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중이었던 1940년 11월 5일 북대서양에서 일어난 사건. 무장상선이 호송선단을 구원하기 위해 단독으로 적국 정규군함과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역사에 남은 사건으로 동시에 대서양 전투 초반의 처절한 상황을 반영하는 사건으로도 유명하다.2. 배경
크릭스마리네의 도이칠란트급 장갑함인 아트미랄 셰어 함은 영국으로 가는 호송선단을 습격하기 위해 아이슬란드를 지나 북대서양으로 진출했다. 그리고 여기서 고속 호송선단 HX-48를 만났는데, 37척의 수송선으로 이루어진 이 선단은 단 1척의 영국 해군 함정에게 호위를 받고 있었다. 대서양 전투 초반에 호송선단에 호위를 제대로 붙이기 어려운 영국의 상황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그나마 그 호위함인 "HMS 저비스 베이(HMS Jervis Bay)" 함은 원래 군함도 아니었다. 여객선을 개조한 무장상선인 가장순양함(auxiliary cruiser)이었던 것이다. 크기는 14,000톤이 넘었으나 원래 여객선인 이상 기본적으로 취약한 것은 어쩔 수 없었고, 무장도 임시로 설치한 6인치 함포 7문과 3인치 대공포 2문이 있을 뿐이었다. 덤으로 말이 가장순양함이지 가장순양함의 요소에 필수적인 위장이 하나도 안된 상태라 비무장한 여객선처럼 보이지도 않아서 가장순양함의 위력을 제대로 보여줄 수도 없었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아트미랄 셰어가 아주 간단하게 저비스 베이를 제압하고 호송선단도 궤멸하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3. 전투
저비스 베이의 함장 에드워드 페건(Edward Stephen Fogarty Fegen) 대령은 아트미랄 셰어를 발견한 순간 살아남기를 포기하고 전력으로 돌격하면서 선단에는 분산해서 도주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저비스 베이가 전투를 하면서 시간을 끄는 사이에 호송선단의 나머지 상선들이 도주하는 자기희생을 각오한 명령이었다.달려드는 저비스 베이 함을 무시할 수 없었던 아트미랄 셰어는 16,500m에서부터 11인치 함포를 퍼붓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아트미랄 셰어는 포켓전함이다. 10,800톤에 불과한 기준배수량에 비해 강력한 주포인 280mm 6문을 장비하고 있지만 대신 장갑이 장거리에서 경순양함의 6인치 주포에 관통당할 수준으로 약했다. 만약 저비스 베이 함이 박치기하면 그대로 끔살이고 그 전이라도 근접하면 6인치 함포 맞고 만신창이가 될 가능성이 높다.
저비스 베이 함은 아트미랄 셰어가 있는 곳까지 닿지도 않는 6인치 포를 마주 쏘면서 돌격했다. 구경은 경순양함이 쓰는 6인치와 동일했으나 구식에다가 장포신도 아니고 강력한 장약을 가진 포탄을 쏠 수도 없고 장착방식도 그냥 함포만 달아놓은 셈이라 고각도로 포구를 올릴 수 없어서 사정거리가 매우 짧았기에 벌어진 비극이었다.
결국 저비스 베이 함은 아트미랄 셰어로부터 1해리 떨어진 지점까지 돌격한 끝에 11인치 함포의 피탄 누적을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침몰하고 말았다. 함장 에드워드 페건은 만 48세로 실종, 사망처리되었다.
아트미랄 셰어는 단 22분만에 저비스 베이를 격침시키는데 성공하기는 했으나 호송선단은 이미 흩어졌고, 해가 지고 있었으므로 제대로 추적할 수가 없었다. 아트미랄 셰어는 전속력으로 호송선단을 쫓았지만 37척 중 단지 6척을 공격하여 5척을 격침시킬 수 있었다. 1척은 유조선이었는데, 포격을 받고 화재가 발생했으나 다행히 가라앉지는 않았다. 놀라운 것은 배가 불타자 구명보트를 타고 탈출했던 승무원들 중 일부가 배가 가라앉지 않는 것을 보고 다시 돌아와 엔진을 고쳐서 영국으로 몰고 갔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저비스 베이 함은 자신의 임무를 초과달성했다. 스스로가 인간 방패가 되어 아트미랄 셰어로부터 호송선단의 피해를 최소화한 것이다.
4. 이후
저비스 베이 함의 생존자 65명은 마침 근처를 지나던 스웨덴 기선에게 구조를 받았고, 실종된 함장 페건 대령은 빅토리아 십자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한편 영국 해군은 이 사건으로 대규모 호송선단에는 꼭 호위함대로 전함을 붙이는 등 보다 엄중한 경계를 취하게 되었다.그리고 실제로 영국 해군의 조치는 적절했다. 포켓전함보다 더 강력한 샤른호르스트급 전함 2척이 대서양에서 통상파괴전하려고 나갔다가 넬슨급 전함같은 강력한 영국의 전함을 목격하고 전투를 포기하고 후퇴한 사례가 존재한다. 그래서 호송선단을 호위중인 영국 전함까지 박살내고 호송선단도 초토화할 생각으로 비스마르크급 전함 1번함 비스마르크를 투입하였고 그 과정에서 비스마르크 추격전이 발생하게 된다.[1]
이 전투에서 페건 대령의 결단은 대서양 전투 전체를 통틀어 가장 영웅적인 것 중 하나로 여겨지며, 이 사건은 은하영웅전설에 등장하는 그랜드 캐널 사건의 직접적인 모티브가 되었다. 사건의 개요나 함장의 이름이나 딱 이 사건이 모델이다.
[1] 노르웨이 침공에서도 샤른호르스트급 전함 2척이 영국해군의 리나운급 순양전함인 리나운 1척에게 쫓겨나기도 했다. 샤른호르스트급 2척의 주포화력은 280mm 9문 X 2척 = 18문이고 리나운은 380mm 6문이다. 위력은 리나운이 훨씬 강력하지만 주포문수는 3:1의 비율이고 리나운은 순양전함이다. 즉, 전함보단 장갑이 약해서 수치상으론 충분히 해볼만했다. 문제는 전투 초반에 그나이제나우가 리나운의 포격으로 주포를 사용할 수 없게되면서 순식간에 화력이 반토막나서 포문수가 3:2의 비율로 바뀐데다가 영국은 구식군함이 포함되기는 하지만 10척이 넘는 전함급 함선이 남아 있었던 반면(퀸 엘리자베스급 5척 + 리벤지급 4척 + 넬슨급 2척 + 어드미럴급 1척 + 리나운급 2척 + 킹 조지 5세급 1척+4척(건조중)) 독일의 경우 저 둘이 전함의 전부였다(신형 전함인 비스마르크급은 아직 취역하지 않은 상태). 리나운이 방어력이 부실하다고 하더라도 더 대구경의 주포를 가진만큼 전투를 벌이기 부담스러운 상대였기에 후퇴한 것. 말 그대로 서로가 서로에게 극딜을 선물할 수 있는 상황인데 이러면 당연히 군함 숫자가 부족한 독일 해군이 점점 불리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