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04 01:15:51

육성회비

학교 등록금의 구성
<colcolor=skyblue> 기본 수업료 | 졸업유예금[폐지]
시설이용 급식비 | 기숙사비 | 교과서비 | 보건의료비
특별부담 졸업준비금 | 입학금[대학원] | 기성회비[폐지] | 학교운영지원비(육성회비)[폐지]
학생회비(학보구독료|교내방송수신료) | 동문회비

1. 개요2. 명칭3. 역사4. 비판

1. 개요

육성회비(育成會費)란 자녀 교육을 위한 학부모의 자진협찬 형식으로 마련하는 회비로 육성회한테 내는 비용이었다.

2. 명칭

원래 용어는 '사친회비(師親會費)'였지만 대다수 학교들의 재정이 지나치게 사친회비, 기성회비에 의존하는 비율이 높아 강압이 지나쳤고 후술하듯 많은 비판을 받아 사친회비라는 용어와 제도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강하게 일자 1970년에 육성회비로 명칭을 바꿨다. 그러나 육성회비로 명칭이 바뀌어도 실제로 행태가 바뀐 것은 없었다.

기성회비와 수업료를 합쳐서 월사금이라고도 불렀다. 2000년대 들어 학교운영지원비로 용어를 바꿨다.

3. 역사

사친회비는 1952년에 처음 도입되었는데 국민학교의무교육화와 중고등학교 진학률 증가로 인해 학교 다니는 인원은 넘치는데[1] 반해, 전쟁 비용과 전후 복구 문제로 국가의 지원이 적어서 학교운영 자금이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1950년대와 60년대 초반까지 사친회비가 학교 운영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에 달했을 정도로 학교재정 운영에 있어서 핵심적인 부분이었다.

서울은 1970~1974년 육성회비가 450원이었는데 1975~1976년 600원으로 인상되었다가 1977년부터 450원으로 인하되었다. 농어촌 및 읍 이하 지역은 1978년까지 150원이었고 1978년에 폐지되었다. 당시에는 가정 형편별로 차등이 있었는데 150원, 300원, 450원, 600원순으로 나누어져있었다. 부유한 집에서는 여기에 더해서 여러 가지재들까지 납입하고 교사들 상대로 촌지도 두둑하게 주어서 학교임원과 교사도 굽신거릴 정도로 떵떵 거렸지만, 150원조차 못 내는 가난한 집안에서는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1979년을 기점으로 도 지역에서 육성회비는 폐지되었다.

이후 국민학교 육성회비는 대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징수되었다. 급여와 물가상승률이 육성회비 상승액을 훨씬 초과함에 따라 점차적으로 빈민층 가정에서도 부담 없이 낼 수 있는 푼돈으로 변하기는 했지만 1996년까지도 6대 도시 초등학교 학생들은 월 1,000원(대전)에서 2,000원(인천)까지 육성회비를 냈다. 1997년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명칭이 바뀌고 전국의 모든 초등학교에서 육성회비가 완전히 폐지되었다.[2] 그러나 중학교와 고등학교 육성회비는 학교운영지원비라는 이름으로 훨씬 뒤까지 남았으며 중학교 육성회비는 2012년, 고등학교 육성회비는 2021년에 폐지되었다.

4. 비판

육성회비는 반드시 내야 하는 돈이 아니라 자진해서 내는 일종의 기부금이었으나, 말이 좋아 자진이지 사실상 강제였다. 만일 못 냈다면 선생님이 불러 독촉했으며 심하면 샌드백 취급을 했다. 이는 뇌물죄에 해당하는 불법적인 수금이다. 아무리 학생들 대상으로 한 체벌이 일상적인 시대라지만 돈을 안 냈다고 때리는 것은 사채업자나 할 짓인데 가정형편이 어려운 게 뻔히 보이는 애들 상대로 선생님이 그런다는 것은 인륜에 어긋난다는 것이 기본적인 인식이었다.

당시에는 국민학교에서 수업료, 기성회비, 육성회비를 내지 않는 학생들을 학교에서 독촉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담임 교사가 미납자를 호출하여 회초리체벌하거나 동네방네 소문을 내는 갈굼을 주기도 하였다.

당시에는 한 반에 적어도 50~60명은 되었던 데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가정도 적지 않아서 육성회비를 제때 못 내는 가정도 많았다. 1970년대 초반 기준으로 보면 당대의 청소부나 여공 같은 저임금직 노동자가 버는 돈은 월 1만원 안팍인 수준이었다. 거기에다가 자녀 수는 5명을 넘기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국민학교로 보내는 자녀가 3명이 되어도 육성회비가 450원이 나갔고 중학교, 고등학교 육성회비는 더 비싸 육성회비는 당시 가정에 상당한 부담이 되는 금액이었다. 국민학생들의 참고서이던 전과 1권당 125원(1970)~450원(1978)이었다.

하지만 학교 임원진들이 학부모들의 사정을 빤히 알면서도 운영기금을 어떻게든 충당해야 한다는 이유를 내세우면서[3] 교사에게 학부모들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육성회비를 징수하라고 압박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교사가 아무리 양심적이라고 해도 학교 임원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교사에 따라서는 오늘까지 회비를 내지 않은 학생들은 내일까지는 꼭 가져오라고 마지막 기회를 주기도 했다. 당연히 이 약속마저 안 지키면 전술한 것처럼 결국 체벌을 당하게 된다.

가난한 집 아이들과 청소년들은 육성회비를 못 낸다는 이유로 체벌을 받아야 하다 보니 마음의 상처를 입는 경우가 많아 육성회비를 걷는 날에 일부러 결석하는 경우도 있었고 꼭 내야 한다 싶으면 장작이나 연탄 같은 현물로 내기도 했다. 1990년대 이전에는 육성회비 문제 때문에 자퇴퇴학, 전학가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특히 유명인사들 중에 학창시절 월사금 내지 사친회비 문제로 시달린 사례도 있는데 천재교육 창업주 최용준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집안이 가난한 탓에 월사금을 못 내 퇴학당했다가 1년 후 복학했으며 # 문재인 전 대통령이 2011년에 쓴 자서전 <운명>에서도 월사금과 만화방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 그래서 이 당시에는 가난한 집 청소년들은 산업체 부설학교로 진학가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산업체 부설학교로 가면 몸은 피곤해도, 적어도 월사급 못 낸다고 체벌받거나 실랑이를 벌이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었다.[4]

육성회비를 걷고도 엉뚱한 데 쓰는 경우도 잦았다. 사친회비를 육성회비로 바꿨을 때 초기에는 농어촌 근무 교사에게 돈을 별로 안 써서 교사들의 근무 의욕이 저하되는 일이 발생했다고 하며 도 지역에서 육성회비가 폐지된 후 대도시의 많은 학교 임원진들이나 고위급 교사들이 육성회비를 가지고 회식비나 자기네 용돈으로 쓰는 경우가 잦아 당대에도 사회 문제로 많이 지적받았다.

하근찬의 흰종이 수염검정 고무신의 '보릿고개 시련기' 편에서 사친회비 납부와 관련한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 교육부도 이 문제는 부끄러웠는지 국어 교과서가 국정 교과서였을 때는 중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흰종이 수염에서 동길이 선생님한테 책보를 뺏기는 장면은 생략되었다. 물론 국어도 검정 교과서를 채택하는 현재 교육과정에서는 출판사에 따라 교과서에서 문제의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1] 이 당시에는 오전반, 오후반뿐만 아니라 저녁반 수업까지도 진행했었고, 중고등학교도 야간반을 따로 두어서, 야간수업을 하기도 했었고, 나중에 이를 모티브 삼아서 아침과 낮 시간대에는 일하고 오후~밤 시간대에 수업을 병행하는 산업체 부설학교를 만들기도 했다.[2] 서울 등 6대도시 초등학교 육성회비 폐지[3] 물론 그만큼 국가의 지원이 부실하던 시기였기는 했다.[4] 물론 산업체 부설학교도 수준미달 교사들은 많이 존재했다. 단지 돈 문제로 실랑이를 벌이거나 얼굴 붉힐 일이 적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