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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 타마하라 키후쿠(玉原基福) |
출생 | 1919년 10월 2일 |
경상북도 영일군 청하면 미남리 488번지 (현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청하면 미남리)[1] | |
사망 | 2007년 12월 10일 (향년 88세) |
경상북도 포항시 | |
본관 | 초계 정씨[2] |
학력 | 니혼대학 예술학원 (제적)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699호 |
상훈 |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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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훈하였다.2. 생애
1919년 10월 2일 경상북도 영일군 청하면(현 포항시 북구 청하면) 미남리에서 아버지 정두호(鄭斗浩, 1902.9.21. ~ 1953.4.26.)[3]와 어머니 경주 이씨 이삼남(李三南)[4] 사이에서 5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시 에도가와구 코이와마치 4정목(小岩町4丁目) 2006번지[5] 나카바야시 분이치(中林文一)의 집에 하숙하면서 니혼대학 예술학원을 다녔다. 그러던 1940년 10월, 일제의 민족차별에 분개한 그는 당시 도쿄 주오대학 학생인 이진기(李振基)와 동지적 결합을 맺고 항일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그후 동지포섭에 힘을 쏟아 1941년 10월에는 메이지대학 학생인 심달윤(沈達潤) 등을 동지로 포섭하였다.
이들은 동지적 유대를 강화해가면서 독립운동의 방안에 관한 토론을 갖고 조선민중의 지도자로서 수업을 쌓았다. 이때 그는 태평양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고 이를 독립의 기회로 삼을 것을 역설하였다. 이에 따라 이들은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처한 불리한 상황을 대중들에게 알리며 패전기 일본의 혼란을 더욱 가중시키는 등 항일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 활동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었고, 1943년 3월에 체포되어 국내로 이송된 뒤 모진 고문을 겪었다. 1944년 2월 1일 전주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및 육군형법·해군형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2년(미결구류일수 10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아[6] 복역하였고, 1945년 8.15 광복으로 출옥하였다.
198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을 수훈하였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훈하였다. 2007년 12월 10일 경상북도 포항시에서 숙환으로 사망했다. 유해는 2007년 12월 12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