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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5 20:13:27

조병천

조병천의 역대 등번호
{{{#!folding [ 펼치기 · 접기 ]
{{{#ff9933 [[청보 핀토스|청보 핀토스]]/[[태평양 돌핀스|태평양 돌핀스]] 등번호 24번}}}
박명운
(1983~1985)
조병천
(1986~1992)
구윤
(1993.6.30.~1994)
}}} ||
조병천
曺秉千 | Cho Byung-Cheon
출생 1960년 5월 25일 ([age(1960-05-25)]세)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전주상고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86년 2차 13라운드 (청보)
소속팀 한국화장품 야구단 (1980~1985)
청보 핀토스-태평양 돌핀스 (1986~1992)
1. 개요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2.2. 프로 경력
3. 여담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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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보 핀토스-태평양 돌핀스 소속 투수.

학창시절부터 프로야구 선수시절까지, 약팀에서 고생고생하며 활약한 투수. 프로야구 선수 중 어릴 때 천재 아니던 선수 없다지만 조병천은 그 시절부터 기사 등 인지도가 낮은 편에 속하며 프로에서도 무명의 설움을 많이 겪었다.

부족한 성적을 감안하더라도 승운이 심각하게 없던 선수.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전주상고 출신이다. 나무위키의 전주상고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아예 야구부의 언급 자체가 없다. 구글에 검색해봐도 한 때 전주 야구를 대표하던 야구부가 사라져서 슬프다는 지역 신문의 기사 하나 뿐이다. 이는 그가 3학년이던 1979년을 끝으로 야구부가 폐부됐기 때문. 그 79년에는 네이버 옛날신문 기준으로 그 흔한 기사 하나도 없다.

졸업 후 한국화장품에 입단했지만 별다른 성적은 거두지 못했다. 85년 시즌이 끝난 후 청보 핀토스 2차 지명으로 프로에 진출한다. 당시 프로야구의 1차 지명은 10명까지 지명이 가능하기에 사실상 2차까지 내려가는 일도 거의 없고 대부분이 지명돼도 포기하고 진학하거나 실업야구를 향하기 마련이었다. 조병천은 그런 2차 지명으로 프로야구를 시작한다.

2.2. 프로 경력

86년, 87년 청보에서는 계투로 주로 뛰었다. 당시 아무리 마구잡이로 등판했다지만 잘하는 선수는 선발로 많이 나오는 것이 조병천의 위상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심지어 86년엔 조병천을 청보 핀토스의 강력한 타선 구성원이라며 기사를 올린 신문도 있었다. 86년엔 딱 1승을 올렸는데 이 1승은 당시 7연패의 늪에 빠져있던 청보가 빙그레 이글스를 상대로 3:8로 지고있던 8회, 아무런 기대없이 조병천을 올렸다가 양승관의 역전 쓰리런 홈런으로 얻게 된 것. 감독이었던 허구연은 기뻐서 눈물을 흘렀으며 기사도 조병천을 행운의 투수라 언급하기 여념이 없었다.

87년엔 해태 타이거즈를 상대로 8안타 1실점 완투승을 거뒀다. 그때 기사 제목은 '무명 투수 돌풍' 이때 조병천의 소감은 '강타자일 수록 약점도 많다'. 천하무적 타선 청보 핀토스 이 해 조병천은 4승 중 3승을 완투승으로 따내는 한편 9월 26일에는 8.1이닝을 1실점으로 막고도 승리는 배경환에게 뺏기는 등[1] 승운이 안 좋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줬다. 9월 16일에는 '조(병천)는 담력이 약해 지금까지 아슬아슬한 상황에 나온적이 없었다'라며 디스도 먹었다. 당연히 그 경기에선 패배 적립.

팀 이름이 청보 핀토스에서 태평양 돌핀스로 바뀌며 조병천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한 88년이 찾아온다. 이 해 조병천의 성적은 나름 훌륭했으나 그리 특출나지는 않았다. 3.94로 가까스로 4점을 면한 방어율, 128이닝으로 겨우 규정이닝을 넘긴 수준의 이닝, 2승 10패의 기록. 그러나 투수의 기록에서 승수가 모든 걸 설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8월 중, 22경기를 출장했을 때 그의 성적은 0승 9패 1세이브. 다 이긴 경기를 수비가 말아먹어 무승부가 된 게 2번이고 끝내기 패배가 된 것이 2번이었다. 6번을 1점차로 패배했고 5번은 타격불발로 무승부. 그런 그에게 붙은 별명은 무승의 에이스였다.

23번째 경기에서야 겨우 승리를 딸 수 있었다. 한 시즌에 1:0 경기를 가장 많이 경험한 투수가 바로 88년 조병천인데, 그는 4월~8월 사이에 5번이나 1:0을 경험하며 2승 3패를 기록했다. 그가 경험한 2승조차도 모두 1:0의 살얼음판 승부였던 것.

89년엔 다시 주춤하다 90년엔 나름 성적을 올리며 해나쌩이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 이유를 들은 이유가 고작 2승 덕분.88년 얘기보면 2승이라도 충분히 들을만 한 것 같다 그 후 노쇠화로 인해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하며 92년엔 4.2이닝 완투패라는 진기록도 세웠다(…) 92년 시즌이 끝난 후 이선웅, 김재박, 이광근 등과 함께 은퇴한다.

97년엔 이영만이라는 기자가 잡초의 향이 더 진하다는 기사를 쓰며 기약없는 인생을 살던 조병천(현대)이 7년만에 잠에서 깼다 표현했는데 자세한 이유는 불문. 아마 조웅천이랑 헷갈린 것이 아닌가 한다.

3. 여담

마구마구에서는 조우천이란 가명으로 등장한다. KBO 분류도 우완이고 89년엔 오른손잡이라는 기사도 있으나 게임 내에는 좌투우타로 나온다(…) 여기서도 무명의 설움이 쓰는 플레이어도 적지만 좌투가 적은 80년대이기에 쉬쉬하는 편. 청보에 쓸만한 좌완이라곤 양상문, 정성만 밖에 없다. 컬트적인 인기까지 따지면 감사용까지

각종 야구게임에서는 청보의 존속기간이 2년 반밖에 안 되기에 계투로 곧잘 언급되는 편. 정작 팀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던 89년에는 성적도 성적이고 이닝도 적어서 로스터 채우는 용도로 사용된다.

4. 관련 문서


[1] 9회 1사 만루 상황에서 강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