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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1 23:40:35

우군칙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

1. 개요

禹君則(1776 ~ 1812)

우군칙은 조선 후기에 활동한 풍수복설가이자 홍경래의 난의 주동자이다.

2. 생애

본명은 장유(將酉)로, 군칙(君則)은 그의 자이다. 평안도 태천 양반가의 서자 출신으로 풍수복설가로 활동하였다. 평소 조선 사회에 불만을 품고 있다가 1800년에 홍경래를 만났다. 뜻이 통한 두 사람은 반란을 모의하였고 무려 10년 동안 반란을 준비하였다.

우군칙은 지관 행세를 하며 가산의 거부 이희저에게 접근했고, 그의 아버지의 묫자리를 점지해주면서 이희저를 반란 모의에 동참하도록 꼬드겼다. 그로 인해 반란에 필요한 자금은 물론 관아와 군대에 내통자를 모으는 일도 수월해졌다. 1810년이 되자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반란을 계획하기 시작했고, 1811년 4월 우군칙은 다복동에 30칸짜리 기와집을 지어 살았는데 그 집은 반란군들의 비밀 군사기지가 되었고 홍경래는 자신이 모아온 장사들과 함께 우군칙의 집에 지냈다. 홍경래와 우군칙은 운산에 금광을 연다는 소문을 내어 농민들을 끌어들였고 모여든 농민들은 그대로 반란군이 되었다.

1811년 12월 마침내 반란이 일어나자 우군칙은 김창시와 함께 반란군의 참모로 활약하였다. 반란이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대린 등이 배신하여 홍경래를 죽이려 하자 김대린을 붙잡아 홍경래를 구했다. 이후 송림의 패배로 반란이 실패로 돌아간 뒤에도 홍경래와 함께 정주성에서 4개월 동안 농성했으며, 정주성이 무너질 때 죽은 홍경래와 달라 살아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도망친 우군칙은 무사히 정주성을 빠져나온 최이륜(崔爾崙), 최이항(崔爾恒), 최정우(崔正宇), 김이구(金履九)와[1] 임해산(臨海山)에서 만나 행동을 같이했다. 이들은 곽산의 당아산(堂峨山) 바위 동굴과 석현(石峴)에서 잠시 숨었다가 밥을 얻어먹을 생각으로 우군칙의 4촌 처남인 정몽량(鄭夢良)의 집을 찾아갔다. 하지만 정몽량은 구성의 우장령 방수장, 다시 말해 관군이었고 우군칙 일행은 정몽량에게 속아 집에 있다가 4월 22일 그가 불러모은 마을 사람들에 의해 붙잡히고 말았다.

이때 우군칙은 우용문(禹龍文)이라는 가명을 쓰고 있었지만 콧등의 총상 탓에[2] 대번에 정체가 들켰고 문초 결과 자신이 우군칙임을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우군칙은 한양으로 압송되어 의금부의 심문을 받았다가 1812년 5월 5일 거병 동지인 홍총각, 김이대, 윤언섭, 양시위, 최이륜과 함께 목이 베였다. 우군칙의 아내인 정씨도 그해 7월 참수형에 처해졌다.

3. 대중매체


[1] 최이륜은 정주 주관장과 북진군 참모 등을 역임한 반란군의 주요 간부였고, 최이항은 최이륜의 동생, 최정우는 최이륜의 아들이다. 김이구는 판자를 사려고 박천에 왔다가 반란에 휘말려 화를 피해 정주성으로 도망친 농민이다.[2] 우군칙은 3월 20일 출성하여 관군의 진영을 공격하다가 콧등에 총알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