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3-29 21:11:56

오타 쥬리아

파일:external/sites.google.com/julia1.jpg

1580~?

1. 개요2. 생애3. 쥬리아의 서한4. 여담5. 창작물에서의 등장6. 관련 저서

1. 개요

ジュリアおたあ(쥬리아 오타)[1]

조선 출신의 전국 시대, 에도 시대 인물. 참고로 쥬리아(ジュリア)는 세례명율리아/줄리아(Julia)[2]의 일본식 발음으로, 세례명 이외에 지어진 일본어[3] 이름이 오타아(おたあ)이며 장음 표현을 생략한 '오타'로 한국에 알려져 있다. 오다 노부나가로 유명한 오다씨가 아니라는 점에 주의.

2. 생애

고니시 유키나가임진왜란 당시 입양한 조선 아이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다. 일각에선 양녀로 알려져 있기도 한데, 사실 고니시가 그녀를 시녀로 쓴 것은 맞지만, 양녀로 입양했단 것을 증명할 사료는 없다고 한다. 하여튼 고니시 가문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처를 모시며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천주교 집안이던 고니시가의 영향을 받았는지 오타도 천주교인이 되어 '율리아(일본어: 쥬리아, ジュリア)'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고니시 유키나가가 패배하고 처형당한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녀가 되었다가, 이즈 제도의 고즈시마(神津島, こうづしま) 섬으로 유배되었다. 유배된 이유는 이에야스의 측실이 되는 것을 거부했다는 설도 있고[4] 가톨릭 신앙이 금지되었어도 배교하지 않아서였다[5]는 설도 있다. 후술할 남동생 건을 보면 적어도 이에야스의 총애를 받는 시녀였던 것 같다. 유배된 후에는 고니시 가에서 배운 약학 지식[6]을 살려 환자를 간호하는 등 신앙 생활과 봉사를 계속했다고 하며, 이후 유배지에서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이후 예수회 선교사들의 편지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이에야스 사후(1616년) 쥬리아가 유배에서 풀려났으며, 유배에서 풀려난 후에는 일본 각지를 떠돌며 복음을 전파하고 선교사를 돕는 등 살아서 신앙을 전파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619년 나가사키에서 여자 아이들을 모아놓고 교리와 성가를 가르치기도 했다고 하며, 1622년 오사카에서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산다'는 기록을 마지막으로 더는 역사에 등장하지 않는다. 쥬리아가 언제 생을 마쳤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3. 쥬리아의 서한

조선에서의 행적, 본명 등은 불명이었는데, 2023년 그녀가 남동생 '운나키(うんなき)'[7]에게 쓴 편지가 공개되면서 일부 사실이 드러났다.

편지에 따르면 그녀는 한양에 살던 김(金)씨 양반 출신 집의 장녀였다고 한다.## 1871년에 청나라에서 출판된 「관광일본」[8]을 참조해 조선 왕족 출신이라는 듯한 견해도 있었으나, 이 편지가 공개되면서 왕족은 아닌 것[9]으로 밝혀졌다. 해당 편지는 한양에서 살다가 포로로 잡히면서 생이별한 '운나키'(일본명 무라타 야스마사(村田安政))라는 이름의 남동생에게 보낸 편지들이었다.

편지는 그녀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거처인 시즈오카 슨푸성(駿府城)에서 지내던 1609년 8월 19일 쓴 것으로, 수신인은 마찬가지로 일본에 잡혀와 야마구치 하기에 살던 둘째 남동생 '운나키(うんなき)'다. 하기는 조선인 도공이 많이 살기로 유명했던 곳이다. '운나키'는 당시 야마구치 일대를 지배하던 모리(毛利) 가문의 가신, 히라가(平賀) 가문에서 하층민으로 지내고 있었다. '운나키'는 조선에서부터 쓰던 이름으로 여겨지며, 원형은 '운락(운낙)'이나 '운학', '운악', '응락'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安政(야스마사)[10]는 나중에 얻은 일본식 이름이다.

편지를 받고 누나의 존재를 알게 되어 슨푸성으로 간 남동생은 누나와 상봉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하사품도 받아 하기로 돌아갔다. 그러자 모리 가문은 그에게 200석 봉토와 함께 '무라타(村田)'라는 성과 '야스마사(安政)'라는 이름을 내려줬다. 그렇게 조선인 운나키는 일본인 사무라이 무라타 야스마사가 됐다. 즉,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아끼는 시녀의 동생이라는 사실이 조선인 포로인 그가 무사가 될 정도로 든든한 자산이었던 것이다. 이후 대대로 하기에서 사무라이로 살던 무라타 가문은 쥬리아의 편지를 보관해왔고, 2021년 하기박물관에 기증했다. 그리고 2023년 박물관이 편지를 전시하면서 일련의 사실이 새롭게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이에 일각에선 이에야스 사후 일본 각지를 떠돌던 쥬리아가 말년에 남동생이 사는 하기로 가서 지내다 삶을 마감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편지에서 쥬리아는 자신을 '타아(たあ)'라고 부르는데, 남동생의 이름 운나키처럼 조선에서부터 쓰던 것일 가능성이 있다.[11] 쥬리아의 속명 '오타아'에서 '오'를 귀부인에게 붙이던 일본어 높임말인 '오()'라고 본다면 그녀의 속명은 사실 '타아'였을 것이고, 이는 조선식으로는 (그대로) 타아거나 다아, 내지는 단아로서 쥬리아는 조선에서 '김타아'와 비슷한 성명을 지녔을 수 있다고 추측된다.

출신 배경에 대하여 쥬리아는 편지에서 자신이 왕의 측근인 '제운대군절도사 김세왕온'과 홍씨 부인의 5자녀 중 장녀라고 말한다. 하지만 '제운대군절도사'와 '김세왕온'은 국내 사료엔 없는 이름이라 교차 검증이 필요하다고 한다. 쥬리아는 또 편지에서 자신이 임진년(1592년) 당시 13살이었으며, 이듬해에 11살짜리 동생[12] 그리고 몸종과 잡혀 일본으로 끌려갔다고 말한다.

4. 여담

5. 창작물에서의 등장

6. 관련 저서



[1] 일본에서는 그리스도인을 지칭할 때 '바오로 미키(パウロ三木)'와 같이 세례명-속명 순으로 표기한다. 이때 세례명이 마치 미들네임처럼 성과 이름 사이에 들어가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며, 제일 앞에 와야 한다. 한편 한국에서는 김대건 안드레아와 같이 속명-세례명 순으로 부른다.[2] 율리아라는 이름을 지닌 성인(聖人) 중에는 대표적으로 5세기경의 인물인 '코르시카의 율리아' 성녀가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카르타고의 귀족 가문 출신이었지만 시리아 상인의 노예가 되어 그와 동행하면서 코르시카 섬에 들렀다. 마침 이교도의 축제가 행해지고 있었는데, 이교도의 신전에 희생제물을 바치면 자유를 주겠다는 통치자의 제안을 거절하여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고문을 받고 십자가형에 처해졌다.[3] 없다, 얻다와 같은 한국어 답변을 듣고 이름으로 생각하여 오타아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설도 있고, 후술되듯 사실 그녀의 조선 이름에서 비롯되었다는 견해가 있다.[4] 야사에 따르면 쥬리아가 상당한 미모의 소유자여서 도쿠가와가 시녀였던 그녀를 첩으로 삼으려 했다고 한다. 심지어 끝까지 자신의 첩이 되길 거부했음에도 가톨릭이 금지되었을 때 '배교하지 않으면 넌 죽는다. 그러니 제발 배교하겠다고 해서 목숨을 보전해라.'고 부탁했다고도 하는데 사실이라면 당대 기준으로 상당한 미녀였던 모양.[5] 이 때 ‘지상의 왕을 위해 천상의 왕을 배신하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설이 있다.[6] 고니시 유키나가의 아버지 고니시 류사가 사카이의 약종상(藥種商)이었다.[7] '운락(운낙)'이나 '운학', '운악' 내지는 '응락'이라는 조선 이름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되며, 김씨 집안 출신임을 고려하면 '김운낙' 정도의 성명을 지녔을 것이다.[8] 예수회 소속 중국 선교사 하현덕(夏顯德)의 저술로 1871년 중국 상하이의 자모당(慈母堂)에서 상·하 2권 1책으로 간행되었다.[9] 임진왜란 당시 일본 무장들이 공적을 부풀리기 위해 자신이 잡은 포로를 왕족으로 칭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10] 한국식 독음은 '안정'.[11] 헤어졌던 동생에게 자신을 소개하며 정말 동생이 맞는지 묻고자 보내는 편지에서 스스로 '타아'라고 칭했기에 없다, 얻다와 같은 한국어 답변을 듣고 일본인이 이를 이름으로 생각하여 '오타아'라는 새 이름을 받았다는 설보다는 애초에 '타아'가 조선에서 쓰던 본명에서 비롯되었다는 견해에 무게가 실릴 수 있다.[12] 운나키가 아닌 다른 동생. 운나키는 당시 7살.[13] 작중에서는 오타 쥬리아가 순수하고 정결한 영혼을 가졌는데다, 미래에 크게 이름을 남길 인물에겐 마수들이 크게 해를 끼치지 못하기 때문에 쉽게 접근하지 못했다고 설명된다.[14] 안나와 쥬리아 둘 다 우토 성 내에 있었으나 헤마만 성 아래 마을로 가 있어서 안나는 자신이 마을 지리를 잘 아니 헤마를 찾아 오겠다고 하면서 쥬리아를 성에 남게했다.[15] 어린 시절 남동생이 손에는 푸른 멍 다리 안쪽에는 갈색 멍이 들었다라며 보여준 적이 있었는데, 이 때 모양새가 민망한지라 쥬리아는 "이 바보야"라고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