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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07 09:58:39

우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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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제3대 타이완성정부 주석
우궈전[1]
[ruby(吳國楨, ruby=ㄨˊㄍㄨㄛˊㄓㄣ)] | Wu Kuo-Chen
파일:오국정.jpg
치지(峙之), 유주(維周)
출생 1903년 10월 21일
청나라 호북성 건시현
사망 1984년 6월 6일
미합중국 조지아 주 서배너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학력 칭화대학 (학사)
그린넬 대학교 (경제학 / 학사)
프린스턴 대학교 (철학 / 박사)
재임기간 제3대 타이완성정부 주석
1949년 12월 21일 ~ 1953년 4월 16일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중일전쟁과 국부천대2.3. 3대 타이완성 정부주석2.4. 장징궈와의 불화2.5. 우궈전 사건2.6. 말년
3. 주요 경력4. 매체에서5. 참고문헌

[clearfix]

1. 개요

중화민국의 정치인. 3대 타이완성 정부 주석을 지냈으며 중화민국 민주파의 대표로 민주선생이라 불렸으나 장제스와의 불화로 미국으로 망명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903년 호북성 건시에서 태어났으나 북방에서 성장했다. 1921년 칭화대학을 졸업하고 국비유학생으로 선정되어 미국으로 유학했다. 1923년 아이오와 주의 그린넬 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에 입학, 1926년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27년 귀국하여 국민혁명으로 중국의 지배자가 된 국민정부 외교부 비서가 되었다. 이후 강소성 교섭공서 교제과장, 외교부 제1국 국장 등을 거쳤으나 직책에 불만을 품고 리쭝런의 우한정치분회에 합류, 호북성 세무국장이 되었으나 반장전쟁에서 광서파가 패배한 이후 장제스의 심복인 하성준의 추천으로 1932년 다시 장제스 측으로 합류하여 비서실 비서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절강성 파벌이 대부분인 비서실에서 곧 축출되어 쑹쯔원의 추천으로 강서성에서 염무 관리를 맡았다.

2.2. 중일전쟁과 국부천대

이후 한커우 시장에 임명되었으며 중일전쟁 발발 후 1939년 충칭 시장에 임명되었다. 1942년 외교부 정무차장에 임명되어 미국에 거주하고 있던 외교부장 쑹쯔원을 대리하여 외교부의 전권을 행사하였다. 전쟁 승리 직전 국민당 중앙선전부 부장에 임명되었으며 전쟁 승리 이후 상하이 시장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상하이 시장 재직 시절 장제스의 재정경제긴급처분령 발효에 따라 경제독도보조원에 임명되어 화폐개혁을 하러 온 장징궈와 다투면서 장징궈와 사이가 나빠졌다. 장징궈는 경제부독도원을 설치하여 강압적으로 투기 상인들을 탄압하고 화폐개혁을 실시하려 했는데 우궈전은 강압적인 정치수단을 남용하는 것으로는 경제개혁을 이뤄낼 수 없다며 장징궈의 방법을 크게 비판하고 난징으로 가서 장제스에게 직접 장징궈가 잘못됐다고 직언해버렸다. 결국 장징궈의 화폐개혁은 실패로 돌아갔고 장징궈는 이것이 우궈전의 탓이라 여겨 이를 갈게 되었다.

우궈전은 이 시기까지 후스, 뇌진을 비롯한 중화민국의 자유주의 지식인들과 활발하게 교류했으며 장췬, 우톄청, 웨이다오밍, 천이, 왕스제 등과 함께 국민당 내부의 대표적인 자유파 인물로 꼽혔다. 상하이 시장 이후에는 총재 판공실 설계위원에 임명되었다. 정치협상 시기 쿤밍에 거주하던 국가사회당원 뤄룽지를 설득하기 위한 충칭 회담에 참여, 장다오판(張道藩)[2], 푸쉐펑(蒲薛鳳)[3]과 함께 뤄룽지를 포섭하는 역할을 맡았다.

2.28 사건 이후 타이완성정부가 설치되자 1대 주석으로 웨이다오밍이 임명되었으며 1949년 1월 1일에 천청이 2대 주석이 되었다. 이때 장제스는 미국의 민주화 압력을 의식하여 중화민국의 자유파 인사들을 포섭하고자 했는데 이때 장제스의 눈에 들어왔던 것이 우궈전이었다. 1949년 11월, 장제스의 측근 정제민(鄭介民)이 워싱턴 D.C.를 방문했을 때 레이턴 스튜어트를 비롯한 외교 측 인사들은 공식적으로 우궈전을 타이완성정부 주석으로 임명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장제스는 우궈전을 3대 타이완성정부 주석으로 지명하였고 12월 15일에 정식으로 발표하였다. 우궈전은 이에 천청이 이미 주석을 잘하고 있다면서 거절의 의사를 비췄지만[4] 장제스는 "나는 당신이 매우 적당하다고 생각하오. 부디 앞으로 전력을 다해 당신이 미국의 원조를 획득해주길 바랄 뿐이오."라면서 그에게 주석 자리를 권했다. 결국 우궈전은 주석 자리를 수락했다.

2.3. 3대 타이완성 정부주석

파일:타임지오국정.jpg
타임지 표지를 장식한 우궈전

12월 21일 타이완성 정부주석에 취임한 우궈전은 그날 저녁 즉각 기자회견을 열어 4가지 시정강령을 제시했다.

또한 우궈전은 본성인 인사들을 적극 기용하겠다고 약속하였으며 실제로 타이완성정부의 5개 청 중 민정청장에 장웨이촨(蔣渭川), 건설청장에 펑더(彭德), 농림청장에 쉬칭중(徐慶鍾)을, 25명의 성정부위원 중 17명을 본성인으로 임명했다. 우궈전은 자신이 장제스의 신임에 대해 전심전력으로 개혁을 하여 보답해야한다고 여기고 매우 정력적으로 개혁을 추진하였는데 이 때문에 장제스의 후계자 자리를 노리던 국방부 총정치부 주임 장징궈와의 마찰이 심해졌다. 장징궈는 미국의 후원과 장제스의 신임을 바탕으로 기세등등한 우궈전을 가만 둘 수가 없던 것이었다.

2.4. 장징궈와의 불화

맨 처음 불거진 것이 타이완성보안사령관직 문제였다.

전임 타이완성 주석인 천청은 대만 내 중화민국군을 지휘하는 타이완성경비총사령부 경비총사령이기도 했다. 다만 천청이 주석이던 시절에는 그의 업무가 바빠[5] 부사령관 펑멍지(彭孟緝)에게 대행하게 했고, 나중에 국민정부는 타이완성경비총사령부를 동남군정장관공서와 타이완성보안사령부로 분할하여 천청에게는 중국 동남부의 방어를 총괄하는 동남군정장관을 주고, 보안사령부 사령은 펑멍지(彭孟緝)에게 주었다.

그러나 타이완성 관련 일만 맡던 우궈전은 여유가 있었고, 이에 펑밍지를 밀어내고 타이완성 보안사령관을 겸하였다. 이에 펑멍지는 불만을 품고 장징궈에게 붙어 우궈전을 방해했다. 또한 우궈전은 장징궈가 주도하는 정보기관의 불법 납치를 크게 비판하며 모든 체포는 타이완성 보안사령부를 거쳐야 하며 모든 사람은 체포 14일 후에는 기소가 되던 석방이 되던 해야 한다고 장제스에게 직언했다. 장징궈는 이를 자신의 세력에 대한 도전으로 여기고 맹렬히 반대했다.

1950년 대만성냥회사 사건이 터지면서 우궈전과 장징궈의 불화는 극에 달했다. 대만성냥회사는 원래 상하이에서 설립된 성냥회사였는데 이사장 오성재는 국공내전 이후 중공에 투항하였다. 이에 중화민국 정부는 오성재를 공비에 부역한 반역자로 등록하였다. 오성재는 영화산업에 종사하며 대륙에서 장제스와 국민당을 중상하는 <민국 40년>이라는 영화를 찍었다. 장징궈는 이를 듣고 격노하여 대만으로 이동한 대만성냥회사를 조사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리고 회사 사장 왕철보를 우궈전에게 알리지 않고 체포하였다. 이를 알게 된 우궈전은 왕철보는 무죄라고 석방하려 했으나 팽맹집은 우궈전의 명령을 듣길 거부했다. 이에 장제스가 비서 저우훙타오(周宏濤)를 파견하여 우궈전과 장징궈 사이를 중재하는 한편 자신의 후계자가 될 장징궈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왕철보를 유죄로 하되 우궈전의 입장도 고려하여 사형에서 7년형으로 감형시켜주었다.

이어서 터진 사건은 1952년 타이완성 제2차 현·시의원 선거 때 장징궈가 하룻밤 사이에 398명을 체포한 일이었다. 이중에서 오로지 19명만이 경미한 전과가 있고 나머지는 아예 무고한 사람들이었다. 우궈전은 이들을 3시간 안에 석방시킬 것을 지시하고 책임자들을 처벌했으나 펑멍지의 사보타주로 명령이 제대로 먹혀들지 않았다. 펑멍지는 우궈전이 나설 때마다 이것은 장 선생의 뜻이다! 라고 엄포를 놓으며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여기에 타이완성정부 재정청장 런셴췬(任顯群)이 적산가옥과 국민정부가 대륙에서 가져온 황금을 팔아 불법자금을 마련한 사건이 발각되면서 장징궈와 우궈전은 또다시 반목했다. 런셴췬은 정부 자산을 불법으로 팔아 장징궈의 정치자금으로 제공했고 우궈전은 이를 참지 못하고 장징궈에게 따진 것이었다. 여기에 군부와 우궈전의 사이도 계속 악화되었다.

2.5. 우궈전 사건

피로가 누적된 우궈전은 1952년 말부터 계속해서 사직을 요청했으나 장제스는 이를 수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장제스는 그에게 장징궈와 협조하면 행정원장 자리를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우궈전은 장징궈가 정보기관이 아니라 사회복지 쪽에서 일하지 않는다면 협조할 수 없다면서 거절했다. 우궈전은 3차례나 더 사직을 요청, 행정원 286차 원회는 4월 16일 우궈전의 사직을 수리하여 위훙쥔을 새로운 주석으로 삼았다. 이후 우궈전은 쑹메이링과 미국 대사 칼 란킨에게 도움을 요청한 끝에 1953년 5월 24일, 모교인 그린넬 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고 6차례의 공개 연설을 한다는 구실로 천청, 장징궈 등 정부 요인 500여명의 환송을 받으며 쑹산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떠나버렸다.

그런데 1953년 11월 17일 총통부 비서장 왕스제 파면사건이 있자 왕스제와 가까웠던 우궈전도 연루되어 입지가 좁아졌다. 대만과 미국의 화교 언론들은 왕스제가 불법적으로 우궈전에게 외화를 선물하였다는 거짓보도를 하였고 우궈전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중화민국 정부를 작심하고 비판하였다. 이것이 바로 우궈전 사건이었는데 중화민국 정부가 대만에 남아있던 우궈전의 아들 우슈황의 출국을 막아 인질로 삼았다. 결국 미국 정부가 개입하여 우슈황을 미국으로 보내주는 대신 우궈전이 더 이상 대만을 비판하지 않는 것으로 중재함에 따라 우궈전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2.6. 말년

미국 망명 이후 조지아 주에서 거주하며 시카고 트리뷴 지의 극동 문제 자문으로 일했다. 1966년 조지아 서던 대학 암스트롱 캠퍼스에서 동양사와 철학을 가르쳤으며 중국 문화와 신화에 관련된 다양한 저작을 남겼다.

1984년, 조지아 주 서배너에서 사망했다.

3. 주요 경력

타이완성 역대 성정부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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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3대 4대
천청 우궈전
(1949년 12월 21일 ~ 1953년 4월 16일)
위훙쥔

4. 매체에서

파일:건국대업오국정.jpg
영화 건국대업에선 중국 배우 조가범(曹可凡)이 맡았다. 실제 역사에는 장징궈랑 맞서는 꼬장꼬장한 인물이었는데 공산당 선전 영화 특성상 장징궈에게 딸랑거리는 똘마니처럼 묘사되었다.

5. 참고문헌



[1] 한국식 독음은 오국정이다.[2] 우궈전 재임기 입법원장 역임. 따라서 정작 우궈전 사건 시기에는 앞장서서 그를 비난하는 역할을 맡았다.[3] 1948~1954년 타이완성정부 비서장 역임. 웨이다오밍 시기부터 우궈전의 후임 위훙쥔 시기까지 장기간 재임했다.[4] 우궈전은 천청과의 불안한 관계를 임기 내내 신경써야 했다. 특히 천청이 1950년 3월 명목상 상급자인 행정원장으로 임명되면서 이 갈등은 격화된다.[5] 천청은 이 당시 중국 동남부의 방어까지 총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