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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0-19 19:12:34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

파일:장 바티스트 그르누이.jpg
영화판
18세기 프랑스에 한 남자가 살고 있었다. 이 시대에는 혐오스러운 천재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는 그중에서도 가장 천재적이면서도 혐오스러운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이 책은 바로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드생 쥐스트, 푸셰보나파르트 등의 다른 기이한 천재들의 이름과는 달리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라는 그의 이름은 잊혀져 버렸다.

물론 그것은 오만, 인간에 대한 혐오, 비도덕성 등 한마디로 사악함의 정도에 있어 그르누이가 그 악명 높은 인물들에 뒤떨어지기 때문은 아니다. 단지 그의 천재성과 명예욕이 발휘된 분야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 냄새라는 덧없는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 소설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1부의 첫 문단 中

1. 개요2. 특징3. 작중 행적
3.1. 1부3.2. 2부3.3. 3부3.4. 4부
4. 연보5. 이야깃거리6. 기타

1. 개요

Jean-Baptiste Grenouille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의 주인공. 영화판 배우는 벤 위쇼.

18세기 프랑스에 살았던 가상의 인물로 인간의 수준을 초월한 초인적인 후각의 소유자이다. 작가의 표현에 따르면 "혐오스러운 천재."

2. 특징

그의 가장 무서운 능력은 바로 초능력에 가까운 후각이다. 말을 늦게 트고 사회성도 좋지 않았으며 어렸을 적부터 고생을 하고 산 탓에 외모도 볼품없었지만, 후각만큼은 동물적인 수준을 뛰어넘어 가히 신에 가깝다. 소설 속 묘사에 따르면 후각이 예민하기로는 성당의 의자에 앉았던 월경 중인 여성의 피 냄새를 맡을 수 있고, 한번 맡은 냄새를 기억하기로는 갓 태어났을 때 어머니에게서 맡은 냄새를 성인이 되어서도 기억하고 있는 수준. 거기다 한니발 렉터기억의 궁전처럼 그 냄새를 머릿속에 수집해서 또다시 맡고 조합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일반인을 초월한 감각의 소유자답게, 어지간한 향기와 악취에는 도리어 무감각한 편이다. 보통 사람들은 견디지도 못하는 악취에도 아랑곳하지 않지만,[1] 정 반대로 웬만한 향기에도 매혹되거나 만족하지 않는다. 그 때문인지 자신을 만족시켰던 향기에 대해서 엄청난 집착을 보인다.

그의 또 다른 무서운 능력은 그 후각에 못지않은 초인적인 수준의 기억력과 의지력이다. 살아남거나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고통이라도 묵묵히 감내할 수 있을 정도의 끈기를 지니고 있으며 덕분에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겼다. 비록 머리가 비상하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기억력은 상당히 뛰어난 편이며 가면 갈수록 경험이 쌓이면서 타인의 심리를 쥐고 흔드는 등 교활한 면모가 강해진다. 또한 앞서 언급하였듯이 후각과 기억력은 인간의 영역을 뛰어넘은 수준이다.

향기[2]는 머지않아 사라진다는 진실을 마주하면서 큰 상실감에 빠지며 이 향기를 보존하려는 욕망을 갖고 있다.

초인적인 후각 외에 또 한 가지 무서운 사실은 그와 얽힌 사람들이 대부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는 징크스이다. 일종의 패턴이 있는데, 그르누이를 착취하거나 그를 이용해 이득을 취한 사람, 혹은 그르누이를 부당하거나 비도덕적으로 대한 사람들이란 것이다. 자기 자식인 그르누이를 살해하려 한 친어머니, 그르누이의 능력에 알 수 없는 공포를 느꼈고 양육비가 끊긴 김에 포악한 그리말에게 일곱 살 어린애를 팔아넘긴 가이아르 부인, 그르누이를 학대하고 착취하다 역시 돈 받고 넘긴 그리말, 그르누이의 재능으로 가장 많은 득을 본 발디니, 그르누이를 이용해 엉터리 이론을 성공시킨 라 타이아드 에스피나스 후작, 역시 그르누이의 재능을 마음껏 취하고 그에 따른 대접은 제대로 하지 않은 드뤼오 등이다. 악마의 재능답게 악마의 가호라도 받는 것 같다. 특히 그르누이의 능력을 이용했던 사람들이 주로 죽어나가는 걸 볼 수 있다.

다만 후작은 딱히 비참하다거나 운이 나쁘다고 할 죽음은 아니다. '치명적 유동체' 이론에 너무 심취되어 높은 산의 신선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 눈보라 속으로 환희에 가득 차서 들어갔으니,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다. 물론 목표는 '영원한 젊음'이지 '죽음'은 아니었고, 하필 산에 오르는 날 기후가 안 좋아 어느 정도는 죽음의 법칙이 작용한 듯하다. 그래도 자신의 이론을 바탕으로 한 도전에서 환희에 차서 죽었으니... 죽은 후에도 전설로 남았다. 참고로 그 역시 그르누이를 이용해 성공하긴 했으나 작중 그나마 그르누이를 대접해 준 편이다. 본인의 엉터리 이론에 끼워 맞춘 것이기에 그르누이 없이도 언젠가는 했을 법한 일이긴 하지만, 그르누이를 이용하여 이론이 성공하여 도취되어 한 모험이니 그르누이가 없었다면 역시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의 능력을 두려워해 잔혹한 그리말에게 팔아넘긴 가이아르 부인은 반대로 '너무 오래 살아서' 비참해졌다.(다만 영화판에서는 그르누이를 팔아치우자마자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강도들한테 살해당했다)그리고 발디니도 영화판에서는 그르누이랑 꽤나 친하게 지내는 것처럼 나오고 악행이라고 할만한 거라고는 그르누이가 떠날 때 도제 증명서를 써주는 대가로 백 종류의 향수 레시피를 알려달라고 한 것 밖에 없는지라 뼛속까지 악인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르누이를 이용하지 않고 나름 최선을 다했던 유모와 신부는 별일 없었는데, 이것이 그들과 아주 짧은 시간만 같이 있었기 때문인지 그를 착취하거나 학대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참고로 진짜 아무런 이후 행적 언급이 없었던 뷔시에 비해 신부는 그르누이가 7세가 되던 무렵 아무런 통보도 없이 양육비 지원을 갑자기 끊어버렸다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지나가는데 일부러 지원을 끊은 것일 수도 있지만 "통보도 없이 갑자기"라는 언급으로 보아 신부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 것일 가능성도 있다.

다만 작중에서 그르누이가 거쳐간 사람이 죽어나가는 경위는 제법 상세히 묘사되는지라, 그 이후 정말 아무 근황도 언급되지 않는 이 신부는 신변에 문제가 생겨봤자 그냥 자연사일 가능성이 높다. 18세기 유럽의 평균수명이 45세인데 테리에 신부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르누이를 맡은 시점에서 이미 50대였으니...

향기 외엔 아무런 관심도 애정도 욕심도 없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부귀영화에 대한 욕심이나 식욕, 성적 욕구 등이 전혀 보이지 않으며 남에 대한 공감 능력도 전혀 없는 사이코패스. 그러나 냄새 외엔 아무것도 욕심 내지 않고 아무런 쾌락도 욕구도 추구하지 않아 대단히 순수하고 무위적인 부분도 있다. 향기 외에는 아무것도 욕심 내지 않아 이용하기 쉬운 바보로 보이기도 하고 스스로도 그렇게 보이려 의도하지만, 향기에만 관심이 있어서 그럴 뿐 결코 바보가 아니며 목표를 위해선 매우 교활하다. 혐오스럽고 비인간적이지만 향기에만 집중된 순수함이 그르누이의 특징이자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냄새를 맡을 수 있고 이를 지배할 수 있지만 정작 본인의 체취는 없다. 이는 그르누이 본인의 절대적인 콤플렉스로 남는다. 작품 내에서 냄새는 '영혼' 혹은 '인간성' 그 자체인데 때문에 냄새가 없는 그르누이는 인간적이지 않은 존재로 묘사된다. 즉 그르누이 자신이 보기에나 타인이 보기에나 그르누이는 영혼이 없는 존재 혹은 악마로,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존재이다.

냄새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르누이가 주변에 있어도 직접 보기 전까지 눈치채지 못하고, 눈으로 보아도 거기 있어서는 안 될 존재처럼 대한다. 그와 만났음에도 만난 기억을 금세 잊어버린다.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 그에게서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는 느낌을 느끼며 무의식적인 거부감을 느낀다.

체취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 초인적인 후각 능력을 가질 수 있었다는 의견도 있다. 자신의 몸에서 냄새가 나지 않기 때문에 다른 냄새에 온전히 집중하는 게 가능해서 그런지도.

3. 작중 행적

3.1. 1부

1738년 7월 17일, 파리의 페르 거리에서 생선 장사를 하던 여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르누이의 어머니는 미혼이었고 정황상 사생아였음이 분명한데[3], 그르누이의 생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고 사실 작중에서는 그게 별로 중요하지도 않다.

그 전에도 네 번이나 아이를 낳았던 그르누이의 어머니는 매번 갓난아기를 생선토막 찌꺼기 속에 방치해 죽였고 그르누이 또한 그렇게 될 뻔했지만, 그르누이를 낳고 잠시 기절했다 정신을 차린 어머니가 그 자리를 떠나려는 순간 그르누이가 갑작스럽게 울음을 터뜨린다. 이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급히 그르누이를 구출했고, 그의 어머니는 그동안 자신이 낳은 아기들을 죽였던 것이 드러나 영아 살인죄로 사형당한다.

어머니가 죽은 후, 그르누이는 유모 잔 뷔시와 테리에 신부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그르누이에게는 문제점이 있었으니, 천재적인 후각을 타고난 대신에 그 자신의 몸에서는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몸에서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는 그르누이에 대해 본능적으로 불쾌감과 혐오감, 공포감을 느낀다.

잔 뷔시는 아이에게 악마가 씌인게 분명하다며 주당 5프랑을 주겠다는 테리에 신부의 파격적인 조건도 마다하며 아이를 거부하고, 신부는 그르누이를 마냥 귀여워하며 잔 뷔시의 말을 헛소리로 치부하지만 잠시 뒤 그녀의 말대로 아이에게 어떤 냄새도 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잔 뷔시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그르누이를 혐오하게 된 테리에 신부는 어떻게든 아이를 떼어놓아야겠다는 생각에 휩싸여 돈만 주면 어떤 아이든 받아주는 가이아르 부인에게 1년치 양육비를 선불로 주면서 그르누이를 떠넘긴 뒤 마음에 안정감을 찾는다.

어릴 적에 당한 사고 때문에 후각을 상실하는 장애를 지녔던 가이아르 부인은 그르누이의 문제점을 알지 못하고 한동안 그를 잘 키웠으나, 그의 범상치 않은 능력을 눈치채고는 내심 그를 두려워하다가, 교회에서 지원받던 양육비가 끊기자 그를 거친 성격의 무두장이 그리말에게 맡겨버린다.

그리말의 밑에서 몇 년 동안 노예처럼 살며 청소년기를 보낸 그르누이는 어느 한 소녀로부터 태어나서 맡아본 적이 없는 경이로운 향기를 느끼게 되었고, 급기야는 이를 살해하고 만다.(영화판에선 의도된 살인이라기보단 실수에 가까운데 여자가 비명을 지르려 하자 입을 막아버렸는데 이를 너무 오래 막고 있던 탓에 여자가 죽어버렸다.) 그르누이는 이후 향수 제조업자가 되어 이런 경이로운 향수를 만들고 말겠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고, 퇴물이 된 향수장인 주세페 발디니 앞에서 한 번 맡은 냄새 만으로 에센스를 조합하여 향수를 만들어내 천재성을 인정받고는 그의 도제가 된다.

그르누이는 발디니의 밑으로 들어가 자신의 놀라운 재능으로 수많은 뛰어난 향수의 조합 공식을 만들어 그를 돈방석에 앉게 해주었으며, 그 대신에 발디니로부터 증기를 이용한 향수 제조법을 전수받게 된다. 그러나 자신이 배운 증기법으로는 (자신이 죽인 처녀처럼) 동물부터는 향기를 뽑아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4] 절망하여 앓아 눕고 사경을 헤메게 된다. 죽어가는 그를 돌봐주러 온[5] 발디니에게 그르누이는 증기 증류법 말고도 향기를 뽑아낼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는지 묻고, 발디니는 프랑스 남부에 있는 향수의 고장 그라스에서는 증기보다 더욱 정교한 냉침법을 사용한다는 대답을 해준다. 이 말을 듣고 그 방법이라면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그르누이는 기적처럼 회생해서 발디니의 사업을 번창하게 한 후, 발디니 밑에서 만든 향수를 다시 만들거나 제조법을 발설하지 말 것, 그리고 발디니가 죽을 때까지 파리에 돌아오지 말 것[6]을 조건으로 도제 자격증을 얻어 그라스로 떠나게 된다.

3.2. 2부

그라스로 향하던 중, 태어나서 처음으로 지저분하고 복잡한 도시인 파리를 떠나 자연의 맑고 상쾌한 공기를 마시게 된 그르누이는 점차 이에 매력을 느끼게 된다.[7] 그는 사람을 피하면서 대자연의 청정한 공기에 이끌려 점점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플롱 뒤 캉탈'이라는 곳에 도착하게 된다. 그곳은 어느 한 방향으로도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인간세상과 가까워지는, 즉 가장 멀리 떨어진 오지다.

그르누이는 그라스로 가야 한다는 목적조차 잊은 채 장장 7년 동안 거기에 틀어박혀 은거 생활을 하게 된다. 깊숙한 동굴 속에 파고들어 있다가 배가 고프거나 용변을 볼 때만 밖으로 나오고, 먹는 거라곤 죽은 들짐승 시체나 벌레, 잡풀 뿐인 그야말로 짐승 같은 생활. 대부분의 시간은 반쯤 꿈같은 자기 머릿속에서, 오직 냄새로만 이루어진 궁전에서 냄새로만 이루어진 하인의 수발을 받으며 살면서 맡아왔던 여러 냄새들을 떠올려 맡을 뿐인 생활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정작 자기 자신의 몸에서는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난생 처음으로 깨닫게 된다. 엄청난 충격을 받은 그르누이의 내면에는, 이전에 자신이 맡았던 소녀의 향기를 반드시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다시 싹트게 된다. 결국 그르누이는 다시 세상 밖으로 나가게 된다.

산에서 내려온 그르누이는 말 그대로 짐승에 가까운 모습이었기에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는데, 그르누이는 산적들에게 붙잡혀 7년 동안이나 굴속에 갇혀있다가 간신히 탈출했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이에 속아 넘어가 그를 도와줄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고, 때마침 몽펠리에 지역의 유지였던 에스피나스 후작[8]은 그르누이야말로 자신이 고안해낸 '치명적 유동체' 이론을 증명할 샘플이라 생각하여 그를 자신의 저택으로 데려와 후원하게 된다.[9]

후작의 도움으로 그르누이는 급조해서 완벽하진 않지만 그럭저럭 '사람의 냄새'라고 할 수 있는 향수를 만들어냈다.[10] 그리고 그것을 뿌린 결과, 여태껏 마치 냄새 없는 괴물 같았던 그르누이의 존재를 다른 사람들이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르누이가 지나가면 누가 지나가는 것을 느끼고 확인했으며, 뛰어놀던 아이들은 그르누이가 지나갈 수 있게 길을 비켜주었고, 실수인 척 부딪히고 사과하니 전이라면 마치 유령과 부딪힌 것처럼 깜짝 놀랐을 테지만 지금은 태연하게 괜찮다고 말하고 마저 길을 가는 것이었다. 그르누이는 결혼식을 보며 환호하는 사람들 사이에 위화감 없이 섞이며 그들을 실컷 조롱한다.

에스피나스 후작이 '치명적 유동체'를 치료한 증거로 그르누이를 다시 사람들 앞에 내보이며 발표하는 날, 모인 사람들 모두 광신도처럼 열광할 정도로 발표는 대성공을 거둔다. 이는 잘 먹이고 꾸며서 멀끔해진 그르누이의 외모와 더불어, 무엇보다도 그르누이가 만든 향수 덕분이었다. 그르누이의 향수 냄새를 맡는 순간 모두가 그르누이에게 절대적인 호감과 신뢰를 가지게 되어 열광한 것이다. 이 발표로 후작과 그르누이 모두 목적을 달성하는데, 후작은 '치명적 유동체'라는 엉터리 이론이 대성공을 거두고 절대적인 찬사와 인정을 받게 된 것이고, 그르누이는 만들어낸 '사람의 냄새'로 사람들과 섞일 수 있음은 물론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 그르누이는 어느 날 슬쩍 그라스로 떠났다. 그날은 이 향수를 뿌리지 않았기에, 문지기도 그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해 대체 언제 사라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한편 에스피나스 후작은 치명적 유동체 이론에 따라 산 꼭대기에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다시 젊어져서 내려올(...) 계획을 세우는데, 하필 그날 심한 눈보라가 치지만 후작은 자신의 이론에 도취되어 옷을 벗으며[11] 알몸으로 눈보라 속을 걸어갔다. 이후 후작은 영영 실종되는데, 날씨와 상황을 보면 당연히 죽었겠지만, 후작이 영원한 생명을 얻어 살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았고, 치명적 유동체 이론은 계속 남아 후작의 영생설은 전설이 되었다.

3.3. 3부

그르누이는 그라스로 들어가, 향수 제조업체를 운영하는 장인의 미망인 아르뉠피와 그의 도제이자 내연남 도미니크 드뤼오의 밑으로 들어가 겉으로는 평범한 향수 제조업자로 위장하는 한편, 그들의 밑에서 냉침법을 배우며 자신의 야망에 한 발짝 더 다가가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우연히 로르라는 여자아이에게서 과거에 죽인 여자의 향기와 비슷한 경이로운 향기를 느낀다. 다만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완성되지 않은 향이었기에 그녀가 다 자라서 완성되는 순간 반드시 그 향기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아르뉠피와 드뤼오의 신뢰를 받아 혼자 일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기자 가장 먼저 만든 건 후작과 있을 때 만든 사람의 냄새였다. 다만 그건 급한 대로 비슷하게 만들어낸, 평범한 사람은 속일 수 있지만 자신의 기준에선 전혀 만족스럽지 않은 향이었고 이제는 재료와 시간이 충분한 만큼 더욱더 정교하게 만들어냈다. 그것도 그냥 만드는 것도 아니고 목적에 따라 쓸 수 있게, 사람의 성격조차 묘사해내는 여러 가지 향수를 만들어냈다.

거기에 사람이 있다는 것만 겨우 알릴 정도로 옅어서 사람들 사이에 아무렇지 않게 섞일 수 있는 겸손한 냄새, 약간 진한 땀냄새와 드뤼오의 정액 냄새를 흉내 내어 그르누이가 거칠고 다급한 사람처럼 느껴지게 하여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냄새, 사람들(특히 여인들)의 동정심을 이끌어낼 수 있는 냄새, 고약한 악취 같아서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그를 피하게 만드는 냄새[12] 등등을 만들어내, 옷을 갈아입듯 필요에 따라 바꿔 쓴 것이었다. 이 냄새들로 거리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된 그르누이는 이제 냉침법으로 사물의 향기를 추출해내는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르누이는 금속 같은 무생물의 냄새부터 시작해 생물의 냄새도 채취해내기 시작했고, 이때 생물이 저항하는 것 때문에 별 수 없이 죽이고 나서야 얻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어떤 떠돌이 벙어리 여자에게 돈을 주고 여러 기름을 바른 천을 두르게 해서 어떤 조합의 기름이 사람의 체취를 가장 잘 추출해낼 수 있는지도 알아냈다.

그러던 중 그르누이는 로르의 향기를 다시 한번 맡아보고 돌아와 그걸 떠올리다가, 문득 자신이 그 향기를 가져와 소유해도 오래가지 못하고 소멸해버리고 만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이내 어차피 잃을 것이라면 한 번이라도 소유하고 잃는 것이 좋다는 것과, 그 향기를 그냥 쓰는 것이 아니라 다른 향기들과 조합해서 조금이라도 더 오래 유지되도록 만들면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보석을 원석 그대로 쓰는 게 아니라 세공하고 다른 보석과 조합하여 쓰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의 향기를 붙들어놓기 위해서는 꽃 같은 것의 향기가 아닌 다른 재료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후 그라스에서 연쇄살인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피해자들은 하나같이 아름다운 여성들이었다. 대체 누가 죽인 건지 종잡을 수 없어 그라스는 공포에 빠지고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수상한 사람들을 무턱대고 의심하고 경계하기 시작했다. 피해자들은 하나같이 머리카락이 전부 잘려나가고 옷이 사라져 있었는데, 이는 그르누이가 그 사람을 죽이고 몸에 기름 바른 천을 발라 향을 추출해낸 다음 체취가 묻어있는 머리카락과 옷으로 싸서 함께 가져간 것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살인은 급작스레 중단되었고, 사람들은 점차 공포스러운 연쇄살인이 끝난 것으로 여겨 조금씩 안심하고 있었다.

한편 그라스의 집정관인 앙투안느 리쉬는 이 연쇄살인사건을 조사하던 중, 살인자가 어떤 알 수 없는 이유로 미녀들을 살해하고 있는데 이는 마치 일종의 "아름다움을 수집"해서 소유하려는 것임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연쇄살인이 끝난 줄 알고 있는 동안 그 혼자만은 그 살인마의 최종 목표가 그라스 최고의 미녀인 자신의 딸 로르일 것이라고 직감하게 되었다. 비록 그 아름다움이 '향기'라는 것만은 몰랐지만 그르누이의 계획을 가장 정확하게 알아맞힌 것이다.

더욱이 그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자신의 딸이 순결을 잃게 된다면 살인마의 표적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까지 추리해내고 벼락치기로 딸의 결혼을 강행하기로 마음먹는다.

그에 따라 앙투안느 리쉬는 딸을 지키기 위해 딸과 함께 최대한 은밀하게 다른 곳으로 떠나 다른 지역의 귀족과 결혼시키려 했으나, 그르누이는 냄새로 이를 추적하였다. 그리고 결국 리쉬가 다 끝났다고 안심한 바로 그날 여관에 침입하여 로르를 살해하고 그 냄새를 추출해갔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만큼은 당국과 여러 공권력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고, 특히 그르누이가 리쉬 일행이 떠난 날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한 경비대원에게 물어보면서 인상을 남긴 바람에 결국 덜미를 잡혔다. 처음엔 이를 믿기 힘들어하던 사람들도 그르누이의 오두막을 수색하면서 나온 살인 흉기와 죽은 사람들의 옷가지, 머리카락 등 결정적인 증거들이 드러나며 확신하게 되었다.

그르누이는 별다른 저항 없이 자신이 살인자라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했고, 결국 사형 판결을 받게 된다. 단 살인 동기에 대해서는 아무리 고문해도 "그들이 필요했어요"라는 말만을 반복했다고.

그르누이는 쇠몽둥이로 근육과 관절이 끊어진 상태에서 죽을 때까지 방치되는 끔찍한 형벌을 받게 되었으나, 사형을 당하기 직전, 자신이 살해한 처녀들과 로르에게서 탈취한 향기를 조합해서 마침내 자신의 목표였던 궁극의 향수를 만들어낸다. 사형을 받기 위해 광장에서 사람들 앞으로 끌려간 그르누이가 그 향수를 자신의 몸에 뿌리자, 사람들은 그르누이에게 매혹되어 그를 마치 천사처럼 숭배하게 된다. 심지어 딸을 잃고 울분에 치를 떨던 앙투안느 리쉬마저도 그르누이를 자신의 양자로 삼겠다고 해버릴 정도였다.

그르누이의 향수 때문에 황홀경에 빠진 약 일만 명의 광장의 군중들은 그 자리에서 단체로 난교를 펼치기 시작한다. 그날 동안 그라스 전체는 광기 어린 향락과 난교의 장으로 변해버린다. 이 광경을 바라보며 그르누이는 악마처럼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승리를 자축하지만 곧 밀려드는 허탈감을 견디지 못하고 그라스를 빠져나온다. 자기 자신으로써 증오받기를 원했으나 사람들은 그가 만들어낸 향기를 사랑했을 뿐이었기에.

3.4. 4부

극단적으로 사람들을 피하는 은거 생활에서도, 궁극의 향수를 이용해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일에서도 삶의 목적을 찾지 못한 그르누이는 파리로 돌아간다. 그가 도착한 곳은 페르 거리의 자신이 태어났던 그 자리. 밤이 되어 모여든 유랑 빈민들 앞에서 그르누이는 자신의 몸에 그 향수를 병째로 쏟아버린다. 그의 향기에 이끌린 빈민들은 처음에는 그라스의 시민들처럼 그를 천사처럼 떠받드는 듯하다가 그를 차지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그 자리에서 그르누이의 육신을 갈가리 찢어버린 후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뜯어먹어 버린다.

그르누이를 죽이고 그 시체를 모조리 파먹어 버린 후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행위에 놀라움을 느끼면서도 난생처음으로 진정한 사랑을 느끼게 된다.

4. 연보

5. 이야깃거리

그르누이를 이용한 사람들은 비참한 결말을 맞이한다는 징크스에서 타인들이 신을 멀리하도록 만드는 '악마적 존재'가 그르누이라는 정황이 암시된다. 가령 발디니의 경우 자신의 상점을 팔기로 하고 이 계획을 신의 은총으로 여겨 노트르담 사원에서 감사의 기도를 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르누이의 뜬금없는 방문 이후 발디니는 감사의 기도고 뭐고 깨끗하게 잊어버린다. 물론 그가 그르누이를 고용한 이후 매일같이 기도를 하기는 하는데, 그 내용이라는 게 '그르누이가 만든 향수에 내 이름을 붙여 파는 속임수가 들통나지 않게 해 달라'라는 신도 빡칠만한 기도였다.(...)

훗날 그르누이와 결별한 발디니는 노트르담 사원에 가서 기도를 드리려 하지만 이번에도 전쟁이 터져 갈 수 없게 된다. 즉 발디니가 노트르담 사원으로 가려고 할 때마다 뭔가 알 수 없는 힘이 개입해 그를 막아서고 있는 것. 작가가 딱히 신학적 관점에 비중을 둬 소설을 쓰지는 않았으나, 상술한 대목들과 연관지어 볼 때 결국 발디니가 맞게 되는 최후는 '저주' 혹은 '신벌'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6. 기타

그의 이름을 "그루누이"라고 표기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열린책들 출판사에서 출간된 정식 번역본을 따르자면 "그르누이"가 맞다. 한국에서는 이 표기를 은근히 헷갈리는 사람들이 많다.

원작 소설과 2006년작 영화에 묘사되는 성격이 꽤 다른 편이다. 원작 속의 그르누이가 궁극의 향수를 만드는데 집착한 이유는 체취가 부재한 탓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신의 내면세계, 즉 세상에 대해 품은 끝없는 증오심을 모든 사람들에게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사형장에서 자신이 만든 향수로 군중들을 굴복시켰을 때, 원작의 표현에 따르면 그르누이는 마치 악마처럼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비웃었다.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향수 만을 사랑할 뿐 그 내면의 증오심을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심한 허탈감 또한 느끼게 된다. 자기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겠다는 진정한 목표만큼은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 속의 그르누이는 은연중에 마음속에서 타인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할 뿐 아니라 어머니에게조차 받지 못했던 일종의 사랑과 관심을 갈구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형장에서 향수를 뿌려 군중들의 숭배를 받게 되자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끝내 눈물까지 흘린다. 원작의 악마적인 모습에 비해 조금 더 인간적으로 변모한 셈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 향수의 향만 사랑한다는 걸 깨닫자 낙심한다. 여하튼 소설과 영화 속의 그르누이는 궁극의 향수를 만든다는 목적을 달성한 후 미련 없이 자신의 삶을 끝마친다.
[1] 과거 무두장이 조수로 일한 경험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입맛을 잃을 정도인 무두장이 일의 악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게 느낀다.[2] 작품에서 향기는 영혼이나 다름없다.[3] 조금 뒤에 등장하는 유모 잔 뷔시도 그르누이를 '그 페르 거리의 영아 살인마가 낳은 사생아' 혹은 '이 사생아'라고 부른다.[4] 증기를 이용한 향수 제조법은 꽃의 냄새 정도만을 뽑아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5] 사실 이것도 본심은 그르누이에게서 향수 제조법을 하나라도 더 뽑아내려는 것이었다.[6] 사실상 발디니 밑에서 일할 때의 일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것이다. 다만 그르누이 입장에선 별로 의미있는 제약도 아니었다. 첫번째 조건은 그르누이의 능력이라면 그보다 훌륭한 향수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고, 두번째 조건은 파리의 모든 냄새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기에 파리에 다시 올 이유가 딱히 없어서.[7] 작중에서 파리는 그야말로 온갖 냄새가 뒤섞인 악취의 구렁텅이로 묘사된다. 실제로 상하수도나 각종 청결용품이 개발되기 전, 많은 사람이 모여사는 대도시의 위생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8] 괴짜 중의 괴짜인데, 온갖 유사과학을 가설하고 실험하는 기행에 이골이 나 있다. 황소의 정액을 들에 뿌려서 우유 꽃을 생산하겠다는 해괴한 발상을 실험하느라 엄청난 돈을 낭비한 적도 있다. 못 사는 사람일수록 더 무거운 세금을 물려서 하류층의 경제적 활동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정신 나간 내용의 사이비 사회과학을 책으로 써낸 적도 있다. 자신이 가진 부와 지위를 고작 뇌피셜스러운 망상들의 증명을 위해 낭비하는 인물. 치명적 유동체 이론 역시 그런 망상에 속한다.[9] '치명적 유동체' 이론이란, 땅에서 모든 생명을 고갈시키는 일종의 가스와 같은 물질이 생성되며, 이것 때문에 모든 생명체가 죽게 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땅에서 멀어질수록 수명이 연장되어 결국은 영생을 누리게 된다는 것인데, 그르누이는 7년 동안 동굴 속에 살면서 그 몰골이 끔찍할 정도로 흉악해졌기에 자신의 이론을 증명할 기회라 여겼던 것이다. 물론 누구나 알다시피 유동체는 개뿔이고, 7년 동안 그르누이가 한 것처럼 제대로 식사 안 하고 안 씻고 이발이나 면도도 안 한다면 동굴이 아니라 궁전에서 지내도 거지꼴이 될 것이다(...).[10] 작중 묘사에 따르면 사람마다 체취는 제각각이지만 그 기본이라 할만한 특유의 냄새가 있다고 한다. 그르누이는 우선 고양이 똥에 상한 치즈, 생선 썩은 내 등을 조합해 사람의 냄새라기보다는 시체의 냄새 같은 악취를 만들어냈고, 거기에 몇 가지 향기로운 재료들을 첨가했다. 그러자 마치 좋은 향수를 뿌린 사람의 체취 같은 게 완성되었다. 그리고 추가로 이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향수를 만들어냈다. 이 향수를 일반인이 뿌리면 그 사람의 체취와 합쳐지며 마치 앞의 향수 같은 향이 완성된다. 체취가 있는 앞의 것을 그르누이 자신에게 뿌리면 뒤의 것과 유사해지는 것이다.[11] 저체온증이 심각해져 감각기관에 이상이 생길 때 나타나곤 하는 전형적인 이상 행동이다. 그런데 에스피나스 후작이 하도 기인인지라 맨정신으로 저 짓을 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12] 둔감한 드뤼오도 이 냄새를 맡자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을 돌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