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저화(楮貨)는 고려 말과 조선 시대 초에 발행한 한국의 지폐이다.2. 내용
2.1. 고려
고려 전기에는 철전과 동전 같은 금속 화폐를 만들어 썼다. 하지만 성종 때 만든 철전과 숙종 때 만든 동전은 널리 쓰이지 못했다. 그에 비해 숙종 때 도장을 찍은 은병은 고려 후기까지 계속 쓰였다.그런데 고려 후기에 원나라의 간섭으로 은이 많이 빠져나가고, 그 대신 원나라 화폐인 보초가 들어왔다. 이 과정에서 은값이 크게 뛰었고, 충혜왕이 소은병을 만들며 제도를 유지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고려 말기에는 고려의 화폐 제도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한편, 은병과 함께 쓰였던 포는 점점 품질이 나빠져 옷감 구실도 못 할 정도로 거친 추포가 유통되었다. 이는 고려 후기에 물가가 크게 오르고 유통 질서가 어지러워진 상황을 보여준다. 거기다 고려 말에는 원나라의 영향력이 약해지고 보초의 가치가 급락하면서 고려 내 화폐 유통에 혼란이 일어났다.
이에 공민왕 때부터 새로운 화폐 제도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1356년에는 도당에서 은 1냥으로 은전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1390년 3월, 중랑장 방사량은 지폐인 저화를 유통하자고 건의했다. 같은 해 7월, 도평의사사도 저화 유통을 주장했는데, 방사량은 저화만 쓰자고 한 반면, 도평의사사는 저화를 기본으로 하되 포화와 함께 쓰자고 했다. 홍복도감을 없애고 자섬저화고를 세워서 고려통행저화를 발행하고, 오승포와 함께 쓰면 나라 살림도 보충하고 유통도 안정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고려는 원나라 지폐를 써 본 경험이 있어서 저화 발행이 낯설지 않았다. 원 간섭기 고려와 원 본국이 교류할 때 교초가 약간 사용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유통량이 본격적으로 원과 연계될 정도로 깊게 침투한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원에서 고려 왕실에 사여품을 내릴 때나 원의 고관들이 고려에 방문했을 때 지불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고려 내에서 교초가 유통된 기록은 전혀 없으며, 고고학적 증거도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고려인들이 교초를 사용한 경험은 고려인들이 원으로 가서 생활하거나 교역할 때 정도였을 것이다. 이런 제한적 사용 때문에, 고려의 재정 역시 교초가 비중이 높았을거란 증거는 없다.
그렇게 저화가 실시되나 했는데, 여말 교체의 정치적 혼란 때문에 또 중지되고 만다. 1392년 4월, 심덕부와 배극렴이 자섬저화고를 없애고 저화와 인판을 폐기하자고 해서 저화 유통은 미뤄졌다. 그리고 그 사이 고려는 멸망했다.(...) 그러다 조선 태종 1401년 4월, 하륜의 건의로 사섬서를 세우고 이듬해 1월에 저화 2천 장을 발행했다.
2.2. 조선
조선 태종 때와 세종 때 중국을 본받아 저화를 발행하였는데, 이것은 쌀을 본위로 하는 화폐로 유통 시도 되었다. 그러나 여러가지 이유로 저화 정책은 실패한다.태종 2년, 저화가 처음 나왔을 때는 한 장의 가치가 상5승포 1필이나 쌀 2말로 책정되었다. 또 관리들에게 녹봉을 저화로 일부 주게 했고, 쌀과 면주, 목면 등으로 저화를 살 수 있게 조치했다. 그리고 저화를 믿게 하려고 저화로 국고의 금, 은, 목면, 마포, 저포 등을 살 수 있게 했고,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쌀 3천 석으로 저화를 사들이게 했다. 또 사재감의 어육과 풍저창의 쌀과 콩을 저화로 살 수 있게 조치하기도 했다. 또 4월에는 저화의 위치를 굳히려고 5승포 쓰는 것을 금지하고 강제로 저화로 전용시켰다.
이러한 강력한 조치로 인한 것인지, 태종 2년 7월경에는 '백성들이 이미 저화를 편하게 여긴다'는 발언이 등장하기도 한다. 완전히 성공적으로 안착하였는지에는 의문의 소지가 있으나, 적어도 일부 관헌은 저화정책이 자리잡아가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9월에는 태종이 갑자기 오승포 사용을 허가하는데, 이 정도로 빠르게 저화 전용을 포기하고 포화 겸용을 허가하는건 아직 초기 단계인 저화의 입지를 위험하게 할 수 있는 조치였다. 처음에 저화를 반대했던 대간들까지 '아니 잘 정착해가는 중인 저화 정책 왜 갑자기 포기함?' 하고 따질 지경이었다. 이듬해 9월에는 하륜이 극구 만류하는데도 태종은 저화가 자기 실수라며 폐지를 단행한다.
그러고서 태종 10년에 다시 의정부가 저화 사용을 건의하는데, 또 무슨 변덕인지 지난번의 저화 폐지가 실수라며 또 시행한다. 이때도 처음에는 포와 저화를 같이 쓰게 했지만, 저화가 잘 돌게 하려고 포 쓰는 것을 금하고, 세금으로 내는 포를 저화로 바꾸게 하는 등 강하게 밀어붙였다. 또 서울과 개경에 화매소를 두어 국가 물건과 저화를 바꾸려 했고, 작은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저화를 내게 하고, 공장세, 행상세, 노비가 바치는 세금 같은 것을 저화로 내게 했다. 그리고 단 한번이지만 호저화(戶楮貨) 라고 하여 집 칸수 마다 한 장씩의 저화를 내게하는 인두세도 시행하였다.
그러나 실제 값어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백성들의 생각과 저화 자체의 크기나 질에 따른 쓰기 불편한 점, 그리고 작은 거래에 도움이 안 되는 이름뿐인 값, 거기다 국가 물건과 교환이 오래가지 못한 점 등으로 저화 가치는 계속 떨어졌다.
세종 재위 기간인 1423년 무렵에는 저화 1장이 쌀 한 되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국가에서는 저화를 계속 사용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였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16세기에 이르면 저화는 민간 유통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3. 실패 원인
일부에서는 조선이 억상을 하고 화폐를 발행하지 않은 것은 원나라의 사례를 보고 반면교사로 삼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원나라가 교초를 이용한 중상주의 경제를 운영했는데 원나라가 교초를 남발하자 그 중상주의 국제 경제가 무너진 것을 보고 조선 사대부들이 상업의 위험성을 느꼈다는 식의 주장인데, 실제로는 여말선초 당대 문헌에서 비슷한 논조의 주장이 전혀 없기 때문에 완전히 허무맹랑한 주장일 뿐이다. 저화 자체가 교초의 본을 받은 것에서 드러나듯 조선은 원의 교초 제도를 매우 좋은 것으로만 인식했고, 결국 실패한 것에서 보이듯 원의 교초 정책의 성공과 실패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거나 반면교사로 삼지도 못했다.교과서나 그 바탕이 되는 국사편찬위원회의 우리역사넷,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 80~90년대에 정립된 설을 기반으로 한 서술들에서는 백성들이 실제 가치를 중시해서 "먹지도 입지도 못하는" 저화는 가치가 없다고 생각되어서 통용되지 않았다는 설명이 흔히 쓰여 있다. 또 조선의 시장 경제 발전이 미진했던 것이 원인이라는 주장도 많이 통용된다. 하지만 2010년대 이후의 연구에서는 이런 설명이 조선왕조실록의 관료들의 주장을 그대로 옮긴 것 아닌가 하는 검토가 진행되었고, 좀 더 입체적으로 경제학적인 이론을 도입하고 조선 전기의 사회경제적 조건과, 실제 시행된 저화 정책들을 검토하여 실패 원인을 분석하는 논문들이 제시되었다.[1][2][3]
일단 화폐는 실물가치와 액면가가 따로 움직인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화폐의 실물 가치가 높다고 한들, 액면가의 가치가 떨어지면 사람들은 화폐를 녹이거나 실물로써 쓰는 등의 대응을 하지 화폐로써 유통하여 사용하지는 않는다. 저화 같은 종이라면 벽지로 쓰고, 금화라면 금화를 녹여서 금괴로 쓴다. 이를 보여주는 예시가 당시 조선에서 통용되던 포화(布貨)다. 이 시기 통용되어 화폐라는 이름으로까지 불릴 정도의 위치였던 것은 오승포(五升布)와 이승포(二升布)였다. 원래 삼베를 가지고 제대로 된 옷감을 만들려면 12승에서 26승 정도로 짜야 한다. 오승포는 옷감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궁여지책으로 옷을 만들어 입을 때나 혹은 속옷이나 푸대자루 등을 만들 때 쓰던 저질 옷감이었고, 삼승포나 이승포로 옷감을 지으면, 옷을 입어도 나체가 다 보이는 거의 누드나 다름없는 상태가 된다. 이 추포들도 저화와 마찬가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화폐로 통용된 것이다. 조정에서는 이승포를 만들면 옷감만 낭비된다고 몇 번이나 제작을 금지시켰으나, 마땅한 물물교환 수단이 없어서 민간에서는 조정의 명령을 무시하고 계속 제작, 유통시켰다. 즉, 오승포와 이승포는 실물 가치가 없이 오직 화폐로써 통용되는 가치만 있는 물품화폐로 이미 정립되어 있던 것이다.[4]
또 함께 제시되는 조선의 상업경제 수준도, 조선이 상업이 주변국가나 유럽에 비해 미발달한 것은 사실이나, 조선은 전기 시점에 이미 민간에서 자생적으로 물품화폐를 사용할 정도 수준의 상업에는 도달했다. 조선의 민간경제는 마직물이나 면직물로 간이 화폐를 만들어 그를 기반으로 교환을 하는 식의 경제를 구성하고 있었다. 흔히 법화를 상업 발달 수준에 따라서 자연스레 나타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나, 실제로는 전근대 경제에서 정부가 발행한 법화는 대체로 일원적인 본위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고, 민간이 발행하는 여러 종류의 다른 화폐랑 경쟁하는 경우가 전세계적으로 대부분이었다. 상업이 발전하여 화폐 수요가 발생하면 민간도 스스로 화폐를 만드는 일은 전세계 공통이었다. 귀금속 화폐가 아주 오래전부터 자리잡아서 다른 '민간 화폐' 도 전부 귀금속이었던 유럽 및 지중해권과 달리 고립된 경제였던 한반도에서는 그런 민간 화폐가 쌀이나 포목이었던 것이다. 또 화폐가 잘 자리잡은 것으로 보이는 조선 후기의 상평통보 역시 계속 쌀이나 포목과 경쟁해야하는 존재였다.[5]
조선의 지폐 유통 실패는 그보다는 조선 조정의 화폐 유통 정책이 지극히 신뢰하기 어렵고 백성을 착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썼기 때문이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태종은 저화 정책에서 지극히 변덕스러운 면을 보여주는데, 이 배경에는 태종 시기 조정이 시달리던 극심한 재정 부족이 있었으며, 저화 발행으로 재정을 충당하자 금방 무관심해지는 면을 보였다. 또 흐지부지된 저화 정책으로 인해 피해를 본 백성들에게는 아무런 보상이 없었다.
저화의 실패 원인은 현대 경제학으로도 매우 명확하게 설명된다. 태종 시대에 이미 저화는 태환해줄 수 있는 정부 보유 미곡을 아득하게 넘어서는 수준으로 발행되었다. 상기한 호저화를 위해 태종 10년에 이미 수십만장을 넘는 막대한 양의 저화를 발행했다. 이것은 한양과 개성에 있는 화매소에서 쌀을 받고 교환해줘서 군자곡을 채우는데 사용되었다. 그리고 다음해 태종 11년 7월, 태종은 우디르 같이 태세를 전환하여 더는 호저화를 걷지 말라고 명한다. 이유가 이상한데, "호저화는 다만 (저화가 널리)통용되기를 바란 것이고, 영구히 항식(恒式)을 삼을 수는 없으니, 금후로는 거두지 말라."[6] 이다. 저화가 널리 통용되기를 위해 한 정책인데 첫 해에 쌀 좀 받는데 성공했다고 바로 폐기해버린 것이다. 이렇게 저화로 세금을 걷는 정책을 폐해버리자 1년이 채 되지 않아서 저화의 가치는 폭락한다. 그 외에도 이상한 기사가 나온다. "사람들로 하여금 저화를 얻기가 어려운 줄 알게 한다면, 죄를 범하는 것도 쉽지 아니한 줄 알 것이다."[7]. 저화를 널리 통용시키려는 것이 목적이라면 계속 밀어붙이고 지방에서도 구하기 쉽게 해야하는데, 되려 태종은 그걸 막으려 하고 있다. 이유는? 저화를 오직 화매소에서만 구할 수 있게 해야 지방의 쌀들을 중앙으로 끌어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쌀을 채우고선 저화를 팔 때는 쌀을 받으면서 저화를 받고서는 쌀로 태환해주지 않았다. 이미 태환 가능한 쌀보다 유통량이 많으니까 해주고 싶어도 불가능했다. 그리고 금본위제 항목에도 나오지만 이렇게 명목상 태환권인데 발행량이 태환 가능한 양보다 많으면 정부가 손해를 보거나, 초인플레이션이 터져 화폐가치가 폭락하거나, 둘 다가 터지거나 하는데, 저화는 정확히 이 조건을 충족해서 둘 다 터진 것이다.
다른 물품으로 태환을 해주자는 논의도 예산 부족 문제로 태환을 중지하여 저화의 가치는 폭락했다. 이렇게 저화의 가치가 폭락하자, 처음에 저화로 받겠다고 했던 세금들도 저화의 액면상 가치에 해당하는 쌀로 받는 것으로 바꿔버린다. 즉 저화는 근본적으로 조선 조정이 재정을 조달하기 위한 꼼수로 운용했지 화폐로서 신뢰성 있게 유통시키기 위한 정책은 거의 지킨 것이 없던 점에서 한계가 명확했다.
이러한 점에서 태종조의 저화 정책은 '화폐정책'이 아닌 '재정정책'이라고 평되기도 한다.[8] 까놓고 말해서 돈 쓰라고 밀어붙인 정책이 아니라 그냥 백성들 삥뜯으려고 굴린 사기 정책에 불과했던 것이다.
저화는 결국 민간에 화폐 수요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불합리한 정책으로 인해 경쟁에 패하여 사라진 것이다. 조정의 화폐 정책이 오승포와 이승포 만큼이나마 신뢰성이 있었다면 충분히 통용될 수 있는 화폐가 성립되었을 것이다.
이 상태는 200년 후인 임진왜란때까지도 개선이 되지 않았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원병으로 온 명나라군은 자국에서처럼 은을 전비로 잔뜩 가져와서 이것으로 병사들에게 봉급을 지급했고, 명나라 병사들은 이 봉급으로 조선에서 식량 및 필수품을 구입하려고 했으나, 조선에서는 은도 잘 유통되지 않았기 때문에 심각한 보급난을 겪었다. 이 때문에 명나라 군대는 조선에 화폐를 쓰라고 강요하기도 하고, 심지어 약탈을 하기도 했다. 조선 후기가 되어서 어느정도 상업이 발달하자, 화폐의 필요성이 생기게 되며 숙종때에 발행한 상평통보가 널리 쓰인다.
4. 여담
- 초기 형태의 지폐라서 그런지 저화의 존재를 소설 등에서 접해 본 사람들은 막연히 현대의 지폐 크기와 비슷하거나, 혹은 비슷한 시기 원나라의 교초와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꽤나 큰 크기였다. 저주지는 길이 1자 6치, 너비 4치이고, 저상지는 길이 1자 1치, 너비 1자 이상이다. 조선의 척은 20cm 가량의 주척, 30cm 가량의 영조척, 46cm 가량의 포백척까지 무척 척의 종류가 다양해서 어느 것이 기준인지 알기 어렵다. 일단 주척으로 하면 저주지는 32cm x 8cm 고 저상지는 22cm x 20cm 이다. 반면 포백척으로 하면 저주지가 73cm x 18cm 이며, 저상지가 50cm x 46cm 가 된다. 주척 기준으로 보면 그렇게 크지는 않지만, 실록에 너무 커서 가지고 다니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주척은 아니고 최소한 영조척이나 포백척일 가능성이 크다.
[1] 소순규. (2019). 조선 태종대 저화 발행 배경에 대한 재검토 - ‘화폐정책’이 아닌 ‘재정정책’의 맥락에서. 역사와 담론, 92, 111-159.[2] 유현재. (2009). 조선 초기 화폐 유통의 과정과 그 성격 -저화 유통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사학보, 49(0), 65-97.[3] 박평식. (2012). 조선초기(朝鮮初期)의 화폐정책(貨幣政策)과 포화유통(布貨流通). 동방학지, 158(0), 81-141.[4] 전수병, 「조선 태종대의 화폐정책 – 저화유통을 중심으로」, 한국사연구 40, 1983, p.37[5] 유현재. (2009). 조선 초기 화폐 유통의 과정과 그 성격 -저화 유통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사학보, 49(0), 65-97.[6] 태종실록 22권, 태종 11년 7월 12일 신미 4번째기사[7] 태종실록 21권, 태종 11년 6월 9일 무술 1번째기사[8] 소순규. (2019). 조선 태종대 저화 발행 배경에 대한 재검토 - ‘화폐정책’이 아닌 ‘재정정책’의 맥락에서. 역사와 담론, 92, 111-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