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임마누엘 칸트의 생애를 정리한 문서.2. 초년기
칸트는 1724년 4월 22일 토요일 아침 다섯 시에 태어났다. 태어난 날이 옛 프로이센력으로 성명축일[1]이었으므로, 칸트는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되었다. 원래 이 이름이 지닌 히브리어의 의미는 "신이 그와 함께 있다"인데, 이 뜻이 경건한 부모의 마음에 들었다. 칸트 역시 나이가 들어서도 이 세례명을 자랑스럽게 여긴 걸 보면, 그에게 아주 알맞은 이름이었던 듯하다.[2]아버지 요한 게오르크 칸트는 마구 제조업자들의 조합에 소속되어 있는 수공업자[3]였으며, 말이나 수레, 마차, 썰매 등에 쓰이는 가죽끈이나 가죽띠를 생산하고 판매함으로써 돈을 벌었다. 그는 1683년 메멜에서 태어났으며, 젊은 시절 큰 도시인 쾨니히스베르크로 이주했다. 거기서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할 만큼 수입을 얻었던 그는 서른세 살이던 1715년 11월 13일, 뉘른베르크에서 쾨니히스베르크로 이주해온 다른 마구 제조업자의 열여덟 살 딸 안나 레기나 로이터와 결혼했다.[4]
둘은 경건주의에 따라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린 칸트도 부모님의 이러한 모습에 큰 영향을 받았다. 칸트는 대여섯 살이 되어 프로이센의 교회법과 학교법의 규정대로 학교에 들어갈 시기가 되자, 시의 변두리에 인접한 병원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그곳에는 오직 선생님 한 분만이 계셨다. 선생님은 그곳 교회의 합창단 지휘자이자 오르간 연주자이기도 했다. 학급도 오직 하나였다. 모든 학생들이 토지 개량 기술에 능숙하도록 배웠고, 읽기와 쓰기도 배웠으며, 계산하는 법 등도 조금은 배웠다. 무엇보다 그들은 기독교의 근거에 대해 공부했고, 개신교의 정신에 입각해 경건한 삶을 살아가도록 교육을 받았다.[5]
그러던 어느날 어머니 손에 이끌려 교회를 왔던 칸트는 그 지역의 목사이자 교육자였던 프란츠 알베르트 슐츠를 만나게 된다. 어머니는 아들이 지닌 통찰력과 이해력에 대해 자랑하곤 했는데, 슐츠는 칸트의 재능을 알아보고는 어머니에게 칸트를 학교에 보내는 것이 어떻겠냐고 설득했다. 어머니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아버지 또한 적은 수입일지라도 더 나은 학교 교육을 위해 기꺼이 돈을 내놓을 준비를 했다. 그렇게 해서 여덟 살의 칸트는 1732년 부활절 무렵 슐츠가 있는 콜레기움 프리데리키아눔으로 왔다. 일 년 뒤에 슐츠는 그곳 교장이 되었으며, 가까이에서 칸트의 성장을 지켜보며 영향을 줄 것이다. 이제 칸트는 이 엄격한 "경건주의 학교"에서 열여섯 살이 될 때까지 교육을 받는다. 칸트는 일주일의 6일을 아침 일곱 시부터 오후 네 시까지 휴식 없이 보내는 노예 같은 생활을 견뎌야 했으나 그런 와중에도 라틴어 수업만큼은 좋아하고 열심히 들었다.[6] [7]
한편, 아버지의 사업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었다. 마구 제조업자와 가죽끈 제조업자 사이에 빚어진 갈등으로 인해, 말의 안장을 생산하는 것이 힘들어져서 더욱 가난해졌다. 더군다나 1737년 12월 18일 '독성을 지닌 급성류머티즘발열'로 어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이후, 홀로 남은 아버지의 어깨 위에 부양과 교육이라는 모든 짐이 지워졌다.[8] [9]
3. 가난한 대학 생활과 기나긴 강사 생활
칸트는 1740년에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10]에 합격했다. 이것은 멀리 떨어져 있는 개신교 국가에 필요한 교사와 설교자 혹은 목사를 양성할 목적으로 1544년에 세워진 동프로이센의 유일한 대학이었다. 칸트는 이곳에 새로 등록하면서 어떠한 장학금도 신청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경제적 독립을 원했고, 국가로부터 빚을 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자기 스스로 학비를 충당하려고 했다. 그보다 나은 처지의 친구들이 그에게 커피와 빵, 옷 등을 대주었다. 또한 칸트의 외숙 리히터는 제화업을 하는 궁한 형편임에도 조카를 많이 도와주었다. 칸트는 절친인 요한 하인리히 블뢰머와 오랫동안 조촐한 방에서 함께 살았다. 칸트는 그와 함께 가끔씩 당구를 치기도 했는데, 당구 실력이 수준급이라서 내기 당구를 해서 생활비를 벌기도 했다고 전해진다.[11]칸트는 대학교에서 신학, 자연과학, 고등수학을 청강했다. 1년 뒤 칸트는 마르틴 크누첸(Martin Knutzen)을 만나게 되었다. 크누첸은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서 학문 일반의 유럽적인 개념을 대표하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논리적이며 철학적인 성찰, 수학적인 증명과 박물학적인 탐구는 칸트라는 젊은 학생에게 커다란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래서 그는 쉬지 않고 크누첸의 강의와 토론 연습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보다 열한 살 위인 교수와 개인적인 친분을 쌓았다.[12] 크누첸은 칸트에게 1687년에 출간된 아이작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를 빌려주었는데, 이 책은 칸트의 인생에 있어서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책은 "아마도 일직이 등장한, 개별적으로 저술된 물리학 저작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칸트 자신이 떠올렸던 계획과 일치하는 것이었다.[13] 또한 크누첸의 서재에서 칸트는 '사무엘 클라크와 라이프니츠 사이에 오간 서신'을 읽을 수 있었다. 거기에는 '자연 철학과 종교의 원리'를 주제로, 라이프니츠와 뉴턴을 등에 엎은 사무엘 클라크의 논쟁이 쓰여져 있었다. 주목할 점은, 나중에 칸트가 해결점을 찾았던 거의 모든 문제들이 여기서 논의되었다는 사실이다. 칸트는 라이프니츠와 뉴턴/클라크 사이에 논쟁이 되었던 '힘'의 정당한 측정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14] 이 연구를 바탕으로, 아버지가 점점 더 허약해져가는 그 시기에 칸트는 자신의 첫번째 책 『살아 있는 힘의 올바른 측정에 관한 사유들』을 써 내려갔다. 1746년, 평가를 받기 위해 이 책을 철학부에 내놓았을 때 아버지는 뇌졸중 후유증으로 돌아가신 직후였다.[15]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칸트는 남은 유산을 정리했는데, 남은 것이 별로 없었다. 오히려 그는 장남으로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을 넘겨받았다. 학생이던 칸트는 더 이상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의 강의 요목을 좇을 수 없었고 나중에는 강의 자체를 거의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다. 가난한 칸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가정교사가 되는 길 외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16] 학업을 중단한 뒤, 1748년 칸트는 먼저 인스터부르크와 굼비넨 사이에 있는 유드첸이라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다니엘 안더슈 목사 댁의 일을 보았다. 3년 뒤에는 쾨니히스베르크의 남쪽에 있는 그로스-아른스도르프에서 휠젠 집안의 젊은이들을 가르쳤다. 1754년에 쾨니히스베르크로 다시 돌아올 때까지 그는 6년을 그곳에서 보냈다.[17]
가정교사 생활을 하던 6년 동안 그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만 묻혀 지내지는 않았다. 전원적인 고독 속에서 안정된 몇 년을 그는 집중적으로 자연 연구에 사용했다. 칸트는 물리학ㆍ지리학ㆍ천문학을 비롯해 여러 분야의 학문적 기록들을 남겨놓았다. 칸트의 자연철학적 연구들은 바로 이 근면함으로 인해 이루어졌는데, 시간이 날 때면 그는 논쟁의 소지가 다분한 자연과학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했다.[18] 인쇄한 지 3년 뒤의 일이지만, 1749년 여름에 드디어 그의 『살아 있는 힘의 올바른 측정에 관한 사유들』이 서점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칸트는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견본 한 부를 문화계 잡지사에서 일하는 동료에게 보냈다. 자신의 첫 저술에 대한 서평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동봉한 편지에는 "살아 있는 힘의 올바른 측정을 통해, 잠에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의도에 최후의 결정을 일깨우려는" 독일 자연철학이라는 암시가 곁들여져 있다. 같은 날에 칸트는 저명한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레온하르트 오일러에게도 이 책을 보냈다.[19] 동봉한 편지의 내용에는 불확실한 자기 평가가 결합된 젊은 철학자의 자부심이 엿보인다. 그러나 살아 있는 힘(vis viva)에 관한 그의 형이상학적 꿈이 적혀져 있는 칸트의 이 첫번째 글은 출판상으로는 아무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20]
1754년 칸트는 쾨니히스베르크로 돌아와 학문적인 언론인으로서 일했다. 1년 뒤, 『자연사와 천체 이론』[21]을 썼으며, 1755년 4월 17일에 자신의 석사논문인 「불에 관하여」를 제출하고 5월 13일에 시험을 치렀다. 9월 27일에는 교수 자격 취득 논문인 「형이상학적 인식의 제1명제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내놓았다.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서 강사 자격을 얻고, 동양학 교수인 게오르크 다비드 키프케 교수 저택에서 첫 강의를 했다.
1756년 4월 8일, 서른두번째 생일을 두 주 남겨놓고 칸트는 "가장 위대하고 막강한 왕"인 프리드리히 2세에게 한 통의 편지를 썼다. 벌써 5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공석으로 있는 자리에 교수직 신청을 한 것이다. 이 자리에는 원래 어느 누구보다도 자연철학에 대한 칸트의 관심을 일깨우고 지도했던 스승 마르틴 크누츠가 있었다. 그런데 그가 1751년 노환으로 죽자 공석으로 남은 것이었다. 이제 그의 제자는 그 자리로 들어가기에 충분하다고 느꼈다. 그것은 정교수 자리는 아니었고, 보수도 신통치 않으면서 강의를 많이 해야 하는 특별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에게 이 직위는 대단히 매력적인 것이었다. 그는 이 자리를 통해 쾨니히스베르크의 사강사라는 가시밭길에서 벗어나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베를린에 있는 대학 당국은 경비 절약을 이유로 교수직을 채우지 않기로 결정했다. 칸트는 교수가 되기 전까지, 강사의 신분으로 강단이라는 모루 뒤에 앉아 매일같이 "같은 강의의 무거운 망치를 균일한 박자로" 내려치며 14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22] [23] [24]
4. 원했던 교수직, 원하지 않았던 과목
1770년 3월 16일, 마흔여섯 살을 눈앞에 두고도 여전히 강사 생활을 하고 있던 칸트는 비밀 국가예산 장관이자 육군 장관인 폰 퓌어스트 운트 쿠퍼베르크 남작에게 긴박한 편지 한 통을 쓴다. 그는 이 편지를 통해 막 공석이 된 교수직에 응모한다. 그러니까 하루 전날, 최고재판소의 사제이자 수학 교수인 랑한젠이 지루한 병환 끝에 죽은 것이다. 이미 칸트는 1756년에도 교수직을 얻으려 노력했으나 허사였고, 또 2년 뒤의 교수 지원에서도 외면당했다. 칸트가 처한 상황에는 극적인 데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대학 강사로서의 보수는 한푼도 받지 못했지만, 그의 강의를 찾는 사람들이 많았던데다 수강생들이 대개 강의료를 지불했기 때문이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궁핍한 삶에 익숙해 있었며, 어쨌든 사강사로서 칸트는 빚을 지지 않고도 서적상인 칸터의 집에 있는 두 방의 방값을 지불할 수 있었다. 50년대 말부터는 전직 군인 출신인 마르틴 람페[25]를 하인으로 고용하고 식당에서 매일같이 좋은 식사로 즐거움을 누릴 수도 있었고, 1766년 2월부터는 왕립 궁정도서관의 부사서로서 약간의 돈도 벌었는데, 여기서 그는 자기 연구를 위해 책을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는 기쁨까지 덤으로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칸트는 교수단의 정회원으로서가 아니라 무보수의 사강사로서 벌써 15년 동안 활동한 셈이었다. 그동안 칸트는 기진맥진할 때까지 주당 평균 20시간씩 가르쳤고, 또 부지런히 저술 활동을 해왔다. 그는 이제 젊은 학창시절 눈앞에 그렸던 학자 생활을 이루지 못할까 두려워졌다.[26] [27]그런데 칸트의 마음을 괴롭히는 문제가 단 하나 있었다. 칸트는 세계에 대한 이론적 지식 체계에 흥미가 떨어졌기 때문에 윤리 교수직을 맡기를 바라고 있었는데,[28] 공석이 된 자리가 수학 교수 자리였던 것이다. 따라서 칸트는 겸손하게 장관에게 일종의 교환 제안을 했다. 사람들이 그 공석의 교수직을 고인의 사위인 크리스티아니에게 맡기면 어떨까? 카를 안드레아스 크리스티아니는 윤리 교수이기는 하지만, 훌륭한 수학 전문가이기도 하다. 칸트 자신에게 이는 매우 다행스러운 해결책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만 된다면 "나(칸트)는 윤리 교수직을 지원하면서, 귀하(폰 튀어스트 장관)께서 내려주실 존귀한 서언을 겸손히 희망하며 내 본래의 숙명을 따를 생각"이기 때문이다.[29]
하지만 윤리 교수직 임명에서 칸트는 지지를 얻지 못했다. 그 대신 국왕인 프리드리히 2세는 "우리는 임마누엘 칸트 선생을 ... 논리학과 형이상학의 정교수로 그지없이 자비롭게 임명하고 받아들였다"는 내용의 칙령을 내렸다. 그렇게 해서 칸트는 마침내 교수가 되었지만 이는 절반의 성공이나 다름없었다. 왜냐하면 칸트가 자신의 삶에서 바랐던 행복, 즉 윤리와 도덕이라는 실천적 분야에서 자신의 숙명을 따를 수 있는 행복은 왕의 명령으로 말미암아 봉쇄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이 곤란에서 벗어나기 위해 칸트는 10년을 더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그 책, 즉 『순수이성비판』의 탄생은 의무감에서 비롯된 곤경의 해결책인 셈이다.[30]
원하지 않았던 과목임에도 불구하고 칸트는 강의와 반복 수업을 수행하며 논리학과 형이상학의 교수로서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 특히 청중들에게 형이상학ㆍ자연지리학ㆍ인간학에 대한 그의 강의는 매우 흥미로웠다. 그의 강의는 "유머와 분위기로 흥을 더했다." 1762년부터 1764년까지 칸트 밑에서 공부한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가 이러한 사실을 전하고 있다. 그의 "열려 있으면서 사색으로 다듬어진 이마는 깨뜨릴 수 없는 명랑함과 즐거움의 자리였고, 가장 풍부한 사유를 지닌 대화는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왔으며, 유머와 즐거운 분위기는 그의 뜻대로 되었다." 그의 강의는 더욱 유명해져서, 학생들이 필사한 칸트의 강의록은 학계에 널리 퍼졌다. 그렇지만 칸트는 이것이 썩 내키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1778년 8월 28일에 헤르츠에게 전했듯이, 특히 자신의 형이상학 강의와 관련하여 "강의록을 통해 생각을 정확히 이해하는 일"이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31] [32]
칸트는 자신의 임명을 처음부터 미심쩍게 평했던 교수 동료들과는 거의 사교적인 접촉을 갖지 않았다. 그는 그들의 사소한 경쟁과 술책에 관계하지 않으려 했다. 그는 또한 그들의 고지식한 "학자적 자만과 현학"에 대해서도 기꺼이 비웃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괴팍한 외톨이인 것은 아니었다. 칸트는 정기적으로 만나는 좋은 친구들이 있었으며, 그들과 함께 잡담하고 농담하며 논쟁하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칸트가 "식탁 모임"이라고 부르는 그 모임에는 학자와 지성인 뿐만 아니라 상인이나 가정주부들도 있었다. 이들 모두는 칸트와 함께한 모임에서 즐거움을 느꼈다. 칸트는 장난꾸러기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생동감 넘치는 큰 웃음을 재치있게 이끌어내곤 했다. 식사를 한 뒤 칸트는 대개 네덜란드 나무숲이나 나중에 "철학자의 길"로 알려진 강변길을 걸었다. 신선한 공기와 자유로운 운동 속에서 좋은 생각이 생긴다는 것이 칸트의 지론이었다.[33] [34] [35]
5. 10년의 연구 결과, 『순수이성비판』
10년 간의 연구 결과인 그 원고는 1780년 가을에야 완성되었다. 칸트는 최근 칸터[36]의 책방을 넘겨받았던 고트리프 렙레히트 하르퉁에게 그것을 출판해달라며 넘겨주었다. 그러나 그는 출판을 거절했다. 이러한 추상적인 형이상학 논문으로는 돈이 벌리기는커녕 잃기만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칸트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랐다. 그때 하만[37]이 칸트를 도우러 왔다. 그는 리가의 출판업자이자 서적상인 하르트크노흐와의 접촉을 중재했는데, 이 사람은 원고에 흥미를 보이면서 심지어 논문의 대가로 칸트에게 약간의 사례까지 지불하겠다며 흔쾌히 동의했다. 오랫동안 미루어진 그 일은 이렇게 해서 마침내 세상에 나올 준비를 마쳤다. 1781년 5월, 라이프치히의 부활절 장에서 리가의 출판인 요한 프리드리히 하르트크노흐에 의해 쾨니히스베르크 교수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초판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38]그러나 판매 부수는 매우 미미했다. 아무도 칸트의 생각을 좇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가장 친한 친구들마저도 머리를 흔들 정도였다. 친구들이 보기에는 『순수이성비판』은 신비스럽고 암호 같은 것이었다. 히펠은 너무 어려워서 이 책에서 무언가를 찾아낸다고 어떤 도움이 되겠냐고 반문했고, 멘델스존은 견본만 보았는데도 가슴을 쥐며 매우 답답해서 기운이 빠질 지경이라고 말했다. 블뢰머는 이 책을 읽으면 전제되어야 할 단어가 너무 많아서 한 페이지를 넘기기도 전에 모르는 단어를 헤아리는 손가락을 모두 접게 된다고 불평했다. 그나마 칸트의 생각을 제대로 검토한 하만조차도 세번째 읽는데 막혔다면서 네번째 읽기에서는 이해되기를 소망할 정도였다. 결국 하만이 나서서 칸트에게 철학의 문외한도 읽을 수 있는 대중적인 요약본을 작성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요청을 받아들여 1783년 초, 칸트는 리가에 있는 하르트크노흐의 집에서 『학으로 등장할 수 있는 미래의 모든 형이상학에 대한 서문』, 즉 『프롤레고메나』를 출판한다. 이 책에서 그는 더 광범위한 독자들을 위해 『순수이성비판』의 핵심 생각들과 그 철학적 배경을 되도록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하려고 시도하고 있다.[39] [40] [41]
뉴턴은 어떤 일이나 사건에 관계없이 스스로 한결같이 흐르는 절대적ㆍ현실적 시간을 가정했고, 또 움직이지 않고 항상 똑같이 머물며 마찬가지로 "자신 밖의 어떤 것과도 관계 없이 존재하는" 절대적ㆍ현실적 공간을 가정한다. 칸트는 이와 반대로 뉴턴의 절대주의를 필요 없는 것으로 여겼다. 그는 공간과 시간을 감성의 순수 형식 조건으로 선언했다. 그는 시공을 주관화하고 그것들의 객관적 성격을 거부했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공간과 시간 속의 대상을 감성적으로 직관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이러한 형식 조건들 때문이다. 동시에 그는 이제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이러한 형식 조건을 재구성하는 일을 순수 수학의 과제로 선언했다.[42]
즉, 인식이 대상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우리의 인식에 따라야 한다. "그러니까 현상에 우리 스스로가 질서와 규칙성을 부여한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것들을 발견할 수조차 없다면, 우리 심성의 본성이 그것들을 처음부터 거기에 부여하지 않은 것이다." "오성 자체가 자연법칙의 원천이다." "오성은 자신의 법칙을 자연에서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그것을 규정한다." 그것이 "코페르니쿠스"라는 이름을 들어 말했던 칸트의 대담한 혁명이다.[43]
하지만 그를 도덕적으로 자극했던 실천철학의 세 가지 큰 문제들은 이 길 위에서 답변될 수 없었다. 인간 본래의 것을 형성하는 불멸의 영혼이 있는가? 자연법칙으로 결정된 세계 속에서 인간 의지의 자유는 어떠한가? 그리고 신의 현존은 시령자의 상상 속에서만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 하나의 환상 이상인가? 이론이성의 형이상학이 이 문제를 자연철학적 지식의 영역 밖으로 경계지웠다고 해서 그것의 매력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론이성의 형이상학은 또한 동시에 그것에 의해 자기 자신의 경계 설정을 명시한다. 그것은 "아마도 본래 실천적인 것만이 관계해야 할" 차원에 도달하지 못한다. 『순수이성비판』의 말미에서 이야기하는 "우리 이성의 순수한 사용의 최후 목적"을 칸트는 도덕형이상학과 실천이성의 비판에서만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다음에 주어질 그의 큰 과제일 것이다.[44]
6. 수요 모임의 계몽주의자
1783년 베를린에서 계몽을 위한 투쟁 단체인, 은밀한 "수요 모임"이 결성되었다. 이들은 생각의 자유와 출판의 자유 그리고 독자적 사유와 시민정치적 자유를 향한 적극적인 참여, 더불어 이것들에 결합된 공공성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았다. 그들은 어두운 감정 철학, 비이성의 감옥, 종교적 독단, 교회의 강요, 광신과 미신 등에 대항했다. "그들은 교대로 돌아가며 규칙적으로 개인 주택에서 모임을 가졌고, 우정 어린 생각들을 교류하면서 서로서로 정신을 계몽했으며, 이를 통해 여러 종류의 개념 자체를 명확하게 규정했다. 이 모임의 결과는 『베를린 월간지』에 실렸는데, 칸트는 1796년까지 총 15편의 글을 기고했다.[45] [46]이러한 계획의 수립과 더불어 계몽의 동지들은 동시에 그들의 반대자에 대한 전선을 구축했다. 일반적으로 그들의 전선은 자신들의 감정에 지배받고 자신의 갈채를 신적인 계시로 간주하는 모든 종류의 광신자들을 향해 구축되었다. 이 광신자들은 모든 사유의 자유를 반대하는 자, 특히 문화ㆍ정치적인 반대자로 간주되어 논쟁적으로 반박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직상 그들의 고유한 방식 때문에도 위협을 받고 있던 예수회와 비밀 구교를 향해서도 계몽 단체의 반박이 이루어졌다. 때문에 토론과 강연 그리고 제한적으로 돌려보던 문서 등은 엄격하게 비밀로 유지되었다.[47]
『베를린 월간지』에서 계몽이란 무엇인가 하는 토론이 시작된 직접적인 계기는 전통적인 교회결혼을 둘러싼 찬반 논쟁이었다. 교회에서 치르는 혼례성사는 번잡한 허례허식이므로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과, 결혼은 신성하므로 교회의 축복을 받아야 하고, 이를 통해 풍기문란과 도덕적 타락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 똑같이 '계몽'의 이름으로 제기된 것이다. 이에 쵤너는 '계몽'의 이름으로 야기되는 혼란을 비판하면서 무엇보다 계몽에 대한 분명한 개념 규정이 절실하다고 역설했다. "계몽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계몽을 시작하기 전에 우선 진리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만큼이나 중요한 이 문제에 답해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어디서도 찾지 못했다!"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쵤너의 물음에 대해 칸트는 몇 개월 뒤 이렇게 응수했다. "계몽이란 인간이 스스로 초래한 미성숙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미성숙이란 다른 사람이 지도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다. 이러한 미성숙이 지성의 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의 지도를 받지 않고서는 지성을 사용할 결단력과 용기가 없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것은 스스로가 초래한 것이다. 과감히 알려고 하라! (Sapere aude!) 자기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이것이 계몽의 좌우명이다."[48]
즉, 자기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지고 "언제나 스스로 생각한다는 원칙이 계몽이다."[49]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전제되어야 할 조건이 있다. 그 조건이란, 사람들에게 공론장에서 "자신의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누군가가 독서계의 모든 공중이 지켜보는 앞에서 학자의 입장으로 이성을 사용한다는 것을 뜻한다. 예컨대, 장교가 직무수행 중에 상관의 명령의 합당함이나 유익함에 관해 공공연히 따지려 든다면 심각한 해악을 초래할 것이다. 그렇지만 학자의 입장에서 병역 의무의 결함에 대해 논평하고 독자층에게 판단을 호소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금지되어선 안 될 것이라는 얘기다.[50] 여기서 칸트는 심지어 종교나 군주라도 공론장에서의 사상의 자유만큼은 억제해선 안 될 것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7. 순수한 도덕을 찾아서
칸트는 1762년에 루소의 저술을 읽기 시작했다. 『에밀 또는 교육에 관하여』를 읽기 시작했을 때, 그는 몸이 얼어붙어 며칠 동안 규칙적인 산책을 하지 못했다. 그는 루소의 자연적인 인간상, 즉 가면을 쓰지 않고 살아가도록 교육된 인간의 모습에 매료되었다. 청년 시절의 칸트는 뉴턴으로부터 자연과학적인 세계 관찰의 원칙들을 진지하게 수용했다. 그는 『자연사와 천체 이론』에서 그 첫번째 정점에 도달했다. 하지만 이제 루소로부터 그는 인간에 대한 새로운 안목을 배웠다. 무엇보다도 루소의 역설은 인간 영혼 속에 감추어진 어떤 흔적을 찾아내는 데 도움을 주었다. 1765년에 칸트는 전해에 출판된 『미와 숭고의 감정에 관한 고찰』의 여백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기록했다. "오직 이것(물리적 세계 인식)만이 인간의 명예를 세울 수 있다고 믿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무지의 천민들을 멸시했다."[51]1770년 무렵이 되자, 칸트는 궁극적으로 다음과 같은 점을 분명히 하게 되었다. 즉, 자신의 "도덕형이상학"이 "시초의 근거"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태도나 감정에 대한 가능한 고찰 영역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또 자신의 도덕형이상학이 즐겁고 교훈적인 발견에만 제한되어서는 안 되며, 개별적인 주관의 의욕 혹은 행위의 주관적 원리에 불과한 준칙에 머물러 있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도덕형이상학자로서 칸트는 대단히 명확하고 순수하게 "도덕법칙", 즉 도덕성 일반의 최고 원리를 생각했다. 이 원리 안에서 경험적인 현상은 어떠한 역할도 하지 못한다.[52]
하지만 이러한 생각을 완성하기까지는 10년 이상이 연기되어야 했다. 왜냐하면 1770년 3월 31일에 칸트는 내각의 명에 따라 논리학 및 형이상학 교수로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도덕적 전문성은 고려되지 않았다. 그를 기다린 것은 다른 과제들이었다. 10년 동안 그는 『순수이성비판』에 몰두했으며, 실천철학은 여기에서 단지 암시로만 드러났을 뿐이다. 『순수이성비판』에서는 경험의 형이상학과 변증법적인 가상의 논리학이 전면에 부각되었다. 순수 이론이성과의 대결이 종결된 뒤에야 칸트는 비로소 실천이성, 즉 자신의 본래 사명에 전진할 수 있었다.[53]
1785년 4월 8일, 드디어 그의 『도덕형이상학정초』가 세상에 나타났다. 도덕적 견지에서 실제 "선한"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칸트는 문제시되는 것이 세계의 사태가 아니라 주체의 능력임을 전제한다. 윤리적 견지에서 볼 때, 도덕적 의식 일반에 대해 능력 있는 주체만이 선하거나 악할 수 있다. 그런데 선의 근원이 되는 주체적 혹은 주관적 능력이란 어떤 것인가? 인간의 정신적 능력인가? 칸트는 아니라고 답한다. 지능, 오성, 재치, 또는 학문적 지식은 해롭거나 악하게 작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질인가? 칸트는 이것 역시 아니라고 답한다. 우리는 용기와 인내 그리고 감탄의 기질을 가지고 선하게 행동할 수 있지만, 악하게도 행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행운인가? 이것 또한 아니다. 권력이나 재산이나 인정 또는 건강 같은 행운을 통해 어떠한 일이 좋게 될 수는 있지만, 그 자체는 어떠한 도덕적 혹은 인륜적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격인가? 칸트에 따르면 도덕적 존재로 간주되기 위해서는 인격이 필요하다. 하지만 인격이 그 자체 스스로 좋은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남아 있는가? 칸트의 『도덕형이상학정초』는 단순한 규정으로 이루어진다. "이 세상에서 그리고 이 세상 밖에서도, 어떤 제한 없이 선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선한 의지 뿐이다." 규정된 또는 보편적으로 수행된 법칙, 행복감, 공리적인 유용성, 외적인 자산들과 내적인 재질들, 이 모든 것은 결코 도덕성의 최상의 원리에 구성적인 것들이 아니다. 오로지 "의지"만이 윤리적 가치를 지닌다. 칸트는 도덕성의 합리적 근거를 "신적인 전능한 의지"에서 끌어내는 대신 전적으로 인간 의지의 자유로부터 이끌어내고 있다. 칸트는 1788년에 쓴 『실천이성비판』의 종결부에서도 "내 안의 도덕법칙"을 그 어떤 다른 근거에서 칭송하지 않는다.[54] [55]
그러나 칸트의 『도덕형이상학정초』는 경험의 영역과 도덕의 영역을 더 이상 결합할 수 없는 세계로 보이게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도덕의 영역은 이 세계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칸트의 도덕성의 이념에 대해 가장 일반적으로 제기되는 이의이다. 물론, 칸트도 윤리학 역시 경험적 부분을 지닌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인정한다. 이것은 나중에 "실천적 인간학"으로 특징지어지며, 여기서는 감성, 쾌와 불쾌의 감정, 본능과 욕망, 그리고 한 인물의 성격도 자신의 고유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럼에도 칸트는 경험에서 추론된 것이 아닌 이성에서 추론되는 순수한 도덕 철학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추구할 가치가 있다고 간주했다. 그것이 단지 도덕형이상학일 뿐이라해도, 도덕적 법칙을 순수하고 참된 본질 속에서 추구하려는 시도는 도덕성이 퇴색한 시대에 특히 가치 있는 일로 여겨졌다.[56] [57]
8. 검열에 맞서
프로이센의 새로운 군주가 된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1788년 7월 3일, 계몽군주국의 장관인 프라이헤어 폰 제드리츠를 파면하고, 그 자리에 신학자인 요한 크리스토프 뵐너를 임명했다. 그리고는 그를 "성직부의 수장"이라고 명명했다. 이에 따라 1788년 12월 19일에 프로이센 국가의 새 검열 선포가 시행되었다. 국가 검열을 통해 왕과 성직자단에 의해 선포된 종교와 국가의 원칙들에 위배되는 일은 제한을 받았다. 출판의 자유가 철저하게 제한되었다.[58]1789년 6월 17일 프랑스 혁명이 터지자, 검열은 더욱 엄격해졌다. 내각의 규정에 따라 1791년 10월 19일부터 월간지와 계간지 그리고 여타의 시대지들도 검열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베를린 월간지』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었다. 이 무렵 칸트는 『베를린 월간지』에 종교철학에 관한 논문을 연속적으로 투고했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칸트는 선한 삶의 활동적인 심성은 종교적 확신에 대해 우위를 지닌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이 검열관들의 심기에 거슬렸던 것이다.[59] 『인간의 지배에 대한 선한 원리와 악한 원리의 대립에 대하여』는 출판 허가를 받지 못했다. 이러한 긴장된 상황에서 칸트는 『베를린 월간지』에 기고하고자 계획했던, 네 편의 원고를 독자적인 책으로 출판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는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의 신학부가 그러한 종류의 철학부 논문을 검열할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피해 그는 우회로로 그 논문을 예나 대학의 철학부에 제출했다. 예나 대학의 철학부는 프로이센 밖에서 그 논문을 출판하도록 승인했고, 이렇게 해서 1793년 부활절에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가 출간되었다.[60]
칸트는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법적 자유를 달성하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은 자유를 얻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토지 소유자의 농노는 아직 자유를 얻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또한 일반 사람들은 아직 종교의 자유를 누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가정 뒤에서는, 자유는 결코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먼저 자유로워지지 않으면 성숙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의 시도는 조야하며,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의 명령과 배려 아래에 있는 것보다 더 어렵고 위험한 상황을 수반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고유한 시도가 아닌 다른 이성을 통해서 성숙할 방법은 없다."[61] 국가의 검열 조처가 칸트의 어조를 더욱 날카롭게 한 것이 분명했다. 법적이고 종교적인 권위자의 절대명령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의 자유에 대한 신조는 더욱 급진화되었다. 국가에서나 집에서나 혹은 교회에서나 항상 되풀이되는 지배적인 관료적 선언에 반기를 들며 칸트는 이의를 제기했다. 자유는 칸트에게 일생 동안의 소망이었다. 그는 프랑스 혁명에 열광했으며 이 소망과 정치적인 시대사를 결합시켰다. 칸트는 자유와 평등 및 자주에 대한 자신의 이념을 자유ㆍ평등ㆍ박애라는 혁명의 외침 속에서 다시금 인식했다. 그는 이제 세계사적인 전망으로 이행가능하도록 자신의 비판철학을 정치화했다. 많은 친지와 친구들은 그의 이러한 태도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62] [63]
그러나 그 책이 1년 동안 대중들의 관심을 받게 되자 칸트는 더 이상 검열관들을 피할 수 없었다. 1794년 10월 1일 내각은 "왕의 칙령"을 칸트에게 선포했고, 이것은 칸트에게 10월 12일에 전달되었다. "자비로운 왕의 특별 명령에 따라" 뵐너는 칸트가 앞으로는 더 이상 종교적인 사태에서 책임질 일을 하지 말 것을 통보했다. 왕과 뵐너는 이미 오래전부터 불만을 가지고 칸트가 자신의 철학을 "성서와 기독교의 주된 교리를 왜곡하고 폄하하는 데 잘못 사용"하는가를 관찰했다. 그들이 보기에 칸트의 저작은 무책임한 짓이고, "우리와 당신에게 잘 알려진 조국의 의도"에 반하는 행동이다. 이러한 경고 뒤에 노골적인 위협이 뒤따랐다. "우리는 존경스러운 당신의 가장 확신에 찬 책임을 요구하고, 우리의 커다란 불쾌감을 모면하기를 당신에게 기대합니다. 당신은 앞으로 그와 같은 일에 책임질 일을 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당신의 의무에 합당하게 당신의 능력과 재질을 우리 조국의 계획이 갈수록 더 많이 실현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못할 경우 당신은 계속된 반항으로 확실히 불편한 상황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은총을 받고 있습니다."[64]
왕의 칙령이 떨어진 이후로 칸트는 종교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간행해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 억눌렀던 자신의 자유를 정치적 논평을 함으로써 풀어냈다. 그는 이제 국가의 질서와 존귀한 법에 직접 손대기 시작했다. 1795년 4월 5일, 바젤에서 맺어진 프랑스와 프로이센 사이의 단독 강화에 영감을 얻어, 그는 영구평화를 향한 그의 철학적인 기획을 써 내려갔다. 『영구평화론』은 그해 말엽에 모습을 드러냈고, 출판상 완전한 성공을 거두었다.[65]
그리고 마침내 1797년 11월 10일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죽고, 새롭게 즉위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1798년 3월 뵐너 장관을 면직했다. 새로운 왕은 계몽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았다. 이로써 칸트는 다시금 교회와 국가 그리고 종교와 법에 대해 자신의 비판적인 태도를 자유롭고 공공연하게 표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칸트는 빌헬름 3세의 새롭게 계몽된 정부에 감사를 표했다.[66]
9. 말년
일생을 두고 보면, 칸트는 심한 병에는 걸리지 않은 셈이었다. 단 하루도 병으로 인해 침대에 누워 본 적이 없었다는 말이다. 그 점에 대해 칸트는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그것을 스스로 처방한 섭생의 근본 원칙을 따른 자신의 의지의 효과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병을 낫기 위한 치료법이 아니었다. 그것은 실천적이고 철학적인 기술이었으며, 생명력을 도덕적인 관점에서 뿐 아니라 건강상의 관점에서 가능한 한 좋게 그리고 길게 영향을 미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67]칸트는 물론 허약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는 그의 삶의 나머지 생애 동안 그를 생산적이도록 만드는 규칙적인 생활에 익숙해졌다. 오랜 시간 동안 확고한 습관이 된 바 같이, 하인 람페가 매일 아침 5시 15분전에 깨우고 주인이 일어날 때까지 침실에서 기다린다. 그는 옷을 입고 그 위에 붉은 비단 띠를 한 노란색의 침실가운을 걸쳤고 머리에는 나이트캡을 썼는데, 삼각형의 작은 모자를 그 위에 고정시켰다. 그런 후에 연구하는 방으로 가서 두 잔의 온화한 꽃잎 차를 마시고, 점토로 된 파이프에 담배 한 대를 핀다. 다섯 시 정각에 그는 책상에 앉는다. 이제 그는 오전 내내 연구할 시간을 갖는다.[68]
칸트는 분명 약하게 태어났다. 그런데도 이토록 장수한 자신의 건강을 그는 자랑스러워 했다.[69] 그러나 40년을 교육에 종사하며 통틀어 268개의 연속강의를 했었고 1796년 7월 23일 마지막으로 강단아래에 서 있는 그의 몸은 더 이상 강의할 상황에 놓여 있지 않다. 노령의 그는 약해진 몸 때문에 넘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웃었으며, 몸이 가볍기 때문에 심하게 넘어지지 않았다고 익살을 떨기도 했다. 또한 피로감 때문에 의자에서 잠드는 횟수가 늘어났다. 의자 밑으로 굴러 떨어져 가끔식 그런 채로 누워 있기도 했다. 스스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누군가가 도와주러 올 때까지 그렇게 가만히 있었다. 아침에 책을 읽을 때나 글을 쓸 때면 머리를 가누지 못해 촛불 아래로 머리가 내려가 때때로 "무명으로 된 나이트캡에 불이 붙어 머리위에 환한 불꽃이 타올랐던" 경우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놀라지 않고 맨손으로 나이트캡을 벗어 바닥에 내려놓고는 불을 껐다.[70]
1803년 10월 8일에 칸트는 그의 생애에서 처음으로 예사롭지 않게 아팠다. 그의 아버지처럼 뇌졸중이 일어났던 것이다. 물론 그는 다시 회복되었으나, 그러한 타격은 그를 점점 쇠약하게 했다. 곧이어 그는 자신의 이름을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었고 거의 무엇인가를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되기에 이르렀다.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을 더 이상 인식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태연하고 침착했으며 평온해 보였다. 그러던 1804년 2월 12일 밤에 그는 의식은 있었지만 거의 마비된 듯 보였기 때문에, 말년에 그를 따르며 수발을 도와주던 제자 바지안스키[71]가 그의 곁을 지켰다. 새벽 1시경에 칸트가 목마르다는 표정을 짓자, 바지안스키는 그에게 포도주와 물을 섞어 조금 달게 만든 음료를 마시도록 갖다 주었다. 조금 기운을 돋우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맛이 있었을 것이고 또한 그에겐 충분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그의 삶과 노고를 돌이켜보고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물론 불명료하게 들리긴 했지만 이해할 수 있게끔, "그것으로 좋다 (Es ist gut)" 라고 속삭였다. 밤이 지나가고 해가 떠올랐을 때 칸트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11시였다.[72]
장례식 날 쾨니히스베르크 시 전체가 휴무에 들어가 모든 상점들은 문을 닫았다. 수천 명이 운구 행렬의 뒤를 따르고 시내의 모든 교회가 같은 시간에 조종을 울리는 등 위대한 철학자의 사망을 애도했다. 칸트는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이 마련한 쾨니히스베르크 대성당의 묘지에 묻혔다.
(좌) 쾨니히스베르크 대성당 뒷편의 칸트의 무덤. (우) 기둥 사이로 보이는 칸트의 무덤. |
[1] 기독교 신자가 자신의 세례명으로 택한 수호 성인의 축일.[2] 1724년 4월 22일 아침, 칸트가 처음으로 세상의 빛을 보았을 때는 다섯 살 먹은 누이가 살고 있었다. 4월 22일이 옛 프로이센력으로 성명축일이었으므로, 칸트는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되었다. 원래 이 이름이 지닌 히브리어의 의미는 "신이 그와 함께 있다"인데, 이 뜻이 경건한 부모의 마음에 들었다. 칸트 역시 나이가 들어서도 이 세례명을 자랑스럽게 여긴 걸 보면, 그에게 아주 알맞은 이름이었던 듯하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31)[3] 칸트의 할아버지도 마구 제조업자였다.[4] 칸트의 아버지인 요한 게오르크 칸트도 자신의 아버지, 그러니까 칸트의 조부 한스와 마찬가지로 수공업자였다. 그는 마구 제조업자들의 조합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말이나 수레, 마차, 썰매 등에 쓰이는 가죽끈이나 가죽띠를 생산하고 판매함으로써 돈을 벌었다. 그는 1683년 메멜에서 태어났으며, 젊은 시절 큰 도시인 쾨니히스베르크로 이주했다. 거기서 그는 자수성가한 마구 제조업자로서,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할 만큼 수입을 얻었다. 서른세 살이던 1715년 11월 13일, 그는 안나 레기나 로이터와 결혼했다. 당시 그녀는 열여덟 살이었는데, 뉘른베르크에서 쾨니히스베르크로 이주해온 다른 마구 제조업자의 딸이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40)[5] 아이다운 순진무구함으로 가족의 일과에 맞추어 살아가던 자유로움과 함께 시간이 흘러갔고, 임마누엘은 대여섯 살이 되어 프로이센의 교회법과 학교법의 규정대로 학교에 들어갈 시기가 되었다. 아침마다 그는 시의 변두리에 인접한 병원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그곳에는 오직 선생님 한 분만이 계셨다. 선생님은 그곳 교회의 합창단 지휘자이자 오르간 연주자이기도 했다. 학급도 오직 하나였다. 모든 학생들이 토지 개량 기술에 능숙하도록 배웠고, 읽기와 쓰기도 배웠으며, 계산하는 법 등도 조금은 배웠다. 무엇보다 그들은 기독교의 근거에 대해 공부했고, 개신교의 정신에 입각해 경건한 삶을 살아가도록 교육을 받았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48~49)[6]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아마 잊혀졌을지 모른다. 만약 프란츠 알베르트 슐츠가 1731년에 어린 임마누엘의 커다란 재능을, 어머니 손에 이끌려 정해진 시각에 신앙 시간을 맞이하고 성경 시간을 보냈던 그 아이의 재능을 인식했던 첫번째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안나 레기나 칸트는 슐츠의 강의를 "꾸준히 청강했으며, 또한 그를 마음으로부터 따르는" 사람이었다. (중략) 어머니는 아들이 지닌 통찰력과 이해력에 대해 자랑했는데, 적어도 슐츠는 그녀의 자랑이 정당하다는 것을 간파했다. 약한 체질의 어린이이기는 했지만, 난장이 학교에 다니기에 칸트는 너무나 재능이 있음이 분명했다. 슐츠는 명망 있는 인물이었으나, 소박한 수공업자 가족이 사는 사틀러 거리의 조그마한 집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그리고 부모에게 아들이 대학 공부를 미리 준비할 수 있도록 잘 말해주었으며, 더 좋은 학교도 추천했다. 영리하면서도 믿음이 깊은 아들을 가지고자 했던 오랜 소망 때문에 어머니는 이를 받아들였다. 아버지 또한 적은 수입일지라도 더 나은 학교 교육을 위해 기꺼이 돈을 내놓을 준비를 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52~53)[7] 그는 교육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라틴어 수업을 좋아했다. 학교는 특히 근면한 학생에게는 어떤 방식으로든 로마의 고전문학가를 신뢰하도록 이끌어주었으며, "이러한 것에 대한 애정은 그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60)[8] 칸트는 학교 생활의 노예 같은 상태에서 살아남았다. 그는 알베르투스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그리고 부모의 집에서 나오기 위해 열여섯 살 때까지 열심히 공부했다. 그는 돈이 조금밖에 없었다. 게다가 아버지의 사업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었다. 마구 제조업자와 가죽끈 제조업자 사이에 빚어진 경제적 갈등이 부지런한 수공업자인 요한 게오르크 칸트를 가난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왜냐하면 다른 마구 제조업자들은 가죽끈을 만들어도 괜찮았지만, 그에게는 말의 안장을 생산하는 일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일한 고객을 얻기 위한 경쟁에서 누가 패배할지는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1737년 12월 18일 어머니의 죽음 이우, 호로 남은 아버지의 어깨 위에 부양과 교육이라는 모든 짐이 지워졌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61)[9] 칸트의 어머니는 1737년에 "독성을 지닌 급성류머티즘발열"로 갑자기 세상을 뜰 때까지 다섯 아이를 더 낳았다. 그때 그녀의 "꼬마"는 겨우 열세살이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31)[10] 알베르투스 대학교라고 부르기도 한다. 현재는 칸트의 이름을 따 임마누엘 칸트 발틱 연방대학교가 되었다.[11] 임마누엘 칸트는 1740년 9월 24일에 알베르티나의 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이것은 멀리 떨어져 있는 개신교 국가에 필요한 교사와 설교자 혹은 목사를 양성할 목적으로 1544년에 세워진 동프로이센의 유일한 대학이었다. 칸트는 이곳에 새로 등록하면서 어떠한 장학금도 신청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경제적 독립을 원했고, 국가로부터 빚을 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자기 스스로 학비를 충당하려고 했다. 그보다 나은 처지의 친구들이 그에게 커피와 빵, 옷 등을 대주었다. 또한 칸트의 외숙 리히터는 제화업을 하는 궁한 형편임에도 조카를 많이 도와주었다. 칸트는 가장 좋은 친구인 요한 하인리히 블뢰머와 함께 오랫동안 조촐한 방에서 살았다. 칸트는 그와 함께 가끔씩 당구를 치기도 했는데, 이는 좋은 휴식이었을 뿐만 아니라 돈을 버는 데 쓸모가 있기도 했다. 이 나이 어린 학생은 유별나게 숙달된 놀이꾼이어서, 이기지 않고 집에 가는 경우가 드물었다고 전해진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62)[12] 1731년에 슐츠를 알게 되었듯, 자유롭게 떠돌던 이 학생은 10년 뒤 마르틴 크누첸(Martin Knutzen)을 만나게 되었다. 크누첸은 슐츠의 주선으로 알베르티나에 논리학 및 형이상학 원외 교수로 초빙된 인물이다. (중략) 쾨니히스베르크의 대학 선생들 가운데 크누첸은 "학문 일반의 유럽적인 개념을 대표하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논리적이며 철학적인 성찰, 수학적인 증명과 박물학적인 탐구는 칸트라는 젊은 학생에게 커다란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래서 그는 쉬지 않고 크누첸의 강의와 토론 연습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보다 열한 살 위인 교수와 개인적인 친분을 쌓았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66~68)[13] 크누첸은 우선 칸트에게 1687년에 출간된 아이작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를 빌려주었다. (중략) 이 책은 "아마도 일직이 등장한, 개별적으로 저술된 물리학 저작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칸트 자신이 떠올렸던 계획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수학적 계산의 필요성과 인과적 설명에 따른 기대의 결합은 학문의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71~72)[14] 1715~16년에 사무엘 클라크와 라이프니츠 사이에 오간 서신의 심화된 논쟁을 통해 칸트는 교훈을 얻었다. 이는 아마도 유럽의 정신사에서 주목할 만한 재기 넘치는 서신 왕래였던 것 같다. (중략) 이에 "자연 철학과 종교의 원리"에 대한 다툼이 벌어졌다. 이를 통해 한편으로는 실험적 자연철학이라는 뉴턴의 실재론이 자리 잡게 되었다. 주목할 점은, 나중에 칸트가 해결점을 찾았던 거의 모든 문제들이 여기서 논의되었다는 사실이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73~74)[15] 1744년, 이 젊은 철학자는 라이프니츠와 뉴턴/클라크 사이에 논쟁이 되었던 '힘'의 정당한 측정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점점 더 허약해져가는 시기에 칸트는 자신의 첫번째 책(『살아 있는 힘의 올바른 측정에 관한 사유들』)을 썼다. 1746년, 평가를 받기 위해 이 책을 철학부에 내놓았을 때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였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75)[16] 규정된 규칙 없이 그 스스로 자유롭게 사유하고 행동할 수 있으며 자신의 특별한 길을 걸어가는 천재에게는 자신의 생계를 위한 수단이 필요한 법이다. 1746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칸트는 남은 유산을 정리했는데, 많은 것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누이를 돌보아야 했다. 아직 정규 학업 과정을 끝낼 수 있을지 확신할 수도 없는 처지에서, 가난한 칸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가정교사가 되는 길 외에 달리 무엇이 있었겠는가?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88)[17] 1748년, 칸트는 먼저 인스터부르크와 굼비넨 사이에 있는 유드첸이라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다니엘 안더슈 목사 댁의 일을 보았다. 그 뒤에 쾨니히스베르크의 남쪽에 있는 그로스-아른스도르프에서 휠젠 집안의 젊은이들을 가르쳤다. 1754년에 쾨니히스베르크로 다시 돌아올 때까지 그는 6년을 그곳에서 보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88)[18] 가정교사 생활을 하던 6년 동안 그는 교육적 임무에만 묻혀 지내지는 않았다. 전원적인 고독 속에서 안정된 몇 년을 그는 집중적으로 자연 연구에 사용했다. 칸트는 물리학ㆍ지리학ㆍ천문학을 비롯해 여러 분야의 학문적 기록들을 남겨놓았다. 칸트의 자연철학적 연구들은 바로 이 근면함으로 인해 이루어졌는데, 그는 30대에 이 연구물들을 들고 쾨니히스베르크로 돌아와 출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바람과 불 그리고 지구의 연령과 지축 회전에 관한 연구, 물체의 역학에 관한 연구, 1755년 지구의 대부분을 흔들었떤 지진의 특수성에 관한 연구 등이 그것이라 하겠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106~107)[19] 1749년 여름에 드디어 그의 『살아 있는 힘의 올바른 측정에 관한 사유들』이 서점에 모습을 드러냈다. 인쇄한 지 3년 뒤의 일로, 칸트는 물론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8월 23일에 견본 한 부를 문화계 잡지사에서 일하는 동료에게 보냈다. 자신의 첫 저술에 대한 서평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동봉한 편지에는 "살아 있는 힘의 올바른 측정을 통해, 잠에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의도에 최후의 결정을 일깨우려는" 독일 자연철학이라는 암시가 곁들여져 있다. 같은 날에 칸트는 저명한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레온하르트 오일러에게도 이 책을 보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오일러를 베를린의 학사원에 초빙했다. 오일러는 그곳에서 1744년부터 수학 수업을 이끌었다. 동봉한 편지의 내용에는 젊은 철학자의 자부심이 불확실한 자기 평가와 결합되어 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82)[20] 칸트의 첫번째 글은 출판상으로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살아 있는 힘(vis viva)에 관한 그의 형이상학적 꿈은 고유한 정신적 힘에서 비롯된 넘쳐나는 자의식과 결합되어 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83)[21] 『자연사와 천체 이론』의 첫 문장에서 칸트는 벌써 자신을 몰아댄 우주론적 시도의 엄청난 난관에 대해 고백하고 있다. 칸트는 태양계에서 항성 전체로 시야를 확대시켰다. 이제 1750년 더행의 라이트가 세운 새로운 가설이 정당화되기에 이른다. 지구가 자신의 축을 회전하면서 불러일으키는 하늘의 순환을 제외하고 항성들의 위치는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반대해, 칸트는 이 별들이 "아마도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 보다 높은 질서의 행성들일 수도 있다"고 추측했다. 칸트는 하위헌스와 헬리 및 모페르튀가 확신했던 "일종의 안개 같은 별들" 역시 다시금 보다 높은 질서의 현상이라고 추측했다. 특히 그 타원형의 모습은 칸트로 하여금 이 안개 같은 조직이 "파악할 수 없이 수많은, 더구나 하나의 공통된 중심을 둘러싼 별들의 모임과 다를 바 없다"고 가정하게 했다. 즉, 갈락시스도 태양계나 은하계와 마찬가지로 같은 체계에 따라 정돈 되어 있다는 것이다.[22] 1756년 4월 8일, 서른두번째 생일을 두 주 남겨놓고 칸트는 "가장 위대하고 막강한 왕"인 프리드리히 2세에게 한 통의 편지를 썼다. 벌써 5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공석으로 있는 교수직 신청을 한 것이다. 이 자리에는 원래 어느 누구보다도 자연철학에 대한 칸트의 관심을 일깨우고 지도했던 스승 마르틴 크누츠가 있었다. 그런데 그가 1751년 1월 25일 노환으로 죽자 공석으로 남은 것이다. 이제 그의 제자는 그 자리로 들어가기에 충분하다고 느꼈다. 그것은 정교수 자리는 아니었고, 보수도 신통치 않으면서 강의를 많이 해야 하는 특별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에게 이 직위는 대단히 매력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칸트로서는 수년 전부터 애쓰고 있던 목표가 드디어 눈 앞에 다가온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중략) 칸트는 『살아 있는 힘의 올바른 측정에 관한 사유들』로 그의 특이한 대학 과정을 끝마쳤다. 1748년에서 1751년까지 그는 프로이센의 외딴 지역에서 가정교사 생활을 했다. 이어 알베르티나의 사강사라는 가시밭길로 접어들면서 그는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92~93)[23] 칸트가 1756년 4월 6일에 논리학과 형이상학을 가르치는 특수 교수직을 지원했을 때, 그의 느낌은 매우 좋았다. 그의 업적은 필요한 것 이상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희망을 만족시키기에는 시기가 그리 좋지 않았다. 자신의 지원이 성과 없이 끝난 것에 그는 실망했을까? 아무튼 대학 당국은 멀리 떨어진 베를린에서, 경비 절약을 이유로 교수직을 채우지 않기로 결정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98)[24] 가난한 석사 칸트는 그의 위대한 노력이 충족될 때까지 강단이라는 모루 뒤에 앉아, 매일같이 "같은 강의의 무거운 망치를 균일한 박자로" 내려치며 14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98)[25] 마르틴 람페(Martin Lampe)는 원래 프로이센 군대에 복무하던 군인이었다. 그는 군인을 그만두고 칸트의 하인으로 40년간을 살았다. 람페는 매일 새벽 5시 15분 전이 되면, 불침번하는 군인처럼 칸트의 방으로 들어와서 "교수님! 시간이 되었습니다! (Mr. Professor, the time is come.)"라고 군대식의 큰소리로 칸트를 깨웠다. 그러나 칸트도 늙고 람페도 늙자, 람페는 칸트의 돈을 맘대로 쓰기 시작했고, 이를 본 바지안스키가 칸트에게 이 사실을 일러바쳤다. 그래서 칸트는 죽기 2년 전인 1802년에 람페를 해고한다. 그럼에도 칸트는 람페를 극진히 생각했고, 유언장에 람페에게 연금을 준다고 썼다. 람페는 칸트가 죽은 해부터 연금을 받았다. #[26] 1770년 3월 16일, 마흔여섯 살을 눈앞에 두고도 여전히 강사 생활을 하고 있던 칸트는 비밀 국가예산 장관이자 육군 장관인 폰 퓌어스트 운트 쿠퍼베르크 남작에게 긴박한 편지 한 통을 쓴다. 그는 이 편지를 통해 막 공석이 된 교수직에 응모한다. 그러니까 하루 전날, 최고재판소의 사제이자 수학 교수인 랑한젠이 지루한 병환 끝에 죽은 것이다. 이미 칸트는 1756년에도 교수직을 얻으려 노력했으나 허사였고, 또 2년 뒤의 교수 지원에서도 외면당했다. 그는 교수단의 정회원으로서가 아니라 무보수의 사강사로서 벌써 15년 동안 활동한 셈이다. 칸트는 기진맥진할 때까지 주당 평균 20시간씩 가르쳤고, 또 부지런히 저술 활동을 해왔다. 그는 이제 젊은 학창시절 눈앞에 그렸던 학자 생활에 진전이 없을까 두려워졌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198)[27] 칸트가 처한 상황에는 극적인 데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대학 강사로서의 보수는 한푼도 받지 못했지만, 그의 강의를 찾는 사람들이 많았던데다 수강생들이 대개 강의료를 지불했기 때문이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궁핍한 삶에 익숙해 있었다. 어쨌든 사강사로서 칸트는 빚을 지지 않고도 서적상인 칸터의 집에 있는 두 방의 방값을 지불할 수 있었으며, 50년대 말부터는 전직 군인 출신인 마르틴 람페를 하인으로 고용하고 식당에서 매일같이 좋은 식사로 즐거움을 누릴 수도 있었다. 그리고 1766년 2월부터는 왕립 궁정도서관의 부사서로서 약간의 돈도 벌었는데, 여기서 그는 자기 연구를 위해 책을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는 기쁨까지 덤으로 누릴 수 있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199)[28] 세계 전체, 즉 우주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면서 도덕철학적 반성들에도 자리가 마련되었다. 지상의 인간이 천체의 체계보다 더 중요하다. 칸트는 1768년 5월 9일에 자신의 옛 학생인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이 점을 밝히고 있다. 이 편지에서 그는 자신이 이 이론적 지식 체계들에 대한 "깊은 무관심"에 빠져 있음을 알리고 있다. 자신에게는 실제로 "본래의 숙명과 인간의 인식 능력과 성벽의 한계만"이 흥미를 불러일으킨다고 하는데, 거기에는 도덕이 중심에 서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도덕형이상학"을 작업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하면서, 칸트는 이 도덕형이상학의 원칙을 규정하려 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더 이상 젊다고 할 수 없는 이 사강사는 자신의 철학적 숙명과 직업 목표가 다행스럽게 일치하는 윤리 교수직을 바라게 된 것이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201)[29] 그런데 칸트의 마음을 괴롭히는 문제가 단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랑한젠이 수학자였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칸트는 감히 자신의 기대를 "나의 기량과 성벽에 적합한 그러한 자리들에만 한정하려고" 했다. 따라서 그는 다음과 같이 가장 겸손하게 일종의 교환 제안을 했다. 사람들이 그 공석의 교수직을 고인의 사위인 크리스티아니에게 맡기면 어떨까? 카를 안드레아스 크리스티아니는 윤리 교수이기는 하지만, 훌륭한 수학 전문가이기도 하다. 칸트 자신에게 이는 매우 다행스러운 해결책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만 된다면 "나(칸트)는 윤리 교수직을 지원하면서, 귀하(폰 튀어스트 장관)께서 내려주실 존귀한 서언을 겸손히 희망하며 내 본래의 숙명을 따를 생각"이기 때문이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200)[30] 드디어 쾨니히스베르크 철학자의 계속되는 운명뿐만 아니라 근대의 서양 문화사 일반을 결정하는 일이 일어났다. 윤리 교수직 임명에서 칸트는 지지를 얻지 못했다. 그 대신 국왕이자 주인인 프리드리히 2세는 "우리는 임마누엘 칸트 선생을 ... 논리학과 형이상학의 정교수로 그지없이 자비롭게 임명하고 받아들였다"는 내용의 칙령을 내렸다. 그렇게 해서 칸트는 마침내 교수가 되었다. 하지만 이는 불확실한 성공이었다. 왜냐하면 칸트가 자신의 삶에서 바랐던 행복, 즉 윤리와 도덕이라는 실천적 분야에서 자신의 숙명을 따를 수 있는 행복은 왕의 명령으로 말미암아 봉쇄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이 곤란에서 벗어나기 위해 칸트는 10년을 더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중략) 그 책, 즉『순수이성비판』은 의무감에서 비롯된 곤경의 해결책인 셈이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203~204)[31] 그의 강의는 "유머와 분위기로 흥을 더했다." 1762년부터 1764년까지 칸트 밑에서 공부한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가 이러한 사실을 전하고 있다. 그의 "열려 있으면서 사색으로 다듬어진 이마는 깨뜨릴 수 없는 명랑함과 즐거움의 자리였고, 가장 풍부한 사유를 지닌 대화는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왔으며, 유모와 즐거운 분위기는 그의 뜻대로 되었다." 그가 식탁 모임에서 즐겨 이끌어냈던 생동감 넘치는 큰 웃음에 대해서도 익살스러운 근거가 떠오른다. 친구들의 모임에서 한 재치 있는 장난꾸러기가 순수한 마음으로 기대했던 긴장을 갑자기 하찮은 것으로 만들었을 때, "그 웃음은 항상 근육의 흔들림으로 소화에 도움을 준다. 이것은 의사의 지혜로운 처방전보다 오히려 소화를 더 잘 촉진시킨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330~331)[32] 칸트는 강의와 반복 수업을 수행하며 교수로서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 특히 청중들에게 형이상학ㆍ자연지리학ㆍ인간학에 대한 그의 강의는 매우 흥미로웠고, 학생들의 강의록은 학게에 널리 퍼졌다. 그렇지만 칸트는 이것이 썩 내키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1778년 8월 28일에 헤르츠에게 전했듯이, 특히 자신의 형이상학 강의와 관련하여 "강의록을 통해 생각을 정확히 이해하는 일"이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218)[33] 칸트는 자신의 임명을 처음부터 미심쩍게 평했던 동료들과 거의 사교적인 접촉을 갖지 않았다. 그는 그들의 사소한 경쟁과 술책에 관계하지 않으려 했다. 그는 또한 그들의 고지식한 "학자적 자만과 현학"에 대해서도 기꺼이 비웃었다. 칸트는 매일 점심을 먹기 위해 들르는 공공 식당의 다양한 사람들을 더 좋아 했다. 그는 지적인 호언장담과 인위적인 허식을 증오했다. 칸트의 사회적 교제에 관한 다음의 글은 이를 잘 말해준다. "그 철학의 사회적 교제에 관한 다음의 글은 이를 잘 말해준다. "그 철학자는 비틀린 정신이나 마음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보다는 마을의 주막에서 더 편안할 수 있다." 칸트는 함께 잡담하고 농담하며 논쟁하는 세속적인 친구들과의 교제를 가장 좋아했다. 그가 매일 만나는 가장 친한 친구인 영국 상인 조지프 그린이 거기에 속하고, 또한 그린의 사업 상대인 로버트 머더비, 법률가이자 문필가인 요한 게오르크 세프너가 거기에 속한다. 그리고 특히 프레겔 섬 위에 있는 , 당구장이 딸린 식당 "게르라흐"에서 자주 식사를 함께하던 시청 형사계 행정관 테오도르 고트리프 히펠도 거기에 속한다. 식사를 한 뒤 칸트는 대개 네덜란드 나무숲이나 나중에 "철학자의 길"로 알려진 강변길로 산책을 가곤 했다. 좋은 생각은 신선한 공기와 자유로운 운동 속에서 생길 것이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218~219)[34] 그렇다고 해서 그가 괴팍한 외톨이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모임에도 즐겨 참여했다. "이 단체는 학자와 지성인의 모임이기도 했고, 뿐만 아니라 상인이나 가정주부들의 모임이기도 했다." 그는 정기적으로 만나는 좋은 친구들이 있었다. 그의 갖아 신뢰할 만한 친구인 영국 상인 조지프 그린과 그의 대화 상대였던 로버트 머더비, 그리고 젊은 동료 크리스티안 야콤 크라우스, 논쟁을 즐기는 요한 게오르크 하만, 군비위원인 요한 게오르크 셰프너와 은행 관료인 빌헬름 루트비히 루프만, 매우 애매한 법학자이자 작가인 테오도르 고트리프 히펠, 게다가 수많은 학문적 친구들과 부유한 귀족 집안 출신의 교양 있는 많은 부인들, 이들 모두는 칸트와 함께한 모임에서 즐거움을 느꼈다. 칸트는 "식탁 모임"을 좋아했다. 이 모임에서 그는 "우울한 비판적 세계의 현인"이 아니라, "빛이 충만한 대중적인 철학자"였다. 그는 자신에 대한 훌륭한 근거를 올바르게 제시했다. 끊임없이 자신의 무거운 생각을 끌고가야만 하는 철학자에게 공동의 식사는 부담을 줄여주는 향유이기 때문이다. "철학하는 학자에게 혼자 식사하는 것은 건강하지 못하다." 그에 비해 공동으로 식사하고 마시는 것은 건강한 일이라 하겠는데, 그런 자리에서 사람들은 고독한 사유로 인한 압박감 없이 사교적으로 이야기하고 토론하고 농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329~330)[35] 그가 식탁 모임에서 즐겨 이끌어냈던 생동감 넘치는 큰 웃음에 대해서도 익살스러운 근거가 떠오른다. 친구들의 모임에서 한 재치 있는 장난꾸러기가 순수한 마음으로 기대했던 긴장을 갑자기 하찮은 것으로 만들었을 때, "그 웃음은 항상 근육의 흔들림으로 소화에 도움을 준다. 이것은 의사의 지혜로운 처방전보다 오히려 소화를 더 잘 촉진시킨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330~331)[36] 요한 야콥 칸터(Johann Jacob Kanter): 쾨니히스베르크의 서적상이자 출판업자. 칸트는 사강사 생활 동안 칸터의 집에 세들어 살았으며, 몇 편의 논문을 칸터를 통해 책으로 출판하기도 했다.[37] 요한 게오르크 하만(johann Georg Hamann): 칸트의 친구이자 제자. 흄의 『인간본성론』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칸트는 이 책을 읽고 "독단의 잠에서 깨어났다"고 말했다. 하만은 훗날 항구의 세관창고 관리가 된다.[38] 원고는 1780년 가을에 완성되었다. 칸트는 최근 칸터의 책방을 넘겨받았던 고트리프 렙레히트 하르퉁에게 그것을 출판해달라며 넘겨주었다. 그러나 그는 출판을 거절했다. 이러한 추상적인 형이상학 논문으로는 돈이 벌리기는커녕 잃기만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칸트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랐다. 그때 하만이 칸트를 도우러 왔다. 그는 리가의 출판업자이자 서적상인 하르트크노흐와의 접촉을 중재했는데, 이 사람은 원고에 흥미를 보이면서 심지어 논문의 대가로 칸트에게 약간의 사례까지 지불하겠다며 흔쾌히 동의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미루어진 뒤에야 마침내 준비가 끝난 셈이었다. 1781년 5월, 라이프치히의 부활절 장에서 리가의 출판인 요한 프리드리히 하르트크노흐에 의해 쾨니히스베르크 교수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초판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225~226)[39] 2년여가 지난 뒤 칸트는 저명한 대중 철학자 크리스티안 가르베에게 "처음부터 내 저서에 대한 신속한 환대는" 그 자신도 기대하지 않았다고 편지를 썼다. 가르베는 칸트에게 이 세상의 어떤 책도 "읽는 데 그렇게 많은 노력을 들인" 것이 없음을 솔직히 고백했다. 이 어렵고 심원한 작품은 그를 위해서 씌어진 것이 아니었고, 그래서 그는 넘어설 수 없는 난해함에 거의 언짢아졌다고 했다. 그러면 누가 그것을 읽고 이해할 수 있겠는가? 판매 부수는 매우 미미했다. 아무도 칸트의 생각을 좇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가장 친한 친구들마저도 머리를 흔들 정도였다. 그것은 그들에게 읽도록 요구하기에는 신비스럽고 암호 같은 것이었다. (중략) 하만은 칸트가 대중적인, 철학의 문외한도 읽을 수 있는 요약본을 작성하도록 설득했다. 칸트는 그에게 설득되었다. 1783년 초, 리가에 있는 하르트크노흐의 집에서 『학으로 등장할 수 있는 미래의 모든 형이상학에 대한 서문』, 즉 『프롤레고메나』가 출판되었는데, 이를 통해 칸트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생각들과 그것의 철학적 배경을 더 광범위 한 독자를 위해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227~229)[40] 히펠은 1781년 7월 17일 셰프너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그들은 벌써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었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찾는 것은 그 속에 있는 어둠입니다! 그것은 내게 너무나 높습니다. 그렇게 무언가를 찾아낸다고 해서 어떤 도움이 될까요?" 멘델스존은 전율을 일으키는 그 책의 견본을 보자마자 완전히 옆으로 치워버렸다. 가슴을 쥐고 하소연하듯, 그는 칸트에게 "매우 불편하다. 다시금 바라건대, 나는 견본과 같이 만들어져 나오는 일이 영원히 없길 바란다"고 했다. 2년 뒤인 1783년 4월 10일, 멘델스존은 비로소 연락을 취해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반어적으로 드러냈다. "자네의 『순수이성비판』은 건강의 시금석이네. 기력이 늘었다고 생각될 때마다 나는 기운을 빼버리는 이 작품에 대들어본다네. 그런데 죽기 전에 그것을 완전히 숙고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완전히 없지는 않다네." 다시금 가슴을 짓누르는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가장 집중적으로 칸트의 비판을 검토한 하만 ㅡ 그는 1784년에 언어철학적으로도 방향을 지시하는 『이성의 순수주의에 대한 메타비판』을 썼다ㅡ은 1781년 10월 10일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헤르더에게 보냈다. "나는 칸트 저술의 세번째 강독에서도 막혔다네. 네번째는 아마도 통과해야만 할 것이네. 그러나 나는 그가 말을 끝맺도록 해볼 것이고, 발췌본이나 독본이 되어야 할 다음 저술을 기다릴 것이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228~229)[41] 칸트는 자신의 『순수이성비판』이 직면했던 사소한 반향을 고통스럽게 의식하고 있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이에 몰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화부장관 프라이헤르 폰 제드리츠와 그의 개인비서인 비스터는 그들이 받은 헌정본에 대해 침묵했다. 고귀하게 평가를 받는 모제스 멘델스존은 칸트의 작품을 신경을 자극하는 것으로 치부해버렸다. 그의 옛 학문적 동료인 블뢰머는 『순수이성비판』을 읽으면서 손가락이 부족했다는 냉소조의 생각을 내뱉었다.(그래, 여보게 친구, 자네의 서술 방식은 괄호에 넣고 전제되어야 할 것이 너무 많아. 한 단어에 한 손가락을 대고, 두번째 단어에 다음 손가락을 대고, 이렇게 계속하다보니, 한 쪽을 넘기기도 전에 내 모든 손가락이 단어들을 지적하고 있네") 이러한 반응들을 접할 때마다 칸트는 자신의 정신적인 성과를 어떤 고결한 사회가 소유하게 될 것인지 진지하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쓴 것에 아무도 관심이 없어 보였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288~289)[42] 칸트는 이와 관련해 뉴턴을 화제의 실마리로 삼으면서 동시에 그를 반박했다. 왜냐하면 뉴턴은 어떤 일이나 사건에 관계없이 스스로 한결같이 흐르는 절대적ㆍ현실적 시간을 가정했고, 또 움직이지 않고 항상 똑같이 머물며 마찬가지로 "자신 밖의 어떤 것과도 관계 없이 존재하는" 절대적ㆍ현실적 공간을 가정했기 때문이다. 거꾸로 상대적 시간과 상대적 공간은 물체의 운동과 위치에서 직접적ㆍ감성적으로 지각될 수 있다. 칸트는 이와 반대로 뉴턴의 절대주의를 필요 없는 것으로 여겼다. 그는 공간과 시간을 감성의 순수 형식 조건으로 선언했다. 그는 시공을 주관화하고 그것들의 객관적 성격을 거부했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공간과 시간 속의 대상을 감성적으로 직관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이러한 형식 조건들 때문이다. 동시에 그는 이제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이러한 형식 조건을 재구성하는 일을 순수 수학의 과제로 선언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259~260)[43] 인식이 대상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우리의 인식에 따라야 한다. "그러니까 현상에 우리 스스로가 질서와 규칙성을 부여한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것들을 발견할 수조차 없다면, 우리 심성의 본성이 그것들을 처음부터 거기에 부여하지 않은 것이다." "오성 자체가 자연법칙의 원천이다." "오성은 자신의 법칙을 자연에서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그것을 규정한다." 그것이 "코페르니쿠스"라는 이름을 들어 말했던 칸트의 대담한 혁명이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263)[44] 하지만 그를 도덕적으로 자극했던 실천철학의 세 가지 큰 문제들은 이 길 위에서 답변될 수 없었다. 인간 본래의 것을 형성하는 불멸의 영혼이 있는가? 자연법칙으로 결정된 세계 속에서 인간 의지의 자유는 어떠한가? 그리고 신의 현존은 시령자의 상상 속에서만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 하나의 환상 이상인가? 이론이성의 형이상학이 이 문제를 자연철학적 지식의 영역 밖으로 경계지웠다고 해서 그것의 매력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론이성의 형이상학은 또한 동시에 그것에 의해 자기 자신의 경계 설정을 명시한다. 그것은 "아마도 본래 실천적인 것만이 관계해야 할" 차원에 도달하지 못한다. 『순수이성비판』의 말미에서 이야기하는 "우리 이성의 순수한 사용의 최후 목적"을 칸트는 도덕형이상학과 실천이성의 비판에서만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다음에 주어질 그의 큰 과제일 것이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265~266)[45] 같은 이름들이 1783년 결성된 "수요 모임", 즉 "계몽 친구들의 비밀 모임"의 회원 명부에서 발견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은 교대로 돌아가며 규칙적으로 개인 주택에서 모임을 가졌고, 우정 어린 생각들을 교류하면서 서로서로 정신을 계몽했으며, 이를 통해 여러 종류의 개념 자체를 명확하게 규정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284)[46] 『베를린 월간지』는 전통적인 학자의 간행물이거나 대학의 간행지가 아니었다. 닫힌 문 뒤에서 개별적으로 토론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베를린 월간지』가 시민사회의 교양에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잡지는 1783년 초에 요한 에리히 비스터와 프리드리히 게디케에 의해 창간되었고, 거의 모든 수요 모임의 회원이 집필진이 되었다. 이 잡지는 최고이자 최후의 단계에서 독일 계몽주의를 점유하고 있떤 가장 중요한 대중의 모임을 보여준다. (중략) 생각의 자유와 출판의 자유 그리고 독자적 사유와 시민정치적 자유를 향한 적극적인 참여, 더불어 이것들에 결합된 공공성은 이들의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그들은 어두운 감정 철학, 비이성의 감옥, 종교적 독단, 교회의 강요, 광신과 미신 등에 대항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290)[47] 이러한 계획의 수립과 더불어 계몽의 동지들은 동시에 그들의 반대자에 대한 전선을 구축했다. 일반적으로 그들의 전선은 자신들의 감정에 지배받고 자신의 갈채를 신적인 계시로 간주하는 모든 종류의 광신자들을 향해 구축되었다. 이 광신자들은 모든 사유의 자유를 반대하는 자, 특히 문화ㆍ정치적인 반대자로 간주되어 논쟁적으로 반박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직상 그들의 고유한 방식 때문에도 위협을 받고 있던 예수회와 비밀 구교를 향해서도 계몽 단체의 반박이 이루어졌다. 때문에 토론과 강연 그리고 제한적으로 돌려보던 문서 등은 엄격하게 비밀로 유지되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285)[48] Aufklärung ist der Ausgang des Menschen aus seiner selbst verschuldeten Unmündigkeit. Unmündigkeit ist das Unvermögen, sich seines Verstandes ohne Leitung eines anderen zu bedienen. Selbstverschuldet ist diese Unmündigkeit, wenn die Ursache derselben nicht am Mangel des Verstandes, sondern der Entschließung und des Mutes liegt, sich seiner ohne Leitung eines andern zu bedienen. Sapere aude! Habe Mut, dich deines eigenen Verstandes zu bedienen! ist also der Wahlspruch der Aufklärung. (Immanuel Kant, Beantwortung der Frage: Was ist Aufklärung?)[49] und die Maxime, jederzeit selbst zu denken, ist die Aufklärung. (Immanuel Kant: Was heißt sich im Denken orientieren? In: Kant Werke.)[50] 그러므로 상관의 명령을 받는 장교가 직무수행 중에 그 명령의 합당함이나 유익함에 관해 공공연히 따지려 든다면 심각한 해악을 초래할 것이다. 그렇지만 학자의 입장에서 병역 의무의 결함에 대해 논평하고 독자층에게 판단을 호소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금지되어선 안 될 것이다. (이마누엘 칸트 외 『계몽이란 무엇인가』 임홍배 옮김, 길, 2020, p.32)[51] 칸트는 1762년에 루소의 저술을 읽기 시작했다. 청년 시절의 칸트는 뉴턴으로부터 자연과학적인 세계 관찰의 원칙들을 진지하게 수용했다. 그는 『자연사와 천체 이론』에서 그 첫번째 정점에 도달했다. 루소로부터 그는 인간에 대한 새로운 안목을 배웠다. 무엇보다도 루소의 역설은 인간 영혼 속에 감추어진 어떤 흔적을 찾아내는 데 도움을 주었다. (중략) 그러나 루소로부터 인간의 나약함에 대한 어떤 관점을 취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칸트는 인간의 나약함에서 재미있는 측면도 얻어낼 줄 알았다. 인간의 실천적 인식에 대한 칸트의 관심은 루소를 통해 각성된 것이었다. 1765년에 칸트는 전해에 출판된 『미와 숭고의 감정에 관한 고찰』의 여백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기록했다. "오직 이것(물리적 세계 인식)만이 인간의 명예를 세울 수 있다고 믿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무지의 천민들을 멸시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344~345)[52] 1770년 무렵이 되자, 칸트는 궁극적으로 다음과 같은 점을 분명히 하게 되었다. 즉, 자신의 "도덕형이상학"이 "시초의 근거"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태도나 감정에 대한 가능한 고찰 영역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또 자신의 도덕형이상학이 즐겁고 교훈적인 발견에만 제한되어서는 안 되며, 개별적인 주관의 의욕 혹은 행위의 주관적 원리에 불과한 준칙에 머물러 있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도덕형이상학자로서 칸트는 대단히 명확하고 순수하게 "도덕법칙", 즉 도덕성 일반의 최고 원리를 생각했다. 이 원리 안에서 경험적인 현상은 어떠한 역할도 하지 못한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348)[53] 하지만 이러한 생각을 완성하기까지는 10년 이상이 연기되어야 했다. 왜냐하면 1770년 3월 31일에 칸트는 내각에 명에 따라 논리학 및 형이상학 교수로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도덕적 전문성은 고려되지 않았다. 그를 기다린 것은 다른 과제들이었다. 10년 동안 그는 『순수이성비판』에 몰두했으며, 실천철학은 여기에서 단지 암시로만 드러났을 뿐이다. 『순수이성비판』에서는 경험의 형이상학과 변증법적인 가상의 논리학이 전면에 부각되었다. 순수 이론이성과의 대결이 종결된 뒤에야 칸트는 비로소 실천이성, 즉 자신의 본래 사명에 전진할 수 있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348)[54] 도덕적 견지에서 실제 "선한"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칸트는 문제시되는 것이 세계의 사태가 아니라 주체의 능력임을 전제한다. 윤리적 견지에서 볼 때, 도덕적 의식 일반에 대해 능력 있는 주체만이 선하거나 악할 수 있다. 그런데 선의 근원이 되는 주체적 혹은 주관적 능력이란 어떤 것인가? 인간의 정신적 능력인가? 칸트는 아니라고 답한다. 지능, 오성, 재치, 또는 학문적 지식은 해롭거나 악하게 작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질인가? 칸트는 이것 역시 아니라고 답한다. 우리는 용기와 인내 그리고 감탄의 기질을 가지고 선하게 행동할 수 있지만, 악하게도 행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행운인가? 이것 또한 아니다. 권력이나 재산이나 인정 또는 건강 같은 행운을 통해 어떠한 일이 좋게 될 수는 있지만, 그 자체는 어떠한 도덕적 혹은 인륜적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격인가? 칸트에 따르면 도덕적 존재로 간주되기 위해서는 인격이 필요하다. 하지만 인격이 그 자체 스스로 좋은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남아 있는가? 칸트의 『도덕형이상학정초』는 단순한 규정으로 이루어진다. "이 세상에서 그리고 이 세상 밖에서도, 어떤 제한 없이 선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선한 의지 뿐이다." 규정된 또는 보편적으로 수행된 법칙, 행복감, 공리적인 유용성, 외적인 자산들과 내적인 재질들, 이 모든 것은 결코 도덕성의 최상의 원리에 구성적인 것들이 아니다. 오로지 의지만이 윤리적 가치를 지닌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354~355)[55] 1785년에 칸트는 도덕성의 합리적 근거를 "신적인 전능한 의지"에서 끌어내는 대신 전적으로 인간 의지의 자유로부터 이끌어내고 있다. 칸트는 1788년에 쓴 『실천이성비판』의 종결부에서 "내 안의 도덕법칙"을 그 어떤 다른 근거에서 칭송하지 않는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384)[56] 칸트의 『도덕형이상학정초』는 세계를 잘게 쪼개어 더 이상 결합할 수 없는 세계로 보이게 만들었다. "도덕의 영역은 이 세계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칸트의 도덕성의 이념에 대해 가장 일반적으로 제기되는 이의이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350)[57] 칸트도 윤리학 역시 경험적 부분을 지닌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인정한다. 이것은 "실천적 인간학"으로 특징지어진다. 여기서는 감성, 쾌와 불쾌의 감정, 본능과 욕망, 그리고 한 인물의 성격도 자신의 고유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럼에도 칸트는 순수한 도덕 철학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추구할 가치가 있다고 간주했다. 특히 도덕성이 퇴색한 시대에 도덕적 법칙을 순수하고 참된 본질 속에서 추구하려는 시도는 가치 있는 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는 단지 도덕형이상학일 뿐이다. 이 내부에는 "가능한 순수의지"의 이념이 놓여 있다. 여기서는 도덕이 문제시되기 때문에, 이 의지는 동시에 순수한 "선의지"라야만 한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352)[58] 만프레드 가이어의 『칸트 평전』에 따르면, 앞선 계몽군주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새군주인 빌헬름 2세가, 계몽이 끼치는 종교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고자 강경파 신학자 뵐너를 요직에 임명한 것이었고, 이러한 해석은 1900년대 독일의 학자인 딜타이에서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해석으로, (영문판) 캠브리지 칸트 전집에서도 이와 같은 설명을 제시한다. 반면 보다 현대의 연구자인 이안 헌터의 경우에는 뵐너의 칙령이 원칙적으로 베스트팔렌 조약에서부터 내려오는 프로이센의 전통적인 또 다른 계몽적 종교관, 곧 사적인 영역에서의 신앙의 자유와 공적 발언의 통제라는 이념에 의해서 제정되었다고 보고, 나아가 당대 프로이센의 영토 확장으로 인해, 그로 빚어질 수 있을 법한 혼란을 막기 위해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재임 기간 내내 이러한 전통에 기인하는 칙령이 강화 및 유지되었다고 본다.[59] 그는 『베를린 월간지』를 위한 연속적인 투고에서 종교철학자로서 자신의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할 계획을 세운다. 그는 자신이 강조하는 바를 명확하게 세웠다. 선한 삶의 활동적인 심성은 종교적 확신에 대해 절대적인 우위를 지닌다. 그러나 칸트가 확신했던 것처럼, 종교가 도덕에서 비롯된다면 도덕철학만이 그 토대를 제공하게 된다. 이 토대 위에서 믿음의 이론은 비판적으로 연구될 수 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395)[60] 『인간의 지배에 대한 선한 원리와 악한 원리의 대립에 대하여』는 출판 허가를 받지 못했다. (중략) 이러한 긴장된 상황에서 칸트는 『베를린 월간지』에 기고하고자 계획했던, 그의 근원적인 네 편의 원고를 독자적인 책으로 출판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위해 그는 우회로를 찾아야 했다. 우선적으로 그는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의 신학부가 그러한 종류의 철학부 논문을 검열할 수 있다는 점을 드러냈고, 그런 연후 그 논문을 예나 대학의 철학부에 제출했다. 예나 대학의 철학부는 프로이센 밖에서 그 논문을 출판하도록 승인했다. 이렇게 해서 1793년 부활절에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가 출간되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397)[61] ein gewisses Volk (was in der Bearbeitung einer gesetzlichen Freiheit begriffen ist) ist zur Freiheit nicht reif; die Leibeigenen eines Gutseigentümers sind zur Freiheit noch nicht reif; und so auch: die Menschen überhaupt sind zur Glaubensfreiheit noch nicht reif. Nach einer solchen Voraussetzung aber wird die Freiheit nie eintreten; denn man kann zu dieser nicht reifen, wenn man nicht zuvor in Freiheit gesetzt worden ist (man muss frei sein, um sich seiner Kräfte in der Freiheit zweckmäßig bedienen zu können). Die ersten Versuche werden freilich roh, gemeiniglich auch mit einem beschwerlicheren und gefährlicheren Zustande verbunden sein, als da man noch unter den Befehlen, aber auch der Vorsorge anderer stand; allein man reift für die Vernunft nie anders als durch eigene Versuche (welche machen zu dürfen, man frei sein muss)." (Immanuel Kant, Religion innerhalb der Grenzen der bloßen Vernunft)[62] 이러한 검열 조처는 칸트의 어조를 날카롭게 했다. 법적이고 종교적인 권위자의 절대명령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의 자유에 대한 신조는 더욱 급진화되었다. 국가에서나 집에서나 혹은 교회에서나 항상 되풀이되는 지배적인 관료적 선언에 반기를 들며 칸트는 이의를 제기했다. 왜냐하면 국가의 시민이란 것은 노예이거나 아니면 자유를 향한 성숙이 아직 덜 된 인간 일반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전제에 따르면, 자유는 결코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들이 자유에 미리 들어서지 못한다면, 자유를 향해 성숙할 수 없을 것이다. 자유로운 가운데 자신의 힘을 이용할 수 있기 위해서라도 사람은 자유로워야 한다. 처음의 시도는 물론 조야하며, 일반적으로 어렵고 위험한 상황과 결부되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명령 아래에 있고, 다른 사람의 배려 가운데 있다. 인간은 자신의 고유한 시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달리 이성을 위해 성숙할 방법이 없다." 프랑스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를 조망하면서, 칸트는 자유 운동의 조야함과 위험성을 불가피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420)[63] 1789년 6월 17일에 시민계급은 국민의회를 선포했다. (중략) 프랑스 혁명에 대해 칸트는 열광적인 공화주의자이자 주석가였다. 자유는 칸트에게 일생 동안의 소망이었다. 그는 이 소망과 정치적인 시대사를 결합시켰다. 칸트는 자유와 평등 및 자주에 대한 자신의 이념을 자유ㆍ평등ㆍ박애라는 혁명의 외침 속에서 다시금 인식했다. 그는 이제 세계사적인 전망으로 이행가능하도록 자신의 비판철학을 정치화했다. 나이가 들수록 칸트는 더욱더 급진적으로 되어갔다. 90년대에 프랑스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칸트는 열정적으로 모든 것을 고찰하고 논의했으며, 많은 친지와 친구들이 그의 이러한 태도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언제나 정치적인 소식에 관심을 보였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411)[64] 검열관은 무엇보다도 1794년 부활절에 이미 2판 이상이 출간된 칸트의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에 대한 커다란 대중적인 관심을 고려해서 행동해야 했다. "궁중의 먹구름에서 나온 파문"은 피할 수 없었고, 이것을 칸트는 이미 1793년 5월 4일 괴팅겐의 카를 프리드리히 스토이들린 교수에게 보낸 서한에서 예고하고 있었다. 1794년 10월 1일 내각은 "왕의 칙령"을 칸트에게 선포했고, 이것은 칸트에게 10월 12일에 전달되었다. "자비로운 왕의 특별 명령에 따라" 뵐너는 칸트가 앞으로는 더 이상 종교적인 사태에서 책임질 일을 하지 말 것을 통보했다. 왕과 뵐너는 이미 오래전부터 불만을 가지고 칸트가 자신의 철학을 "성서와 기독교의 주된 교리를 왜곡하고 폄하하는 데 잘못 사용"하는가를 관찰했다. 그것은 무책임한 짓이고, "우리와 당신에게 잘 알려진 조국의 의도"에 반하는 행동이다. 이러한 경고 뒤에 노골적인 위협이 뒤따랐다. "우리는 존경스러운 당시느이 가장 확신에 찬 책임을 요구하고, 우리의 커다란 불쾌감을 모면하기를 당신에게 기대합니다. 당신은 앞으로 그와 같은 일에 책임질 일을 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당신의 의무에 합당하게 당신의 능력과 재질을 우리 조국의 계획이 갈수록 더 많이 실현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못할 경우 당신은 계속된 반항으로 확실히 불편한 상황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은총을 받고 있습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401)[65] 파리에서는 루이 16세가 처형되었고, 혁명 법정이 열렸으며, 체계적인 테러가 합법화되었다. (중략) 1794년 10월 1일, 칸트에게 무엇보다도 종교 문제에서 어떠한 죄도 범하지 말라는 왕의 칙령이 떨어졌다. 이에 따라 종교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간행해서는 안 되었다. 칸트는 스스로 자제하며 억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개략적으로나마 정치적 논평을 하게 되었다. 그는 이제 국가의 질서와 존귀한 법을 직접 손대기 시작한 것이다. 1795년 4월 5일, 바젤에서 맺어진 프랑스와 프로이센 사이의 단독 강화에 인상을 받아, 그는 영구평화를 향한 그의 철학적인 기획을 써나갔다. 『영구평화론』은 그해 말엽에 모습을 드러냈고, 출판상 완전한 성공을 거두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420~421)[66] 1797년 11월 10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죽음과 1798년 3월의 뵐너 장관의 면직은 칸트로 하여금 다시 한번 교회와 국가 그리고 종교와 법에 대해 자신의 비판적인 태도를 자유롭고 공공연하게 표명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와 관련하여 칸트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새롭게 계몽된 정부에 감사하게 여겼다. "반계몽주의자들의 모든 새로운 공격에 반하여 학문 분야에서 문화의 진보를 안전하게 해주는" 이 정부를 칸트는 믿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425~426)[67] 일생을 두고 보면, 칸트는 심한 병에는 걸리지 않은 셈이었다. 단 하루도 병으로 인해 침대에 누워 본 적이 없었다는 말이다. 그 점에 대해 그는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그것을 스스로 처방한 섭생의 근본 원칙을 따른 자신의 의지의 효과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병을 낫기 위한 치료법이 아니었다. 그것은 실천적이고 철학적인 기술이었으며, 생명력을 도덕적인 관점에서 뿐 아니라 건강상의 관점에서 가능한 한 좋게 그리고 길게 영향을 미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441)[68] 칸트는 물론 허약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는 이제 그의 삶의 다음 몇 해 동안 생산적이도록 하는 정신적인 도전에 관계할 많은 시간을 갖고 있다. 오랜 시간 동안 확고한 습관이 된 바 같이, 하인 람페가 매일 아침 5시 15분전에 깨우고 주인이 일어날 때까지 침실에서 기다렸다. 그는 옷을 입고 그 위에 붉은 비단 띠를 한 노란색의 침실가운을 걸쳤고 머리에는 나이트캡을 썼는데, 삼각형의 작은 모자를 그 위에 고정시켰다. 그런 후에 연구하는 방으로 가서 두 잔의 온화한 꽃잎 차를 마시고, 점토로 된 파이프에 담배 한 대를 핀다. 다섯 시에 그는 책상에 앉는다. 이제 그는 오전 내내 연구할 시간을 갖는다. 40년을 교육에 종사하며 통틀어 268개의 연속강의를 하고 그는 1796년 7월 23일 마지막으로 강단아래에 서 있다. 물론 그는 다가오는 학기를 위해 아직도 강의를 알리고 있지만, 더 이상 강의할 상황에 있지 않음을 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446~447)[69] 야흐만은 자세하게 주의를 기울여 묘사했다. 즉, 칸트가 자신의 신체적 행위들과 반응들을 고찰하고 높은 나이에 드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칸트의 신체는 자연으로부터 확실하게 80년이라는 수명을 살도록 규정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자연에게서 삶을 강탈한 셈이었다. 그의 신체의 전체 구조는 그렇게 많은 해를 버티고 유지하기에는 아주 허약했다. 그리고 또한 그의 마지막 몇 해 동안 신뢰했던 바지안스키는 칸트가 어떻게 흔들리며 느슨한 신체라는 밧줄을 타는 체조기예가가 자신의 균형을 잃지 않는가에 대해 자랑스러워 했음을 확실히 한다. "그리하여 또한 그는 자신의 건강과 많은 나이를 자신의 고유한 업적으로 보았다. 그 스스로 지칭하는 바와 같은 예술품으로서 말이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439~440)[70] 그는 약해진 몸 때문에 넘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웃었으나, 몸이 가볍기 때문에 심하게 넘어질 수 없음을 알고 익살을 떨기도 했다. 또한 피로감 때문에 의자에서 잠드는 횟수가 늘어났다. 의자 밑으로 굴러 가끔식 그런 채로 누워 있기도 했다. 스스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누군가가 도와주러 올 때까지 그렇게 가만히 있었다. 때로는 칸트를 아주 태연스럽게 괴롭히던 자그마한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아침에 책을 읽을 때나 글을 쓸 때면 촛불 아래로 머리를 낮추는데, "무명으로 된 나이트캡에 불이 붙어 머리위에 환한 불꽃이 타올랐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놀라지 않고 맨손으로 벗어 바닥에 내려놓고는 불을 껐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459)[71] 바지안스키(Wasianski)는 칸트의 마지막 생애를 돌보았던 칸트의 학생이자 친구였다. 1801년 건강 때문에 더 이상 집을 떠날 수 없게 되자, 칸트는 바지안스키를 자신의 재산 관리인으로 지정했다. 바지안스키는 칸트가 죽은 뒤, 칸트의 생애 마지막 나날들에 대한 전기를 썼다.[72] 1803년 10월 8일에 칸트는 그의 생애에서 처음으로 예사롭지 않게 아팠다. 그의 아버지처럼, 뇌졸중의 발작이 그를 갑자기 땅위로 밀어 넘어뜨렸다. 물론 그는 다시 회복되었으나, 그러한 타격은 그를 쇠약하게 했으며, 살려는 칸트의 의지가 꺾이게 되었다. 곧이어 그는 자신의 이름을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었고 거의 무엇인가를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되기에 이르렀다. 그의 주변에 잇는 사람을 더 이상 인식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태연하고 침착했으며 평온했다. 그의 몸은 거의 해골처럼 수척해졌다. 1804년 2월 그는 죽음의 형상처럼 보였고, 그의 침대에서 종종 의식이 없는 채로 누워 있었다. 2월 12일 밤에 그는 마비된 듯이 시간을 헛되이 보냈으나 의식이 깨어 있기는 했다. 방에는 바지안스키가 머물고 있었다. 1시경에 칸트가 목마르다는 표정을 지었다. 바지안스키가 그에게 포도주와 물을 섞어 조금 달게 만든 음료를 마시도록 갖다 주었다. 조금 기운을 돋우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맛이 있었을 것이고 또한 그에겐 충분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그의 삶과 노고를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불명료하게 들리긴 했지만 이해할 수 있게끔 그는 "그것으로 좋다" 하고 속삭였다. 새벽 4시 무렵, 칸트는 더 이상 바꾸지 않을, 반듯하고 한결같은 상태에 올바르게 누어 있다. 바지안스키는 죽음의 침상 곁에 서 있다. 오전에는 표정이 바뀌었다. 그의 눈은 뜬 채로 딱딱하게 응고되었다. 얼굴을 창백했다. 발과 손은 온기가 없었다.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맥박은 몇 초 동안 뛰다가, 이윽고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11시였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4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