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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3-23 05:23:16

유우국

<colbgcolor=#0047a0><colcolor=#fff> 이명 유시완(柳時完)[1], 유훈(柳薰)[2]
유진(柳盡), 유덕(柳德)[3], 유청우(柳靑佑)[4]
사용(士用)
청우(靑宇)
출생 1895년 5월 23일
안동부 상주군 중동면 우물리
(현 경상북도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 1102번지)[5][6]
사망 1928년 9월 24일[7] (향년 33세)
경기도 경성부 인사동 인흥여관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본관 풍산 류씨(豊山 柳氏)[8]
상훈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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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2. 생애

1895년 5월 23일 안동부 상주군 중동면 우물리(현 경상북도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 1102번지) 수암종택(修巖宗宅)에서 아버지 이강(二江) 유만식(柳萬植, 1860.2.9. ~ 1926.2.11.)[9]과 어머니 진성 이씨(1858.7.1. ~ 1937.12.10)[10] 사이에서 1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11] 서애(西厓) 우천파(愚川派) 11대 종손이자, 조선 고종좌의정을 지낸 낙파(洛坡) 유후조(柳厚祚, 1798.12.15. ~ 1876.1.10.)의 장현손이다.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6월 중화민국 펑톈성 둥볜다오(東邊道) 류허현 제3구(第三區) 구산쯔가(孤山子街) 부근의 허둥(河東) 다두쯔(大肚子)[12]에 있던 신흥무관학교에서 파견된 최재화(崔載華)·배승환(裵昇煥)으로부터 신흥무관학교에 학생으로 입학할 것을 권유받았다. 이에 같은 해 7월 조성돈, 조태연과 함께 권유에 응하여 중화민국으로 건너갔고, 펑톈성 안둥현[13]에 이르렀다. 이때 조성돈과 조태연은 병 기운이 있어 귀국하였고, 홀로 안둥현에 머물렀다. 이후 상하이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행선지를 바꿔 망명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때문에 1920년 9월 24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이른바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사기 혐의로 송치 및 기소되기도 하였으나 1920년 10월 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에 대해 기소중지불기소처분을 내렸다.[14]

1923년 상하이시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 국민당 대표의 자격으로 참가했으며, 이후 의열단에 입단하였다. 1924년 4월 남형우, 한흥교, 서동일(徐東日) 등 과거 국민당의 일부 당원들과 함께 철권단(鐵拳團)의 조직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비밀결사 다물단을 조직하였다. 1925년 7월 北京北城皮口胡同十八號에 거주하고 있었다.

1926년 6월 중화민국 베이징시에서 '선두자사(先頭者社)' 명의로 "중국 국민의 구국구족운동에 당(當)하여 아(我) 2천만 형제자매에 고함"이라는 제목과 함께 "중화민국과 한국이 연합하여 일본을 총공격하자", "국내외의 각종 사회단체 및 조선 독립운동단체와 연합하여 활동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주고 중화민국의 국민운동에 대해 정신적, 물질적으로 응원하는 활동을 시행하자"는 내용의 격문을 발표하였다. 또한 『선도자(先導者)』라는 잡지를 발행하였다.

1927년 4월 비밀리에 국내로 입국해 고향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했다. 1928년 9월 10일 상경하여 경기도 경성부 인사동[15] 인흥여관(仁興旅館)에서 묵었다. 그러던 1928년 9월 23일 밤 11시까지도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잠에 들었다. 그러던 중 이튿날인 9월 24일 아침 7시에 숙소를 찾아온 족제(族弟) 유덕우(柳德佑)에 의해 숨진 채 발견되었다. 이후 경성부 종로경찰서의 이(李) 형사부장이 현장에 출동하여 검시하였고, 경기도 경성부 낙원동 인제병원 주영선(朱榮善) 의사와 영제(永濟)의원 김두영(金斗榮) 의사의 진단 결과 당일 새벽에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으로 결론이 났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3. 여담


[1] 우연의 일치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장남의 이름이 마침 유시완(柳時浣, 1915.4.17. ~ 1994.4.9.)이다.[2] 일본 외무성 기록 1924년 6월 17일 機密 第161號; 機密受第169號[3] 1925년 7월 14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 秘高警第2394號; 地檢秘第377號[4] 1928년 9월 25일 동아일보 기사[5] 출처: 1925년 7월 14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 秘高警第2394號; 地檢秘第377號. 이 지번에 풍산 류씨(豊山 柳氏) 우천파(愚川派) 종택인 수암종택(修巖宗宅)이 있다.[6] 1928년 9월 25일 동아일보 기사에는 우물리 100번지가 본적이라고 언급되었다.[7] 음력 8월 11일. 출처: 1928년 9월 25일 중외일보 기사, 1928년 9월 25일 동아일보 기사[8] 서애(西厓) 우천파(愚川派)-주목(疇睦)파 25세 우(佑) 항렬.[9] 자는 건일(健一).[10] 이황의 후손으로, 이만인(李晩寅)의 딸이다.[11] 어머니 진성 이씨는 아버지의 첫째 부인이다. 아버지의 둘째 부인 해주 오씨(1879 ~ 1949.2.15.) 슬하에 또한 1남 2녀가 있었다.[12]중국 지린성 퉁화시 류허현 구산쯔진(孤山子鎭) 다두쯔촌(大肚子村).[13]중국 랴오닝성 단둥시[14] 1920년 10월 9일 대구지방법원 형사사건부 #1, 1920년 10월 9일 대구지방법원 형사사건부 #2[15]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16] 유우국의 증조부 계당(溪堂) 유주목(柳疇睦, 1813.8.18. ~ 1872.4.22.)의 4촌 동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