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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13 11:40:13

의령군(1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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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조의 손자
의령군 | 義寧君
출생 1385년 3월 26일[1]
사망 1423년 8월 25일[2] (향년 38세)
묘소 경기도 여주시 (실전)
재위기간 조선 의령정
1398년 ~ 1399년
조선 의령후
1399년 ~ 1400년
조선 의령군
1400년 2월 8일 ~ 1423년 8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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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맹종(孟宗)[3]
부모 부친 회안대군
모친 삼한국대부인 여흥 민씨
형제자매 부친 기준 4남 2녀 중 장남
모친 기준 1남 중 장남
배우자 정부인 개성 왕씨()
계부인 청주 한씨()
자녀
2남 2녀 [ 펼치기 · 접기 ]
장남 - 영평정 이온(永平正 李溫) 1404 ~ ?
장녀 - 미상
차남 - 미상
차녀 - 미상
아호 망우당(忘牛堂)
봉호 원윤(元尹)[4]
→ 의령후(義寧侯)[5]
의령군(義寧君)[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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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4. 대중매체에서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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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말기 사람이자 조선 초기의 왕족. 이성계의 4남 회안대군 이방간과 삼한국대부인 여흥 민씨의 아들이었다. 제1차 왕자의 난 당시 회안대군 측의 모주, 책사였다는 설도 있다.[7]

2. 생애

1385년이방간과 판서(判書) 증 문하찬성사 민선(閔璿)의 딸 여흥 민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선 건국 후 아버지가 회안군에 봉군되면서 그도 1394년 원윤(元尹)에 봉해지고, 1398년 의령정으로 개칭되었다가 1399년 의령후(義寧侯)로 봉군되고, 1400년 의령군으로 봉군되었다. 고려 공양왕의 친족인 왕씨와 결혼했지만 사별하였다. 이후 주부 한기(韓琦)의 딸과 재혼하였다.

1400년제2차 왕자의 난 때 아버지 회안대군을 도와 군사를 일으켜 정안대군과 충돌하였으나 패하고, 한양 서동(西洞)으로 퇴각하다가 아버지 회안대군과 함께 체포되었다. 아버지 회안대군과 함께 황해도 토산현에 안치되었다.그러나 태종 즉위 이후 회안대군 부자를 사형에 처하라는 여론이 있었으나 태종이 듣지 않았다. 1416년 태종은 형인 회안대군의 작위와 공신녹권, 직첩과 의령군의 직첩을 모두 회수하였다. 1418년 6월 22일에는 그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태종은 전의감 부정(典醫監副正) 이헌(李軒)과 내약을 홍주로 내려보내 그를 진료하게 하였다.

1421년 아버지 회안대군이 충청도 홍주목에서 사망하자 그는 태종의 명으로 홍주로 배소를 옮기게 되었다. 또한 그때까지 소유하고 있던 그의 집안 노비들은 그의 누이들에게 분배되었다. 그러나 태종이 죽고 1423년 7월 7일부터 의정부와 육조에서 그를 사형시키라고 상소하였고, 세종대왕은 그에게 자살을 명하였다. 7월 11일 자살하였다. 그의 후손은 단절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세종 때에는 이미 수 명의 아들들이 생존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시신은 외가가 있는 여주군에 안치되었으나 묘는 후에 실전되었다.

3. 가족 관계

4.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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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 〈용의 눈물〉의 의령군
파일:이맹종(태종 이방원).jpg}}} ||
<colbgcolor=#94153E> 〈태종 이방원〉의 의령군

5. 관련 문서


[1] 음력 1385년 2월 15일[2] 음력 1423년 7월 11일[3] 맹중은 오기인 듯하다.기사[4] 조선왕조실록 태조 1년 1년 8월 7일 병진 2번째기사[5] 조선왕조실록 태조 7년 9월 1일 계유 5번째기사[6] 조선왕조실록 태종 1년 1월 25일 을유 4번째기사[7] "정인지·한확 등이 백관을 거느리고 이용과 이우직을 법으로 처치하기를 청하다", 단종실록 8권, 1453년 단종 1년 10월 17일 경자 6번째기사[8] 판서(判書) 황형(黃亨)의 딸[9] 세종실록 세종 21권, 5년(1423 계묘 / 명 영락(永樂) 21년) 7월 25일(계묘) 5번째기사, 이방간의 딸과 맹종의 자식에게 한전을 주게 하다[10] 난을 일으키기 하루 전에 부자가 둘이서 대면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 자리에서 의령군은 정안군이 나라의 적이니 정을 두면 안 된다는 식으로 말하는 반면 회안군은 아무리 그래도 내 동생이라며 살짝 고뇌하는 모습을 보인다. 반면에 정안군은 의령군을 기특하게 여기는 듯한 묘사가 몇 번 나오는데, 활을 잘 쏜다는 것을 대견해하는가 하면 "아직 미혼이었지? 내가 중매라도 서 줄까?ㅎㅎ" 하는 식의 대사를 하기도 한다. 본작의 정안군이 동복형제들을 많이 아끼는 성격으로 나오는데다,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기 위한 사전 작업이기는 했지만 회안군이 의도적으로 정안군에게 친한 척을 했기에 조카라는 이유로 총애했던 듯.[11] 극 최후반부에 회안군과 함께 나오는 모습이 한 번 더 있긴 한데, 잠깐 지나가며 보여주는 식일 뿐 극의 흐름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