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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3 22:06:12

올랭프 만치니

프랑스 메트레상티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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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7D992><colcolor=#000000> 수아송 백작부인
올랭프 만치니
Olympe Mancini, Comtesse de Soissons
파일:Olympia_Mancini_by_Mignard.png
이름 이탈리아어 올림피아 만치니
(Olympia Mancini)
프랑스어 올랭프 만치니
(Olympe Mancini)
출생 1638년 7월 11일
교황령 로마
사망 1708년 10월 9일 (향년 70세)
스페인령 네덜란드 브라반트 공국 브뤼셀
배우자 수아송 백작 외젠 모리스 드 사부아
(1657년 결혼 / 1673년 사망)
자녀 루이 토마, 필리프, 루이 쥘, 에마뉘엘 필리베르, 외젠, 마리 잔, 루이즈 필리베르, 프랑수아즈
아버지 로렌초 만치니
어머니 제로니마 마자로니
형제 로라, 폴, 마리, 필리프, 알폰스, 오르탕스, 마리 안
1. 개요2. 성장 과정과 결혼3. 독살 사건4. 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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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재상 쥘 마자랭의 외조카이자 수아송 백작부인이었으며, 잠깐이지만 루이 14세의 정부였다. 외숙부 덕에 프랑스 궁정에서 자랐으나 문제를 일으켜 쫓겨났다.

남편이었던 수아송 백작 외젠 모리스와의 사이에서 오스트리아의 명장이었던 사부아 공자 외젠을 낳았다.

2. 성장 과정과 결혼

1638년에 이탈리아 귀족인 아버지와 쥘 마자랭의 여동생이었던 제로니마(지롤라마) 마자로니의 차녀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찍 사망한 후, 외숙부의 권유로 가족들과 함께 프랑스로 이주해 궁정에서 자랐다. 이때 올랭프와 형제들은 궁에서 좋은 대접을 받았다. 마침 올랭프는 루이 14세와 그의 동생이었던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와 비슷한 나이였기에 그들 형제와 친하게 지냈다.

쥘 마자랭의 여자 외조카들은 마자리네트라고 불리며, 모두 미인인 것으로 유명했다. 올랭프는 다른 자매들만큼의 미인은 아니었지만 밝고 생기 넘치는 매력으로 인기가 있었다. 루이 14세는 만치니 자매들과 가깝게 지내며 그들에게 호감을 드러냈다. 그 중에서 마리와 올랭프는 루이 14세의 애인이 되기도 했다.[1]

아들 루이 14세가 만치니 자매들 중 한 명과 결혼하길 원치 않았던 모후 안 도트리슈는 만치니 자매들을 서둘러 시집보내기로 했다. 이때문에 올랭프는 이탈리아 반도의 서북부 사보이아 공국을 통치하는 사보이아 가문의 방계 출신 귀족이었던 수아송 백작 외젠 모리스(Eugène Maurice de Savoie-Carignan 1635~1673)[2]와 결혼하게 되었다. 올랭프는 1657년에 수아송 백작과 결혼해 그해에 첫 번째 자식인 루이 토마를 낳았다. 그러자 궁중 사람들은 루이 토마가 루이 14세의 자식일지도 모른다고 수근댔다.

수아송 백작부인이 된 올랭프는 마리 테레즈 왕비의 시녀장에 임명되었다. 이는 왕족을 제외한 프랑스 귀족 여성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였다. 높은 지위에 오른 올랭프는 으스대는 걸 좋아하고, 여러 사건에 관여하곤 했기에 루이 14세와 점점 멀어졌다. 왕에게 있어 올랭프는 이전에 잠깐 가볍게 만난 여자였으나 올랭프는 공식적으로 왕의 정부가 되길 원했는지, 이후 루이 14세에게 나에게 돌아오지 않으면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협박에 가까운 말까지 했다.

3. 독살 사건

올랭프는 결혼 후 루이 14세의 제수인 오를레앙 공작부인 앙리에트 안[3]와 가까워졌다. 앙리에트는 루이 14세와 염문을 뿌렸는데, 올랭프는 시녀였던 루이즈 드 라 발리에르를 왕에게 소개시켜 이를 무마할 것을 권유했다. 그런데 잠깐 사람들의 눈을 돌릴 용도였던 루이즈 드 라 발리에르는 루이 14세와 사랑에 빠져 왕의 공식 정부가 되고 말았다. 이에 올랭프는 루이즈 드 라 발리에르를 질투해 왕비에게 이 사실을 고했다.

1677년, 라 부아쟁이라는 마녀가 붙잡혀 최음제독약 등을 판매해왔다는 걸 실토한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라 부아쟁의 주요 고객은 귀족들이었는데, 그 중에는 올랭프도 포함되어 있었다. 1679년에 올랭프는 루이즈 드 라 발리에르를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몇년 전에 죽은 남편을 독살했다는 혐의까지 추가되면서 올랭프는 프랑스에게 추방되었다.[4]

추방된 올랭프는 앙리에트 안의 딸 마리 루이즈 도를레앙이 왕비로 있는 스페인으로 향했다. 에스파냐에서 올랭프는 귀족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1689년, 마리 루이즈 도를레앙이 식중독으로 추정되는 병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올랭프가 독살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올랭프는 결백을 주장했지만 결국 추방 명령을 받아 브뤼셀로 향했다.

때때로 자매들을 만나며 살던 올랭프는 1708년에 70살의 나이로 브뤼셀에서 사망했다.

4. 자식

파일:외젠.jpg
올랭프의 5남 외젠 드 사부아

남편과의 사이에서 5남 3녀를 두었다. 장남 루이 토마는 루이 14세의 자식이라는 의혹을 받았지만 루이 14세와 올랭프 간에 육체적인 관계가 있었을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추측된다. 루이 토마는 프랑스의 군인이 되었는데, 루이 14세는 그의 아내를 정부로 삼으려 했다가 거절당하자 루이 토마의 군대를 해산시켜 화풀이를 했다(...). 이후 동생 외젠의 도움으로 오스트리아에서 군인으로 활동했다.

올랭프의 자식들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오스트리아의 장군 사부아 공자 외젠이다. 어머니의 스캔들로 프랑스에서 제대로 된 자리를 잡지 못한 외젠은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한 합스부르크 제국으로 건너가 군인이 되어 역사에 남을 명장이 되었다.[5]

생애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젊은 시절 내내 놀러 다니기 바빠서 자녀들 양육은 내팽겨쳤다. 그래서 외젠과 형제 자매들은 고모인 루이즈 크리스틴(Louise-Christine de Savoie-Carignan 1627~1689)[6]과 할머니 부르봉의 마리(Marie de Bourbon 1606~1692)의 보살핌 속에서 성장했다.

[1] 사실 루이 14세가 정말로 좋아했던 건 마리 만치니였고, 올랭프와는 잠깐 시시덕거렸던 사이에 가까웠다.[2] 이탈리아어로는 에우제니오 마우리치오(Eugenio Maurizio di Savoia-Soissons). 사보이아카리냐노 공 톰마소 프란체스코(Tommaso Francesco di Savoia 1596~1656)의 막내아들로, 사보이아 공작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의 손자였다.[3] 잉글랜드 왕 찰스 1세와 프랑스 공주 앙리에트 마리의 딸이었다. 남편인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 및 루이 14세와는 사촌 지간이었다.[4] 유명한 철가면 죄수도 이 사건에 연루된 귀족이라는 설이 있다.[5]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람의 업적 대부분은 바로 자기 어머니를 쫓아낸 프랑스와 루이 14세의 패권을 꺾는 것에 일조를 했다.[6] 대튀르크 전쟁에서 활약한 바덴-바덴 변경백 루트비히 빌헬름의 어머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