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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주(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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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주의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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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70번
김영덕
(1985~1986)
<colbgcolor=#fecd00> 신동주
(1991~1993)
김성표
(1995)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37번
최문호
(1993)
신동주
(1994~2000)
강영식
(2001)
해태 / KIA 타이거즈 등번호 25번
조홍준
(2000)
신동주
(2001~2002)
이재주
(2003~2009)
KIA 타이거즈 등번호 37번
곽채진
(1999~2002)
신동주
(2003)
최향남
(2004)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40번
주재필
(2003)
신동주
(2004)
차민규
(2006~2007)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24번
최익성
(2004)
신동주
(2005~2005.7.24.)
최용호
(2005.7.25.~2006)
KIA 타이거즈 등번호 52번
최용호
(2003.7.9.~2005.7.24.)
신동주
(2005.7.25.~2006.6.29.)
손상정
(2006.7.~2007)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97번
전병호
(2012~2013)
신동주
(2014~2015)
정우양
(2016)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70번
김태균
(2012~2015)
신동주
(2016~2019)
허삼영
(2020~2022)
}}} ||
파일:external/imgnews.naver.net/2027158_article_99_20160712161107.jpg
신동주
申東宙 | Shin Dong-Joo
출생 1972년 12월 14일 ([age(1972-12-14)]세)
경상북도 구미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구미초 - 구미중 - 포철공고
포지션 외야수[1]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91년 고졸 연고구단 자유계약 (삼성)
소속팀 삼성 라이온즈 (1991~2000)
해태-KIA 타이거즈 (2001~2003)
삼성 라이온즈 (2004~2005)
KIA 타이거즈 (2005~2006)
지도자 삼성 라이온즈 2군 타격코치 (2014)
삼성 라이온즈 1군 타격보조코치 (2015~2016)
삼성 라이온즈 1군 타격코치 (2017)[2]
삼성 라이온즈 육성군 타격코치 (2017~2019)[3]
도개중학교 야구부 감독 (2020~)[4]
프런트 삼성 라이온즈 원정 기록원 (2012~2013)

1. 개요2. 선수 경력3. 지도자 경력4. 연도별 성적5.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삼성 라이온즈, KIA 타이거즈 소속 외야수. 마해영이 삼성으로 오기 전 이승엽-양준혁과 클린업을 구축하여 상대의 투수에게 공포를 선사하던 장본인. 그래서 임창용도 신동주가 해태로 이적하고 나서야 원래 등번호인 37번을 찾을 수 있었다.[5]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5번타자.

2. 선수 경력

적당히 툴이 우수한 보급형 5툴 플레이어인 선수이다. 나름 장타력도 있고, 컨택도 훌륭하며, 발도 빠르고, 어깨도 좋아서 수비가 안정적이었다. 통산 100홈런과 100도루를 넘겼으며 20-20 클럽에도 가입한 적이 있다. 또한 중심타선에 자주 등장할 정도로 찬스에서도 강한 면모도 있었다. 다만 보급형 저니맨 생활을 하느라 안정된 환경에서 야구를 하지 못하여 감을 잃은 케이스가 되겠다.
파일:external/cfs2.tistory.com/download.blog?fhandle=YmxvZzEzNjcyQGZzMi50aXN0b3J5LmNvbTovYXR0YWNoLzEvMTUyLmpwZw%3D%3D.jpg

포철공고 졸업 후 1991년 연고 팀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해 1992년에 데뷔했다. 본격적으로 1군에 모습을 드러내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건 1995년부터인데 당시 양준혁이 타선을 지휘하던 삼성은 이동수, 이승엽과 더불어 리빌딩을 하는 대표적인 팀이었다. 30경기 지난 즈음 타격 선두에 도루도 2개를 기록했지만 후반의 체력저하로 인해 그럭저럭 도루만 잘하는 타격은 평균도 안되는 외야수의 성적을 내었다.

1996년부터 부임한 백인천 감독 휘하 삼성의 중심 타선으로 자리잡았다.[6] 커리어 하이는 1997년으로, 이 시즌 타격이 만개하여 타출장 0.326/0.396/0.581의 괴물같은 스탯을 쌓았으며, 21홈런 18도루로 아쉽게 20-20클럽 가입에는 실패했다. 이 해의 성적을 세부스탯으로 파고들면 더 대단한데, OPS가 0.978로 리그 6위, wRC+도 169.7로 리그 6위, wOBA도 0.428을 기록하며 리그 6위에 해당했다. 순수 타격만 놓고 봤을 때 그보다 더 뛰어난 성적을 낸 선수는 김기태, 박재홍, 양준혁, 이승엽, 이종범에 불과하며, 이 사실은 신동주가 97년에 얼마나 뛰어난 타자였는지 알려준다.[7] 심지어 그해 쌍방울 레이더스와 준플레이오프에서는 2개의 홈런을 쏘아올렸는데 전주에서 열린 1차전에서는 결승홈런이었고 2차전 대구 경기에서도 0:3에서 추격하는 홈런을 올렸다.

1998년에는 살짝 주춤했다가, 1999년에는 .278 22홈런 26도루로 20-20을 달성하기도 하였다. 이 때 KBO 리그 역사상 최초의 기록을 세웠는데 그것은 바로 1이닝 3도루이다. 6월 24일 대구에서 벌어진 LG와의 더블헤더 2차전에서 2회말 볼넷으로 출루한 뒤 2,3루 도루와 홈 스틸을 잇달아 성공시키며 대기록을 작성했다.[8] 그러나 한 편으로는 희한한 성적을 냈는데, 안타 120개 중 고작 2루타는 9개를 쳤으며, 홈런을 22개를 쳤으므로 장타력이 증명된 상황에서 낸 희한한 스탯이다. 다만 1999년은 KBO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유례없는 타고투저 시즌이라 신동주의 홈런 22개는 고작 리그 20위에 불과하며, 출루율이 고작 0.333에 불과해 OPS가 0.795로 리그 31위에 있다. 이 때문에 타율과 홈런, 도루만 보면 꽤 준수한 호타준족 같아보이지만 결과적으로 따져보면 그냥 리그 평균정도의 성적이었으며, 실제로 99년 신동주의 sWAR은 1.90에[9] wRC+가 고작 95.9로, 리그 평균보다 낮은 타격생산성으로 드러난다.

삼성에서 그의 이미지는 찬스에 강한 해결사였고, 또한 '만루홈런의 사나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삼성에서 뛰었던 2000년까지 6개의 만루 아치를 그렸으며 그것은 김기태(당시까지 8개)에 이은 2번째 기록이며 당시 한참 홈런을 많이 때리던 홍현우(5개)보다도 많은 수치였다.[10]

그러나 2000 시즌 부진하며 주전 자리에서 밀려났는데,[11] 마침 기존의 김기태김종훈, 강동우에 이어 마해영이 트레이드로 영입되었고, 대졸 신인 박한이와 외국인 타자 매니 마르티네스가 합류하며 외야진이 포화됐다 보니 사실상 삼성에서 설 자리를 잃었다.

결국 김응용 감독 부임 직후인 2001년 초 좌완투수 강영식과의 트레이드로 해태 타이거즈로 이적했다. 해태-KIA에서 2001년에는 주전 중견수로 116경기를 소화하며 신동주의 커리어에서 두번째로 뛰어난 시즌을 보냈지만[12] 점차 타석에 들어서는 기회가 줄었고, 2003년 시즌 후 FA 마해영의 보상선수로 지명되며 친정팀인 삼성에 복귀했다. 2004년은 준주전으로 뛰다가 2005년 7월 시즌 중 투수 최용호와의 맞트레이드로 다시 KIA 타이거즈로 이적하였지만, 하락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이듬해인 2006년 6월 웨이버 공시되어 은퇴했다.

현역 시절 우승과는 인연이 없었다. 1999년 롯데와의 플레이오프 당시 삼성의 주전 외야수였으나 팀은 7차전까지 간 접전 끝에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고, 그가 강영식과 트레이드되어 KIA에 있었을 때인 2002년에는 친정팀 삼성 라이온즈가 첫 한국시리즈 우승컵을 들어올린 해였다. 이후 2004년 다시 친정팀 삼성으로 돌아와 그해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들며 생애 첫 한국시리즈 무대도 밟아봤으나 팀은 9차전까지 간 접전 끝에 준우승에 그쳤다. 이후 2005년 7월 다시 KIA로 트레이드된 뒤 그해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이 우승하는 등 여러모로 현역 시절 우승과는 인연이 없었다.

현역 시절 당대 최고의 좌완투수였던 이상훈에게 무척 강한 모습을 보였고 불꽃 남자라는 별명을 지니고 있었고 찬스에 무척 강했다.[13] 또한 타격 시에 배팅장갑을 착용하지 않고 타격을 하기로 유명했다.

3. 지도자 경력

파일:/image/109/2012/01/11/201201111157779933_1_0_20120111121802.jpg
삼성 라이온즈 원정 기록원으로 재직하던 당시의 모습.

은퇴 후 대구광역시 북구 침산2동에 B&G 스크린 골프연습장을 열었으며, 전 삼성 - 두산 - 롯데 투수 출신 이상훈을 티칭 프로로 맞이하여 함께 운영했다. 2012년 친정 팀인 삼성 라이온즈의 프런트 제의를 받고 합류해 원정 기록원으로 활동했다.

2014년부터 2군 타격코치로 선임되면서 지도자로 보직을 받았는데, 실제로는 시즌 중반부터 1군 선수단과 동행 중이다. 2015년부터 정식으로 1군 타격보조코치로 보직이 바뀌며 김한수 타격코치와 같이 팀 타격을 담당하게 됐다.

2016년부터는 신인 시절에 달던 70번을 23년만에 달게 되었다. 4월 동안 부진하던 박해민개인훈련에 함께 하면서하며 박해민이 각성하는 데 일조했다.

2017년, 김한수 타격코치가 감독으로 승격되면서 단독으로 1군 타격코치를 맡게 됐다.[14] 하지만 삼성 라이온즈가 02 롯데, 13 한화 수준의 막장 경기력을 4월 내내 보여 주자 수비코치 이윤효와 묶여서 3군으로 강등되었다. 대신 김종훈강봉규가 1군 타격코치로 올라왔으며, 박진만도 수비코치로 왔다. 그리고 강기웅이 3군에서 2군으로 이동했다.

이후 2019년까지 3군 타격코치로 있다가, 시즌 후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고 팀을 떠났다.#

2020년 5월부터 경상북도 구미에 있는 도개중학교의 감독을 맡았다. 그러나 아마야구 지도자 자격증이 없어서인지 공식적으로는 다른 감독으로 나와 있다.

4. 연도별 성적

역대 성적
<rowcolor=#ffffff>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2 삼성 9 5 .000 0 0 0 0 0 0 0 0 .000 .000
1993 4 1 .000 0 0 0 0 0 0 0 0 .000 .000
1994 25 32 .188 6 1 0 0 0 3 0 1 .219 .212
1995 115 328 .238 78 14 2 5 28 39 23 29 .338 .299
1996 75 174 .230 40 9 0 9 22 31 6 26 .437 .330
1997 120 399 .326
(5위)
130 37
(1위)
1 21 66 79 18 48 .581
(5위)
.396
1998 78 238 .290 69 9 0 13 35 38 11 33 .492 .375
1999 122 431 .278 120 9 2 22 87 64 26 39 .462 .333
2000 97 310 .261 81 14 0 12 52 53 17 39 .423 .339
<rowcolor=#ffffff>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1 해태-KIA 116 387 .284 110 24 1 11 52 64 13 43 .437 .353
2002 81 244 .311 76 9 1 7 33 34 6 27 .443 .377
2003 95 205 .263 54 8 1 8 31 29 1 29 .429 .353
<rowcolor=#ffffff>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4 삼성 73 105 .219 23 5 1 2 9 11 1 11 .343 .291
<rowcolor=#ffffff>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5 삼성 / KIA 23 32 .094 3 0 0 0 0 2 0 3 .094 .171
2006 KIA 8 13 .077 1 0 0 0 0 0 0 1 .077 .143
KBO 통산
(15시즌)
1041 2904 .272 791 139 9 110 415 447 122 329 .440 .344

5. 관련 문서


[1] 외야 전 포지션이 가능하지만, 주 포지션은 우익수.[2] ~4월 27일[3] 4월 28일~[4] 취소선을 친 이유는 아래 설명 참조.[5] 임창용은 3년 동안 39번을 달았다.[6] 흔히 감독 백인천이라 하면 롯데의 8888577의 암흑기의 시작을 알린 최악의 감독으로 알려져있으나, 90년대의 백인천은 1990년 LG의 우승을 이끈 데다 삼성 감독 시절에는 신동주, 최익성, 이승엽, 김한수, 정경배 등을 기용하여 적극적인 리빌딩을 시도했고 삼성의 팀 타격 실력을 대폭 향상시킨 장본인이다.[7] 한편으로는 아쉬운 해였다. 이 해 외야 부문 KBO 골든글러브양준혁, 박재홍, 이병규가 탔는데, 양준혁, 박재홍이야 압도적인 실력이니 그렇다 쳐도 이병규와 비교해서는 타율, 홈런 등에서 압도적으로 우위를 점했음에도 밀렸다. 인기투표도 아니었던 것이, 이병규는 1년차 신인이었다. 신인이 3할에 신인왕까지 땄던 게 임팩트가 컸던 듯 싶으며 신동주가 20-20을 아깝게 못 찍고 LG가 삼성보다 팀 최종성적이 좋았던 것도 어느정도 영향이 있던 걸로 보인다.[8] 이 1이닝 3도루 기록은 김지찬이 다시 세우게 된다.[9] kWAR은 1.04로 매우 낮다.[10] 2000년 당시까지를 기준으로 김기태는 227홈런, 홍현우는 173홈런을 때려냈다. 신동주의 홈런수는 82개에 불과했다. 그가 얼마나 만루에 강했는지 알려주는 지표다.[11] 이 해 삼성의 외야는 좌익수 김기태-중견수 김종훈-우익수 훌리오 프랑코라는 화려한(...) 라인업이었다. 당연히 공격력에 비해 외야 수비 능력은 떨어졌는데, 애초에 1루수/지명타자 포지션인 김기태는 팀 사정상 억지로 좌익수로 출장했으니 말할 것도 없고, 김종훈은 중견수를 보기에는 어깨가 약했으며, 프랑코는 메이저리그 시절 주 포지션이 2루수였다. 사족이지만 당시 또다른 외국인 타자였던 찰스 스미스체구가 이대호만했는데 좌익수 수비를 봤다! 이후 2000년 시즌 도중 지명타자 요원인 찰스 스미스가 방출된 뒤 김기태를 다시 지명타자로 보냈다.[12] 타출장 0.284/0.353/0.437에 11홈런 OPS 0.789로, sWAR 2.53에 wRC+ 104.3을 기록하며 20-20을 찍은 99년보다 오히려 타격 성적은 좋았다.[13] 1997년 플레이오프에서 이상훈에게 역전 3점홈런을 쳤다.[14] 2011년 류중일 감독 부임 이후 삼성에는 줄곧 1군에 2명의 타격코치를 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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