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18년
1. 개요
후삼국시대의 인물.2. 생애
소판(蘇判) 종간(宗偘)과 내군장군(內軍將軍) 은부(犾鈇)가 처형되었다. 종간과 은부는 모두 간사한 말과 아첨으로 궁예(弓裔)의 총애를 받아 선량한 이들을 참소하여 해쳤다. 왕이 즉위하자 먼저 이들을 목 베었다.
- 고려사절요 권1 (태조신성대왕 태조1년 6월 미상일 기사) 국사편찬위원회 - 고려시대 사료
고려사절요에서는 은부로 기록되어 있고 고려사에서는 적부(狄鈇), 적철(狄鐵) 등으로 되어 있다.[1] 드라마 태조 왕건 방영 당시에 성을 은씨라고 여긴 사람이 많았는데[2] 한국의 은씨는 대다수가 殷을 쓰고, 소수가 恩[3]을 쓰므로 현재의 은씨와는 관련이 없음을 은씨 문중에서 밝힌 바 있다.[4][5] 나말여초 시기는 성씨가 보편적이지 않았다. 신라 왕족과 중앙의 귀족들이나 사용했고 지방 호족들에게는 드물었다. 왕건조차 조부(작제건), 부친(용건)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왕씨가 아니었다.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성씨를 하사받거나 왕건처럼 그냥 자기 이름 앞글자를 성으로 삼는 경우가 많아서 같은 아버지를 둔 자식의 성이 다르다든가, 한 조상 아래 2개의 성씨가 갈라져 내려왔다든가 하는 일이 흔하다.[6] 그래서 은부의 이름이 부고 성은 은씨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고려사절요 권1 (태조신성대왕 태조1년 6월 미상일 기사) 국사편찬위원회 - 고려시대 사료
태봉(泰封)의 내군장군(친위대)으로 왕건(王建)의 역성혁명 당시에 소판 종간(宗侃)과 함께 처음에 사로잡혀 처형당했다. 고려사에는 '은부는 어릴 때 머리를 깎이고 목에 칼을 씌우는 형벌을 받았던 죄인이었고 남의 집 하인으로 간사한 말로 아첨을 잘 함으로써 궁예에게 총애를 받았으며 참소하기를 좋아하여 선량한 사람들을 모해한 것이 많기 때문에 종간과 함께 처형되었다.'라는 기록만이 남아 있다. 학자들은 궁예의 심복으로써 궁예의 전제 왕권 강화를 도왔기 때문에 정변 직후 처형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3. 대중매체에서
3.1. 드라마 태조 왕건
자세한 내용은 은부(태조 왕건) 문서 참고하십시오.
[1] 얼핏 보면 犾(은)과 狄(적)이, 鈇(부)와 鉄(철, 鐵의 속자)이 비슷하게 보인다. 따라서 제대로 된 표기와 실수로 잘못 옮겨 적은 표기가 공존하게 되어서 현재는 어느 쪽이 맞는지 알 수 없게 된 셈. 기록이 부실한 고유 명사의 표기는 이렇게 여러 가지 표기가 전해져서 후대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는 경우가 있다. 아무래도 고려사가 고려사절요의 원본이니 오기를 해도 고려사절요의 기록이 잘못된 기록으로 보인다.[2] 작중에 "은 장군"으로 불리기도 한다.[3] 이 은(恩)씨는 본관을 고부로 삼는데, 조선 시대에 무과급제자를 배출하기도 했다. 1930년 인구조사에서 평안도에서 고부 은씨 1가구가 조사되었는데, 광복 이후 국세조사에서 은(恩)씨가 조사되고 있지 않다. 이를 보아 분단 전후에 고부 은씨가 멸성되었거나 분단 후 일가족이 모두 북한에 있기에 분단 후 국세조사에서 조사가 안 되는 것일 수 있다.[4] 은씨 문중의 항의 때문인지 나중에는 태조 왕건에서 은부가 나올 때마다 인물소개 자막에 한자가 꼬박꼬박 병기되었다. 그마저도 완성형에 등록이 되어있지 않아서 來犬 金夫 4글자를 장평 50%로 줄여놓은 형태였다.[5] 만약 은부가 왕건과 견훤처럼 앞글자를 따서 성씨로 사용했다면, 적(狄)씨를 사용했을 것이다. 실제 성씨로 쓰는건 적(狄)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실명이 적철일 가능성이 상당히 많다. 대표적인 사람이 적인걸, 적청, 적룡. 태조 왕건 제작진에서 기록량이 많은 고려사보다 고려사절요가 축약본이라 보기 편하다 보니 참고한 듯 하다.[6] 고려 때는 외가 성을 쓰는 것도 가능했는데 이런 고려 시대의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고 조선 시대의 성씨 관념으로 바라보면 문중끼리 싸움난다. 대표적으로 문화 류씨와 연안 차씨간의 류차 논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