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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안부의 추장 | ||||
완안수가 | ← | 완안석노 | → | 완안오고내 |
금 추존 황제 昭祖 | 소조 | |
묘호 | 소조(昭祖) |
시호 | 무혜성양황제(武惠成襄皇帝) |
성 | 완안(完顏) |
휘 | 석노(石魯) |
부황 | 헌조(獻祖) |
생몰 기간 | ? ~ ? |
재위 기간 | 1005년 ~ 1021년(복간수 완안부 추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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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중국의 왕조 금나라의 추존 황제. 금나라 태조의 증조부다. 헌조(獻祖)[1]의 장남.2. 상세
완안석노는 요나라의 명령으로 여진족 완안부의 추장이 되었다. 홍호(洪皓)가 쓴 송막기문(松漠紀聞)에 따르면 강의 남쪽에 살면 숙여진(熟女真)[2] 북쪽에 살면[3] 생여진(生女真)으로 구분했으며, 생여진은 거란의 신하였고, 후대에 완안부 추장은 요나라 황제의 명령으로 태사(太师)로 높이 불렸다 한다.皇高祖太師指完顏石魯,質自天成,德為民望,兼精騎射,往無不摧,始置官師,歸者益眾
금사, 예지
금사, 예지
금사, 예지(金史·禮志)에선 완안석노(소조)를 가리켜 자연히 덕을 쌓고, 민망(民望)[4]을 쌓으며, 정기(精騎)[5]를 겸해 가는 곳마다 승리했으며 벼슬을 지낼 때도 인망이 두터웠다고 한다.
희종(熙宗)이 즉위 후, 성양황제(成襄皇帝)로 추존되었으며 황통(皇統) 4년[6] 소조의 매장지도 안릉(安陵)으로 격상되었고 황통 5년에는 묘호를 소조(昭祖), 시호를 무혜성양황제(武惠成襄皇帝)로 다시 높였다.
[1] 이름은 수가(綏可). 안제(安帝)로 추존된 안안발해(完颜跋海)의 아들이다.[2] 요에 잘 복종하던 여진족.[3] 귀화하지 않은.[4] 백성의 바람이나 믿음.[5] 날쌔고 용맹한 기병.[6] 희종의 연호(年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