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3-03-24 18:04:24

이달영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송재(松齋)
본관 광주 이씨 (廣州 李氏)[1]
출생 1911년 10월 15일
경상북도 칠곡군 파미면 상매동
(현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매원리 상매마을)[2]
사망 1950년 8월 15일[3]
상훈 건국포장

1. 개요2. 생애3. 여담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009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이달영은 1911년 10월 15일 경상북도 칠곡군 파미면 상매동(현 왜관읍 매원리 상매마을)에서 아버지 이상만(李相萬)과 어머니 부림 홍씨(缶林 洪氏)[4] 사이의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왜관면 왜관리로 이주하였다. 일찍이 왜관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구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대구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이던 1929년 11월 광주학생항일운동에 호응하여 일제에 항거하였다. 1931년에는 일본인 교사 배척 투쟁의 일환으로 동맹휴학을 주도하다가 일제 경찰에 연행되어 심한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듬해인 1932년 2월 왜관면에서 정칠성 등과 함께 조선의 독립과 새로운 사회 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 결사인 적색농민조합 건설준비협의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37년 12월 일본에서 이영석(李甯錫)이 귀국하자 이두석·박형동 등과 함께 인민전선운동(人民戰線運動) 전술에 기초하여 독서회 및 노동 야햑회, 농촌 진흥 조합·농촌 적색 농업 조합 등을 조직하여 농촌 계몽운동과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로 인해 1938년 2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김천형무소에서 1년 9개월 구금되었다가 1939년 11월 4일 기소유예불기소처분선고받고 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는 일제의 감시를 받으며 인쇄소를 경영하였으며#, 8.15 광복 후에는 민선 초대 석적면장을 역임하였다.

그후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국민보도연맹에 관계되어 연행되었고, 8월 15일 총살당했다.

2009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3. 여담


[1] 좌통례공파(左通禮公派, 칠곡파)-첨정공파 20세 영(榮) 환(煥) 항렬.[2] 인근의 석전리와 함께 광주 이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이수목·이두석 부자 및 이석·이수각도 이 마을 출신이다.[3] 9월 9일에 별세했다는 기록도 있다.#[4] 홍건흠(洪健欽)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