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파평 윤씨 |
출생 | 1917년 1월 30일 |
평안남도 중화군 해압면 죽산리 210번지 (現 평양시 강남군 이산리) | |
사망 | 1970년 3월 17일 (향년 54세) |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2가 가톨릭대학교 명동성모병원 | |
상훈 | 대통령표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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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언론인, 기업인. 1963년 한국광복군 정보원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에 서훈되었다.2. 생애
1917년 1월 30일 평안남도 중화군 해압면 죽산리 210번지(現 평양시 강남군 이산리)에서 태어났다.평양 숭인상업학교 재학 중이던 1934년 10월 경성제국대학학우회 탁구부 주최 제7회 전조선학생탁구대회에 개인전 선수로 참여해 제6회전에서 탈락했고, 그해 11월 3일 관서체육회 주최 제3회 전조선남녀탁구대회에서 준결승전에서 탈락했다. 1935년 2월 조선탁구협회에서 발표한 1934년 중등남자부 탁구 랭킹 15위에 올랐고, 그해 3월 숭인상업학교 탁구부 주장이 되었다.
이후 숭인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936년 4월 일본탁구협회 주최 제5회 전일본도시대항탁구대회에 서조선(평양부) 대표 선수로 선발되었고, 그해 8월 조선탁구협회 주최 제3회 전조선탁구선수권대회 남자부에 출전했다가 준준결승에서 탈락했다.
이듬해인 1937년 메이지대학에 입학했다. 그해 4월 11일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주최 제10회 전조선탁구선수권대회 연식부에 출전해 결승전에서 패배, 준우승을 차지했고, 경식부에서는 준준결승에서 탈락했다. 1938년에는 8월 조선탁구협회 주최 제5회 전조선탁구선수권대회 남자부에 출전해 준준결승에서 탈락했다.
메이지대학 졸업 후 귀국해 1939년 5월 조선탁구협회 주최 제8회 전일본도시대항탁구대회 조선최종예선회에 평양부 대표로 출전했고, 8월 17일 평양체육협회 주최 제1회 국제식서조선탁구대회에서 단식부와 복식부에 출전해 단식부에서는 준우승, 복식부에서는 제4회전에서 탈락했다. 1940년 5월 21일 제9회 전국도시대항탁구대회 조선예선대회에 평양부 대표로 출전했다.
1940년대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1944년 11월 왕징웨이 정권 치하 청도시(靑島市)에서 갓 한광반을 수료하고 청도시에 파견되어 있던 윤영무(尹永茂)를 만났고, 현지에서 포섭되어 그로부터 지하공작원 증서를 받고 한국광복군 현지거점 공작원으로 상하이시 등지에서 활동했다. 광복군 김문택 수기나 장경순 전 국회부의장의 회고록에 따르면 일제 점령 하의 상하이에서 초모 활동의 어려움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8.15 광복 후 동생인 임시정부 경위대장 윤경빈과 함께 상하이에서 백범 김구를 수행하였다.
해방 후에는 연합통신·동양통신 상무이사를 역임하였고, 1953년에는 태양신문(太陽新聞) 부사장을 역임하는 등 언론인으로 활동하였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에 서훈되었고, 대한잠사협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1965년 7월 15일 한중문화협회 제2차이사회의(재건총회)에서 부회장에 선출되었고[1], 1966년 1월 10일 대한실업탁구연맹 정기대의원총회에서 부회장에 임명되었으나, 2월 12일 대한탁구협회 임시대의원총회에서 부회장직을 사임했다. 1968년 2월 대한실업탁구연맹 회장에 선출되었고, 이후 농어촌개발공사 고문을 역임했다.
1970년 3월 17일 오전 6시 30분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2가 가톨릭대학교 명동성모병원에서 뇌일혈로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