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1-08-27 19:42:16

요한 지그문트 맥콰이어 폰 이니스킬린

파일:Maquire.jpg

1. 개요2. 일생
2.1. 초기 경력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2.3. 7년 전쟁2.4. 이후의 경력

[clearfix]

1. 개요

오스트리아의 장성.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7년 전쟁에서 활약했다.

2. 일생

2.1. 초기 경력

맥콰이어는 1710년 또는 1711년경에 아일랜드 케리 주의 발리마셀리고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1641년 아일랜드 반란에 가담했던 적이 있었고, 아버지는 제임스 맥과이어이고 어머니는 세셀리아 맥나마라 레아다. 맥콰이어는 1722년에 오스트리아군에 입대했고 1729년까지 테메스바르의 소위로 근무했다. 1731년, 오닐란 연대의 대위로 진급했고, 이후 오스트리아-오스만 전쟁과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 차전했다.

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42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지자 변경군으로 전출된 그는 1743년 하데크 백작부인 엘리자베스 루이즈와 결혼했다. 1746년 맥콰이어는 이탈리아로 파견되어 와라스디너-크로처 국경 수비대 대령으로 승진했다. 그 후 그는 폰트레모리에서 스페인 분견대를 무찔렀고 6월 16일 피아첸차 전투에 참가해 연대장으로서 두각을 드러냈다. 1746년 8월, 맥콰이어는 막시밀리안 율리시즈 폰 브라운 장군의 지휘 아래 제노바와 알레산드리아 사이의 보체타 고개를 지켰다. 그해 연말, 맥콰이어는 4천 명을 이끌고 드라기낭으로 진군했고 1747년 1월 24일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1747년, 맥콰이어는 제노바 포위전에 참가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고, 같은 해 제5 그렌저 연대 소장으로 임명되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난 후, 그는 그렌저 부대의 재편성을 담당하는 위원회에 가담했고 1751년에는 맥콰이어 보병대의 지휘관이 되었다.

2.3. 7년 전쟁

7년 전쟁이 발발할 무렵인 1756년 8월 28일 중령으로 승진한 그는 같은 해 10월 1일 로보지츠 전투에 참가했으나 프로이센군에게 패배했다. 이후 1757년 봄 프로이센군이 보헤미아를 침공했을 때, 맥콰이어는 라이헨베르크 전투프라하 전투에 참가했다. 프라하 전투 패전 후, 맥콰이어는 프로이센군 후방 인근으로 이동해 적의 보급망을 교란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6월 18일 콜린 전투에서 패배한 프로이센군이 작센을 향해 퇴각하자, 맥콰이어는 그들을 추격하여 많은 낙오병과 물자들을 노획했고 7월에 36시간의 공성전 끝에 가벨 시를 점령했다. 이후 11월 22일에는 브레슬라우 전투에 참가해 브레슬라우 공략에 성공했고 12월 5일에는 로이텐 전투에 참전했으나 오스트리아군이 와해되는 걸 막지 못했고 그 역시 부상당했다.

1758년 소넨슈타인 요새 공략전에 참가한 그는 1759년 8월 드레스덴 공방전을 지휘해 9월 4일에 함락시켰다. 그는 이 공으로 야전군관에 임명되었고 드레스덴 사령관을 맡았다. 1760년, 맥콰이너는 드레스덴 공략의 공로를 인정받아 마리아 테레지아 대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같은 해 7월, 맥콰이어는 프리드리히 대왕이 이끄는 프로이센군의 드레스덴 공세에 맞서 분전해 드레스덴을 끝까지 사수했다. 이후 그는 7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드레스덴 사령관으로 남아있었고 1762년 5월부터 1763년 5월까지 작센에서 합스부르크 제국으로 넘어간 부대의 총사령관을 맡았다.

2.4. 이후의 경력

전쟁이 끝난 뒤, 맥콰이어는 1763년 9월 24일 마리아 안토니아 폰 블뤼메겐과 결혼했다. 이후 그는 말년을 조용히 보내다가 1767년 1월 12일 트로파우에서 사망했다. 향년 56세 또는 57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