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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58:43

이벨린 가문

파일:Ibelin_coat_of_ Arm.png
이블랭 가문의 문장

1. 개요2. 기원3. 성장4. 역대 이벨린 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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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Maison d'Ibelin

중세에 보기드문 입지전적인 가문이다. 겨우 2대 만에 영지도 없던 가난뱅이 기사에서 킹메이커 가문으로 발전하니 철저한 혈통 중시 사회이던 중세에서 참으로 보기 드문 가문이었다.

이블랭 가는 예루살렘 왕국키프로스 왕국의 가장 중요한 귀족 가문이 되지만 그 시작은 한미하기가 그지 없었다. 이블랭 가에서는 프랑스 샤르트르 지방의 르 퓌세 자작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후대에 날조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오히려 이블랭 가의 초대 영주라 할 수 있는 바리장은 이탈리아 반도 북부 토스카나에서 온 이름이었으니 사실은 이탈리아 출신 가문일 가능성도 있다. 학자에 따라서는 위그 뒤 퓌세의 형제였을지도 모른다는 말도 있지만 1115년 이전 기록은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

또한 초기 십자군 고위 귀족의 숨겨졌지만 암묵적으로 인정받은 사생아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예루살렘 왕국 건국과 바리장의 출생시점이 동일하며 그게 또 맞는게 일개 기사의 아들들인 보두앵이 시빌라의 약혼자 물망에 오르내리고, 발리앙이 동로마 제국 황녀와 결혼하는 것도 말도 안되는 판타지다. 이토록 급속도로 성장하는데에는 누구나 알지만 누구도 말하지 못하는 암묵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사실 그 당시 귀족들이 성지에 자리를 잡으면서 본국의 아내를 버리고 이혼은 불가능하니 다른 여자와 그냥 중혼해버리는 경우도 허다해서 종교적 도덕적 문제가 크게 대두됐다. 정석대로라면 죄다 파문감인데 그러자면 태생적으로 인물난에 허덕이던 왕국의 존립이 위험했었고 그들도 초기 안티오키아 공국의 궤멸적 전멸과 풍토병 등 외부 상황의 어려움이 그러한 죄악 때문이라고 성찰하며 입법부를 만들어 간증 대회같은 나블루스 공의회를 개최하기까지 한다.

2. 기원

어찌되었든 이 1대 이블랭 가의 영주인 바리장은 1115년에 야파 지방을 점령한 위그 1세 뒤 퓌세[1]의 기사로 참전했다는 식으로 처음 역사에 드러난다. 하지만 워낙 갑툭튀라 유럽에 영지와 봉토가 없음은 확실하니 귀족의 차남 이후라 영지를 물려받지 못한 경우이거나 극단적으로는 자칭 기사...일지도 모른다.[2] 물론 자칭 기사라 하더라도 말과 무장 정도는 스스로 마련해야 하니 평범한 농민은 아니었을 것이긴 하다. 이 야파 지방을 공략하는 과정에서 나름대로 공로를 세웠던 모양인지 1122년 야파 백작령의 봉신인 람라 영주의 딸인 헬비스(Helvis)와 결혼하게 된다.

1141년에는 람라 남작령의 주군이자 야파 백작령의 영주인 위그 2세 뒤 퓌세 백작의 반란을 일으켰다. 풀크가 아내 멜리장드를 정치적으로 고립시켜 뒷방 아녀자로 전락시키자 여왕에 대한 충성심으로 군사를 일으킨것이다. 1, 2대 국왕의 플랑드르 가문, 현 왕조의 레텔 가문, 르 퓌세 가문은 서로 혈연으로 묶인 가문이었고 당시에는 고인이 되었던 야파의 초대 영주 위그 1세는 선왕 보두앵 2세와 사촌 관계로 보두앵 2세의 딸 멜리장드와 위그 1세의 아들 위그 2세는 6촌 관계로 둘 사이는 썸이상의 관계였다고 기록되었다. 당시는 거대한 스캔들이었다. 풀크는 위그 2세의 연적이었던 셈이다.[3]

그런 와중에서 바리장은 왕에게 충성심을 보인 결과 반란이 의회에서 법적으로 정리되자 예루살렘 왕국의 4대 국왕인 풀크로부터 야파 백작령 내에 있는 이벨린이라는 작은 성(城)을 하사받아 영주가 되었고, 이후 야파 백작령은 예루살렘 국왕의 직할지가 되었으므로 이벨린성과 람라령을 갖고 있던 이블랭 가문도 국왕의 봉신이 되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예루살렘 왕국의 야파 백작령의 안에 있는 이벨린이라는 작은 성이 바로 이블랭 가문의 시작이다.

이벨린 성의 위치는 오늘날 텔아비브 남동쪽 15km 정도 떨어진 Yavne(야븐)이라는 작은 도시 근처다. 아직도 잔해가 조금 남아 있는데, 탑이 겨우 네 개 있는 작은 성으로 성이라기보다는 요새에 더 가까울 정도. 킹덤 오브 헤븐에서는 좀 크고 튼튼한 저택 정도로 묘사되었다.

3. 성장

앞서 설명했듯이, 이블랭(Ibelin)의 초대 영주 바리장(Barisan)은 람라(Ramla)의 상속녀 헬비스(Helvis)와 결혼하면서, 람라를 혼수로 얻고 위그(Hugues) 보두앵(Baudouin) 발리앙(Balian) 에르망가르드(Ermengarde) 스테파니(Stéphanie), 3남 2녀를 슬하에 둔다. 시간이 흘러 장남이 이벨린을 차남이 람라를 물려받지만 장남 위그가 산티아고 순례길에 병사를 하고만다. 차남 보두앵이 이벨린을 물려받으나 자신이 다스리는 람라를 가지고 영지가 없는 막내 발리앙에게 이벨린을 건넨다. 삼남 발리앙은 훗날 비잔티움 제국의 황녀이자 아모리 1세의 미망인 마리아 콤네네와 결혼하여 멜리장드 이후로 왕비의 직할령이였던 나블루스까지 얻고, 기 드 뤼지냥이 즉위하자 왕국의 환멸을 느낀 둘째 형 보두앵이 키프로스 섬으로 넘어가며 람라를 양도하여 이벨린 람라 나블루스 그리고 브엘세바까지 얻는다.

발리앙의 후손들은 예루살렘 왕국과 키프로스 왕국에서 가장 영향력 높은 귀족들이었다. 발리앙의 장남인 장(프Jean, 영John)은, 예루살렘 왕국의 베이루트 백작령을 다스리는 동시에 키프로스 왕국의 섭정의 자리에 있었는데,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시칠리아 왕국 국왕 프리드리히 2세가 6차 십자군 당시 십자군 국가에 제국의 권속을 강요하며 키프로스를 아래에 두려 할 때, 쉽게 말하면 야당 지도자로 황제의 권위에 반발을 했었다. 1241년 이블랭 가문은 황제가 맺은 종전 협정에 의해 예루살렘을 다시 되돌려 받자 그 여파로 살라딘에게 점령 당했던 이벨린 영토를 돌려받았다.

장은 아르수프(Arsuf)의 멜리장드와 함께 베이루트의 군주인 발리앙 3세를 포함하여 키프로스 왕국의 대집사인 보두앵, 아르수프의 영주이자 예루살렘 왕국의 집정관인 요한, 그리고 키프로스 집정관 기(Guy) 등의 많은 자녀를 두었다.

발리앙 3세는 몽벨리아르(Montbéliard)의 에쉬바(Eschiva)와 결혼하여 베이루트 요한 2세를 낳았고, 요한 2세는 아테네의 공작 기 드 라 로셰(Guy I de la Roche)의 딸과 결혼했다. 아르수프의 요한은 안티오키아 공국의 플레장스(Plaisance)와 결혼 한 아르수프의 발리앙의 아버지였다. 기는 예루살렘 왕국의 위그 1세이자, 키프로스 왕국의 위그 3세의 왕비인 이사벨라의 아버지였다.

이렇듯 이블랭 가문은 라틴 제국의 위성 국가를 포함한 거의 모든 십자군 국가와 혼맥이 닿았고 특히 키프로스 왕국은 대대로 왕비 가문인 셈이다.

4. 역대 이벨린 영주


[1] 야파를 제압하고 야파 백작령의 영주가 됨.[2] 이게 농담이 아닌 게, 예루살렘 왕국의 귀족들은 귀족 가문의 차남 이하라 할지라도 유럽에서 건너와서 본가로부터 지원을 받거나 최소한 서신 연락 정도는 하고 지냈다. 그런데 이블랭가는 예루살렘 왕국과 키프로스 왕국의 가장 유력한 귀족 집안임에도 불구하고 훗날 자손들이 유럽의 귀족들과 결혼하기 전에는 유럽의 본가와 어떠한 연락이라도 주고받았다는 사료가 남아있지 않다.[3] 너무 가까운 혈연이라 이어지지 못하고 선왕 보두앵 2세의 예루살렘 왕국의 미래에 대한 정치적 수완으로 유럽의 강대한 앙주 가문의 풀크가 사위로 낙점되었다.[4] Balian이 본명이지만 저명한 아들 발리앙과 구별하기위해 대 발리앙 또는 이탈리아 태생이라 바리장으로 구분한다.[5] 바리장의 장남. 산티아고 순례중에 객사...[6] 바리장의 차남. 람라와 이벨린을 물려 받았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이벨린을 발리앙에게 건넨다.[7] 바리장의 삼남. 비잔틴 제국 황제의 사위. 십자군 전쟁 예루살렘 공성전 당시 방어 지휘관이자 살라흐 앗 딘과 협상한 인물이다.[8] 발리앙의 장남. 예루살렘 왕국과 키프로스 왕국 섭정, 이후로 베이루트 백작을 겸한다. 장으로 발음하지만 당대의 예루살렘 부왕 장 1세와 구분하기 위해 요한으로 구분한다.[9] 이후로 아르수프(Arsurf) 백작을 겸[10] 키프로스 왕국 대집사[11] 명목상 갈릴리 (Galilea)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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