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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0 21:52:29

이사벨 목테수마

1. 개요2. 생애3. 기타4. 가계

1. 개요

Isabel Moctezuma

아즈텍의 마지막 공주. 본명은 나우아틀어로 '테퀴치포치 이슈카쇼치친'(Tecuichpoch Ixcaxochitzin)이라 전해진다.

몬테수마 2세의 딸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인물이다.

2. 생애

목테수마 2세의 딸로 태어났다. 목테수마 2세가 적에게 잡혀 죽고 숙부 퀴틀라왁(Cuitlāhuac)이 즉위하자 정통성을 메꾸기 위해 결혼했는데[1] 퀴틀라왁이 천연두로 즉위 80일 만에 죽어버리자 이번에는 목테수마 2세의 사촌 형제인[2] 콰우테목(Cuauhtémoc)이 틀라토아니로 즉위했다.

콰우테목 또한 정통성을 위해 5촌 조카이자 목테수마 2세의 딸인 테퀴치포치와 결혼했지만 테노치티틀란이 함락되면서 다시 과부가 되었다. 둘 다 적통인[3] 목테수마 2세가 적에게 잡혀 죽었다는 초유의 사태로 인해 즉위한 것인지라 평소에도 이런 족내혼이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테퀴치포치는 목테수마 2세의 딸로서 아즈텍 내에서도 그 적통을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나라가 멸망하고 메시카인이 학살당하는 와중에도 무사히 살아남았고, 적통황제인 목테수마 2세의 딸이자 두 번이나 황후가 된 귀한 몸인지라 그 혈통은 틀라토아니의 적통을 이어받은 상속자로 인지되었다. 이때부터 '이사벨 목테수마'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는데 자식들의 명칭을 보면 아버지의 이름인 목테수마를 성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4] 정복자인 코르테스와의 사이에서 레오노르 코르테스 목테수마라는 딸을 낳았는데, 코르테스는 목테수마 2세의 외손녀인 레오노르 코르테스 목테수마를 적자로 인정해달라고 교황청에 요청했으며, 이에 레오노르는 클레멘스 7세의 자비로 말린체가 낳은 코르테스의 서장자 마르틴 코르테스와 함께 적자로 승인되었다. 이를 보면 이사벨의 혈통적 중요성을 외국에서는 분명히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코르테스와 헤어진 뒤 코르테스의 주선으로 알폰소 데 그라도와 결혼했지만 1528년 그라도는 사망했고, 코르테스가 다시 주선해서 페드로 가예고와 재혼했다. 코르테스는 그렇게 가깝던 말린체도 헤어진 뒤 재혼시키는 등 원주민 현지처들의 중매를 봐주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5][6] 페드로 가예고와의 사이에서 후안 가예고 안드레데 몬테수마를 낳고 1531년 페드로 가예고가 죽자 후안 카노와 재혼해 3남 2녀를 낳아 생애 동안 4남 3녀(7명)를 낳았다. 남편의 불운함과 별개로 본인은 천수를 누렸다.

3. 기타

기록에 따르면 상당한 미인이었다고 한다.[7] 생애에 다섯 차례나 결혼했고 사실혼도 한번 있었으나 대부분 정략혼 내지 주위 상황에 떠밀려 한 결혼이라, 남성편력이 화려했다거나 남자관계가 복잡했다고 하는 것은 얼토당토않은 시각이다. 오히려 전근대 사회의 여성이자 이후엔 식민지 여성이 된 케이스이니 자기 의사와 관계없이 이리저리 불운하게 떠밀려다녔다고 보는 점이 맞을 듯. 게다가 젊은 나이에 나라를 잃고 남편을 자주 잃었으니...[8]

다만 몬테수마 2세의 딸이라는 적통이 인정되어 말년까지 유복하게 살기는 했고 그녀의 후손들도 스페인 식민제국 시대와 멕시코 독립 이후에도 1934년 아벨라르도 로드리게스 대통령이 이를 폐지할 때까지 4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연금을[9] 따박따박 수령하며 호사를 누렸다. 어쨌든 테퀴치포치의 자손은 단절된 몬테수마 2세의 다른 혈통과 달리 현대에도 2,000여 명 가량의 후손이 남아있다고 하며, 일부는 스페인 귀족으로 살고 있다.[10] 틀라토아니의 혈통이 끊어지지 않고 남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나름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셈이지만 이들은 모두 스페인인으로, 멕시코와는 별 상관이 없다.

4. 가계



[1] 목테수마 2세에게는 아들이 있었지만 그는 황위 계승에서 배제되었다.[2] 목테수마 2세의 선대 틀라토아니이자 숙부였던 아위소틀(Āhuitzotl)의 아들이다.[3] 본래 목테수마 1세 사후 목테수마 2세가 즉위해야 했지만 어리다는 이유로 숙부 티소크와 아위소틀이 목테수마 2세가 성년이 될 때까지의 징검다리로 즉위한 것이라서 목테수마 2세가 적통이 맞다.[4] 사실 역사적으로 가문 시조의 이름을 성씨로 사용하는 경우는 흔했다.[5] 이걸 버렸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는데 첩 제도가 없어 재혼 아니면 1명의 부인만 인정하는 기독교 윤리 특성상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정부를 적당한 위치의 사내와 맺어줘 기독교 세계에서 공인된 사회적 신분을 제공해주는 그 시대 나름의 배려로 볼 수 있는 부분이다.[6] 말린체는 지위가 낮아서 신대륙에서 거물로 성장한 코르테스와의 정식 혼인은 불가능했다. 코르테스가 첫아내이자 벨라스케스의 처제인 카탈리나와 냉랭했던 이유중 하나가 귀족이 아니라 아무런 메리트가 없었기 때문인데(결혼 자체도 본인이 하려고 한게 아니라 불장난을 눈치챈 벨라스케스의 강권이 들어갔다.) 원주민 노예 출신 말린체는 말할 것도 없다. 두번째 아내 후아나는 '도냐'라는 호칭을 쓸 수 있는 백작 영애로 둘의 결합에는 당연히 정치적 계산이 들어갔다.[7] Chipman (2005), 50[8] 네번째 남편을 잃었을 때의 나이가 불과 17살이었으니 어린 시절부터 이리저리 치여 살았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9] 정확히는 으로 받았다. 그녀의 후손 가문 중 하나인 미라바예 백작가문(Condado de Miravalle)에 대한 스페인어 위키피디아 문서를 보면, 폐지 당시 연 1,480그램의 금을 연금으로 받았으며 그 당시만 해도 금본위제가 상식 중 하나였으니까, 이는 2010년 기준으로 60,715달러의 가치라고 한다.[10] 1913년까지는 멕시코 귀족이기도 했지만 멕시코 혁명으로 멕시코에서는 귀족제가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