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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3-09 09:20:06

장완의 북벌


장완의 북벌
장소
하동군, 홍농군의 사예주 지역, 교주 서부 및 형주 남부 지역, 익주 파동 백제성 일대 및 상용군
기간
기원후 239년 ~ 240년[1]
교전세력 계한 위나라
오나라
지휘관[2] 계한 대사마 장완
계한 대홍려 겸 교주목 마속
오의
강유
왕평
마충
요화
나헌
장익
서막
왕준
조위 대장군 조상
진태
제갈탄
문흠
왕경
손오 대도독 주연
보즐
전종
여대
육윤
정봉
제갈각
병력 약 24만 명 전후[3] 조위 병력 20만 이상
손오 병력 12만 이상
총합 32만 명 이상
피해 규모 피해 불명 도합 수만 명 이상
결과
계한의 대승
영향
계한, 관중 전역 장악. 그 외 교주 서부 및 형남 3군 점령
위나라의 업성 천도
오나라 정계의 혼란
한오 동맹의 파기, 삼국의 2강 1중 체제 형성


1. 개요2. 배경
2.1. 동관대전 이후의 정세
3. 전개
3.1. 조예의 급사, 계한의 3차 북벌 감행3.2. 하동 전투3.3. 한오 동맹 결렬, 마속의 대오 전선3.4. 계한의 관중 제압, 위오 연합의 퇴각
4.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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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간절히의 대체역사소설 아! 내가 마속이다에 등장하는 가공의 전쟁.

계한의 제3차 북벌임과 동시에 제갈량 사후 진행된 첫 번째 북벌이다.

2. 배경

2.1. 동관대전 이후의 정세

동관대전 이후 천하의 정세는 이전보다 더 유동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압도적인 패권국 위나라에 맞서 계한과 동오가 힘을 합쳐 대항하는 단순한 구도였다면, 동관대전 이후부터는 어느 정도의 힘의 균형이 이뤄진 상태로 계한과 동오 사이에서도 미묘한 공기가 흐르면서 삼국 사이의 긴장이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물론 여전히 국력은 위나라가 가장 강력했기에 한오 동맹은 아슬아슬하게나마 유지되고 있었으나, 이미 계한과 동오 수뇌부는 동맹이 껍데기만 남았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한편 위나라는 병주에서 이민족을 이용한 함정을 팠음에도 계한이 손쉽게 빠져나가고, 결국 병주에서 벌이는 교전에도 일진일퇴를 반복하는 전선에 답답함을 느끼는데, 실각했다가 복귀한 사마의는 계한을 쓰러트리기 위해 과거 관우의 사례처럼 오나라를 자신 편으로 끌어들이자는 전략을 내놓는다. 지금 자신들이 요동을 계속 찌르면서 오나라의 힘을 빼고 있는데, 이를 중단하는 대신 손을 잡자고 권유해볼 수 있다는 것. 조예는 이를 승낙하고 사마의는 손권을 설득하려 시도하지만 손권은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인다.

이에 마속은 팽팽히 대치하는 중인 위나라 쪽 전선보다는 오나라 쪽에 눈을 돌린다. 자신이 알고 있는 오나라의 특징과[4] 과거 관우의 사례를 교훈 삼아 오나라를 적극적으로 견제하고 약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마속은 우선 오나라의 군사적 기둥인 육손을 노렸다. 자신이 과거 참여했던 요동 원정의 부작용이 오나라 내에서 심화되고 있음을 파악한 마속은 이를 이용한 이간계를 사용해 손권과 육손의 관계 파탄을 유도했고, 결국 꾀에 넘어간 육손은 손권의 분노를 사 갖은 모욕과 수모를 당한 끝에 홧병으로 세상을 뜨고 만다. 이로써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를 제거한 마속은 여건상 수군을 기르기 힘든 계한의 사정을 고려, 실제 역사에서도 일어난 교주와 오나라의 갈등을 이용해 오나라 견제를 위한 새로운 전선을 제시한다.

3. 전개

3.1. 조예의 급사, 계한의 3차 북벌 감행

위나라의 2대 황제 조예가 요절하는 사건이 터지자 제갈량의 후계자로서 정권을 잡은 장완은 곧바로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동안 키워온 국력을 총동원해 대규모 북벌을 시도한다.

조예의 탁고대신 중 2명인 조상과 사마의 중 이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인재는 사마의 뿐이었으나, 권력욕에 불타던 사마의는 오히려 이 위기를 방치하여 자신이 위나라의 전권을 잡고자 하는 야망이 있었다. 결국 사마의는 오나라와의 동맹을 추진한다는 핑계로 북벌에 참여하지 않고, 다른 탁고대신인 조상이 이끄는 20만 대군이 장완의 군대에 맞서 전쟁이 시작된다.

3.2. 하동 전투

그러나 대장군이라 해도 야전 지휘 경험이 전혀 없던 조상은 대장군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여러 장수들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며 되려 위군을 혼란 속에만 빠트리고, 반대로 똑같이 경험은 없다지만 제갈량의 후계자로서 상당한 능력과 지휘력 및 결단력을 갖춘 장완은 곧바로 위군이 흔들리는 틈을 놓치지 않고 공격해 하동 전투에서 조상의 위군을 참패시켜 유례없는 대승을 거둔다. 무능한 조상으로 인해 다곤 성역 회전이 연상되는 대승이었다.

3.3. 한오 동맹 결렬, 마속의 대오 전선

너무나도 일방적인 결과에 마침내 오나라는 공식적으로 한오 동맹의 파기를 결정하고 계한을 공격. 11만 대군을 일으켜 계한의 핵심 요새인 백제성과 계한과 분할한 상용을 동시에 침공한다. 북벌로 인해 전 대군을 장완이 쓸어간 상황이었기에 절체절명의 위기처럼 보였으나, 이미 이러한 상황은 마속의 예상 범위 내에 있었고 마속은 오나라가 침공하자마자 곧바로 서막, 왕준 등과 함께 인심을 장악한 교주에서 난을 일으킨다. 11만 대군을 동원한 차에 후방에서 난리가 나자 손권은 무리해서라도 교주를 빨리 진압하기 위해 여대를 시켜 1만군을, 교주의 오나라군까지 포함해 1만 6천으로 진격해온다.

과거 여대가 교주를 제압할 때는 겨우 3천이었으니 그 5배에 이르는 대군이었으나, 마속의 군은 계한군 4천에 현지 호족까지 합쳐 2만 4천이나 되었다. 심지어 계한군과 마속의 존재를 모르는 여대는 1만6천의 대군을 휴식도 취하지 않고 몰아서 공세를 가해온다. 왕준과 곽익이란 양장들을 보유한 마속은 대등하게 여대와 맞붙었다.

뒤늦게 마속의 존재를 깨닫고 당황한 여대는 싸움이 길어지면 체력이 고갈된 오군이 질 것을 깨닫고, 그 전에 정예하지 못한 교주군을 격파해 활로를 찾으려 했다. 이에 마속이 직접 군사를 지휘하며 막았다. 그렇게 싸움이 길어질 때 기회를 노리던 왕준은 자신이 빚까지 지며 챙겨준 500명의 정예병을 데리고 여대를 기습한다.

교주군을 격파하기 위해 계속 진용을 움직이던 여대는 왕준의 결사적인 돌격을 막지 못했다. 그렇게 오군의 진형이 찢어지는 순간, 마속이 교주군의 코끼리 부대를 투입해 완전히 적진을 갈라버리면서 여대는 패배한다.

여대는 과거 교주목 사섭과 그 일가를 찢어죽인지라 교주 사람들에게 원한을 많이 샀고, 마속의 계한군도 비겁하다면서 마구 긁어댔다. 이에 마속은 교주사람들의 요구대로 여대의 목을 치고 그 시신은 찢어서 교주 각지에 보낸다.

그러나 마속군의 싸움은 이제 시작이었다. 교주의 반란이 교주 밖으로 번지지 않으면, 손권이 나중에 진압하기로 하고 주력군을 움직이지 않을 터였다. 때문에 마속은 군을 움직여 형남을 위협하기로 한다.

이 때 내항도독 서막이 6천 병력을 더 데리고 합류해 계한군 1만에 교주군까지 더해서 약 2만 5천에 달했다. 물론 수적으로 압도하는 여대군도 제대로 못 막은 교주군을 믿기엔 불안했으나, 점차 나아질 거라 믿고 형남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형남 무릉군에 진입한 마속은 오나라가 장강을 통해 보낼 군사를 경계하면서 극도로 예민하게 움직였다. 이에 비상이 걸린 건 백제성을 공격중인 7만의 오군사령관인 주연이었다. 주연은 고민 끝에 육윤에게 본군에서 1만 5천 병력을 보내서 형주군까지 합쳐서 2만에 달하는 병력으로 마속을 막으라고 시킨다. 육윤은 육손의 후계자로서 그 사병을 이어받았기에 백제성 공세를 약화시키지 않는 선에선 가장 정예한 패였다.

원수 수로를 이용해 이동한 육윤과 북상한 마속은 형주 원릉현에서 대치하게 된다. 원릉현을 넘는다면 무릉군의 주요지역이 나오기에 반드시 지켜야 할 곳이었다. 마속은 수군이 중요한 형남에서 오군과, 그것도 능력이 있는 육윤과 대치하는 것을 불편히 여겼으나 당황한 건 육윤도 마찬가지였다. 마속의 움직임이 너무 빠른 탓에 여대가 끌고 갔다가 패한 잔존 병력을 거의 수습하지 못해 군사는 겨우 1만 7천밖에 안 되었다.

이 때 서막과 왕준 등은 먼저 육윤을 치자고 주장했다. 나헌이 지키는 백제성의 압력을 줄이려면 마속이 무리해서라도 형남에 가하는 압력을 높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속은 나헌이 원역사에서 보이는 실적과, 제자로서 봐온 실력을 알기에 이를 거절하고 수비 강화와 교주군 훈련에 집중한다.

3.4. 계한의 관중 제압, 위오 연합의 퇴각

오군은 마속이 미리 백제성에 주둔시켜놓은[5] 나헌의 대활약으로 백제성에서 진군이 막혀 곤혹을 겪고 있었고, 설상가상 교주를 넘어 형남을 장악하고 형북까지 돌입한 마속의 교주군을 가만히 내버려둘 수 없어 주연이 이끄는 오군은 결국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퇴각하고 만다. 상용을 공격하던 정봉과 제갈각 역시 비의와 장익의 항전으로 인해 난항을 겪고 있었고, 그 와중에 장완이 홍농을 점령하며 관중 지역을 제압했다는 소식과 백제성의 오군이 철수했다는 소식을 듣자 이들 역시 끝내 무성과로 군사를 돌리게 된다.

4. 결과

이 전쟁으로 인해 계한은 홍농군까지 장악해 사실상 관중 일대를 전부 제압했으며, 마속의 대활약으로 교주와 무릉을 비롯한 형남 일부까지 확보하는 큰 성과를 이룩하며 위나라와 거의 대등한 국력을 손에 넣게 된다.[6] 다만 한오 동맹이 파기되었고 위오를 모두 적으로 돌리게 되었기에 앞으로의 북벌은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7] 그래도 계한은 형남과 교주라는 안전선이 설치되어 손오를 견제하는 방어선을 설치했으며,[8] 장안 일대 역시 여러 겹의 방어선을 갖춘 안정적인 상태가 되었기에 계한은 장안으로 천도한다. 반면 전쟁에서 패한 위나라 역시 관중을 완전히 빼앗긴 이상 더 이상 수도인 낙양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게 되었기에 하북의 업성으로 천도하고, 오나라도 동맹을 배반했는데 역으로 영토만 잃어버린 상황이라 패전한 여러 장수들의 처분을 두고 조정에서 갑론을박이 이어지며 내정이 흔들리는 등 상당한 타격을 입는다.
[1] 전쟁 직후 마속이 이막을 풀어줄 당시 제갈량이 죽고 6년이 지났다고 언급했으므로 전쟁이 끝난 시기는 240년이 확실하다.[2] 각국 부관급은 제외하고 군사 지휘권자만 기재.[3] 장완이 북방에서 동원한 군대가 20만. 마속이 남방에서 이끄는 교주/계한 연합군이 2만 4천 가량. 그 외에 나헌이 백제성에서 거느린 병력 7천과 장익이 상용에서 거느린 숫자 불명의 병력까지 합치면 최소 24만 전후라는 계산이 나온다.[4] 과거 형주 공방전 때도 그렇듯이 오나라는 한쪽이 상승세를 타서 한쪽을 밀어붙이기 시작하면 그 맥을 끊어버려 삼국의 정세를 유지시키는 것으로 천하통일보다는 지방에서 할거하는 것에 더 중점을 두고 있었다. 마치 유럽의 영국처럼. 주인공은 이를 혐오(吳)스럽다고 마구 까내린다[5] 마속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 때문에 몸을 사리고 있다는 것에 미안함을 느낀 장완이 마속의 요청을 적극적으로 들어주어 백제성과 상용에 일부 군사를 배치시켜두었다.[6] 작중 정확히 언급되는 국력 차이는 조위가 4, 계한이 3.7, 손오가 2.3 정도인 2강 1중 체제가 형성되었다. 여전히 위나라가 아주 약간 더 강하긴 하지만 계한은 험준한 지형으로 인해 방어에 유리하고 하물며 이번 북벌에서 조위와 손오의 협공을 성공적으로 격퇴하는 성과를 거뒀기에 사실상 차이는 거의 없다시피 한 수준이 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7] 장완 역시 하동에서 위군을 대파하고 더 진군할 속셈이었으나 오나라의 배신으로 결국 관중을 얻은 것에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8] 직접 익주로 쳐들어오면 교주 방면에서 후방을 교란하고, 교주로 쳐들어오면 역으로 익주에서 협공을 가할 수 있기에 오나라는 절대 계한 쪽으로 전력을 집중할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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