서이며 오목두기를 "격오(格五)" 라고 하였다. 이후 오목은 중국에서 일본으로 전래되었으며 오랜 세월 동안 발전하며 현대오목으로 이어졌다. 현재 일본에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오목서적인 오석정적집(五石定蹟集, 1856)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오목은 동북아시아 지역뿐만 아니라 이집트와 그리스, 콜롬비아 등지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료가 발굴됨에 따라 어느 한 곳에서 유래되었다기보다는 세계 여러 곳에서 각각 독자적으로 발생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오목이 바둑의 여기(餘技)로서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초창기의 오목은 매우 단순하고 단조로운 형태의 놀이였기 때문에 오히려 바둑보다 앞서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 처음에는 적당한 곳에 선을 그어놓고 하다가 바둑판이 완성되면서 자연스럽게 바둑판에서 하는 놀이가 된 것으로 보인다.

1988년 8월 8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RIF(국제오목협회)가 탄생하였으며, 초창기 구성국은 일본, 소련, 스웨덴이었다. 현재는 세계 20개국이 가입해 있고 1989년부터 세계 선수권 대회도 2년 단위로 연다. 한국도 2001년 이래로 가입한 상태이다

중국, 일본, 대만에서는 비교적 오목이 활성화 되어 있고 국내보다 상위권 플레이어들도 많은 편이다. 서구권에서도 러시아, 에스토니아, 스웨덴, 체코, 헝가리 등 북, 동유럽을 중심으로 많이 하고 있는 보드게임 중 하나이다.

2011년부터 세계온라인 통신 오목 대회인 CWC가 열려왔다.

2. 일본

오목은 중국으로부터 일본에 전래되었다. 당시에는 오목이 “카쿠고(Kakugo)"라는 이름으로 일본전역에 매우 빠르게 보급되었으며 이후 17~18세기의 기록에 의하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이 오목을 즐겼다고 한다. 20세기 초에는 보다 체계적인 오목이론에 관한 서적들이 출판되기도 하였으나 “고렌(Goren)”, “고세키(Goseki)”, “고모쿠 나라베(Gomoku narabe)” 등의 명칭으로 불린 흑에게 아무런 제약을 두지 않은 단순한 심심풀이 수준의 오목도 공존하고 있었다고 한다. 훗날 이러한 단순한 방식의 오목은 “Gomoku”라는 이름으로 통합되어 불리게 되며 “Renju”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한 현대오목과는 구별된다. “렌주(Renju)"라는 이름은 1899년 일본인 저술가 쿠로이와 루이코(黒岩涙香)[1]가 만조보(萬朝報)라는 신문에서 처음 명명하였다. 당시에는 연주(聯珠 : 구슬을 잇다)라고 불렸으며, 훗날 연주(連珠 : 구슬 연결하다)로 바뀌게 되었다. 그는 이후 1904년 도쿄렌주협회를 창설하고 초대 영세 명인에 오르기도 하였다.

오목에서 흑(黑)에 대한 제약은 오목이 단순한 놀이에서 논리적인 두뇌스포츠로 전환되기 위한 필수적인 절차였다. 이것은 먼저 시작하는 흑돌이 매우 유리해서 항상 공정하지 못한 대국을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1899년 쿠로이와 루이코는 만조보에 아무 제약 없는 오목에서의 선수 필승법을 게재하기도 하였다. 이후 흑백 모두 3-3을 금지시키는 규칙이 정식으로 도입되었고 1903년에 흑의 3-3만을 금지시키는 것으로 바뀌었다. 주형개념과 흑의 초반 수를 제한하자는 오프닝개념도 이 때 처음 도입되었다.[2] 1912년에는 흑이 3-3을 둘 경우 즉시 반칙패로 패배한다는 규정이 추가되었으며[3], 1916년에는 장목도 금수로 정해졌다. 1931년 일본의 삼대 영세 명인이었던 타카기 라쿠잔(高木楽山)[4]은 흑의 4-4도 금수로 정해서 둘 수 없게 하는 규칙을 도입하였고, 원래 19x19 크기의 바둑판에서 두어지던 오목에 15x15 크기의 전용 오목판을 도입하였다. 이것 이외에도 흑에게 제약을 주는 독자적인 규칙들이 제안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제약들은 선수라는 흑의 매우 큰 이점을 상쇄시키기고 흑백의 공정한 대국을 추구하려는 노력이었다. 하지만 초창기에 이러한 세부 규칙들은 통합되지 못했으며, 독자적인 규칙을 사용하는 여러 개의 단체들로 분열되었다. 1966년에야 여러 개로 나뉜 단체들이 일본렌주협회로 재통합되었으며, 현재의 RIF룰과 유사한 룰이 공식적으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출처: 일본어 위키백과 )

1989년에 일본 교토에서 최초의 세계대회가 열렸는데, 이 대회를 일본의 나카무라 시게루 명인이 우승한 이후 1991, 1995, 1997년도에 일본인 선수가 모두 우승을 차지하며 렌주 종주국으로서의 자존심을 지켰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에는 일본인 우승자가 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세계대회에서 중국, 유럽 선수들에게 밀리는 모습이다. 현재 일본 주요 대회로는 명인전[5], 관동선수권, 제왕전, 전일본 챔피언쉽(주왕전) 등과 다른 여러 지역별 대회가 있다.

3. 한국

우리나라는 옛날에 고누라는 오목 비슷한 것이 있었다고 한다. 특히 고누 중 참고누의 원리가 오목과 비슷하다. 오목은 중국에서 한국으로, 다시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보이나 한국에는 오목에 대한 별도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확실하지 않다. 현재 오목은 간단한 룰, 편의성 등으로 인해 일반인들 사이에서 사랑받는 매우 대중적인 보드게임으로 자리매김하였으나, 일본처럼 오목을 체계화 하고 경기화 하려는 시도는 부족한 상태였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통신오목을 중심으로 발전해나가기 시작하여 2002년 한국오목협회가 설립되었으며, 2001년에 열린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김병준 7단이 AT(결선) 9위를, 2006년 아시아 챔피언쉽에서 김창훈, 김병준기사가 우승과 준우승을 합작 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오목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닌 오목을 전문적으로 하는 기사가 거의 나오지 않고 있어 오목의 저변이 부족한 상태이다. 게다가 일반인들의 인식도 오목을 바둑, 체스와 같은 마인드스포츠가 아니라 애들 놀이 쯤으로만 생각하며, 진지하게 두려고 하는 사람도 거의 없는 편이다. 오목을 재미로 둔다는 사람 중에서도 렌주룰조차 제대로 이해를 못하는 사람이 많으며, 흑만 3-3, 4-4가 안되는 렌주룰 규칙이 흑한테 불공평한 규칙이라 납득이 안된다느니 하는 이상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매우 많다. 현재 우리나라에 대한오목협회[6]가 있긴 하나 그 존재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상태다. 국내에서 생활체육으로는 잘 보급되어 있으면서도 엘리트스포츠로서 국제대회에서 힘을 못쓰는 종목 중 하나

2022년 현재 우리나라는 오목 급수가 15급부터 시작하며[7] 9단까지 있다. 이 급수는 오목 대회를 통해서 또는 기력측정을 통해 얻을 수 있다. 공식 대회를 통해 오목 급수를 따거나 올린 사람이 있는데 초단 이상의 기력자를 오목기사라고 부르지만, 대회를 후원해줄 스폰서가 없어서[8] 프로기사화는 안 되어있다. 현 오목기사 랭킹은 대한오목협회에서 볼 수 있다.

한동안 국내에서 오프라인 대회가 열리지 않다가 2015년 이후로 다시 대한오목협회가 주관하는 오목대회가 정기적으로 개최되고 있고 젊은 기사들도 많이 배출되고 있다. 그 효과로 2019년에 열렸던 세계대회에서 장원철기사가 BT 3위로 입상하는 좋은 성적을 내기도 했다.

4. 중국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목을 잘 두고 가장 오목이 활성화되어있는 나라이다. 중국 특유의 오목 공동 연구 방식이 중국 오목을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중국은 정부에서 관리하는 방식으로 '팀단위'로 오목 선수단이 운영되고 있는데, 즉 부분적으로나마 프로기사화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수많은 강자들을 보유중이며 중국대회를 우승하는것이 세계대회를 우승하는것보다 힘들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수준이 상향평준화 되어있다.

5. 유럽

스웨덴에서는 1958년 스웨덴 오목 협회(Svenska Luffarschackförbundet)가 설립되어 1961년부터 정기적으로 스웨덴 챔피언쉽과 다른 다양한 대회들이 개최되었다. 1982년에는 최초의 국제대회인 Swedish Open이 개최되었다. 당시에는 금수가 없는 형태의 오목인 Gomoku 규칙이 사용되었으며 1980년 이후에는 pro룰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1979년 렌주라는 이름의 금수가 있는 형태의 오목이 소련에 보급됨에 따라 많은 대회들이 현재의 렌주 오프닝 룰을 도입하였다. 하지만 이 당시의 영향으로 렌주 일변도인 동양과는 반대로 현재까지도 고모쿠가 많이 두어지며, 고모쿠를 두다가 렌주로 전향하여 우승까지 차지한 플레이어들도 있다. 이후 러시아와 에스토니아는 세계대회에서 우승자도 여러 명 배출하였으나 최근에는 젊은 신인들이 배출되지 않으며 세계랭킹에서 동양에 밀리는 추세이다.

6. 현황

해외에서도 바둑, 체스, 오델로, 백개먼 등 메이저급 보드게임에 비하면 상당히 마이너한 편이다. 그나마 대중적으로 인지도 있는 동양에서와는 달리, 서양에서는 보드게임 덕후가 아니라면 거의 모르는 편이다. 다른 보드게임에 비해서 일반인들의 접근이 쉬운 점이 오목의 강점이지만, 대회룰이 복잡해 보인다는 점이 이러한 강점을 상쇄하는 진입장벽으로 작용한다는 아이러니한 면도 가지고 있다.


[1] 타카야마 고라쿠(高山互楽)가 이 사람이다.[2] 금수(禁手)개념이 완성되기 이전에 이미 오프닝 개념이 만들어진 것이다. 여담으로 바둑이 처음 도입된 시기는 1939년 본인방 대회부터였다.[3] 그래서 백의 금수유도가 가능해졌다.[4] 바둑 고수로도 유명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명인"에서 등장하기도 한다.[5] 현행 명인전 체계가 확립된건 1962년 부터이며, 생각보다 역사와 유서가 깊다.[6] 前 한국오목협회[7] 그러나 실질적인 기력체계는 6~7급부터 시작한다. 대회에 나오기만 하면 무조건 6~7급은 준다.[8] 즉 오목기사를 업으로 삼아 돈을 벌 수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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