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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19-05-25 17:54:26

적벽대전/평가


1. 개요2. 배송지의 평가3. 조조의 성급함4. 병사 문제5. 유비손권을 친 이유6. 익주를 치지 않은 이유7. 조조의 나이 문제8. 결론

1. 개요

적벽대전에 대한 평가.

2. 배송지의 평가

신 배송지는, 가후의 이 전략은 시의를 따르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한수나 마초 등의 무리는 관우(관서)지방에서 승냥이같이 (중원을) 노리고 있었고 위의 무제가 영주(형주)에 느긋하게 앉아, 위광으로 오지방을 다룰 여유가 없던게 명백한 상황이었다. 형주는 손권, 유비 쟁탈의 목표였던 지방이다. 형주의 주민은 이미 오랜 기간에 걸쳐 유주(유비)의 웅세를 흠모하고 손권의 무략을 두려워 했다. 실제로 조씨의 제장이 방어해낼만한 곳이 아니다. 그래서 조인은 강릉을 수비한 때, 곧바로 패배를 겪고말았다. 어째서 '위애'하는것이 가능하며, '머리를 숙이고 귀순'시키는걸 기대한단 말인가. 장강과 한수에 끼인 지역(형주)를 새롭게 평정하고, 양주와 월주(오 지방)를 떨게 만드는 이 때에. 유표의 수전용 무기를 이용해 형초의 지방에 수오의 손을 빌리는 것은 말그대로 강남을 제압할 호기, 천하를 넓게 평정할 큰 기회였다. 이 기회를 타고 오를 빼앗지 않고서, 언제 찾아올 기회를 노릴 것인가. 적벽의 패배에 있어서는, 아마 그렇게 될 운명이어서였을 것이다. 실제로 역병이 대유행해 예리한 창끝을 잃어버리고, 남풍이 불어와서 불의 기세를 타버렸다. 하늘이 이렇게 만든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책임인가. 그렇다면 위무제의 동진은 실책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가후의 이 계략은, 타당성이 떨어진다. 위무제가 후년(215년) 장로를 평정한 때 촉 내부에서는 하루에 수십번이나 패닉상태가 일어나 유비는 그들을 억누르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때 무제는) 유엽의 계략을 채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촉을 취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계획에서 벗어난 뒤에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이것도 마치 여기서 논한 일과 같은 실패와 같다. 세간의 사람들이 모두 유엽의 계략이 옳았다고 인정하는 이상, 결국 가후의 의견에 잘못이 있는게 확실하게 드러난 것이 아닐까.
배송지의 평

다만 배송지의 경우는 가후전에 가후가 더 이상의 진격을 반대하는 대목에 주석을 달아 조조의 이런 결정을 옹호하며 결과가 나빴을 뿐이지 의도는 좋았다며 득롱망촉의 고사까지 들어가며 설명을 한다.[1] 즉 일을 망친 건 맞지만, 조조가 성급하게 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는 소리.

3. 조조의 성급함

적벽대전이 겨울(음력 12월의 동지철)에 일어난 것을 본다면 조조가 전투를 서둘렀으며 이는 결국 패배로 이어진다.[2] 주유가 지적했듯 조조군은 유비를 쫒기 위해 상당한 강행군을 하였으며 이들은 물 위에서의 싸움에 익숙하지 않았다. 또한 조조군의 주유, 유비 연합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강력한 전력이었던 기병의 경우 말먹이를 확보할 수 있는 계절이 아니었으며 또한 배 위에선 기병의 강점이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에 조조는 자신의 군의 강점을 발휘할 수 없는 곳을 전쟁터로 삼은 셈이었다.

조조는 유종을 공격하기 위해 남하할 당시 손권까지 공격할 생각은 없었던 것 같아 보이며 이는 합비에 대한 수비가 매우 빈약한 것으로 보면 알 수 있다. 형주 공방전 항목을 참고하면 알겠지만, 조조가 자랑하는 하북 기병으로 원술을 죽이고 차지한 회수에서 장강으로 도하해 건업을 치는 게 더 빠르고 간단하다. 오히려 형주에서 강을 타고 내려가는 게 더 번거롭다. 손권은 그 위험성 때문에 회수를 손에 넣겠다고 열심히 꼴아박다 모두 실패하기까지 했다. 당대 최고의 전략가로 불린 조조가 진심으로 시간을 들여서 강동 침공을 계획했다면 합비에서 건업으로 밀고 내려갔을 것이다.

즉 조조가 적벽에서 싸우는 것은 치밀한 계획 끝에 나온 것이 아니라 유종이 너무도 쉽게 무너지자 내친 김에 손권까지 정복해 보려는 다소 즉흥적인 발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결과 조조군은 만반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형편없는 컨디션으로 대군이 싸우기에 불리한 지형에서 싸움을 강요받은 것이었고, 이것이 원인이 되어 조조가 직접 지휘한 전투 중 유례없을 정도의 참패를 당하게 된다.

4. 병사 문제

조조군이 전염병으로 인해 고생했다는 기록을 본다면 군의 컨디션도 좋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기후 조건과 강행군의 여파였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조조군이 주유군의 화공에 대책없이 당한 것을 본다면 적벽이 좁은 협곡을 끼고 있어 대선단을 기동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지형인 듯하는데 그 이유는 넓은 곳에 포진하였다면 기동함으로써 화공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5. 유비손권을 친 이유

순수하게 세력으로 따지자면 유비의 세력은 조조는커녕 유장이나 손권보다도 한참 뒤떨어질 정도로 보잘것 없었지만, 종실 출신+헌제의 밀명+좌장군-예주목의 직위와 같은 강력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함부로 경시할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조조의 관점에서 보면 '자신이 다스리는 익주조차 제대로 휘어잡지 못하고 있는 무능하고 유약한' 유장이나 '나이로 따지면 조조의 아들뻘 정도밖에 안 되는 애송이' 손권에 비해 한 평생을 전란 속에서 보낸 조조 자신과 같은 시기에 전란 속에 뛰어들었으며, 조조 자신과 마찬가지로 평생동안 전란의 한복판을 해쳐나왔고, 조조 자신보다 훨씬 불리한 처지에서도 종종 눈에 띄는 활약상을 보여줄 정도의 유능함과 명망을 가지고 살아남은 유비쪽이 훨씬 신경쓰이는 상대였을 가능성은 충분히 높다.

군웅할거 시대가 거의 끝나가던 적벽대전 당시 남아있던 세력들을 보더라도 한수, 마등등의 관서군벌이나 요동의 공손씨 정권, 교주의 사섭 등은 전란의 한복판에서 크게 벗어난 변방에 위치한 세력들이었고, 익주의 유장 역시 아버지가 평정한 익주를 물려받아 지형의 유리함에 힘입어 전란의 한복판에서는 비껴나 있었으며, 강동의 손권은 군웅할거 시대에 활약한 아버지 손견 및 형 손책의 세력을 '물려받은' 인물이었다.

단 폄하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물려받긴 했지만 그 물려받고 난 후의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오죽했으면 적벽대전 전에 자신과 맞서려는 손권을 보며 조조가 "아들을 낳을거면 손중모(중모는 손권의 자)같은 아들을 얻어야지 유표의 아들들은 개돼지다!" 라고 했을까 조조 입장에서도 손권은 애송이겠지만 완전히 무시하기는 어려운 애송이였을 것이다. 실제로도 조조는 적벽대전 이후 손권 스스로가 형식상으로 숙이는 것을 받을 수 있었지 스스로 손권을 복속시키지 못했다.

한중의 장로는 애초에 전란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천하를 노린 군웅이라기보다는 험지로 보호받는 한중에 세력을 구축하고 웅거했던 종교 지도자였다.(게다가 이쪽도 교주 노릇을 물려받은 인물이었다.)

즉, 군웅할거 시대 천하의 패권을 노리며 서로 다투던 군웅들 중에서 적벽대전 시점에서 남아있는 인물은 '군웅할거 시대의 최종 승리자' 인 조조 이외에는 유비뿐이었던 것. 며칠만에 삼국지를 읽어내려갈 수 있는 현대의 독자에겐 실감이 덜 갈 수도 있겠지만, 십여 년 간의 처절한 전쟁 끝에 천하를 다투던 군웅들을 제패하고 1인자가 된 조조의 입장에서는 한때 자신과 더불어 천하를 다투던 군웅 중 마지막으로 남은 인물인 유비를 의식한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특히나 유비는 그 세력이 몇번이고 박살났지만 좀비마냥 계속 싸움을 걸어대니, 조조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기겁할 만한 상대다.

게다가 이후의 전개를 보더라도 조조의 선택이 틀렸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 조조는커녕 형주도 다 장악하지 못한 상태의 유비의 공격을 받고도 허무하게 항복해버린 유장보다는 강동의 호족 연합체를 나름 효과적으로 규합하여 제대로 된 세력을 구축, 칭제하기에 이른 손권+적벽대전 후 조조의 위세가 축소된 틈에 당장 자기 세력을 구축할 정도의 역량을 가진 유비를 여유가 있는 김에 한큐에 처리해 버리는 쪽이 더 중요한 과제였던 것은 분명하다. 문제는 처리에 실패해서 급성장을 허용하고 말았다는 거지만.

6. 익주를 치지 않은 이유

사실 형주에서 강동보다 익주를 먼저 정리한다는 게 말은 좋지, 강동은 그나마 장강 수로가 있으니 일이 끝나면 주력병력을 빠르게 빼낼 수가 있는데 익주는 한 번 병력을 들여놓았다가는 언제 다시 이동시킬 수 있을지 기약이 없는 험난한 지형이다. 게다가 무려 10만이나 되는 민간인이 우르르 조조를 피해 유비를 따라갈 정도로 형주 민심이 우호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한 이상 시간을 질질 끄는 것 역시 위험부담이 크기는 마찬가지였다.

간단히 말해, 손권+유비를 배후에 놔 둔 상태로 익주를 먼저 칠 경우 손권과 유비 연합세력이 오히려 형주를 장악하고 조조의 배후를 끊어버릴 수 있다는 것. 10만이나 되는 인구가 우르르 조조를 피해 유비를 따라갈 정도로 적대적인 형주 민심+10만이나 되는 인구를 따라오게 할 정도로 상당했던 형주 내에서 유비의 인망+유표의 장자라는 명분을 가지고 있는 와일드카드 유기까지 있으니 유비가 의외로 손쉽게 형주를 장악해 버릴 가능성도 있었던 것이다. 이를 막으려면 형주에 믿을 수 있는 병력과 장수를 충분히 남겨둬야 하는데, 전력을 이렇게 분리하면 당연히 익주 공략에 불리해질 수밖에 없다.

이 경우 유약한 성격의 유장이 저항을 포기할 경우 익주를 생각보다 쉽게 장악할 가능성도 있다는 점이 그나마 조조에게 유리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유장 밑에도 바보만 있는 것은 아닌 이상 '조금만 버텨내면 손권+유비가 조조의 배후를 끊어줄 것이다' 라는 기대로 익주의 지세에 기대어 방어하는 전략을 채택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는 것.[3] 이렇게 시간이 끌릴수록 위험요소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최악의 경우 익주를 장악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손+유에게 장악된 형주와 익주 사이에 갇혀버릴 수도 있으며, 설령 어찌저찌 익주를 장악한다 하더라도 그 사이에 형주를 빼앗긴다면 한중이 아직 장로의 손에 남아있는 상황에서 방금 점령하여 제대로 장악하지도 못한 익주에 고립될수도 있는 것.

무엇보다도... 이런 고립 상황에 빠질 경우 조조 자신이 중원+하북에 걸친 광대한 세력권과 단절된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평소라면 설령 패전하더라도 자기 세력권 내로 퇴각하여 이후를 기약할 수 있지만, 이런 고립 상태에서 패배할 경우 본거지로 돌아갈 길도 막혀 모든 것을 잃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

즉, 이런 고립-패배의 가능성을 낮게 보더라도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일어날 경우 감당해야 할 리스크가 너무 막대하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1) 방금 장악한 형주에 충분히 머무르며 상황을 충분히 안정시키거나 2) 일단 본거지로 물러난 후 다시 한중의 장로를 복속시키고 익주로 넘어가는 것 과 같은 방책을 선택해야 할 텐데. 이것은 형주를 쉽게 얻음으로써 발생한 이점을 포기하고 재원정을 한다는 의미이니 아예 논외.

7. 조조의 나이 문제

또한, 조조가 이처럼 준비가 철저하지 못하고 시기도 좋지 못한 상황에서 굳이 전면전을 감행하였다가 참패를 초래한 원인을 조조의 연령에서 찾는 분석도 있다. 적벽대전 당시 조조의 나이는 50대 중반으로, 현대라면 '훗, 이제부터 중년의 원숙한 노련미를 보여주지!'라고 말할만한 나이겠지만, 당대의 기준으로는 이미 할아버지 테크를 탔다고 봐야 할 나이였다는 점을 생각하자.

예순을 넘기기도 쉽지 않고 일흔을 넘기면 드물게 장수한 것이라고 하던 당시 기준으로 조조는 사실상 은퇴할 시기가 멀지 않은 노인이었다. 그런데 한 번 출병한 군대를 되돌린다면… 갓 점령한 형주를 안정시키고 다시 출병을 준비하는 데는 수 년 이상의 기간이 필요할 것이고, 이 경우 나이 예순에 가까운 조조가 다시 직접 출병할 수 있을지 자체가 불투명했던 것.

노년에 갑자기 건강이 악화될 가능성도 상당하고, 예순 살 노인이 직접 군을 이끌고 출전한다고 하면 주변의 만류나 불신 등으로 인한 정치적 부담도 감안할 수밖에 없었다. 뭐 실제로 삼국지(정사든 연의든)를 보면 이후에도 조조가 직접 군을 이끌고 출병한 사례가 몇 차례 더 있었으니 지나친 걱정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4], 어지간하면 내일이 보장되는 젊은이의 사고방식과 하루하루 늙고 쇠약해지는 자신을 느낄 수밖에 없는 노인의 사고방식이 같을 수는 없다. 특히 그때까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천하를 재패해 온 조조로서는 보장되지 않는 훗날을 믿기보다는 가능하기만 하다면 당장 문제를 해결하는 쪽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더구나, 적벽대전에서 조조에 맞선 손권-유비진영의 주요 인물들의 나이를 살펴보면 조조와 비슷한 세대인 유비를 제외한 손권, 주유, 제갈량등은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으로 조조보다 20세 이상 젊었다. 즉, 당시 조조의 입장에서는 자신보다 한 세대 젊은, 아들뻘 되는 세대들이 정신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충분한 활력을 가지고 대두해서 성장해 나가고 있음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적벽대전 당시의 조조는 자신 를 제패하고 최강자의 자리에 올랐지만, 젊은 세대가 성장해서 그 자리를 위협하고 있음을 느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는 것이다. 이 경우, 세대론의 입장에만 한정해서 본다면 당장 싸우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인 것이 당연하다. 자신은 시간이 지날수록 늙고 쇠약해지고 약해질 테고, 젊은이들은 경험을 쌓아서 성장하며 강해질 테니까. 이래서야 조조가 조급함에 일을 그르치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다.

이런 조조의 개인적 상황에 맞물려, 예상보다 훨씬 쉽게 형주를 점령한 결과 형주 점령을 위해 준비한 군대와 군비가 온전히 남았고, 약점이었던 수상전력 역시 형주를 흡수하면서 어느정도 보충된 상황이라면 준비가 불충분하고 상황이 최적이 아니라도 당장 싸우는 쪽이 더 낫다고 느끼는 것 역시 이상한 일은 아니었던 셈이다.

8. 결론

결국, 적벽대전은 조조가 평생을 바쳐서 꿈을 이루고자 했던 천하통일의 달성을 눈 앞에 두고 극적으로 좌절되어버린 천추의 한이 남는 패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조조 본인은 물론이고 조씨 가문 전체에게도 천하통일의 기회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으며, 천하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적벽의 대패로 입지가 약해진 조조는 이후 동작대를 세우면서 "내가 다른 애들은 다 잡았는데 유비랑 손권 등만은 평정 못했으니 군권 못 내놓는다"면서 입지를 유지하려고 하지만 이후로도 조조에 반항하는 이들은 많았다. 군사적 세력으로는 여전히 조조가 최강자였지만 적벽 이후 정치적 세력으로는 유비와 손권이라는 라이벌들이 힘을 얻어서[5] 조조에겐 골치 아프게 된다. 따라서 정치적 위상에 커다란 타격이 가는 것은 피하기 어려웠다. 실제로도 관도전과 원가 잔존세력을 쓸어버린 이후 어느 누구도 도전할 수 없던 조조의 위상이 흠이 간 것이 결국 삼국정립의 길을 열어준 것이니까.

촉한과 오를 멸하고 천하통일을 이룬 건 위 왕조를 찬탈한 사마씨의 진이었기 때문에 결국 조조의 비원이 이루어지지 못한 건 맞다.


[1] 배송지위진남북조 시대 한족 출신 최고의 명장인(간단히 말하자면 촉한+동오에 회수, 산둥 반도, 일시적이지만 관중까지 손에 넣었다) 남조 유송유유를 따라 종군한 경험이 있어서 싸우에 일자무식은 아니었다.[2] 삼국지연의처럼 조조가 강의 서북안에 포진했다는 가정하에 조조가 소위 계절풍을 믿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정작 동지에는 역계절풍이 하루이틀 정도 부는 경우가 있다. 조조는 바로 이것에 당했던 것이다. 연의에도 "동지(冬至)는 음기가 절정이라 다시 양기(陽氣)가 움트는 시절이니, 어찌 잠시인들 동남풍이 없겠는가. 조금도 이상히 생각할 것 없다.(冬至一陽生 來復之時,安得無東南風, 何足為怪)”라면서 애써 황개의 투항을 믿으려는 장면이 있다.[3] 여기에 유장은 진짜로 유비에게 공격당했음에도 3년이나 버텼다. 유비 세력이 조조 세력보다야 작긴 했지만 조조는 조조대로 제일 거대한 세력답게 견제 세력도 많은 만큼 세력이 제일 크다고 익주공략에 몰빵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니 아무리 유장이래 해도 조조를 상대로 버티기 정도는 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조조는 시간을 날려먹는 것이고[4] 실제로 조조는 꽤나 건강관리에 신경을 썼다. '조조닭'이라는 전용 보양식도 챙겨먹었으며, 전복요리를 즐기는 것을 넘어서 아주 환장했다고 한다.[5] 적벽 이후 유비는 남형주를 얻으며 손권도 적벽 땐 2~3만 정도밖에 군사를 못 모았지만 이후 합비에는 10만이나 되는 병사를 쏟아부을 정도로 세력이 강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