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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8:00:34

이순철/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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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해태 타이거즈 시절
2.1. 1985 시즌2.2. 1986~1987 시즌2.3. 1988 시즌2.4. 1989 시즌2.5. 1990 시즌2.6. 1991 시즌2.7. 1992 시즌2.8. 1993 시즌2.9. 1994 시즌2.10. 1995 시즌2.11. 1996 시즌2.12. 1997 시즌
3. 삼성 라이온즈 시절4. 수상 경력
4.1. KBO
5. 연도별 성적

[clearfix]

1. 개요

이순철의 선수 경력을 다룬 문서.

2. 해태 타이거즈 시절

파일:역동적인 플레이를 보여주던 이순철.jpg

프로야구 원년 도루왕을 기록한 김일권[1]에 이은 1980년대와 1990년대 왕조를 이룩한 해태 타이거즈의 붙박이 1번타자로 활약해[2] 팀의 우승을 8차례에 걸쳐 이끌었으며, 세 번의 도루왕과 네 번의 골든 글러브를 수상할 정도로 뛰어난 호타준족의 선수였다. 특히 외야와 내야 모두 KBO 골든글러브를 수상했으며, 특히 중견수 수비에 있어서는 라면수비의 원조로 유명하며, 역대 최고의 수비능력을 지닌 중견수로 종종 언급되고 있다.

2.1. 1985 시즌

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
KBO 골든글러브 3루수 부문 수상자 (1985)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1985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하여[3] .304의 타율과 12홈런 31도루라는 매우 빼어난 성적으로 선동열[4]이나 이종범[5]도 수상하지 못한, 타이거즈 역사상 최초이자 2021년 이의리의 등장 전까지는 36년 동안 유일했던 신인왕에 등극하였다. 이순철은 현재는 외야수로 유명하지만 입단 당시의 포지션은 3루수로 무주공산이었던 해태 타이거즈의 3루를 매꿔줄 내야 유망주로 기대받았다.[6] 이후 1986년에 국가대표 3루수 출신인 한대화가 OB에서 해태로 트레이드되어 영입되자 외야수로 포지션을 변경했던 것이다.

다만 기분좋게 간 건 아니고, 내야에서 더 경쟁하고 싶어서 감독에게 외야 가기 싫다고 어필했다고 한다. 외야수는 대학 시절에도 봤었고, 1984 LA 올림픽에서 코너 외야수로 차출되는 등 외야 수비 경력은 있었다. 그래서 이순철 본인도 외야 수비 적응이 빨랐다고 할 정도. 하지만 이 때는 그저그런 편에 속했다.

중견수 초창기에 타구 위치 파악에 어려움을 겪으며 게임에서도 낙구 실책을 종종 범했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광주체고에 방문해 소리만 듣고도 타구 위치를 파악하는 연습을 했다고 한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사람들이 보기에 '되게 설렁설렁 수비를 하네. 편하게 공을 잡네.'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수비력이 크게 향상됐다. 원조 라면수비 이순철은 '밀어치는 타구와 당겨치는 타구의 소리가 약간 다르다'고 말한다.

2.2. 1986~1987 시즌

이후 1986년에는 타율 .257 14홈런 19도루를 기록해 홈런 5위, 도루 7위에 오르며 순조롭게 주전으로 안착했으나, 1987년에는 타율 .215에 6홈런 12도루를 기록하며 부진을 겪는다. 그러나 이는 성장통이었고, 포지션 변경으로 인한 적응기였을 뿐이었다. 그걸 증명하듯이 이순철은 이듬해인 1988년부터 본격적으로 리그를 대표하는 1번타자로 발돋움하게 된다.

2.3. 1988 시즌

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
KBO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수상자 (1988)
1988년에는 .313의 타율에 13홈런 58도루를 해내며 한 시즌 최다 도루 기록을 갈아치우면서도 홈런 8위에 오르는 뛰어난 타격실력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그해 한국시리즈에서는 1,2차전에서 연속으로 1차전 선제홈런 포함 결승타를 때려내 해태가 시리즈 내내 유리하게 가는데 1등공신의 역할을 하였다. 시리즈가 5차전 이내에서 끝나서 문희수가 6차전에 던지지 않았다면 시리즈 MVP를 당연히 탔을 정도.

2.4. 1989 시즌

1989년에는 .241의 낮은 타율을 기록했으나 12개의 홈런과 24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1번타자 역할을 무난히 수행했다. 출루율이 타율보다 1할이 더 높았으나 이 시절에는 타자 = 타율이던 시대였던지라.... 그러나 이 시즌은 아이러니하게도 이순철의 존재 때문에 태평양으로 트레이드되었던 그 김일권이 62도루를 기록하면서 전년도에 자신이 세웠던 도루기록을 깨고 1990년에도 김일권이 48개의 도루로 도루 1위를 기록하며 도루왕 2연패를 달성했다.[7]

2.5. 1990 시즌

1990년에도 이순철은 1989년과 비슷한 성적인 타율 .249에 12홈런 26도루를 기록하며 이와같은 성적을 꾸준히 찍을 것처럼 보였으나[8] 이듬해 각성하게 된다.

2.6. 1991 시즌

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
KBO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수상자 (1991)
이순철은 1991년 시즌 타율.276 17홈런 56도루를 기록하면서 부활한다. 김광수와의 경쟁 끝에 쟁취한 도루 1위는 물론 리그 홈런 7위까지 기록하며 해태 타이거즈를 6번째 우승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2년에 선수로서 최고의 해를 기록한다.

2.7. 1992 시즌

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
KBO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수상자 (1992)
1992년은 이순철은 44도루로 도루왕은 물론 기복이 심했던 타율도 .309를 기록해 리그 9위를 기록했으며 152안타를 기록해 최다안타왕도 달성. 홈런도 장채근을 이어 팀내 두 번째인 21개나 쳐내며 김성한이호성에 이어 20-20 클럽에 가입했다. 거기에 1번타자였음에도 76타점을 쓸어담아 리그8위를 기록했을 정도로 타격에 있어서는 최고의 한해를 보냈다. 더욱이 최다안타왕과 도루왕을 동시에 석권한 이들 중 20-20을 이룬 선수는 이순철이 유일하다.[9] 비록 1992년은 돌풍을 일으킨 롯데에게 해태가 아쉽게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했으나 이순철은 플레이오프 기간동안 .391의 타율을 기록하면서 팀의 중심 노릇을 톡톡히 했다.[10]

2.8. 1993 시즌

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
KBO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수상자 (1993)
그러나 1993년 이후 이종범의 등장으로 그의 팀내 입지는 급격히 추락하게 되는데, 비슷한 스타일의 이종범은 타격과 스피드, 장타력 등 모든 면에서 이순철보다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사실 1993년 시즌 개막 직전까지만 해도 대학 졸업 후 막 입단한 신인 이종범과 전년도 골든글러브 수상자였던 이순철의 위치를 비교하면 분명 이순철이 압도적인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1993년부터 노쇠화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며 성적이 하락하기 시작했고 결국 .253의 타율과 11홈런 29도루라는 이름값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을 남겼다. 그래도 이 해 역대급 투고타저의 영향으로 리그 외야수 중 나름 상위권 성적을 내면서 골든글러브를 수상, 여전히 건재하다는 건 보여줬다. 하지만 이 때부터 해태의 1번타자 자리는 .280의 타율과 16홈런 73도루를 기록한 이종범에게 내주고 하위타선으로 밀려난다.

2.9. 1994 시즌

1994년 .322의 타율과 8홈런 18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폼을 다시 끌어올리는가 싶더니 부상과 노쇠화로 인해 85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했다.

2.10. 1995 시즌

커리어 로우 시즌. 1995년에는 이전보다 노쇠화가 극심해지면서 자신의 커리어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게 된다. 출장 경기수도 96경기에 그친데다 타율 .201에 7홈런 13도루로 부진한 성적을 남겼고 여기에 병살타도 무려 20개나 기록하면서 최악의 시즌을 보냈다. 심지어 출루율도 0.278에 그치며 은퇴 직전이던 1998년의 성적보다도 더 나빴다. 이순철의 성적 중 가장 나쁜 성적이었다.

2.11. 1996 시즌

파일:external/sports.chosun.com/81v14014.jpg
1996년에는 시즌 전부터 하와이 스프링캠프에서 코칭스태프와 해태 타이거즈 하와이 항명사건으로 갈등을 일으키며 좋지 않게 시작했다. 실제로 타율도 .219에 그치며 반등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도 팀의 최고참이자 군기반장으로서 선동열의 해외진출과 김성한의 은퇴로 인한 공백에도 불구하고 팀을 결집시켜 1996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11]

2.12. 1997 시즌

1997 시즌 또한 .213의 타율로 부진했지만 1996시즌에 이어 팀의 최고참으로서 2년 연속 우승을 함께했다. 그러나 전술했듯이 몇 년전부터 찾아온 에이징 커브의 여파로 다시는 예전의 폼을 회복하지 못하고 성적도 큰 폭으로 떨어졌다.

게다가 그 전 해 하와이 스프링캠프에서 있었던 항명 사건까지 겹치며 사실상 김응용 감독의 눈 밖에 나기 시작했다. 거기에 그 해 입단한 신인 외야수 김창희에게 중견수 자리를 내주고 아예 백업으로 밀려나버렸고, 끝내 1997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서 제외됐다. 특히 한국시리즈 엔트리 제외는 충격적이었다. 하와이 항명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이루어진 결과라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1997년 시즌 종료 후 이순철은 해태 구단에 트레이드를 요구했고, 결국 해태는 이순철을 자유계약선수로 방출해버리며 해태를 떠나게 되었다.

3. 삼성 라이온즈 시절

해태에서 방출된 뒤 은퇴 위기에 몰린 그에게 손을 내민 건 삼성 라이온즈였다. 마침 해태 시절 선배였던 서정환이 감독으로 있는 팀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이를 이기지 못하고 프로야구 통산 최다득점 기록을 경신한 것을 제외하면 72경기 출장에 타율 0.213과 2홈런 3도루라는 이름값에 어울리지 않는 성적을 기록하고 시즌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은퇴식도 없이 조용히 은퇴하였다.[12] 사실 삼성에는 이미 양준혁[13]을 필두로 그해 뛰어난 활약을 펼쳤던 신인 강동우와 기존의 최익성신동주라는 걸출한 젊은 외야수들이 포진해 있었으며, 같은 이적생이던 김종훈 역시 0.277을 기록했을 정도로 두터웠기 때문에 사실 이순철의 자리는 백업일 뿐이었다.
파일:순페이 삼성 시절 포수 출전.jpg
삼성에서는 딱 1년만 뛰다 은퇴했지만 몇 가지 임팩트를 남겼는데, 그 중 하나는 포수로 깜짝 출장한 적 있었다. 1998년 8월 8일 친정팀 해태와의 경기에서 8회 초 포수 대수비로 출전해 급하게 마스크를 꼈고, 당시 삼성 마무리였던 호세 파라와 2이닝 동안 호흡을 맞춰 생각보다 괜찮은 포수 수비를 보여줬고 도루저지도 한번 잡아내는 데 성공했다. 당시 한창 포수난에 뒷목잡던 삼성팬들은 이참에 주전 해달라고 아우성을 칠 정도였다.[14][15] 위 사진이 그 유명한 이순철의 포수 출전한 사진이다.

두 번째 활약으로는 그해 LG 트윈스와의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선발 출장해 6타수 2안타 4타점을 올리며 삼성의 유일한 승리를 이끌었다. 사실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신인이자 주전 중견수 강동우가 플라이를 잡다가 대구구장 펜스에 부딪히며 정강이 골절상[16]을 입자 3차전에서는 이순철이 선발로 출장했는데, 이 경기에서 결승타 포함 2루타와 3루타로 4타점을 올리며 삼성의 플레이오프 유일한 승리를 이끄는 등 마지막 투혼을 보여주기도 했다.

4. 수상 경력

4.1. KBO

파일:KBO 리그 로고(1982~2012).svg
이순철의 KBO 수상 경력
1985 골든글러브 (3루수 부문) / 신인왕
1986 한국시리즈 우승
1987 한국시리즈 우승
1988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도루 1위 / 한국시리즈 우승
1989 한국시리즈 우승
1991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 도루 1위 / 한국시리즈 우승
1992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 도루 1위 / 안타 1위
1993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 한국시리즈 우승
1996 한국시리즈 우승

5.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5 해태 99 369 .304 112 18 5
(3위)
12 50 67
(1위)
31
(3위)
37 .477 .365
1986 88 319 .257 82 14 3 14
(5위)
40 53 19 33 .451 .325
1987 98 265 .215 57 12 1 6 29 34 12 29 .336 .291
1988 108 406 .313 127
(2위)
26
(1위)
2 13 52 81
(1위)
58
(1위)
64
(2위)
.483 .404
1989 101 373 .241 90 13 1 12 46 58 24 52 .378 .333
1990 114 381 .249 95 20 0 12 51 65 26
(2위)
64
(4위)
.396 .356
1991 115 434 .276 120 21 3 17 50 83
(3위)
56
(1위)
69 .456 .373
1992 122 492 .309 152
(1위)
22 3 21 76 101
(2위)
44
(1위)
67 .494 .389
1993 102 367 .253 93 12 3 11 44 47 29
(3위)
51 .392 .341
1994 85 314 .322 101 19 2 8 54 42 18 34 .471 .386
1995 96 328 .201 66 12 2 7 30 36 13 36 .314 .278
1996 111 351 .219 77 13 2 5 41 49 26
(5위)
44 .311 .304
1997 77 216 .213 46 6 2 5 28 31 12 26 .329 .296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8 삼성 72 160 .213 34 9 1 2 21 21 3 19 .319 .291
<rowcolor=#373a3c> KBO 리그 통산
(14시즌)
1388 4775 .262 1252 217 30 145 612 768 371 625 .411 .348


[1] 해태 타이거즈 불고기 항명사건 등으로 김일권과 앙금이 쌓였던 김응용 감독은 대체 자원으로 이순철이 등장하자 그를 차기 리드오프로 점찍은 이후 김일권을 태평양 돌핀스로 트레이드해 버렸다. 그런 이순철도 나이들고 이종범이 등장한 후 기량이 저하되고 하위 타선을 맴돌다가 1997년 김창희가 들어오자 숙청되었다. 사실 하와이 항명사건이라는 대형 사고의 시발점이 이순철이기도 했고, 이로 인해 김응용과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물론 시간이 흐른 뒤에는 서로 만나고 존중하는 말을 할 정도로 풀어졌다.[2] 다만 1993년 이후부터는 1번 타순을 이종범에게 내주게 된다.[3] 다만 학창시절의 유급으로 인해 입단이 1년 늦었다.[4] 성적은 더 뛰어났으나 입단 전의 잡음과 후반기부터 등판했다는 점에서 밀렸다.[5] 유격수 골든글러브+한국시리즈 MVP까지 수상했지만 MVP급 활약을 한 양준혁에 밀렸다.[6] 1984년까지 해태 타이거즈의 3루는 뚜렷하게 주인이라 할 만한 선수가 없었다. 1루수인 김성한이나 외야수인 김종모가 종종 투입되었을 정도.[7] 이후 1993년 전준호가 75개 도루로 최고 기록을 경신했고, 이듬해인 1994년 이종범84개 도루를 기록해 정상에 올랐다. 이 기록은 2010년대에 접어든 후로도 깨지지 않고 있다.[8] 그래도 출루율은 무난하게 3할대였다.[9] 이종범은 1994년에는 홈런 한개가 모자랐고 2003년에는 박한이에게 최다안타왕을 내주었다.[10] 여담으로 1992년의 이순철과 가장 비슷한 성적을 올린 선수는 1997년 최익성으로 이 둘은 20-20클럽 달성과 높은 출루율로 팀의 1번타자로 활약하면서 시즌 뿐 아니라 플레이오프에서 맹활약했지만, 당시 2승3패로 팀이 한국시리즈 티켓을 놓친 것까지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11] 당시 이순철은 팀 내에서는 김일권-김성한의 대를 잇는 유명한 군기반장이었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해태 2군 감독으로 있던 김성근조차 어떻게 하지 못한 임창용의 머리 염색을 하루 아침에 다른 2군 선수들과 함께 스포츠 머리로 바꾸도록 만들었을 정도. 이순철은 그 이후 송유석에게 군기반장직을 물려줬고 해태의 마지막 군기반장은 이호성이었다.[12] 사실 1999년까지 한 시즌 더 뛰고 싶었는데 당시 감독이던 서정환이 다음 시즌부터는 코치를 맡아달라고 부탁해서 은퇴하게 되었다고 한다.[13] 이 해 주장으로 이순철도 혀를 내두르는 군기반장이었다고 한다. 양준혁 본인도 신인때 갓동님에게 많이 얻어맞았다고.[14] 사실 이순철은 초등학교 시절 야구에 입문했을 때 처음 포지션이 포수였다. 다만 포수로 출전한건 초등학교 이후 처음이라고 본인이 언급했다. 또 호세 파라는 공이 매우 빠른 투수였다고 평가했다.[15] 한편 이순철이 포수 대수비로 나와 무난하게 경기를 마무리하자 당시 삼성 포수진은 코칭스태프에게 엄청나게 까였다고 한다. 이유는 "포수 안 해본 이순철보다 볼 배합을 못하냐"고(...)[16] 이 부상으로 강동우는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대표에서 하차했을 뿐만 아니라 2년간이나 재활에만 몰두했고 복귀 후에도 그저 그런 선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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