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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06 18:20:23

정방직

파일:정방직.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초명 정방호(鄭邦昊)
선약(善若)
출생 1891년 8월 12일
경상도 삼가현 상곡면 평지리
(현 경상남도 합천군 쌍백면 평지리)
사망 1961년 8월 6일 (향년 69세)
경상남도 합천군
본관 초계 정씨[1]
상훈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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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2. 생애

1891년 8월 12일 경상도 삼가현 상곡면 평지리(현 경상남도 합천군 쌍백면 평지리)에서 태어났다. 이후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그는 1919년 3월 중순 정현하(鄭鉉夏)와 이기복(李起馥)이 각기 따로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있음을 알고, 이들을 만나 독립만세운동을 일원화하도록 종용하고 극비리에 이곳 유지들을 모아 의거를 협의하였다. 그는 이들과 함께 3월 18일의 삼가읍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큰 태극기는 각 부락에서 1개씩, 손에 들 태극기는 각자가 지참하고 모이도록 각 부락에 전달하였다. 3월 18일 오전 11시, 그는 장터의 중앙에 있는 언덕에서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장꾼으로 가장한 시위군중이 일제히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만세를 따라 외치자, 그는 이들의 선두에 서서 장터를 돌며 시위행진하고, 이어 경찰주재소를 포위하고 경찰과 재향군인들이 도착하여 현지 일본 경찰과 합세하여 총검을 휘두르며 시위군중을 닥치는 대로 체포하였다. 이때 그도 체포되었으며, 취조를 받는 도중 일본 경찰에게 문화의 선진국을 침략한 일제의 배은망덕함을 질타하였으나, 결국 그해 5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상고하였으나 1919년 6월 12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었고#, 당일 경성감옥[2]에 입소하여 옥고를 치렀다.#
파일:정방직2.png
1919년 경성감옥에서 촬영된 사진.

1920년 4월 26일 특별사면으로 출옥하였으며#, 이후에는 고향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1년 8월 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정방직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서정공파(西亭公派) 25세 방(邦) 연(演) 항렬. 족보명은 정연표(鄭演彪).[2] 마포형무소의 전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