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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27 11:50:00

용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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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군
용주면
龍洲面 | Yongju-myeon
<colbgcolor=#ef3120><colcolor=#ffffff> 광역자치단체 경상남도
기초자치단체 합천군
행정표준코드 5480054
관할 법정리 16리
하위 행정구역 28행정리 62반
면적 89.37㎢
인구 2,134명[1]
인구밀도 23.88명/㎢
정치 {{{#!wiki style="margin:-0px -11px -5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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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복지센터 황계폭포로 1154[2]
용주면사무소
1. 개요2. 지명유래
2.1. 용지리2.2. 평산리2.3. 노리2.4. 팔산리2.5. 장전리2.6. 공암리2.7. 황계리2.8. 고품리2.9. 봉기리2.10. 가호리2.11. 죽죽리2.12. 우곡리2.13. 방곡리2.14. 월평리2.15. 성산리2.16. 손목리
3. 교통
3.1. 버스교통
4. 교육5. 출신 인물
[clearfix]

1. 개요

경상남도 합천군, 대병면, 가회면, 봉산면, 합천읍과 맞닿아 있다.

2. 지명유래

2.1. 용지리

용지리는 황강변의 중간에 위치한 곳으로 서쪽으로 황매산 줄기가 뻗친 의룡산과 멀리 덕유산쪽에서 흘러운 물줄기가 황강이 되어 동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서기 1400년경부터 용마리는 지금의 용주교 밑 황강바닥에서 동쪽을 바라보며 형성되어 있었으며 이천서씨들의 마을로 200년전까지 집성촌을 이루었다고 한다. 또한 마을 뒤편 황강천에 큰 평야지대에 쌀을 생산하고 있어 무척이나 살기 좋은 마을이다.
용지2구는 동쪽으로 모단, 서쪽으로는 2㎞떨어진 의룡산 아래에 위치한 둔덕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모단은 황강변으로 강가의 언덕이라서 물가언덕 모(모)자와 오목한 것이 소쿠리 모양이라서 둥글 단(團)자로 모團이라 불리워졌다. 둔덕은 의룡산 아래에 위치해 있는데 1500년경에는 의룡산 일대가 성터라 의병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이렇듯 의병을 모으고 나라에 덕을 쌓았다 하여 모일둔자와 큰덕자를 합쳐 마을이름을 둔덕이라 하였다

2.2. 평산리

평산리의 지명은 평평한 평야를 의미하는 들과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이 조화를 이룬다고 하여 옛 지명으로 들뫼라고 하였다가 고종 30년경 평산이라고 칭하였다.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풍속은 검소하고 진솔함을 숭상하고 소박하여 인심이 후하고 예부터 시를 읊으며 학문을 탐구하는 선비가 많았으며 마을 입구에는 효자비가 세워져 있다. 지리적으로는 장전리와 평산리 사이에 위치하며 평산, 해곡이 한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해곡은 1960년에 노름밭과 박실이라는 자연마을을 합하여 해곡이라 명명하였으며 바다처럼 많은 박실늪의 물을 가리켜 산속의 바다라하여 해곡이라 부르게 되었다. 해곡마을은 뒷산을 배경으로 하여 앞으로 넓은 들이 형성되어 있고 황계천이 흘러와 12만평의 박실지를 거쳐 흐르고 있으며 서남쪽에 노름밭이라는 지명의 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남쪽에는 박실이 계곡을 끼고 형성되어 있다. 해곡마을은 남쪽으로는 노리, 서쪽으로는 용지리, 북쪽으로는 손목이 위치하고 있다.

2.3. 노리

지금의 노리마을은 예전에 사슴록 자와 마을동 자를 합하여 녹동이라 불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녹리라고 부르기엔 어색하여 중국의 노나라가 국태민안하고 살기가 좋아 노나라 노자를 머리글자로 명칭을 정했다 함. 노리 마을은 위쪽으로 국수봉을 북으로 두고 마을 앞은 평품들을 안으로 한 공골산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황계천이 흐르고 있다.

* 녹명재: 노리 뒷골에 있는 파평윤씨 재실로 충위 윤수의 제각이다.
* 고현재: 노리 위담에 있는 남평문씨 재실이며 고려 판도판서 문근의 묘각이 있다.
* 영모재: 중담에 있는 파평윤씨 재실

* 공골산: 마을에서 바라보면 산 형태가 공(公)자와 같이 생겼다 하여 명명
* 염재(고현, 고티): 노리 동남쪽에 있는 고개, 대양면 도리로 넘어가는 재
* 녹두바우: 공골산 안에 녹두모양의 바위
* 논잇골: 색동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 다리목: 땅골 동쪽에 있는 산
* 들맷골: 장때먼당 동남쪽에 있는 산
* 딩기실: 진골 서남쪽에 있는 산
* 땅골: 노리 동남쪽에 있는 산
* 삼밭골: 딩기실 북쪽에 있는 산
* 서잿골: 장때먼당 동쪽에 있는 골짜기
* 싱잇골: 노리 동쪽에 있는 골짜기
* 엉골: 진골 남쪽에 있는 산
* 용남 굼텅이: 엉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 황새골: 진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 병풍덤: 노리 북쪽산에 있는 병풍같은 바위더미

2.4. 팔산리

팔산의 지명은 팔뫼라고 하였는데 마을 입구에서 보면 산의 형태가 여덟팔자와 뫼산자형으로 형성되어 있다하여 팔산이라 불렀다. 팔산마을은 예전에 옹기골이 있었는데 의령-거창간 옹기상인들의 육로교통의 중심지였다. 팔산마을은 북쪽으로 버리실, 서쪽으로 노리실, 동쪽은 이삿골로 이루어져 있다.

* 창선재: 윗담에 있는 의성김씨 재각

* 절골: 옛날 절이 있었던 골짜기
* 이사골재: 대양면 이계리로 연결되는 재
* 박실재: 용주면 해곡리와 성산, 손목으로 연결하는 재
* 도롱골: 팔산 서북쪽 골짜기

2.5. 장전리

장전리의 지명은 이전부터 장밭이라 불리워 왔는데 장(章)은 학문을, 전은 터를 뜻하는 것으로 선비의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마을 이란 뜻으로 장전이라고 명명하였다고 한다. 이 마을의 앞산과 장전산 사이는 넓지 않으나 토질이 비옥하고 수원이 풍부하여 농작물이 잘 자라는 곳이며 지리적으로 공암, 황계 마을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 본동과 사기동, 금곡동, 창동으로 자연마을이 나뉘어 있고 5개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2.6. 공암리

임진왜란 때 권옥강이라는 분이 공자 위패를 모시려고 자리를 물색하던 중 바위가 넓적하고 아래에 공간도 있으며 비가 와도 물이 들어오지 않아 이곳이 좋겠다고 여겨 공자 위패를 모셨다고 하여 공암이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도 마을 입구에 권옥강씨의 공적을 기린다는 뜻에서 후손들이 비를 세워 후세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2.7. 황계리

마을이 형성될 당시에 구황계곡이라 불리었으며 아침을 짓기 위해 쌀을 씻으면 쌀뜨물이 노리앞까지 퍼졌다 한다. 황계마을은 합천읍에서 서북방향 12㎞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방도 1026호선이 마을앞을 관통하고 있다.

2.8. 고품리

고품리는 마을 앞의 산에서 보면 마을내에 바위와 돌이 없는 낮은 평야지대이기 때문에 땅이 강해지라는 의미에서 뼈골자를 써서 골품리라고 불러왔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변형되어 고품리라고 불리게 되었다. 고품 마을은 원래 강쪽에 형성되어 있었으나 강물이 범람하고 수해의 위험이 많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왔다. 고품 마을은 지금도 곳곳에서 고대 유물이 출토되는 등 옛부터 이름난 고장인데 남쪽으로 황강을 끼고 있으며 평풍덤을 앞에 두고 있고 서쪽으로는 호롱산이 있으며 북쪽으로는 우산이 위치하고 있다.
고품2구는 100년전 윤씨성을 가진 사람과 석씨성을 가진 사람이 신기터를 이루어 살며서 처음 형성되었다. 그후 시간이 지나면서 11개의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오늘날의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고품3구는 고품리 하위 마을이다.
대박리는 2019년 황강전원마을이 조성된 이후 고품1구에 포함 되어있었으나 별도 마을로서의 기능이 요구되어 행정구역 개편을 추진.
2021. 8. 6. 공포됨.

2.9. 봉기리

봉기리는 새 봉(鳳)자와 터 기(基)자를 따서 봉기라고 명명하였으며 합천읍으로부터 약8㎞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으로는 우곡마을, 서로는 가호리를 경계로 하고 있으며 합천댐(보조댐)이 자리잡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관광지인 합천댐, 용문정을 잇는 군도12호선이 마을옆을 휘감고 있다.

2.10. 가호리

가호마을은 용주면 소재지에서 서북간 4㎞ 정도에 위치한 마을로 진주류씨가 99% 집단 거주하고 있는 특이한 고을이다. 아름다울 가(佳)자와 호수 호(湖)자로서 아름다운 호수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인데 옛날부터 산간벽지에 호수라고는 없는 마을에 어떻게 이런 지명이 붙여졌는지 알수 없지만 진주류씨의 선조들은 이 지명을 자랑스럽게 사용해 왔다. 그런데 일제가 이땅을 침략하여 일본인 산실이라는 자가 제 마음대로 안 내(內)자와 가사 가(袈)자로아무 뜻과 의미도 없는 내가리로 표기하여 그때부터 용주면 내가리로 호칭되어 오면서 내가리 1,2구로 분동되어 2개의 마을이 형성되었다. 1990년부터 1993년에 걸쳐 동민들의 숙원인 내가리에서 가호리로 환원을 건의한 결과 1995년 12월 7일부로 합천군 의회 조례제정에 의하여 명칭변경 통과로 지금 현재 가호리로 사용되어 오고 있다. 1984년 국가적 대사업인 합천댐이 완공되어 그야말로 상전벽해의 기적이 일어나 이 고을앞에 조정지댐이 생겨났다.

2.11. 죽죽리

죽죽리는 신라시대 대야성을 지키다 순절한 죽죽 장군이 탄생한 곳으로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일제때 봉산면으로 편입되었다가 1987년 1월 1일자로 합천군 용주면 죽죽리로 새롭게 편입되었다. 죽죽리는 평지마을, 서운마을, 양지마을, 화남마을 등 4개의 마을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합천댐으로 인하여 평지마을과 서운마을은 수몰지구가 되었으며 현재는 양지마을과 화남마을만이 존재하고 있다. 죽죽리는 뒤로는 문가말랑봉, 동쪽으로는 호롱산, 북쪽으로는 서원봉, 서쪽으로는 무덤봉으로 둘러싸인 곳으로 남쪽 신방봉 아래로는 황강이 유유히 흘러 낙동강으로 유입되며 마을 뒷산 너머에는 악경산이 우뚝 서 있다.

2.12. 우곡리

우곡리는 소룡산과 논덕산 줄기에 위치한 마을로 안담, 새담, 계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앞산 골짜기가 가마골로 불리우며 소 죽통모양으로 생겨 소가 가마솥에 있는 죽을 먹고 있는 형국이라 소 우(牛)자와 골 곡(谷)자를 따서 우곡리라 불리게 되었다. 도로가 발달되기 전까지는 봉산면 일대 저포, 계산 사람들이 합천시장에서 생필품을 운반하는 곳으로 역할을 하였다. 우곡리는 논덕산 뒤편으로 합천호가 펼쳐져 있고 우편으로는 소룡산 너머 합천읍 인곡리가 자리잡고 있다.

2.13. 방곡리

방곡1구는 상봉을 뒷산으로 하여 방곡천이 마을앞을 흐르고 있으며 상촌, 하촌 2개마을로 형성되어 있으며 마을이 남서쪽을 향하고 있다.
방곡2구는 큰 마을, 중촌(신방), 새터(신기) 3개 마을로 형성되어 있으며 큰마을은 충주지씨가 고려가 멸망하고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할 시에 역적으로 몰리어 피신차 내려와 정착을 하였다 하며 중촌은 밀양손씨가 약350여년 전에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고 신기는 약300여년전 파평윤씨가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방곡2구는 무봉산(물봉산)을 뒷산으로 하여 3개마을로 형성되어 있으며 방곡천이 마을앞을 흐르고 있다. 그리고 우곡으로 가는 말곡지역 (매봉산 밑) 중촌마을에서 약2㎞지점에 양지마, 음지마 2개마을이 있었다.

2.14. 월평리

평리의 지명은 월암산의 월자와 들평의 평자를 따서 월평리라 불리어졌다. 월평1구는 연촌으로도 불리워지게 되었는데 경기도 양주에 유적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연산군의 폭정으로 말미암아 벼슬을 뿌리치고 함양 안의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거창군 월곡으로 이주를 하였다. 그 뒤 그분의 자제인 유해인이 340여년 전에 구리동(월평2구)으로 입향하게 되었으며 유해인의 자제인 유여림이 연촌이라는 마을에 새로 입향하여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월평2구 마을은 앞으로는 월암산이 버티고 있으며 그 아래로는 황강이 남, 동으로 흐르고 뒤로는 큰골, 깊은산이 있다. 동으로는 메봉재 등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곳으로 마을 중앙에 우뚝선 당산과 큰골, 절골, 생양골, 엔당, 상정 등의 골짜기로 이루어져 있다. 고려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

2.15. 성산리

성산이란 마을은 삼국시대 신라, 백제 두나라가 황강을 경계로 하여 싸울 때 갈마장군이란 백제의 장수가 현 마을의 동쪽 400m지점에 갈마산성이란 성을 쌓아 나라를 지켰는데 그후 산성이 있다하여 산성의 성(城)자와 산 밑에 동네가 있다하여 뫼 산(山)자를 따서 성산이라고 마을명칭을 명명하였다. 원래 마을은 현 위치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현마을의 북쪽 2㎞의 황강변 독산이라고 하는 곳에 있었으나 1592년 임란시 수파로 인해 이곳으로 옮겨 왔으며 현 마을앞 느티나무는 약500여년 전에 독산동에 사는 초군들이 심었다는 설이 있다. 성산마을은 갈마산성이라는 삼국시대의 옛성터가 동쪽에 있으며 큰골, 작은골, 성산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다.
성산2구는 일명 버러실 이라고 하는데 450여년 전부터 밀양박씨가 집단으로 거주하였으나 1700년경 대질병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으며 버러실은 합천 및 인근에서 생활이 어려운 사람이 들어와 살기만 하면 살림이 벌어 진다고 하여 많은 사람이 이사해와 한때는 안버러실 안쪽까지 살았다고 한다. 조선 말엽부터 인근 팔산이란 마을에서 옹기도공이 넘어와 일제 시대에는 황도홍이란 창원 황씨의 도공이 일본왕에게 상을 받았으며 옹기의 전성시에는 200여명의 일꾼들이 일을하여 남한 일대에는 제일 큰 옹기 도요지 마을이었다. 그러나 60년 말부터 세월의 변천에 밀려 지금은 그 자취가 없다. 성산2구는 합천 깃점으로 서쪽으로 지방도 1026호선 주변 용주면의 관문마을이다. 갈마봉을 뒤로하고 앞으로 남쪽에는 시루봉이 있으며, 옆으로는 함안, 거창에서 시작하여 흘러온 물줄기로 대 황강천을 이루고 있다.

2.16. 손목리

합천읍에서 남으로 10㎞ 지점에 위치한 손목1구 마을은 지방도 1024호선이 마을앞을 통과하고 황강과 황계천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서로 만나는 지역으로 조선조 효종때에는 마을의 지명을 독산이라고 불렀다. 동으로 갈마산, 서로 소룡산, 북으로 망월산, 남으로는 팔산을 경계로 하고 있다.
동으로 갈마산, 서로 의룡산, 북으로 망월산이 있으며, 서쪽에서 유유히 흐르는 황강을 끼고 갈마산이 날개짓하는 끝자락에 1500년경 고령박씨 17대조 박관공이 지금의 손목2구에 안주하면서 형성되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본래 지명은 조동이라 하였는데 서쪽에서 흐르는 황강천과 남쪽에서 흐르는 황계천 즉 이수와 사수가 만나는 지역에 소가 형성되어 있으므로 자연히 고기가 많아 조동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 솔땟등: 손목 서쪽에 있는 등성이
* 산짓등: 밴드래 남쪽에 있는 등성이
* 독 산: 조동 북쪽에 있는 산, 광산김씨의 집성촌이였으며 손목의 옛마을 이름이기도 하다.
* 제월암: 벽한정 앞 강가 바위, 선비들이 모여 시를 짓던 곳
* 풍광대: 벽한정 서편 정자, 선비들이 글을 읽던 곳

3. 교통

1026번 지방도가 지나간다. 2024년과 2028년에 각각 남부내륙철도함양울산고속도로가 지나갈 예정이다.

3.1. 버스교통

버스는 합천군 농어촌버스로 합천읍에서 공암,내시,대병,상천,용주 방면 버스가 운행중이다.

4. 교육

초등학교 - 용주초등학교 (공립)

5. 출신 인물


[1] 2023년 2월 주민등록인구[2] 용지리 26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