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22:35:45

유병하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 유병하[1]병하로 등재되어 있다.]}}}
柳秉夏
파일:유병하.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98년[2] 1월 19일
경상북도 안동군 풍남면 하회동
(현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하회마을)[3]
사망 1987년 6월 25일[4] (향년 89세)
경상북도 안동군
본관 풍산 류씨[5]
이중(彛仲)
소정(素庭)
가족 배우자 경주 손씨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77호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 생애

1898년 1월 19일 경상북도 안동군 풍남면(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하회마을에서 아버지 유시성(柳時星, 1875.2.18 ~ 1966.1.27)[6]과 어머니 신 안동 김씨(1871 ~ 1914.3.26)[7] 사이에서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류성룡의 형 류운룡의 14대손이며, 이후 경기도 경성부 소격동[8] 61번지에 거주하였다.[9]

1922년 의열단에 입단하여 동지 김시현, 김지섭, 권정필 등과 함께 일제 기관의 파괴 및 고관의 처단 등 대대적인 독립투쟁을 일의키기로 결의하였다.

1923년 김시현이 상해에서 의열단이 제조한 폭탄 30개를 중화민국 즈리성 톈진시[10]로 운반하고 독립운동가를 조사·체포하기 위하여 톈진에 특파된 경기도경찰부의 조선인 경부 황옥을 설득하여 동지적 결합을 맺고 폭탄과 전단 수천장을 국내에 반입하여 총독부를 비롯한 일제의 중요기관을 폭파하려고 하였다.

1923년 2월에는 의병투쟁에 필요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김시현에게서 무기를 제공받아 권정필·남정각·유시태 등과 함께 경기도 경성부 내자동[11]에 살던 부호 이인희(李麟熙)의 집에서 찾아갔다. 이후 5,000엔을 요구하며 3차례에 걸쳐 독립자금 출연을 강요하였으나, 같은 해 3월 3일 잠복 중이던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3년 6월 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다이쇼 8년(1919) 제령(制令) 제7호 위반, 폭발물 취체벌칙 위반, 총포화약류 취체령 위반, 강도 혐의로 경성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었고[12], 1923년 8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다이쇼 8년 제령 제7호 위반 및 강도 혐의로 징역 6년형을 선고받아[13] 옥고를 치렀다.

8.15 광복 후 196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을 수상하였고, 이어 1977년 건국포장을 수훈하였다. 1987년 6월 25일 경상북도 안동군에서 사망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유해는 본래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광덕리 상봉정(翔鳳亭) 동쪽에 있었으나, 2015년 6월 16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에 이장되었다.

[1] 대전현충원묘적부에는[2] 풍산유씨세보 권2 133쪽에는 1897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3] 인근의 광덕리와 함께 풍산 류씨 집성촌이다.[4] 음력 5월 29일[5] 겸암(謙菴)-찰방공파(察訪公派) 27세 하(夏) 신(信) 문(文) 항렬.[6] 자는 응두(應斗).[7] 김혁한(金爀漢)의 딸이다.[8]서울특별시 종로구 소격동[9] 1923년 6월 12일 경성지방법원 판결문[10]중화인민공화국 허베이성 톈진시[11]서울특별시 종로구 내자동[12] 1923년 6월 12일 경성지방법원 판결문[13] 1923년 8월 21일 경성지방법원 판결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