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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06 23:40:24

오오스미 마사아키

1. 개요2. 특징3. 제작 비화4. 작품
4.1. 감독 작품4.2. 참가 작품

1. 개요

おおすみ正秋 / 大隅正秋
일본의 애니메이션 감독, 인형극 연출가. 1934년 11월 26일 생 ([age(1934-11-26)]세). 효고현 출신.

몽키 펀치와 함께 루팡 3세의 아버지라 불린다.

인형극 출신으로 형과 함께 인형 극단 고베 인형 예술 극장을 만들어 활동했다. 같은 인형극 출신인 TMS 엔터테인먼트 사장 후지오카 유타카의 요청으로 애니메이션 연출가로 전직했다. 이때는 애니메이션의 여명기라 연출할 사람이 부족해 영화계나 인형극 쪽에서 연출가를 불러오는 경우가 흔했다.

작품 활동을 많이 안 하는 과작 크리에이터였으나 연출력이 매우 뛰어나 거장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다만 루팡 3세, 라 세느의 별 외에는 볼 방법이 거의 없는 작품이 많다.

한동안 소식이 없었고 트위터도 하다가 그만두었으나 2022년 달려라 메로스 상영회에 직접 참석한다고 한다.

2. 특징

애니메이터 출신이 아니라 콘티는 전혀 그리지 못 했으며 그릴 생각도 없어 타카하타 이사오, 나가하마 다다오처럼 콘티 담당을 따로 두고 말과 연기로 지시를 내려 연출을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연출력이 뛰어나 좋은 작품이 나왔다.

가부키부터 시작된 일본 특유의 각 잡힌 연기와 장면 구성을 굉장히 싫어하던 인물로 '현실의 인간은 저렇게 각을 잡고 행동하지 않는다.' 라며 메소드 연기, 인간다운 움직임과 감정 표현을 추구했다.

인형극 시절부터 어린이를 상대하며 어린이의 감정과 취향을 매우 잘 알고 있었고 어린이의 성과 폭력에 대한 호기심이 어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고 이해력도 뛰어나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성과 폭력에 대한 묘사의 수위가 높고 사회 풍자가 많다.[1] 그래서 그의 작품은 당시 어린이 시청자들에게 열광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이런 묘사 때문에 훗날 심의가 강화되면서 보기 힘들어진 작품이 많다. 무민의 경우는 원작자의 요청으로 봉인되기도 했고, 많은 작품이 수위 문제로 재방송이 되지 않아 인기를 잃어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루팡 3세는 국민 애니메이션으로 자리잡으며 이러한 표현도 용서를 받고 여전히 재방송되고 인기를 이어가고 있으며 루팡 3세 팬 중에서는 오오스미가 만든 부분만 진정한 루팡이라고 하면서 그가 만든 것만 돌려보는 팬층도 있다. 세월이 갈수록 그의 루팡은 더욱 평가가 높아지고 있으며 2021년 루팡 3세 TV 시리즈 에피소드 인기투표에서는 그가 만든 에피소드가 대부분을 석권하기도 했다. #

1990년대부터 CG를 배워 사이버 아이돌, CG 제작 감수 등으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CG 기술이 열악했던 시기라 그다지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그 후로는 주로 강사로 활동했다.

스태프로 자주 기용하는 인물로는 데자키 사토시, 오쿠다 세이지, 토미노 요시유키, 오오츠카 야스오가 있다.

3. 제작 비화

3.1. 무민

오오스미 마사아키는 무민을 애니화하면서 원작의 설정과 스토리를 완전히 무시하고, 과격한 묘사와 일본적인 묘사를 넣기도 했다. 그래서 당대의 어린이들에게는 일본 애니메이션으로 인식되기도 했으며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원작자 토베 얀손은 이 작품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특히 싫어하는 게 탱크와 전투기 같은 전쟁 병기가 나오는 에피소드였는데 이 에피소드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린 것이었다. 26화로 잠시 중단되고 제작사가 바뀌어서 2기가 나왔는데 그래서 원작자가 그를 경질한 거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원래 26화로 끝낼 예정이었고 자신은 그 다음 바로 루팡 3세 기획에 들어가 원작자의 분노로 인한 조기 종영이 아니라고 밝혔다. 오히려 2기는 1기의 인기가 높아서 방송국과 어린이들이 계속 요청해서 원작자가 "그럼 일본에서만 틀어라." 라고 허락해줘서 다른 제작사가 만든 것이라고 한다.

현재는 무민의 원작자가 '즐거운 무민 일가' 만을 무민의 정식 애니메이션으로 인정하고 이 작품을 봉인해서 공식적으로 이 작품을 볼 방법이 전혀 없다.

3.2. 루팡 3세

그는 루팡 3세 첫 작품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면서 "애니메이션의 여명기에 애니메이션을 보던 사람들이 나이를 먹어서 청년이 되었다. 이제는 성인용 TV 애니메이션이 나올 때가 되었다." 라고 주장하며 루팡을 성인도 볼 수 있는 작품으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학생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권태에 사로잡힌 시대상에 주목하고 도덕이 무너진 피카레스크, 목표가 없는 사람들을 그려내고 싶었다고 한다.[2] 등장인물의 연출에 일부러 힘을 빼고 니힐리즘을 강조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오오츠카 야스오와 함께 작품에 등장하는 자동차, 총기, 명품을 실제와 똑같이 그려내는 '소품 실증주의 연출' 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성인용 애니에 대한 개념이 없던 시대라 첫방영에 들어가니 시청률이 굉장히 낮았다. 루팡의 스태프는 방송국에 불려나갔고 TMS 측에서는 이 작품을 어린이용으로 바꾸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오오스미는 "기획 때는 성인용으로 하자는 내 의견에 동의해놓고 무슨 소리인가. 그리고 바꾼다고 시청률이 올라간다는 보장은 있는가?"라고 항의를 했는데 TMS에서는 "우리는 이 작품을 성인용으로 만들라고 한 적이 없다." 라고 태도를 바꾸며 시치미를 뗐고 오오스미는 이에 분노해서 3화를 만들고 도주해버렸다고 한다. 회사에 있는 물건도 그대로 두고 아예 잠적을 해버렸다고 한다. 이에 대해 현장에 있던 스태프에게 죄송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도쿄 무비의 사장이었던 후지오카 유타카는 미야자키 하야오타카하타 이사오 콤비에게 연출을 부탁했다. 명작 동화 말괄량이 삐삐를 만들겠다고 그들을 스카웃 해왔지만, 그래서 프로듀서 입장으로 스웨덴까지 같이 동행해서 원작자를 찾아가서 직접 만나서 애니화의 허락을 구했지만 끝내 원작자가 거부해서 기획이 좌초된 상태였다. 이들은 하는 일이 없어져서 울며 겨자먹기로 연출을 맡기로 했다.

감독이 도망갔다는 걸 시청자에겐 말할 수는 없으니 크레딧에는 3화 이후로도 그의 이름이 올라갔다.

그럼에도 루팡 1기 TV 시리즈의 1쿨 분량은 오오스미 마사아키의 색이 남아있었다. 오오스미가 콘티를 발주한 게 남아있었고 오오스미가 도주하면서 스케줄이 꼬여 새로 만들 시간이 부족해 그의 콘티를 대부분 그대로 쓰게 되었기 때문이다. 크레딧으로는 1, 2, 3, 4, 5, 6, 9, 12화가 오오스미 마사아키 연출로 표기되었다. 다만 그가 도망갔으므로 미야자키와 타카하타가 일부 수정한 부분도 있다. 7화, 10화, 11화는 오오스미가 남긴 미완성 에피소드를 미야자키와 타카하타가 고쳐서 썼다. 12화 이후에도 오오스미가 발주한 각본이 몇 개 남아있었으나 미야자키는 자신의 색을 넣은 작품을 만들고 싶어서 남은 건 다 버렸다고 한다.

13화부터는 미야자키가 만들기 시작해서 오오스미 보다 미야자키 작품색이 나오기 시작했고 연출도 어린이들이 좋아할 코미디와 모험물에 가까워졌다. 1기에서는 목적 없는 자유로운 범죄자였던 루팡은 2기부터 상냥한 의적으로 캐릭터가 변했다. 그래서 루팡 3세 1기 TV 시리즈의 1쿨은 오오스미의 작품, 2쿨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으로 보는 해석이 많다.

그런데 재방송이 되면서 높은 시청률이 나왔고 루팡 3세는 국민 애니메이션이 되었다. 너무 새로운 작품이라 외면하는 사람이 많았고 나중에 입소문으로 재조명이 된 것이었다.

오오스미는 이 사건 후 분노해서 다시는 TMS 작품을 안 하고 루팡에 대해 인터뷰를 하면 전부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나 1993년 경 끝없는 설득을 받아들여 루팡 3세 루팡암살지령을 감독했고 매우 높은 평을 받으며 중단 될 뻔한 루팡 3세 TV스페셜 시리즈를 살려내게 된다.

루팡 3세 원작자 몽키 펀치도 오오스미 마사아키를 매우 좋아했다고 하며 그가 아니었으면 애니화 허가도 안 해줬을 것이라고 한다. 둘은 친구가 되어 1990년대에 같이 늦공부를 해서 대학에 들어가기도 했다.

4. 작품

4.1. 감독 작품

4.2. 참가 작품



[1] 로봇아이 비톤은 여성형 로봇의 에너지 공급구가 엉덩이에 있기도 했다.[2] 루팡 3세는 부자가 되고 싶어서 물건을 훔치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