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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3 16:46:23

장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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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황건적의 수뇌부
천공장군(天公將軍)
장각(張角)
지공장군(地公將軍)
장보(張寶)
인공장군(人公將軍)
장량(張梁)

태평도 교주
천공장군(天公將軍)
대현량사(大賢良師)
張角
장각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Zhang_Jue_Qing_portrait.jpg
별호 <colbgcolor=#FFFFFF,#1f2023> 천공장군(天公將軍) 대현량사(大賢良師)
종교 태평도(太平道)
성씨 (張)
이름 (角)
생몰기간 ? ~ 184년
고향 기주(冀州) 거록군(鉅鹿郡)
1. 개요2. 생애3. 기타4.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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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漢末乘間竊發(한말승간절발): 한나라 말 틈을 타서 몰래 발동하여,
號稱太平道人(호칭태평도인): 태평도인이라 칭하여 불리었다네.
豈爲儒冠誤我(기위유관오아): 어찌 유학을 배운 것이 나를 그르쳤겠나?
居肰首裹黃巾(거연자과황건): 거연하게 머리에 황건(黃巾)을 둘렀다네.
창천이사 황천당립 세재갑자 천하대길

(蒼天已死 黃天當立 歲在甲子 天下大吉)
푸른 하늘은 이미 죽었으니,
마땅히 누른 하늘이 서리라.
때는 바로 갑자년,
천하가 크게 길하리라.

중국 후한 말기의 인물로 후대 도교의 원류 중 하나가 된 태평도의 창시자이자 교주. 영제 때 세상이 혼란하자 주술이나 부적, 영수(靈水)[1] 등으로 병을 고치는 요법(療法)으로 민심을 모아 수만 명의 신도들을 바탕으로 조직화하여 184년 후한 왕조 타도를 기치로 거병함으로서 황건적의 난이 발발한다.

2. 생애

기주 거록군[2] 출생으로 장보, 장량이라는 두 동생과 함께 농민들을 규합하여 이끈 농민군을 황건적이라 불렀는데 이는 머리에 노란 두건을 걸쳤기 때문이다. 워낙에 거대하게 자라난 집단이라 순식간에 8주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세력을 넓힌 장각은 대현량사(大賢良師)이자 천공장군(天公將軍)이라 자칭[3]하였으나 장량이 행림장, 연주 등에서 패하고 장보가 광녕군으로 도망오자 크게 분노했다. 결국 장각이 184년 병사하면서 황건적은 주준, 노식, 황보숭 등의 활약에 패하여 진압되었다. 이때 병들어 죽은 장각은 무덤이 파헤쳐져서 관은 부서지고 머리가 베였으며 잘린 목은 낙양으로 보내져 효수되었다. 비록 난은 1년만에 진압되었지만 황건적은 후한의 행정을 완전히 마비시켰는데 이후 황건적의 잔당들이 몇 년에 걸쳐 대규모로 봉기하고 치안은 극도로 악화되었으며 이를 해결할 중앙군이 무력한 가운데 지역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군벌들이 대두하여 중국 전토를 할거하게 되었다.

3. 기타

4. 대중매체에서


[1] 신비스러운 효험이 있는 물.[2]허베이 성 싱타이시.[3] 천지인 원리를 이용했으며 그의 동생들인 장보장량은 각각 지공장군(地公將軍)과 인공장군(人公將軍)이 되었다.[4] 청나라 말기에는 종교 반란이 매우 많았다. 태평천국을 비롯하여 무슬림, 백련교도, 천지회(天地會), 의화단 등등이 종교 반란을 일으켰고, 이들 때문에 청나라는 약화되어 결국 망했다.[5] 이 때문에 반중국적인 인사들이나 서방에서는 파룬궁 측이 동정을 받고 있다.[6] 중국에서는 교단 차원의 적극적 포교나 해외교류는 정부의 감시와 규제를 받는다.[7] 과거 제도는 수나라 때 처음 시작되었다. 한나라 시대의 관료선발제도는 향거리선제라고 해서, 지방관이 그 지방의 여론을 보고 적당한 인재를 선발하는 방식. 다만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지방관 역시 향거리선제로 선발된 경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짜고 치는 고스톱'이 되는 것이 다반사다.[8] 지방에서 과목에 따라 효렴, 수재 등을 천거해 시험을 거쳐 등용되는 과정은 한나라 때도 있기는 했다. 다만 피휘 문제로 장각이 살던 후한 말에는 수재가 이닌 '무재'로 불리던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