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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1-16 00:03:13

정천리

1. 개요2. 생애
2.1. 서역 종군2.2. 안사의 난 종군
3. 사후4. 평가5. 일화6. 주요 참전7. 참고자료

1. 개요

程千里, ?~757년
당나라의 장수. 본명은 정앙(程昂)이고, 자는 천리(千里)이다. 경조 만년(京万萬年, 지금의 산시성 시안시) 사람이다. 키가 크고 우람하며 용맹스럽고 힘이 있었다.

2. 생애

2.1. 서역 종군

생년 미상으로, 처음에는 서역에서 종군하여 여러 차례 군공을 세웠으므로 관직은 안서부도호에 이르렀다.

천보 11년(752년) 어사중승(御史中丞)을 지냈고 천보 12년(753년) 북정도호를 겸하며 안서·북정절도사 역할을 했는데 이 와중 이헌충이 난을 일으켰다.

이헌충이 난을 일으키게 된 계기는 이렇다. 742년 돌궐 수령이었던 아포사는 부하들을 이끌고 당나라에 귀순해 삭방군에 속했고, 조정에서 이헌충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이임보는 경성에서 삭방절도사의 직책을 맡아 이헌충을 부장으로 기용했다. 후에 명령을 내려 이헌충의 부족을 유주에 속하게 했는데, 이헌충이 하동, 범양, 평로절도사를 겸한 안록산과 갈등이 있어 반란을 일으키고 막북으로 도망쳤고 현종은 이에 격분해 정천리에게 반란 진압을 명하였다.

천보 12년(753년) 11월[1] 정천리의 군대는 서역에 이르러 군사 문서를 보내 갈라록 부족에게 고하여, 그들을 출병시켜 이헌충 토벌에 협력하게 하였다. 정천리와 당시 삭방절도사였던 안사순의 협공을 받았던 이헌충은 세력이 궁핍하여 갈라록에게 투항하였으나 카를룩의 우두머리는 이헌충을 묶었다. 그의 처남과 그 부하 수천 명이 정천리의 영내로 압송되었고 조정에서는 그의 용맹함을 극찬하였다.

천보 13년(754년) 3월 26일, 근정루에서 큰 잔치가 열렸는데, 정천리가 포로 이헌충을 바치고 저잣거리에서 이헌충을 참수하였다. 3월 28일, 정천리는 그 공로로 우금오위대장군에 올랐고 이어 우림군 부장을 지냈다.[2]

2.2. 안사의 난 종군

천보 14재(755년) 11월 9일, 안록산이 범양에서 군사를 일으켜 남하하면서 안사의 난이 발발하였다.조정에서는 정천리를 시켜 하동 지역에 가서 수만 명의 군사를 모집하여 반란군에게 저항하도록 명령하였고 이에 하동절도부사, 운중 태수를 지냈다. 같은 달 23일 조정으로부터 노주장사로 임명되어 반군을 토벌하라고 명하였다.

천보 15년(756년) 정월 군대를 이끌고 상당을 수비하였다. 반란군은 누차 와서 성을 공격하였는데, 모두 대패하여 개부의동삼사, 예부상서에 공이 더하여 어사대부를 겸임하였다.

지덕 2재(757년) 9월 2일, 채희덕이 군대를 이끌고 당성을 포위 공격하자 여러 차례에 걸쳐 경장기병을 보내 성 아래에 도전했다. 정천리가 이에 응해 성문을 열고 직접 기병 100명을 이끌고 나가 전투를 치르고 채희덕을 생포할 계획을 세웠다. 정천리의 기병들은 모두 용맹스럽고 격렬하게 싸웠고 채희덕은 거의 잡힐 뻔했는데, 뜻밖에도 반란군의 원병이 갑자기 달려와 정천리가 군을 물렸다. 군사를 돌려보내니, 성문에 들어설 때 성문이 부서지고, 정천리가 사로잡혔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수행하던 기병에게 성으로 돌아와 성을 잘 지키라고 일러주었고 군사들은 반란군에게 맞서 성을 지켜내었다.
이건 내 작전의 잘못이 아니라 하늘의 뜻이다! 내 대신 성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전해라, 군대가 지휘관을 잃더라도 성을 잃지 않도록 하라.

낙양으로 압송된 뒤 안록산의 아들 안경서에 의해 사면되어 특진으로 임명된 이후 객성에 억류되었다. 그 해 10월 16일 밤, 안경서가 업으로 후퇴할 때 가서한 등 다른 장수들과 함께 안경서의 승상 엄장에 의해 살해당했다.

3. 사후

757년 당 숙종이 단봉루에 직접 와서 대사면을 하고, 조서를 내려 안록산의 난 때 죽은 사람들의 등의 관직을 추증할 때 정천리의 가족을 우대하여 위로하고, 후대하였다. 자손들은 관직 생활을 하였으나 정천리는 반군에게 사로잡혔을 뿐 아니라 특진으로 위임되었기 때문에, 포양과 추증을 받지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4. 평가

신장은 7척이고 기골이 장대하며 용력이 있었다.
구당서
신장은 7척이고 우람하고 힘이 있다.
신당서

5. 일화

천보 초년에 부몽영찰[3]이 안서사진절도사로 부임했고, 정천리는 고선지와 함께 안서부도호였다. 정천리는 고구려 출신이었던 고선지를 내심 얕잡아 보고 압아비사침(官王滔思多次), 행관 왕도 등과 함께 부몽영찰 앞에서 여러 차례 고선지를 비방했다.

천보 육재(747) 12월 고선지는 소발률을 징발한 공으로 안서사진절도사가 되었고 정천리를 불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겉으로는 사내이지만 속으로는 부인 같으신데 왜 그러십니까?

정천리는 이에 부끄러워하였고 고선지에게 사죄하였다.

6. 주요 참전

서역 종군 시기 여러 차례 무공을 세워 안서부도호(安西副都護)에 올랐다. 이후에는 당나라를 배신한 돌궐의 수령 이헌충(아포사)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받고, 카를룩 부족의 협조를 얻어 안사순과 협공해 이헌충을 투항시키고 경사로 압송하여 참수한다.

안사의 난 때는 하동(河東)으로 가서 수만 명의 군사를 모병하여 반군에 대항하였고, 후에 군대를 이끌고 상당성을 수비하여 반군의 공격을 누차 격파하였다.

7. 참고자료



[1] 《자치통감》에서는 9월[2] 안사순은 삭방절도사 연임이 가능하였다.[3] 서강족 출신이다. 고선지에게 개 창자를 씹어먹을 고구려 노예 놈이라는 욕설을 하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부몽영찰은 이후 마씨 성을 하사받은 뒤, 안사지란 와중 참살당한다.[4] 《구당서·권187하·열전137》[5] 《신당서·권193·열전118》[6] 《자치통감》권 216 내지 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