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E7D8F7><colcolor=#000000> 러시아 제국의 대공비 작센알텐부르크의 엘리자베트 Prinzessin Elisabeth von Sachsen-Altenburg | ||
이름 | 독일어 | 엘리자베트 아우구스테 마리 아그네스 (Elisabeth Auguste Marie Agnes) |
러시아어 | 옐리자베타 마브리키예브나 (Елизавета Маврикиевна) | |
출생 | 1865년 1월 25일 | |
작센마이닝겐 공국 마이닝겐 | ||
사망 | 1927년 3월 24일 (향년 62세) | |
바이마르 공화국 작센 라이프치히 | ||
배우자 | 러시아의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대공 (1884년 결혼 / 1915년 사망) | |
자녀 | 이오안, 가브리일, 타티야나, 콘스탄틴, 올레크, 이고리, 게오르기, 나탈리야, 베라 | |
아버지 | 작센알텐부르크의 모리츠 공자 | |
어머니 | 작센마이닝겐의 아우구스테 공녀 | |
형제 | 마리 아나, 마르가레테, 에른스트 2세, 루이제 샤를로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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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 제국의 대공비. 러시아의 대공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대공의 아내다.작센알텐부르크의 모리츠와 작센마이닝겐의 아우구스타의 1남 4녀 중 차녀. 작센알텐부르크 공국의 마지막 공작 에른스트 2세의 둘째 누나다.
애칭은 마브라(Mavra).
2. 생애
1865년 작센마이닝겐 공국의 수도 마이닝겐에서 작센알텐부르크의 모리츠 공자와 아우구스테 공녀의 1남 4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엘리자베트는 1882년 알텐부르크 성에서 자신의 육촌이기도 한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대공을 만나게 된다. 처음 만났을 때 엘리자베트는 17살이였고, 콘스탄틴 대공은 24살이었다.
1884년 엘리자베트는 러시아로 왔으며 콘스탄틴 대공과 결혼한다. 엘리자베트는 콘스탄틴 대공과 결혼하면서 러시아식 이름으로 "옐리자베타 마브리키예브나"로 개명했다. 다만 엘리자베트는 정교회로 개종하지 않았다.[1] 거기에 엘리자베트는 이콘에 키스하는 것조차 거부하면서 상황이 나빠지기도 했다. 여하튼 여러 작은 문제가 있었지만, 엘리자베트는 러시아에서 잘 정착했다.
남편 콘스탄틴 대공과의 사이에서 슬하 6남 3녀라는 많은 자녀를 낳았다. 남편 콘스탄틴 대공은 다른 러시아 제국의 대공들과 달리 정부를 두지 않고 아내에게 충실했던 몇 안되는 황족 중 하나였다.
사실 마브라와 콘스탄틴 대공은 서로 잘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콘스탄틴 대공은 다양한 원인 때문에 많은 것을 인내하면서 살았다. 특히 동성애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신앙심이 깊었기에 이에 대한 죄책감을 늘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런 성향을 감추고 버리기 위해서 무척이나 노력했다. 그의 일기에 따르면 마브라의 성격은 본인과는 맞지 않았다고.
마브라는 예술적 감각이 뛰어났으며 신앙심도 깊었던 남편 콘스탄틴 대공과 달리 예술적 감각이 뛰어나지도 않았으며 종교에 깊은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도 마브라와 콘스탄틴 대공은 서로에게 충실한 사람들이었으며 또 많은 아이들에게도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당대 황궁에서도 둘 사이에 대해서 매우 좋게 생각했었고,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가 좋아한 친척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과 러시아 혁명을 거치면서 마브라와 가족들은 로마노프 왕조 직계이자 사이가 좋았던 니콜라이 2세 가족들과 더불어 러시아 혁명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남편 콘스탄틴 대공은 제1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15년에 사망했다.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으로 마브라의 아들들 6명 중 4명이 전사하거나 볼셰비키들에게 처형당했다. 특히 장남 이오안, 삼남 콘스탄틴, 오남 이고리는 같은 날에 처형당했다. 장남인 이오안은 1남 1녀를 두었지만 이오안의 장남은 자녀 없이 사망했고, 그 외 아들들은 적자녀가 없어서[2] 결국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더 나아가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계열의 남계가 통째로 단절되게 되었다.[3]
다만, 아예 후손이 없지는 않고 현재 약 10명 여계 후손들이 남아있다. 콘스탄틴의 장남 이오안 왕자의 딸인 예카테리나 공주의 3명의 자녀들과 그녀의 7명의 손주들이 미국 등 다른나라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그 중 한 명이 미국의 배우인 세바스찬 아르셀루스다.
마브라는 가족들과 함께 스웨덴으로 망명했다가 벨기에를 거쳐서 친정인 알텐부르크로 돌아와 정착했고, 1927년 3월 24일 향년 62세로 작센 주 라이프치히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3. 가족 관계
3.1.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1남 | 이오안 콘스탄티노비치 공자 (Prince John Constantinovich) | 1886년 7월 5일 | 1918년 7월 18일 | 세르비아의 옐레나 공주[4] 슬하 1남 1녀 |
2남 | 가브리일 콘스탄티노비치 공자 (Prince Gabriel Constantinovich) | 1887년 7월 15일 | 1955년 2월 28일 | 안토니나 라파일로브나 네스테롭스카야 |
이리나 이바노브나 쿠라카나 | ||||
1녀 | 타티야나 콘스탄티노브나 공녀 (Princess Tatiana Constantinovich) | 1890년 1월 23일 | 1979년 8월 28일 | 무크라니의 콘스탄티네 바그라티온 공자 슬하 1남 1녀 |
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코로첸조프 | ||||
3남 |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공자 (Prince Constanine Constantinovich) | 1891년 1월 1일 | 1918년 7월 18일 | |
4남 | 올레크 콘스탄티노비치 공자 (Prince Oleg Konstantinovich) | 1892년 11월 27일 | 1914년 10월 12일 | |
5남 | 이고리 콘스탄티노비치 공자 (Prince Igor Constantinovich) | 1894년 6월 10일 | 1918년 7월 18일 | |
6남 | 게오르기 콘스탄티노비치 공자 (Prince George Konstantinovich) | 1903년 5월 6일 | 1938년 11월 7일 | |
2녀 | 나탈리야 콘스탄티노브나 공녀 (Princess Natalia Constantinovna) | 1905년 | 1905년 | |
3녀 | 베라 콘스탄티노브나 공녀 (Princess Vera Constantinovna) | 1906년 4월 24일 | 2001년 1월 11일 |
[1] 콘스탄틴 대공의 사촌이자 알렉산드르 2세의 삼남이었던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과 결혼했던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마리의 영향이 있었다. 마리는 개종을 거부하고 루터교회 신앙을 지키면서 결혼했다.[2] 차남인 가브릴은 하급 귀족인 발레리나와 결혼(가족들이 결사 반대했으나 2월 혁명 직후 어찌저찌 강행함) 했으나 자녀가 없었고(아이러니하게도 그 부인의 연줄(당대의 대문호이자 볼셰비키를 지원했던 막심 고리키의 부인을 통한 구명) 덕분에 형제들, 친족들과 달리 겨우 살아남아 망명할 수 있었다.), 6남인 게오르기는 혁명 후 망명했으나 미혼으로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3]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의 남계 단절은 공식적으로는 이오안의 장남 브세볼로도가 죽은 1973년, 비공식적으로는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대공의 형 니콜라이의 차남 알렉산데르의 아들 키릴(1914~1992)이 죽은 1992년이다. 참고로 키릴과 여동생 나탈리야(1917~1999)는 친부의 망명 후 계부에게 입양되어 살았는데, 이 둘은 소련에서 유이하게 거주한 로마노프 황족 출신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작가로도 활동중인 미하엘 (전) 그리스 왕자(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의 누나인 올가 왕비의 5남 크리스토포로스 왕자의 외아들, 1939~)의 전기 소설 "The White Night of St Petersburg(2004)"가 촌수로 6촌이 되는 나탈랴를 그녀의 사망 1년 전에 만나 취재한 것을 바탕으로 니콜라이 콘스탄티노비치 대공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4] 페타르 1세의 장녀이자 니콜라 1세의 외손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