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4차 디아도코이 전쟁 시기인 기원전 301년, 프리기아 입소스(현재 터키 중서부 지역)에서 안티고노스 1세의 군대와 리시마코스-셀레우코스 1세 연합군이 맞붙은 전투. 디아도코이 전쟁 사상 최대 규모의 전투였으며, 한때 디아도코이 중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갖추었던 안티고노스 왕조는 이 전투로 인해 몰락하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으로 유명한 이소스 전투와는 시기와 위치가 다른 별개의 전투이다.
2. 배경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3세가 급사한 후, 그리스-페르시아-이집트-인도 북부에 걸친 거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던 마케도니아 왕국은 대혼란에 휩싸였다. 알렉산드로스 3세의 유일한 적자였던 알렉산드로스 4세와 이복형 필리포스 3세는 일단 공동 왕에 등극했지만, 강력한 군사력을 갖춘 장군들간의 내란에 휘말리다가 비참하게 죽었다. 에우메네스같이 어떻게든 제국을 통합하려는 이들도 있었지만, 끝내 장군들에게 제압되어 제국의 분열을 막지 못했다.이렇듯 제국을 분열시킨 장군들 중 가장 강력한 세력을 구가한 이는 안티고노스 1세 모노프탈모스(Μονόφθαλμος, "애꾸눈")였다. 그는 알렉산드로스 3세의 동방 원정에 처음부터 함께 했고, 이소스 전투에서 승리한 알렉산드로스 3세가 바빌론으로 진군할 때 후방에 남아서 보급로를 차단하려는 페르시아의 분견대를 3차례 격퇴했으며, 이후 소아시아의 미 점령 지역을 모조리 점령하여 보급로가 유지되도록 힘을 기울였다.
알렉산드로스 3세가 사망한 후, 안티고노스는 프리기아, 리카오니아, 팜플리아, 리키아, 그리고 서부 피시디아의 지배권을 확보했다. 이후 그는 제국 섭정에 오른 페르디카스에 대항해 프톨레마이오스 1세, 안티파트로스, 크라테로스와 연합하여 1차 디아도코이 전쟁을 벌였다. 전쟁은 페르디카스가 이집트로 쳐들어갔다가 나일강을 건너지 못해 고전하던 중 셀레우코스 1세, 페이톤, 안티게네스에게 암살되면서 마무리되었다.
이후 제국의 새 섭정은 안티파트로스가 되었고, 안티고노스는 아시아의 스트라테고스로 임명되어 왕실의 군대를 지원 받아 페르디카스와 연합했던 에우메네스를 공격해 오르키니아 전투에서 격파하고 노라 요새에 틀어박히게 한 후, 다른 페르디카스파 잔당들을 각개격파했다. 그러던 기원전 319년 안티파트로스가 노환으로 죽고 폴리페르콘이 새 섭정에 등극하자, 그는 폴리페르콘을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마케도니아 총독 카산드로스 등과 연합해 폴리페르콘을 추방하였으며, 폴리페르콘과 연합하여 자신에게 대항한 에우메네스를 붙잡아 처단했다.
이리하여 제국의 실권을 장악한 안티고노스는 셀레우코스 1세, 페이톤 등을 위험 인물로 여겨 처단하려 했다. 페이톤은 체포된 직후 처형되었지만, 셀레우코스는 용케 몸을 피해 프톨레마이오스가 확고히 장악하고 있는 이집트로 망명했다. 이후 안티고노스는 소아시아를 장악하고, 시리아의 대다수 영역을 확보했다. 이에 기원전 314년 카산드로스, 셀레우코스, 프톨레마이오스, 리시마코스가 반기를 들면서, 3차 디아도코이 전쟁이 발발했다. 안티고노스는 처음에는 영역을 계속 확장했지만, 기원전 312년 아들 데메트리오스가 가자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에게 패배하고 셀레우코스가 바빌론을 수복하자, 더 이상의 전쟁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하여 프톨레마이오스-셀레우코스-카산드로스-리시마코스 연합과 휴전 협정을 맺었다.
기원전 311년, 셀레우코스가 제국 동쪽에서 영역을 계속 확장하자, 안티고노스는 이를 막기 위해 바빌론을 공격했다. 그러나 기원전 309년까지 이어진 전쟁에서 별다른 소득을 거두지 못하고 철수해야 했다. 이후 기원전 307년, 안티고노스의 아들 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가 카산드로스가 에페이로스를 장악하러 간 사이에 아테네를 기습 점령하였다. 데메트리오스는 이듬해에 키프로스의 살라미스 해전에서 프톨레마이오스의 해군을 섬멸하고 키프로스를 장악했다. 데메트리오스는 기세를 이어가 기원전 305년 로도스를 포위하고 엄청나게 거대한 공성탑 헬레폴리스까지 동원하며 공격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보낸 지원군에게 막혀 결국 로도스를 공략하지 못했다.[1]
기원전 305년경 디아도코이 형세
비록 로도스를 공략하지 못하긴 했지만, 이 당시 안티고노스의 세력은 그리스, 소아시아,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등 헬레니즘 제국의 영역 절반 이상을 점거해 알렉산드로스 3세가 세웠던 제국을 통합시킬 가장 유력한 인물로 손꼽혔다. 게다가 아들 데메트리오스 1세가 아테네를 포위하던 카산드로스를 격파하고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전부 귀속시키면서, 카산드로스를 조만간 끝장낼 수 있을 듯했다. 카산드로스는 안티고노스에게 휴전 협정을 시도했으나, 안티고노스는 카산드로스가 가지고 있는 모든 걸 내놓지 않으면 평화는 없다고 답했다.
이에 카산드로스는 트라키아의 리시마코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그리고 아시아의 셀레우코스에게 연합을 호소하는 사절단을 보냈다. 바로 옆에 있던 리시마코스는 즉시 카산드로스와 합류하였고, 카산드로스가 테실리아에서 데메트리오스를 상대하는 사이 자신은 병력을 총동원하여 소아시아를 전격 침공했다. 얼마 후 사절단을 접견한 프톨레마이오스 역시 안티고노스에 대항하는 동맹에 가담하기로 하고, 시리아의 시논을 침공했다. 그러나 셀레우코스는 인도 원정을 떠났기 때문에, 사절단을 접견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기원전 302년 소아시아를 침공한 리시마코스는 안티고노스가 안티고니아에서 축제를 즐기는 틈을 타 플라펠루스 장군의 활약을 앞세워 많은 영역을 빠르게 점령했다. 이 소식을 접한 안티고노스는 즉시 대군을 일으켜 소아시아로 진군했다. 그는 아나톨리아 고원 일대에서 리시마코스의 군대와 조우해 곧바로 결전을 벌이려 했다. 하지만 리시마코스는 결전을 미뤘고, 그 사이에 겨울이 오면서 양측은 날씨가 풀릴 때를 기다리기로 하고 동계 숙영에 들어갔다.
이 무렵, 알렉산드로스 3세가 확보했다가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에게 빼앗긴 편자브와 서북 인도 일대를 탈환하기 위한 원정에 착수한 셀레우코스 1세는 찬드라굽타의 강력한 군대를 상대로 고전하다가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그는 아라코시아와 게드로시아, 드랑기아나 및 그 외의 모든 인도 접경 영토를 포기하고, 딸을 찬드라굽타와 결혼시키는 대신 코끼리 500마리를 받았다. 원정을 마치고 본거지로 귀환한 그는 카산드로스가 보낸 사절단으로부터 안티고노스에 대항하는 동맹에 함께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그는 이를 수락하고, 대군을 이끌고 소아시아로 진격했다.
셀레우코스의 대군이 소아시아로 몰려오고 있다는 급보를 접한 안티고노스는 그리스에 있는 아들 데메트리오스에게 전갈을 보내 당장 자신에게 합류하라고 명령했다. 데메트리오스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에페수스에 상륙한 뒤, 리시마코스가 점령한 해안의 많은 도시들을 순식간에 탈환하고 셀라에나에서 아버지와 합류했다. 한편 셀레우코스는 헤라클레아에서 리시마코스의 군대와 합류했다. 이후 양 측은 디아도코이 전쟁 사상 최대의 격전을 벌인다.
3. 양측의 전력
기원전 302년의 반 안티고노스 연합 (핑크색)
3.1. 셀레우코스 - 리시마코스 연합군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연합군은 64,000명의 보병, 10,000명의 기병, 400 마리의 코끼리, 120대의 전차를 갖췄다고 한다. 한편 디오도로스 시켈로스는 셀레우코스가 보병 2만 명, 기병 12,000명, 코끼리 480마리, 그리고 100대 이상의 전차를 이끌었다고 주장했다. 현대 역사가들은 연합군의 전체 보병 중 약 30,000~40,000명이 호플리테스이고, 나머지는 경무장 보병이라고 추정한다.3.2. 안티고노스군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안티고노스 1세의 군대는 70,000명의 보병, 10,000명의 기병, 75마리의 전투 코끼리를 갖췄다고 한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는 데메트리오스가 그리스에 약 56,000명의 보병을 보유했다고 기록했지만, 이 중 어느 정도가 아시아로 동행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며, 전투에 동원된 병력의 다수는 부친 안티고노스가 직접 동원한 부대였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데메트리오스가 1,500명의 강력한 기병대를 보유했던 건 분명하다.4. 전투 경과
기원전 301년 초봄, 양군은 프리기아의 입소스 마을 인근 평원에서 전투 대형을 펼쳤다. 안티고노스는 중앙에 7만에 달하는 보병대를 배치했다. 이들은 대부분 중무장한 장창병이었으며, 전투 경험이 풍부했다. 또한 우익에는 5천 명의 기병대를 배치했는데, 그 중 1,500명은 데메트리오스 직속 기병대였다. 좌익에도 기병 5,000명이 배치되었고, 최전방에 75마리의 전투 코끼리와 경무장 기병대를 배치했다.
셀레우코스-리시마코스 연합군은 중앙에 64,000명의 보병대를 배치했다. 그들은 메소포타미아, 박트리아, 힌두쿠시 등 다양한 아시아 부대로 구성되었지만, 다들 마케도니아식 갑옷을 착용했다. 또한 양측면에 7,500명의 기병대가 배치되었다. 한편, 셀레우코스는 일부 전투 코끼리를 최전방에 배치했지만, 300마리는 예비대로 남겼다. 전차 120대도 있었지만, 눈이 막 녹아서 진창이 된 땅에는 사용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인지 전투에 투입되지 않았다.
전투 개시를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자, 양측의 전투 코끼리들이 돌격했고 보병대가 바짝 뒤따라왔다. 한편 데메트리오스는 그의 정예 기병대에게 상대편 기병대를 향해 돌격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안티고노스군의 우익 기병대는 쏜살같이 돌진하였고, 연합군 좌익 기병대는 빠르게 압도당하여 전장을 이탈했다. 데메트리오스는 도주하는 적을 맹렬히 추격해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
한편, 전장 한 가운데에서 양측의 보병대가 격렬하게 맞붙었다. 양측 모두 잘 무장되었고 전투 기술이 잘 갖춰져 있었기에, 전황은 한 쪽으로 쉽게 기울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전투 경험이 풍부한 안티고노스의 보병대가 상대를 천천히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이때 데메트리오스가 추격을 중단한 뒤 적의 보병대의 후방을 노리려 했다.
그러자 셀레우코스가 승부수를 던졌다. 그는 사전에 예비대로 두었던 300마리의 전투 코끼리들을 파견해 데메트리오스의 기병대를 덮치게 했다. 그렇게 많은 코끼리들과 마주치는 건 처음이었던 군마들은 겁을 집어먹었고, 데메트리오스의 기병대는 순식간에 무력화되었다. 셀레우코스는 뒤이어 경기병대를 친히 이끌고 기병대가 모두 출격하는 바람에 텅 비어버린 안티고노스 군의 우익 쪽으로 진격했다. 그들은 적 팔랑크스 진형의 오른쪽 측면으로 돌아간 뒤, 화살비를 퍼부었다.
상황이 이와 같이 되자, 안티고노스의 병사들 중 일부가 항복했고, 나머지는 패주했다. 안티고노스는 아들의 구원을 기대하며 전장에서 끝까지 싸웠으나, 데메트리오스는 코끼리들을 끝내 뚫지 못했다. 결국 안티고노스는 투창 세례를 받고 전사했고, 데메트리오스는 잔여 병력을 이끌고 전장을 가까스로 탈출했다. 이리하여 입소스 전투는 연합군의 완승으로 끝났다.
5. 결과
입소스 전투 직후 옛 안티고노스 영토에 대한 리시마코스, 카산드로스, 프톨레마이오스, 셀레우코스의 분할
입소스 전투는 안티고노스 왕조의 몰락을 초래했다. 데메트리오스는 전투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뒤 에페소스에서 5,000명의 보병과 4,000명의 기병만 수습했다. 그는 그리스로 돌아가 항전을 이어가려 했지만, 일전에 도움을 받았던 아테네가 그가 항구에 들어오는 걸 거부했다. 데메트리오스는 어쩔 수 없이 아테네를 포기하고 코린트 해협으로 항해했지만, 얼마 안 가 그리스에 남겨져 있던 모든 수비대가 도시에서 추방되었고, 오랜 동료들이 다른 왕들에게 귀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에게 남은 영토는 테살리아, 그리스 일부, 그리고 키프로스 섬뿐이었다.
한편, 입소스 전투의 승자들은 안티고노스 1세의 영토를 나눠가졌다. 리시마코스는 아나톨리아 서부를 가졌고,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유대 지방을 차지했으며, 카산드로스의 동생 플레이스타르코스는 킬리키아와 뤼키아를 가졌다. 나머지 영토는 셀레우코스 1세에게 귀속되었다. 이리하여 네 명의 디아도코이들은 알렉산드로스 3세의 제국을 4개의 왕국으로 분열시키고, 각자의 영역에서 실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평화는 얼마 안 가 깨지고, 네 왕국들은 더 많은 영토를 얻기 위해 또다시 전쟁을 벌이게 된다.
[1] 다만 이 헬레폴리스와 공세가 어지간히 강했는지 로도스는 프톨레마이오스를 칠 때만 지원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안티고노스의 패권을 인정했다. 이 때문에 데메트리오스는 이로 인해 "공성자"라는 별명으로 불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