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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6 20:35:35

위성복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width=100%><tablebordercolor=#bb4e37> 파일:조흥은행 CI(1999-2006) 화이트.svg조흥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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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성복
魏聖復
파일:금융인 위성복.jpg
<colbgcolor=#025A64><colcolor=#ffffff> 출생 1939년
사망 2024년 8월 30일 (향년 85세)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본관 장흥 위씨
항헌(巷軒)
직업 금융인
학력 광주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 58 / 학사)
약력 이노츠 대표이사 회장
조흥은행 이사회 의장
조흥은행 상임회장
조흥은행 은행장
장흥 위씨 대종회 미래발전협의회 회장
가족 아버지 위일환(1910~1977)
배우자 하순자(1943~ )
아들 위영오(1970~ )

1. 개요2. 생애3. 논란4. 저서5. 외부 링크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금융인.

2. 생애

1939년 전라도 장흥에서 9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나 광주고등학교,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64년 대학 졸업 직후 조흥은행에 입행했고 1982년 싱가포르 지점장, 1984년 영업3부장, 1987년 샌프란시스코 지점장, 1992년 이사, 1994년 상무이사, 1998년 전무이사를 거쳐 은행장으로 취임했다. 1998년 8월 취임했지만 은행 부실에 대한 책임을 명분으로 11월 말에 갑자기 사퇴하고 상임고문으로 물러났다가 1999년 4월 재취임했다.[1]

1990년대 대우그룹쌍용자동차 인수를 주도적으로 성사시켰고, 1997년 외환 위기로 조흥은행이 부실 위기를 맞는 것을 지켜봤다. 외환위기의 여파로 일어난 1999년 2차 금융구조조정 때 금융당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흥은행이 추가공적자금을 받지 않고 타 은행과의 합병을 통해 회생하도록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2000년 11월 23일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은탑산업훈장을 수여받았다.

2001년 9.11 테러를 직접 경험하였다. 당시 그는 뉴욕 세계무역센터 빌딩으로 향하는 차에 타고 있었으나 세계무역센터 빌딩에서 9시에 만나기로 했던 당초 일정이 상대편의 사정으로 30분 연기되어 목숨을 건졌다.

2001년 은행장에서 물러난 후 2002년 3월부터 이사회 회장을 역임했고, 2003년 8월 조흥은행이 신한금융지주에 합병된 후 한국CFO협회 회장을 맡았다. 2005년부터는 프라임그룹 산하 이노츠 회장을 지냈다.

2024년 8월 30일 사망했다. 향년 85세.

3. 논란

은행장 재직 중 기업으로부터 금품을 수수한 혐의로 퇴임 후 구속기소된 흑역사가 있다.

1999년 8월, 당시 부도 상태였던 진흥기업의 부실채권 2,154억 원을 한국자산관리공사에 311억 원에 매각한 뒤 2000년 3월 진흥기업이 이를 384억 원에 재매입하는 과정에서 편의를 봐주고 진흥기업의 100억 원 대출 연장을 도와주는 대가로 진흥기업 회장으로부터 3,000만 원을 수수했다. 검찰 관계자는 “결과적으로 진흥기업은 2,154억 원의 부실채권을 384억 원만 들여 말끔히 처리하고 부실기업에서 정상기업으로 되살아났다”며 “그 차액인 1,770억 원만큼 공적자금이 투입된 셈”이라고 설명했다.[2] #

2004년 1월 7일, 검찰이 청구한 영장이 발부되어 구속되었고[3] 같은 해 3월 11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는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4년, 추징금 3,000만 원을 선고했다.

4. 저서

5. 외부 링크



[1] 훗날 본인이 밝힌 바에 따르면 금융감독위원회의 강요로 사퇴했다고 한다. 이유는 바로 조흥은행을 충북은행 및 강원은행과 합병하기 위해서. 호남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취임 당시부터 매우 주목받는 실세 은행장이었는데, 이에 충북은행, 강원은행 측에서 "정부가 호남 출신 은행장 키우려고 지방은행을 죽이려 한다"고 반발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후 충북/강원은행과의 합병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고 심지어 흑자로까지 전환시킨 걸 감안할 때 지역감정으로 곤욕을 치르기는 했지만 처음부터 조흥은행장에 적임이었던 셈. #[2] 이때 박수범 전 한국자산관리공사 특별채권팀장도 1,000만 원을 수수한 혐의로 같이 구속기소됐다. 당초 자산관리공사는 진흥기업 부실채권의 재매각 가격을 최소 411억 원으로 책정했으나 그의 주도로 가격이 인하된 것으로 드러났다.[3] 검찰이 공적자금 비리수사와 관련해 전직 은행장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한 최초의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