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3-01 11:07:23

조영남 대작 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 개요2. 전개
2.1. 조영남의 미술 활동2.2. 대리제작 작가와의 친분2.3. 대리제작 사실 공개2.4. 두번째 그림 대작 사건
3. 주장과 반응
3.1. 조영남 측 주장 1: 미술계의 관행을 따랐을 뿐이다3.2. 조영남 측 주장 2: 팝아트를 했을 뿐이다3.3. 신정아의 주장 : 조영남이 직접 그렸다3.4. 송기창 (대리제작 작가) 측 주장: 작품을 팔 줄 몰랐다3.5. 구매자 측 주장: 조영남을 처벌해라3.6. 검찰 측 주장: 사기 혐의로 징역을 구형해야 한다
4. 반응
4.1. 언론계 반응: 대작을 예술계 관행이라고 포장할 수 있는가?4.2. 대중의 반응: 자기 손으로 만들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자기 작품이 되냐?4.3. 예술계 반응: 수작업이 중요한가? 구상작업이 중요한가?
5. 쟁점
5.1. 노동법 위반 여부5.2. 사기죄 성립 여부5.3. 명예훼손죄 성립 여부
5.3.1. 관점 1: 수작업 없이 아이디어만 제시하는 예술은 사기다5.3.2. 관점 2: 기계적인 수작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술가의 구상작업이다
5.4. 저작권법상 허위공표죄 성립 여부
6. 재판
6.1. 검찰 구형6.2. 1심6.3. 2심 6.4. 3심
7. 결론
7.1. 작업 참여 스태프 명단 공개 필요7.2. 공정한 계약 방식 도입 필요
8. 여담

1. 개요

가수 조영남이 다른 무명 화가를 고용해 대리제작하게 하고 적은 돈만 준 사건으로 미술계와 대중, 고전미술계와 현대미술계의 인식 차이를 드러내는 계기가 된 사건.

2. 전개

2.1. 조영남의 미술 활동

조영남은 1960년대 말부터 미술 작업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0년대 말에는 주로 유화를 그렸으나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화투, 소쿠리, 노끈 등의 입체적 오브제를 콜라주한 작업을 했다.# 1973년 첫 개인전을 가진 조영남은 수십회 개인전을 치뤘고 2011년에는 무릎팍도사에 출연해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2.2. 대리제작 작가와의 친분

조영남은 미국에서 대작 작가인 송기창을 만났다고 한다.# 당시 송기창은 어렵게 유학 생활을 하고 있었고 귀국 후에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조영남은 송기창에게 작업을 맡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송기창은 재정적 사정이 좋지 않아 조영남에게 그림을 그려서 팔았지만 재능갈취에 가까운 대우와 금전적 대가를 받고 더 이상 조영남을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싫어 연락을 끊고 도망간 적도 있었다. 하지만 조영남은 다른 일반 학생이 그린 그림으로는 그림이 팔리질 않으니 송기창에게 전화해 다시 그림을 그려 달라고 졸라 댔다고 한다.

검찰은 대작 화가는 총 2명이고 모두 전문 화가이며 조영남에게 그림을 어떤 식으로 그리라는 지시를 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로 미루어 조수가 아닌 것으로 판단했다. http://youtu.be/6NcwFp85yG8

2.3. 대리제작 사실 공개

2016년 5월 16일 조영남 자신이 그렸다고 발표한 작품 중 200점 이상이 다른 무명화가가 대부분을 그리고 조영남이 사인 정도만 넣은 대작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검찰은 조영남의 그림이 거래된 갤러리와 소속사 압수수색에 들어갔다.

2.4. 두번째 그림 대작 사건

조영남, '그림 대작' 또 기소..사기 혐의로 추가 재판

2018년 1월 8일 조영남의 그림 대작이 추가로 적발되어 검찰이 불구속 기소하였다.

3. 주장과 반응

3.1. 조영남 측 주장 1: 미술계의 관행을 따랐을 뿐이다

조영남은 이에 대해 '미술계의 관행이다'라는 주장을 하였다.

3.2. 조영남 측 주장 2: 팝아트를 했을 뿐이다

12월 21일 공판에서 조영남은 "제가 직접 마지막 (붓)터치를 했고 사인을 했기 때문에 제 작품"이라며 무죄를 주장했다. 그는 "일부 그림을 그리는데 초안에 도움을 받았다고 해서 사는 사람에게 일일이 고지할 의무는 없다"며 "예술의 자유를 국가 형벌권으로 제한할 것인지 면밀히 판단해달라"며 무죄를 주장했다. 피고인 신문에서 조영남은 "팝아트에서는 아이디어나 개념을 중시한다. 화투를 그리는 것을 팝아트로 보고 저 스스로 팝아티스트라고 한 것"이라며 "제가 (송씨에게) 화투를 그리라고 한 것이니까 당연히 제 작품이 맞다"고 밝혔다.#

3.3. 신정아의 주장 : 조영남이 직접 그렸다

이러한 조영남 측 주장의 바리에이션으로 신정아의 '조영남이 직접 그렸다!'는 주장도 있었다.

사기죄로 콩밥까지 먹은 신정아는 2015년 5월 조영남의 전시회를 통해 8년 만에 큐레이터로 복귀했다. 이후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다닌다는 목격자들이 나오면서 서로 사귄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이에 조영남은 방송에 나와 열애설에 대해 '10위안에 드는 여친일 뿐이다.'라고 해명하고 둘이 공동 작업을 준비하고 있다고 하였다.

사건 2일 후인 5월 18일 신정아는 가짜 논란 신정아와 조영남의 만남 지난해 전시회 열어 열애설도, 신정아 “조영남이 직접 그렸다”고 주장하였다. 기사를 보면 "옆에서 (조영남) 선생님이 집에서 직접 작품 그리는 모습을 자주 봐 왔다. 그래서 선생님 작품이 맞다고 생각한다. 밑작업부터 마무리 최종작업은 직접 한다.", "밑작업부터 수십일이 걸려 그림을 그려내는 과정을 봐왔기 때문에 본인이 직접 그리고 있다."며 조영남이 직접 그렸음을 주장하였다. 이에 네티즌들은 과연“거짓말 하는 사람끼리는 서로 통하는 모양이다”라며 두 사람의 만남을 흥미롭게 보았다.

3.4. 송기창 (대리제작 작가) 측 주장: 작품을 팔 줄 몰랐다

조영남 대작 화가인 송기창은 조영남이 작품을 팔 줄 몰랐다고 말했다.#

송기창의 인터뷰에 따르면 "그림을 다 그려놓으면 조영남은 그 그림 위에 그냥 싸인만 하면 뭐하니까, 집에서 텔레비전이나 보면서 그 위에 깔짝깔짝 그린 후, 자기 손이 갔으니까 자기 그림이라고 하는" 것 이었다고 한다.

그에게 지불한 그림 가격은 갈취 혹은 동네 조폭 수준으로, 가격은 조영남이 정하고 크기에 상관없이 한 점당 10만원씩 주다가 어느 날은 그림 17점에 대해서 150만원 만(20만원 조영남 본인이 깎아서) 주기도 했다.

그림 가격 인상에 대한 것은 말도 못 꺼내게 한다고 증언했다. 그게 어느 정도냐면 '택시운전사가 요즘 얼마 받는 줄 아냐'면서 까분다고 송화백에게 뭘 던지려고 하기까지 했다고. 말 그대로 불공정거래 및 재능갈취.

3.5. 구매자 측 주장: 조영남을 처벌해라

사건이 커지기 전에는 구매자들의 반응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사건이 점점 조명받자 일부 구매자들이 나서 이 사건에 대해 조영남의 처벌을 원한다고 밝혔다.

미술계 특유의 구두거래 방식상 갤러리 말고는 거래내역이 남아 있지도 않은 데다 사건 조사 중에 조영남이 그림을 환불해 주기도 해서 검찰이 구매자 파악에 애를 먹었다.

3.6. 검찰 측 주장: 사기 혐의로 징역을 구형해야 한다

타인의 그림들을 큰 액수의 돈으로 판매한 사실이 밝혀졌으므로 검찰 측은 이 사건에 사기죄를 적용하겠다고 밝혔다.

2016년 12월 21일 서울중앙지법 형사18단독 오윤경 판사 심리로 열린 조씨의 사기 혐의에 대한 결심공판에서 검찰은 "조영남에게 (사기의) 기망행위가 있었다"며 징역 1년 6개월을 구형했다. 검찰은 "조씨의 직업적 특성이나 그림 거래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판단해야 할 사는 사람의 의도를 고려했을 때 기망행위가 있었다"며 "그림을 판매할 때 편취 의도도 있었다고 판단한다"고 주장했다.#

4. 반응

4.1. 언론계 반응: 대작을 예술계 관행이라고 포장할 수 있는가?

언론에서는 대부분 이 사건을 조영남의 대작으로 못박고 그 악랄함은 보도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들의 주장은 이런 식이었다.

조영남은 본인의 대작 사실을 '예술계 관행'이라는 주장을 했지만 그가 저지른 것은 '예술계 관행'인 조수 등이 돕는 근대의 도제관계 혹은 현대예술의 협업 등의 단어들로 미화할 수 없는 형태이다. 도제관계가 아닌 이유는 조영남과 해당 대리 작가 사이에는 무언가를 어떻게 표현하라는 가르침이나 개념적인 지시도 없었고 심지어 조영남은 이미 완성된 그림에 거의 손도 대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외적으로도 송기창 작가가 조영남보다 그림으로서 월등히 뛰어나다. 송기창 작가는 뉴욕의 필라디에스 갤러리 멤버인데 그곳은 한 작가의 그림을 놓고 30-40명이 거수를 진행한 뒤 80% 이상이 찬성해야 들어갈 수 있는 권위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실력으로 도저히 도제 관계라고 칭할 수 없는 관계다. 협업관계가 아닌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 해당 작업의 장르(회화, Painting)와 규모를 고려했을 때 이것은 두 사람의 협업이라고 보기 어렵다.

둘째, 조영남이 타 장르의 작가들처럼 협업자가 있다는 것을 명시하고 판매한 게 아닌 것이 밝혀진 이상 이것은 절대 협업이 될 수 없다.

셋째, 도제관계가 아닌 이유와 비슷하게 작품에 대한 조영남 작가의 기여도가 존재하지 않다시피 하므로 협업의 형태가 될 수 없다. 송기창 작가(대작작가)의 진술에 따르면 그 말고도 이미 여러 대작작가들이 있었고 조영남은 그들에게 그림을 몇 개 그려오라고 말한 뒤 가져온 그림들을 보고 그냥 작품을 사 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정리하자면, 1. 도제관계가 성립되지 않는 대작작가의 실력, 2. 작품에 대한 기여도, 3. 협업작으로 고려할 수 없는 작품의 규모, 4. 협업자의 유무를 밝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도제관계나 현대예술의 협업방식으로 볼 수 없다.

이러한 조영남의 주장은 이미 논리에 맞지 않고 그저 예술 방식으로 포장하려고 한 사기 행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건 종결 후 언론에서는 예술에 문제에 전문가들 대신 비전문가인 외부인들이 자신들의 잣대로 개입하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당시 보도 행태에 대해 비판하였다.

4.2. 대중의 반응: 자기 손으로 만들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자기 작품이 되냐?

대중의 반응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사건 이전에도 온갖 추태로 인해 밉상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 사건으로 제대로 미운털이 박힐 거라고 보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안그래도 논란이 많은데 검찰 조사 당일에 장애인 전용 구역에 주차한 것으로 인해 '이제는 제정신이 아니다'라는 반응이 나왔다. #

다만 조영남이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에서는 대다수가 통일된 의견을 보였지만 사기죄 성립 여부는 의견이 갈린다. 대작 작가의 말바꾸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반응이 갈렸다.

근대 이전의 예술개념에 익숙한 다수의 사람들이 예술가들이 자신의 손으로 작품을 만들지 않아 왔다는 사실에 대해 배신감을 느끼는 것이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4.3. 예술계 반응: 수작업이 중요한가? 구상작업이 중요한가?

예술계 반응은 엇갈렸다.

진중권은 사건 다음날인 5월 17일 트위터에 예술계에 조수 등이 작업을 돕는 관행이 존재함을 언급했다.진중권 “조영남 대작? 미술계 관행… 10만원은 짜다” 진 교수는 18일에는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에서 '미학'이라는 전공을 살려 진중권 "조영남에게 죄있다면 노동착취뿐"이라며 '대작은 개념미술의 공공연한 관행', '예술은 작가의 피땀? 낭만주의 관념'이라며 현대 예술의 핵심을 집었다.

반면 이동연은 '“현대미술의 관행” 운운하는 해명은 대중들에게는 잘난 체하는 ‘엘리트주의’로 힐난의 대상이 된다.'고 비난했다.# 신제남 한국전업미술가협회 이사장도 “미술계의 관행이라는 주장은 사기 행위를 피하려는 목적으로 지어낸 말”이라며 “대작이 관행이라면 그같은 작품이나 화가의 명단을 구체적 증거로 제시하라"고 요구했다. 신제남은 11개 미술단체[1]의 성명을 모아 고소장을 제출했다.고소장 전문 나아가 신제남 이사장은 진중권이 말한 부분에 대해서도 고소장에 관련 내용을 적고 법적 조치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와 같이 고전미술 쪽에서는 이동연의 입장과 비슷한 반응을 보이긴 했으나 상대적으로 현대예술 측은 진중권과 마찬가지로 '왜 이게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많이 보였다. 사건 초기 이런 대작 관행이 있다고 옹호한 것은 거의 진중권 혼자였고 진중권 혼자 비판적인 예술계와 언론계를 상대로 1대 100의 싸움을 벌였다. 다른 예술계 전문가들은 익명으로 진중권 입장을 지지하는 데 그쳤는데 이는 이동연이나 신제남의 의견에 동조해서가 아니라 이미 수작업보다 구상작업이 중요하다고 답이 나온 마당에 이런 소모적인 논쟁에 힘을 낭비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일단 미켈란젤로나 루벤스 같은 르네상스, 바로크 시기 작가들도 조수들과 함께 작업했다. 그리고 이는 도제관계라고 불렸다. 유화를 한 점 그리는 데 물감이 마르고 다시 덧칠하는 과정이 필수였으므로 한 작품을 완성하는 데 최소 몇 개월 이상 걸리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튜브물감이 나오기 전에는 예술가들이 스스로 물감을 만들어 써야 했다. 이런 과정에서 도제 시스템이 적용됐는데 가내 수공업 내지는 공장제 수공업처럼 어떤 제자는 물감만 빻고, 어떤 제자는 물감만 개고, 어떤 제자는 배경 색깔만 칠하는 식으로 분업이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 이 과정 자체는 하나의 수련 과정으로 여겨졌다. 스승인 화가가 하는 것은 작품의 뼈대가 되는 스케치를 잡아주고 세세한 지시를 내리고 마무리 과정에서 잘못된 부분을 매만지는 것이었다. 대신 스승인 화가는 작품값을 판 돈으로 제자들을 어느 정도 먹여 살려줘야 했는데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협업자나 제자 등을 두지 않고 혼자 그리는 작가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보통 혼자 생활하기 원하거나, 가난하거나 유명하지 않아 제자를 둘 형편이 안 되는 경우였다. 혼자 생활하기를 원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조수를 안 두는게 아니라 못 두는 것이었다. 렘브란트는 말년에 생활고와 심리적 고통에 빠져 혼자 생활한 경우고 고흐는 집에서 아버지가 돈을 부쳐주지 않아서 가난했고 무명 작가였기에 혼자 그린 것이다. 그러므로 웬만큼 능력 있는 예술가라면 다 제자를 두고 그렸다고 볼 수 있다.

동양화에서는 작가 혼자 그림을 그리는 경우가 더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어디까지나 남종화 문인 계열에 한정되며[2] 규모가 큰 동궐도 같은 그림은 당연히 화원들이 협동해 그렸다. 홍세섭 같은 화가는 그림이 인기가 많아서 아버지와 같이 그렸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화가, 예술가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는 여전히 예술가가 오직 혼자만의 힘으로 눈과 손만을 가지고 수작업하는 모습이다. 앞서 진중권이 지적했다시피 과거에도 좀 규모가 큰 작업은 여러명이 작업했다. 오직 눈과 손으로만 수작업하는 방식은 사진이 등장한 근대 이후에는 사실상 유지하기 불가능해졌다. 어차피 똑같이 복제하는 기술은 사진이라는 매우 뛰어난 기술로 대체됐기 때문에 수작업으로 얼마나 꼼꼼하게 그렸냐보다는 무슨 발상과 기획을 생각하고 작품을 구상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 됐다. 기계적인 제작 과정보다는 개념이 중요시되기 때문이다.[3]

예를 들어 어떤 예술가들은 카메라 옵스큐라[4]나 카메라 루시다[5] 같은 광학 도구를 이용해 그림을 그리기도 하며# 아예 사진을 찍고 인화된 사진 위에 다시 작업하는 예술가도 있다.#[6][7] 현대예술의 작가가 조수의 도움 없이 홀로 작업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그렇게 따지면 설치미술은 일반적인 경향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현대예술가 데미안 허스트는 100명 이상의 작가를 두고 작업하는 것으로 유명하고 일본 미술가 무라카미 다카시는 아예 카이카이 키키(Kaikai Kiki)라는 유한회사를 차려 스태프들과 같이 일하고 있다. 이렇게 조수를 동원해 상업적으로 제작하는 예술은 외면받고 있다는 주장도 있는데 데미안 허스트나 무라카미 다카시는 바로 그 팝아트 계열로 2010년대에도 잘 나갔다. 이런 논리대로면 러버덕 프로젝트 같은 예술은 '일반적'이지도 않고 '외면'받는 예술이라는 말이 된다.

현대미술에서 수작업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쪽은 극사실주의 같은 일부 한정이다. 현대예술에서는 손으로 직접 작품을 만들지 않아도, 다른 작가에게 제작 하청을 줘도 대작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도제관계인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굳이 부른다면 현대예술의 제작 프로세스는 '협업'이나 '의뢰'라고 불러야 적합할 것이다. 그리고 이 협업이나 의뢰는 진중권의 말처럼 이미 '예술계 관행'이다. 마찬가지의 이유에서 실력, 기여도, 규모 등은 작품의 작가권(authorship)과는 상관이 없다. 애초에 도제관계가 아니라 협업, 의뢰 관계로 보면 의뢰를 받은 사람이 의뢰자보다 실력이 더 뛰어나도 상관없다. 현대미술에서 기여도를 따진다면 단순히 수작업을 누가 많이 했나로 기여도를 따지는 게 아니라 누가 아이디어를 냈고 그 아이디어에 대한 지분이 누가 더 많은가가 중요하다. 이는 작품 규모가 손바닥만한 그림이든 커다란 설치미술이든 마찬가지다. 문제가 되는게 있다면 조영남이 직접 그린 게 아니라 남에게 시켰다는 걸 밝히지 않고 팔았다는 것 뿐이다.

다만 협업, 의뢰 관계에서 보면 그만한 대가를 치뤘느냐가 중요해진다. 작가의 작업물에 대한 대가가 터무니없어서 예술가들 사이에서도 조영남이 대작 작가에게 돈을 너무 적게 지불했다는 점에서는 거의 이견이 없었다.[8]

결국 조영남은 무죄 판결을 받으면서 이 사건이 그의 잘못이라고 비난하던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망신을 사게 되었다. 이에 진중권은 KBS와의 인터뷰에서 “조영남 재판은 전문가 민낯 드러낸 사건”이라고 하였다. 여담으로 진중권은 오만가지 사건마다 나서서 모두까기를 보여주는데 그를 비판하는 네티즌들은 이 사건에서도 "너가 뭘 안다고 이번 사건에도 아는 척 하느냐?"고 하였다. 그러나 그동안 그가 개입한 99%의 사건은 그의 전문분야와 관계 없었지만 이 사건만은 '미학'을 전공하고 관련 책까지 낸 진중권이 전문가라고 할 만하다.

5. 쟁점

5.1. 노동법 위반 여부

이쪽으로 고소한다면 아주 무난하게 위법 판결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됐다. 한 점당 10만원은 너무한 가격이라는 점에서는 대중이든 미술계든 이견이 없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리는 데 최소 며칠은 걸릴 텐데 같은 시간에 편의점 알바를 했다 치고 기회비용을 비교해 보라. 말이 안 되는 가격이다. 하지만 재판이 예술의 작가권(authorship) 쪽으로 흘러가면서 이 부분은 판결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5.2. 사기죄 성립 여부

검찰 측은 사기죄로 조영남을 기소하였지만 사실 이러면 대작을 했던 송기창씨도 공범이 된다. 송기창씨 입장에서는 착취는 착취대로 당하고 법적 처벌까지 받아야 하는 웃지 못할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송기창씨가 갑자기 말을 바꿔 이 사건에서 빠지려는 모양새를 취한 것도 사기죄로 재판에 가게 될 경우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으로 보였다.

반면 구매자 입장에서는 사기죄로 판결이 날 경우 보상금이라도 받을 수 있으니 이득이었다. 노동법으로 이 사건이 다뤄질 경우 사건은 조영남 대 송기창씨의 구도로 흘러가게 되기 때문에 구매자들이 낄 여지가 없게 되기 때문이었다.

5.3. 명예훼손죄 성립 여부

미술 관련 11개 단체에서 조영남을 고소하면서 명예훼손죄가 성립되는지, 성립된다면 얼마나 처벌을 받게 될지도 관건이 되었다. 헌데 명예훼손의 구성요건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간단하지 않다. 우선 공연성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기사를 통해 널리 알려졌으니. 문제는 허위사실을 적시했는지의 여부와 특정성 여부였다. 특히 특정성이 문제인데 집단의 모든 구성원의 명예가 집합명칭에 의하여 침해될 경우에는 구성원 각자의 명예훼손이 될 수는 있지만 '화가'라는 집합명칭이 과연 이에 해당하겠는가? 이게 문제가 되는 이유는 집단구성원이 일반인과 명백히 구별될 정도로 집합명칭이 특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A법과대학의 교수, B경찰서 형사과에 근무하는 형사들 같은 식으로 말이다. 조영남의 경우 'oo대 미술교수는 한심하다'거나 'oo대 미술대학은 썩었다' 같은 식으로 발언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미술계 관행이다'라고만 했기 때문에 더 모호했다. 이는 진중권도 마찬가지였다. 고소한 미술관련 11개 단체 중 한 단체를 콕 찝어 '이 단체도 저런 관행을 저질렀다'고 했다면 또 모를까. 이 경우 '관행'이라는 용어를 재판부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판결이 달라졌을 것이며 예술 관련 사건을 다루는 변호사들이라면 이번 사건이 중요 판례가 될지도 몰랐을 것이나나 관련 판결은 흐지부지된 듯하다.

5.3.1. 관점 1: 수작업 없이 아이디어만 제시하는 예술은 사기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대중과 고전미술계는 여전히 미술가가 손수 수작업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장인이 한땀한땀 작업하듯 예술가도 한끌씩 돌조각을 떼어내고 한붓씩 물감을 칠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서 작품을 완성해야 정직한 예술가라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이에 대해서는 신제남 한국전업미술가협회 이사장이 제출한 고소장 내용 중 일부를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전체 내용은 다음 링크글을 참고하라. 고소장 전문
(전략) 2. 피고소인의 적시한“미술계의 관행”이 허위의 사실인지에 관하여

근대미술에서의 협업

피고소인은 앤디 워홀과 같은 현대 미술의 작가들은 100명 이상의 조수를 쓴다며 우리나라 미술계도 조수를 쓰는 것이 기본적인 관행이라고 주장합니다. (중략) 그러나 르네상스 이래 화가의 개성과 어떻게 그리느냐는 문제에 중점을 두게 되면서 미술품이 예술가의 자주적 인격의 소산이라는 의식이 강화되었고, 19세기 인상파 이후로는 화가가 조수의 도움 없이 홀로 작업하는 것이 근대미술의 일반적인 경향이 되었습니다. 또한 중세에 조수를 고용해 그림을 그린 화가들도 작업을 공개 했습니다. 즉 베르사이유 천장화, 천지창조, 나폴레옹의 대관식 같은 작품들, 그런 많은 대형 벽화그림이 예인데, 대형으로 제작된 공동 벽화 작품에서 총지휘 작가 개인 한 작가가 그린 그림이라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공동작품임이 명백하게 알려져 전해지고 있습니다.

현대 미술의 경향 중 팝아트란?

“외국에는 조수를 100명 넘게 두고 있는 작가들도 있고, 우리나라 작가들도 대부분 조수를 두고 작품 활동을 한다." 라고 주장하자 안하무인 논객 진중권이 감히 피고소인을 팝아트 엔디워홀에 비견하였고 미술계가 비분강개 하였습니다. 팝아트는 1950년대 중후반 미국에서 추상표현주의의 주관적 엄숙성에 반대하고 신문의 만화, 상업디자인, 영화의 스틸(still), TV 등, 대중사회에 있어서 매스 미디어의 사회비판적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주제 삼은 것입니다. 팝아트의 대표 작가 엔디워홀은 상업적 아이디어로 대량생산 기계시설을 갖춰놓고 작업장에 아트 팩토리라고 간판을 붙이고 돈이 되는 상업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조력자들을 상시 고용해 판화를 찍어내는 작업을 공개적으로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20세기 팝아트적 현상은 특히 앤디 워홀 이후 조수들의 조력을 받아 대량 생산 하는 지나친 상업주의 현상이 늘어나자 이를 비판하는 양태가 확산되면서 급하게 와해된 것도 사실입니다. 피고소인이 “외국에는 100명 이상의 조수를 두고 있는 작가도 있고”라고 피고소인과 엔디워홀을 같은 급으로 연상케 하는 주장을 하여 갑자기 팝 아트 사조를 불러 일으켰으나 사회비판적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주제 삼아 젊은이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받았던 팝아트와 화투짝의 재미를 그린 피고소인의 화투그림은 명백하게 팝아트와 비견 할 수 없는 그림입니다. (중략)

허위의 사실 적시

위 사실과 같이 결국 회화작품을 협업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대작을 맡겼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 예술가임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 예술의 본질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피고소인은 남의 그림에 사인 내지 덧칠만 하고 몇 백배의 수익을 올려오다가 그 사실이 들통 나자, 대규모 협업이 요구될 수밖에 없는 현대 미술의 특수한 작가들을 언급하면서 협업이 마치 미술계 전반에 널리 퍼져있는 관행인양 허위의 사실을 적시하며 자신을 정당화하려 한 것입니다. (후략)

예술적 문제와 관련해 신제남 측의 주요 주장을 요약하면 크게 다음 4가지 주장이 나온다.
1) 19세기 인상파 이후로는 화가가 조수의 도움 없이 홀로 작업하는 것이 근대미술의 일반적인 경향이다.
2) 대형으로 제작한 작품은 총지휘 작가 개인 한 작가가 그린 그림이라고 기록하지 않고 공동작품임을 명백하게 알린다.
3) 앤디 워홀이 조력자들을 상시 고용해 판화를 찍어내는 작업을 공개적으로 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팝아트 경향은 조수들의 조력을 받아 대량 생산 하는 지나친 상업주의 현상이 늘어나자 이를 비판하는 양태가 확산되면서 와해되었다.
4) 회화작업을 협업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조영남은 대규모 협업이 요구될 수밖에 없는 현대 미술의 특수한 작가들을 언급하면서 협업이 마치 미술계 전반에 널리 퍼져있는 관행인양 허위의 사실을 적시하며 자신을 정당화하려 한 것일 뿐이다.

이 고소문에 따른다면 재판에서는 화가가 조수의 도움 없이 홀로 작업하는 것이 근대미술의 일반적인 경향인지, 대형으로 제작한 작품은 총지휘 작가 개인 한 작가가 그린 그림이라고 기록하지 않고 공동작품임을 명백하게 알리는 것이 미술계에 정착된 제도인지, 대량생산하는 지나친 상업주의 현상이 늘어나자 이를 비판하는 양태가 확산되면서 조수들의 조력을 받아 제작하는 팝아트 경향이 와해되었는지, 현대미술의 특수한 작가들만 협업을 하는 것인지 등의 질문이 쟁점이 될 것으로 보였다. 더 단순하게 본다면 '대작'이냐 '협업'이냐를 두고 싸우게 될 가능성이 높았고 이와 관련된 국내외 사례가 마구 쏟아질 것으로 보였다.

5.3.2. 관점 2: 기계적인 수작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술가의 구상작업이다

하지만 현대미술계에서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는 작가나 전문가도 많았다. 마르셀 뒤샹 이후 현대미술은 더이상 그런 수작업이나 기교를 중요시하지 않는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돌을 깎아내고 붓질을 하는 기계적인 반복작업을 열심히 했다고 그게 수준 높은 예술작품이 아니란 것이다. 그리고 구상만 했다고 성의가 없는 게 아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을 도구로 삼아서 자신의 작품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입장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진중권이었다. 그는 한 기고문에서 수작업보다 창의적인 발상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며 '대작 관행'에 대해 설명했다.#
화가 조영남 씨가 제 작품을 다른 이에게 ‘대작’을 시킨 사실이 드러나자 검찰이 ‘사기죄’로 엮어 수사에 들어갔다. 정의로운 대중은 인터넷에 분노를 쏟아놓기 시작했다. 내가 보기에 이는 현대예술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과잉행동이다. 적어도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 그리고 팝아트 이후 예술가가 작품에 ‘콘셉트’만 제공하고 실행을 다른 이에게 맡기는 것은 예술계의 관행이 되었기 때문이다.

효시는 바우하우스의 모호이-나지일 것이다. 그는 이미 1930년대에 ‘전화-회화’를 선보였다. 그는 전화로 이미지의 좌표와 색상을 알려주고 제작을 아예 간판 집에 맡겨버렸다. 60년대의 미니멀리스트 토니 스미스 역시 철공소에 전화로 작품의 제작을 의뢰하고 심지어 배달까지 시켰다. 같은 시기에 개념미술가 솔-르위트는 수학 공식만 주고 직공들에게 그 공식에 따라 벽에 도형을 그려나가게 했다.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은 아예 ‘공장’을 차려놓고 조수들에게 작품의 실행을 맡겼다. 대중의 눈에는 이게 이상해 보이겠지만, 사실 이 이상한 관행의 바탕에는 예술에 대한 새로운 ‘관념’이 깔려 있다. 즉, 어떤 대상을 ‘작품’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예술가의 ‘솜씨’가 아니라 ‘콘셉트’라는 관념이다. 이 새로운 관념을 창조한 사람은 물론 ‘사인’만으로 변기를 작품으로 둔갑시킨 마르셀 뒤샹이다.

다만 진중권은 대작 관행에도 한도가 있다고 선을 그으면서 구체적으로 낮은 대가 지불, 대작 관행이 이뤄지는 특정 예술 경향과 다른 조영남의 작품 특징, 대작 사실을 투명하게 밝히지 않음 등의 문제를 지적했다.
이처럼 예술의 본질이 ‘실행’이 아니라 ‘개념’에 있다면 대작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 그림을 대신 그려준 그 작가도 ‘콘셉트는 조영남 씨에게 받았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뭔가 개운치 않은 느낌이 남는다. 왜 그럴까? 일단 내 심기를 거스른 것은 대작 작가가 받았다는 터무니없이 낮은 ‘공임’이다. 작품당 10만원 남짓이라나? 자신을 ‘작가’라 여기는 이에게는 모욕적으로 느껴질 만한 액수다.

문제는 거기에 있다. 조영남은 그 작가가 ‘노동’을 했고 그 대가로 ‘공임’을 받은 것뿐이라 믿는다. 반면, 작가는 자신이 ‘작품’을 했고 그 ‘대우’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느낀다. 이 갈등은 대작의 성격에서 비롯된다. 개념미술가나 미니멀리스트, 팝아티스트들이 남에게 작업을 맡길 경우, 맡겨진 그 작업은 대개 기계적`반복적`익명적인 부분에 머문다. 즉, 예술가의 개인적 터치가 느껴질 수 없는 부분을 맡긴 것이다.

대행의 관행이 주로 미니멀리즘`개념미술`팝아트와 같은 특정 영역에 한정된 것은 그 때문이다. 그 관행이 아무 데서나 용인된 것은 아니다. 물론 ‘화투’를 그린 데서 볼 수 있듯이 조영남은 팝아티스트의 제스처를 취한다. 작품을 판매하는 방식도 ‘팝’스럽다. 하지만 그가 다른 이에게 시킨 것은 워홀의 경우처럼 익명성이 강한 복제의 작업이 아니라, 그린 이의 개인적 터치가 느껴질 수도 있는 타블로 작업이었다. 여기에는 어떤 애매함이 있다.

또 하나, 미니멀리스트`개념미술`팝아티스트들은 내가 아는 한 작품의 실행을 남에게 맡긴다는 사실을 결코 감추지 않았다. 심지어 워홀은 ‘나는 그림 같은 거 직접 그리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공공연히 자랑하고 다녔다. 남에게 작품의 실행을 맡긴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들의 작품 콘셉트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영남의 경우 내가 아는 한 그 사실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다니지 않았다. 여기에 또 다른 모호함이 있다.

물론 작가에게 꼭 그 사실을 밝히고 다녀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는 여전히 ‘내 작업의 콘셉트에 대행이 이미 포함되어 있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아니, 미술사에 대한 막연한 지식에서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대행 사실을 드러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라면 그의 미학적 관념이 정교하지 못한 것이고, 그 사실을 의도적으로 감춘 것이라면 그의 윤리적 의식이 정확하지 못한 것이다.

기고문에서 진중권은 이 문제는 '비평과 담론으로 다루어야 할 미학적-윤리적 문제이지, 검찰의 수사나 인터넷 인민재판으로 다루어야 할 사법적 문제는 아니다'라고 보았다. 사실 진중권이 쓴 글을 읽으면 진중권이 말하고 있는건 미술계의 '대작' 관행이 아니라 미술계의 '협업' 관행에 관한 설명으로 보인다. 중요한 건 1) 작품의 기본 설계인 콘셉트를 작가가 가지고 있어야 하고, 조수들은 단지 그 콘셉트를 실물로 제작할 때 필요한 기계적 반복작업을 위해 노동력을 제공하는 역할만 맡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2) 작가는 조수에게 숙식이든 노하우 전수든 급료 지불이든 충분한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3) 작가는 자신의 작업이 타인의 도움을 받아 '협업'한 것임을 투명하게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사실 데미안 허스트무라카미 다카시의 경우 1), 2), 3) 다 충족한다. 이들은 작업하면서 수십명 이상의 스태프들과 사실상 한 배를 탄 입장이다. 사실상 이런 대규모 팀을 꾸려 작업하는 작가들은 중소기업 사장이나 다를 바 없고 작품이 안 팔리면 자신뿐만 아니라 조수들까지 굶어야 한다. 정작 이런 작가들은 그렇게 작품으로 돈을 많이 벌어도 막상 이득을 조수들과 나누고 다음 작업을 준비하는데 또 돈을 쓰면 항상 돈이 모자란다고 한탄하는 형국이다. 사실 기고문 자체만 놓고 보면 조영남을 옹호했다기보다는 비판한 쪽에 가까워 보인다. '대행 사실을 드러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라면 그의 미학적 관념이 정교하지 못한 것이고, 그 사실을 의도적으로 감춘 것이라면 그의 윤리적 의식이 정확하지 못한 것이다.'라는 말 자체가 별로 긍정적으로 옹호하는 말이 아니다.

진중권의 기고문은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트위터나 기고문으로 진중권을 비판하던 자들 중에는 진중권의 글 앞부분만 보고 뒷부분은 읽지 않은 것이 아닌가 의심되는 사람들이 있었다. 앞서 내용처럼 진중권은 작품 콘셉트가 조영남 자신의 콘셉트냐, 송기창씨에게 공정한 댓가를 지불했느냐, 협업 사실을 밝혔느냐의 여부만 문제삼았는데 헛다리 짚고 열심히 열올리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 트위터에서 진중권은 비판하는 사람들과 설전을 벌이면서 “조영남이 직접 그린 것으로 알고 샀다고 해도 그림의 핵심은 작가의 콘셉이고 콘셉이 작품에 담겨 있다면 거래는 정상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며 ‘사기죄’가 성립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사기죄나 모욕죄로 조영남을 비판하고 고소하는 꼴을 비판한 것이다. 주의할 점은 진중권은 '사기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했지 다른 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는 안 했다. 실제로 그는 조영남은 사기죄가 아니라 노동법 위반이라 주장한 바 있다.#

미술평론가 반이정 또한 비슷한 시각을 가지고 미술계의 현재 메타에 대해 모르는 대중의 무지를 비판했다.# 특히 반이정은 주문-제작 관행(대작 관행)을 과거의 수공업 방식으로 되돌리는 건 불가능하다고 일축했다.
관행은 루비콘 강을 건넜는데 '미적 러다이트'들은 뒷북 난동을 부린다

그들이 성토하는 주문-제작의 관행을 개인 창작의 낭만적 전통으로 되돌릴 수 있을까? 단연코 없다. 불가능하다. 왜 되돌릴 수 없을까? 자명하다. 이번 사태와 주문-제작 관행을 비판하고 부인하는 평론가들에게 그들이 남긴 지난 강연과 글을 되돌아보라고 말하련다. 그들의 강연과 지면에서 공공연하게 격찬한 미술가 중에, 정확한 규모를 가늠할 수 없는 조수를 고용한 미술가가 아마 절대 다수를 차지할 게다. '장막에 가려 규모와 실상'을 파악할 수 없는 개인 스튜디오 화가를 포함하면 그 수는 더 많아진다. 지구촌 평론가라면 여기에 토를 달지 못할 것이다.(중략)

주문-제작 관행을 되돌릴 수 없는 현실에 대해, 조수를 고용한 작가 개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주문-제작으로 얻은 완성도 높은 작업을 기획하고 감상하고 호평해온 갤러리와 관객과 평론이 부지불식간에 연루된 결과물이 바로 미술계의 관행이다. 유능한 개인 요리사의 명성이 알려지자, 수요가 급증해 전문 보조원 여럿을 두고 그의 이름을 단 매장을 확대했다 치자. 흔한 일이다. 이전보다 완성도가 높은 요리가 제공될 것이고 고객과 언론의 만족과 평가도 상승할 것이다. 이때 누군가가 '요리사 개인기'를 향한 낭만을 환기시킨다 한들 이미 탄탄히 구축된 협업 체계가 원점으로 되돌아올까? 불가능하다. 입맛이 천정부지로 올라간 고객과 언론부터 그걸 원치 않을 것이다. 이번 사태에 빗대면, 대중적 공감을 살 법한 '수공의 미덕' 따위를 내세우면서 기계를 파괴하자고 외치는 미적 러다이트들은 그들 스스로 과거에 가담했던 사실을 까맣게 잊고 진실을 호도하고 있다.(중략)

"스튜디오 명칭을 작가 이름 대신, 서명으로 쓰는 건 어떨까요?"(중략)

스티브 잡스와 아이폰, 화가와 조수가 관여한 작품은 유사한 관계이니 저런 제안은 합리적이다. 하지만 저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무라카미 다카시 작품의 물리적인 완성 대부분을 100여명의 조수가 대행하니, 그가 운영하는 회사 이름을 따서 'ⓒkaikai kiki'라는 서명이 ⓒmurakami takasi보다 객관적인 사실일 게다. 그럼에도 회사명을 쓰는 서명은 작가 본인은 물론이고 그걸 전시하는 기획자, 작품을 거래하는 아트딜러나 급기야는 그걸 감상하고 구입하는 관객과 구매자마저 원치 않는 바다. 이런 판단은 '부지불식'간에 이뤄진다. 스튜디오가 공개되어 주문-제작의 관행이 엄연한 사실로 확인됐음에도 그렇다.

이 글을 읽고 어떤 사람은 미술과 요리를 감히 어떻게 동일선상에 비교하고 볼 수 있느냐고 따질 수 있지만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 있는 게 맞다. 미각과 시각은 다르지만 자극을 주고 만족을 준다는 점에서 요리와 미술은 동등한 '기술'일 뿐이다. 현대미술은 과거의 고전미술처럼 지고지순하고 우월한 진리를 찾는 분야가 아니라 사소하지만 소중한 차이를 찾으려 애쓰는 분야다. 과거의 미술이 우월성을 드러내기 위해 아름답고 웅장한 신상을 만들었다면 현대미술은 그 우월성에 억압당했던 타자들에 관심을 보이기 위해 사소하고 추한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예술은 다른 기술과 다른 뭔가 고상한 정수가 존재한다'는 생각 자체가 굉장히 아집을 드러내는 태도일 뿐이다. 또 반이정이 소위 '미적 러다이트'들이 스스로 과거에 가담했던 사실을 까맣게 잊고 진실을 호도한다고 말한 것은 낭만주의적 태도를 고수하는 예술가들조차도 결코 현대 자본주의의 분업체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해야 함을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19세기에 인상주의 예술가들은 기차나 사진같은 신기술에 의해 피폐해지는 산업사회를 거부하면서 인간의 감성으로 이에 맞설 수 있다고 착각했다. 고흐가 혼자 틀어박혀 그림을 그렸고 고갱이 타히티로 떠난 이유를 떠올려보자. 하지만 이런 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이미 당시 시각문화는 광고나 영화 같은 대중매체가 등장하면서 상업주의로 도배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런 상업주의가 만연한 사회에서 어떻게 이 새태를 비틀어 모순을 드러내는 작업을 할지를 고민해야지, 이미 수백년 전에 끝난 메타를 자폐적으로 반복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현재 한국 사회는 수백년전에 끝난 미술계 메타를 좀비마냥 계속 끄집어내 미신처럼 반복하고 있다. 더 이상 예술가는 붓질로 자신의 천재성을 드러내는 사람도 아니고 혼자 고독하게 작업할 수도 없으며 현대 세계화와 정보화의 흐름에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여전히 과거의 고흐처럼 어떻게 자신만의 화풍(또는 서명같이 구분되는 특징)을 완성시킬지만 고민한다면 이는 한참 뒤떨어진 것이다. 오늘날 그런 그림은 컴퓨터로도 얼마든지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반이정은 이러한 문제를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또 그는 추신에서 이후에 벌어질 사태가 뻔할 것이라고 비꼬았다.
ps. 조영남 대작의 풍랑이 잦아든 후 벌어질 현상을 단정적으로 예측해본다.

1. 주문-제작이 미술계를 구성하는 엄연한 풍경이건 말건, 대중의 73.8%는 작업을 완성하는 천재 개인 예술가의 신앙을 품은 채 살아갈 것이다.

2. 주문-제작이 미술계를 구성하는 엄연한 풍경이건 말건, 미술가를 다루는 교양 방송 프로그램과 미디어는 작업실에 고독하게 서있는 미술가의 모습을 대중에게 전파할 것이다.

3. 주문-제작이 미술계를 구성하는 엄연한 풍경이건 말건, 조영남과 대작 관행을 성토했던 평론가들은 강연과 지면에서 조수를 고용한 수많은 예술가들을 이전처럼 인용하고 격찬할 것이다.

4. 주문-제작이 미술계를 구성하는 엄연한 풍경이건 말건, 홀로 작품 제작에 임하는 절대 다수의 미술가들은 유명 작가들의 주문제작 관행이 불공정하다고 느낄 것이다. (이런 반응은 자연스럽다.)

5. 대중적 공분과 언론의 맹공과 사법적 판단이야 어떠하건, 십 수 명을 거느리고 주문-제작으로 작업을 완성해온 무수한 미술가들은 평시처럼, 해오던 공정대로 작업을 완성해 전시장에 걸 것이다.

6. 끝으로. 사법적 판단이야 어떠하건, 조영남은 물의를 일으킨 데에 고개 숙여 사죄한 후, 그가 진행했던 방송 무대로 복귀할 것이다.

어쨌든 반이정은 송기창씨가 "새로운 그림을 내가 창조적으로 그려서 주는 것은 아니다. 조씨가 아이템을 정해서 알려주면 나는 그 그림을 똑같이 여러 장 그려서 조씨에게 가져다준다."#고 진술했던 점을 들어 조영남의 화투 도상은 조영남이 수십 년 전에 개발한 독자적인 아이템인 게 맞다고 보았다. 대작 작가인 송기창씨에게 '화투가 말탄 그림 그려줘.' 하는 식으로 작업한 것을 두고 과연 조영남이 제대로 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일단 그렇다 치고 앞서 말한 세 가지 조건을 따져 보면 다음과 같다.[9] 1)의 작가가 콘셉트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의 측면에서 봤을 때 약간 미심쩍은 부분이 없진 않지만 큰 문제는 아니다. 더 큰 문제는 2)와 결부되는 문제인데 조영남이 자기 개인 만족용으로 작업하는 것처럼 이야기했다가 나중에 수백배 폭리를 취해 팔아치웠기 때문이다. 대작 작가인 송기창씨는 숙식을 제공받은 것도 아니고 어떤 미술 창작 노하우를 전수받은 것도 아니며 돈을 많이 받은 것도 아니다. 애초에 미술경력으로만 보면 송기창씨가 더 고수다. 조영남이 줄 노하우가 애초에 없는 것이다. 조영남 측은 “조수, 알바 개념”이라고 변명했지만 자기보다 더 경력이 많은 사람을 부려먹는 건 조수도 아니고 알바도 아닌 것이다. 이건 학부생이 대학교수를 부려먹고 몇십만원만 댓가로 주고 '알바로 쓴 것 뿐입니다'라고 주장하는 꼴인 것이다. 동시에 이는 3)과도 결부된 문제로, 차라리 처음부터 협업관계라고 말하고 작업했으면 미더워도 뭐라고 지적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지 않고 뒤늦게 밝혀지니까 조수니 알바니 운운하는 것 자체가 조영남이 미술계 작업방식을 잘 모른다는 반증인 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영남 사건은 이말년이 그린 만화의 상황을 꼭 빼닮았다. #

미술평론가 홍경한은 조영남과 일부 전문가들이 모든 작가가 대작을 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면서 이 사건으로 인해 미술계의 부당한 대우가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고 대중의 예술계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것을 우려했다. #

이미 각종 예술계가 이러한 관점에서 창작을 하는 경우가 많아 세계적으로 저작권법은 최초 구상자에게 유리한 판례가 나오고 있다. 만약 조영남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면 만화, 애니메이션은 그림을 그리는 대리 작업자가 많은 작업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데 이들이 조영남의 유죄 판결에 따라 각자의 저작권을 주장하면서 대부분의 작품의 저작권이 공중 분해되고 말았을 것이다.

5.4. 저작권법상 허위공표죄 성립 여부

저작권법 제137조 [벌칙]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1. 저작자가 아닌 자를 저작자로 하여 실명 또는 이명을 표시하여 저작물을 공표한 자

사실 조영남의 유죄가 성립된다면 가장 가능성이 높은 혐의다. 조영남이 해당 작품의 저작권자가 아니라면 전형적으로 저작권법 제137조제1항제1호에 해당된다.

문제는 검사가 이를 알지 못하고 항소심 변론종결시까지도 기소하지 못하였다가 뒤늦게 상고심에 와서야 상고이유로서 추가한 것이다.

6. 재판

6.1. 검찰 구형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18단독은 2017년 8월 9일 오후 조영남의 사기 혐의 결심 공판을 열었다. 이날 공판에서 검찰은 조영남에 대해 징역 1년 6개월을 구형했다.#

6.2. 1심

"조영남, 죄질 가볍지 않다..국내 미술계 혼란 초래"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18단독은 2017년 10월 18일 오후 조영남의 사기 혐의 1심 선고 기일을 열고 조영남에게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이날 재판부는 조영남의 공소 사실에 대해 모두 유죄로 판단된다고 밝히며 심지어 죄질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입장도 전했다.

재판부는 "조영남은 이번 일로 국내 미술 시장의 혼란을 초래했고 작가로서 신뢰성도 떨어뜨렸다"며 "자신을 수족처럼 부리는 조수로 키웠지만 이에 대한 노력과 노동에 대한 가치를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밝혔다. 이어 "이번 일을 통해 조영남은 무명 작가들로 하여금 자괴감을 남겼다고도 볼 수 있다"고 전했다. 재판부는 "범행 자체만 봤을 때는 결코 가볍게 넘길 수가 없다. 사기 혐의에 대해서도 조영남의 피해자는 20명이 넘고 피해 금액도 1억 원이 넘는다. 또한 대부분의 피해자와 명시적인 합의도 이뤄지지 않았다"며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켰는데도 책임 있는 자세와 반성도 부족하다"고 전했다.

재판부는 이와 함께 "조영남은 연예인으로서 자신의 높은 인지도와 송씨의 높은 예술적 완성도를 결합해 자신의 이름을 내건 전시회를 개최했고 이를 통해 미술 작품을 높은 가격에 판매한 의도도 분명하다고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조영남은 이에 반박해 항소의 뜻을 전했다. 10월 19일 조영남은 서울중앙지법에 항소장을 제출했다. 관련 기사

10월 24일 검찰도 항소장을 제출했다.

6.3. 2심

8월 17일 항소심 재판부는 조영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관련 기사 재판부는 다음의 사유를 들며 범죄의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 화투를 소재로 한 해당 작품은 조영남의 고유한 아이디어였다.
▲ 대작 화가 송모씨 등은 조영남의 아이디어를 작품으로 구현하기 위한 기술보조에 불과했다.
▲ 구매자들에게 조영남이 일일이 직접 다 그렸는지의 여부는 반드시 필요하거나 중요한 정보라고 볼 수 없다.
▲ 그림 구매자들은 구입 동기로 ‘아이디어의 참신함’ ‘조영남의 이름값’ ‘소장가치’ 등을 진술했다.
▲ 일부 구매자는 조수 사용을 대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 미술사적으로도 조수가 제작을 보조하는 방식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며 조영남이 구매자들에게 송씨 등을 사용한 사실을 통보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6.4. 3심

검찰은 위 판결에 불복하여 상고했다.

대법원은 2020년 5월 28일 14시에 공개변론을 열었다. 다음 쟁점에 관해 변론이 실시되었다.
① 미술저작권에서 사상과 감정의 표현방식과 시기[대작화가와 보조자(조수)의 구별기준]
② 미술계에서 제3자를 사용한 제작 방식이 허용되는지 여부
③ 제3자를 사용한 미술작품 제작 방식을 작품 구매자들에게 미리 알리는 것이 미술계의 통상적인 거래 관행인지 여부
④ 피고인 조영남의 친작(親作) 여부가 구매자들의 작품 구매의 본질적인 동기로 볼 수 있는지 여부
⑤ 예술 분야에서 예술 작품의 가치 평가(판단)에 관한 사법심사 기준

특기할 것은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아닌 소부(小部)에서 공개변론이 열린 것은 위 사건이 대한민국 사상 최초라는 점이다.

대법원은 2020년 6월 25일 검사의 상고를 기각하여 조영남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다만 대법원 판결과 별개의 재판이 계속되고 있다. 검찰은 고지 의무가 인정되지 않는지에 대해 다시 살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7. 결론

7.1. 작업 참여 스태프 명단 공개 필요

문제가 되는 점이 있다면 예술계에서 특히 미술계에서 관행으로 누가 작업에 참여했는지 밝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작가들이 조수들의 이름을 표시하지 않는 건 그냥 작품 설명란에 여백이 모자라서다. 작품 밑에 붙는 캡션에 작가 이외의 조수들의 이름을 다 적는다면 명함 크기가 아니라 거의 A4 용지 크기만큼 커져야 할 테니. 리플렛에는 참여한 조수들의 이름을 적는 작가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어쨌든 작품 제작에 참여한 조수들의 이름을 표시해 주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두고두고 문제가 될 수 있다. 앞으로 이런 미술계의 관행은 고쳐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미디어 아트 같은 영상 작업의 경우 영화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작품 말미에 스태프롤을 넣고 누가 무슨 일을 했는지 표시하는 경우도 있다.

7.2. 공정한 계약 방식 도입 필요

더불어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없게끔 투명한 계약 방식 도입이 필요하다. 사실 예술인 복지법 개정안 시행으로 2월부터 서면 계약이 의무화되긴 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모르고 열정페이 당하는 무명 예술가들이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예술인복지재단 홈페이지에서 표준계약서를 제공하고 있다.

8. 여담

원래부터 밉상으로 안 좋은 평가를 받던 조영남은 의혹이 처음 제기되었을 때 언론과 네티즌들을 포함한 전 국민에게 엄청난 욕을 먹었다. 그런 상황에서 미술의 전문가라는 사람들마저 대작은 관행이 아니라며 그를 비판하는 데 동참한 것이다. 워낙 비난이 거세 익명의 인터뷰에서만 일부 전문가들이 대작은 업계의 관행이 맞다고 할 뿐이었다.

결국 법적으로는 죄가 없던 한 사람을 진중권 교수만이 조영남은 무죄라며 평소처럼 1대 100 만으로 싸웠다. 이에 무죄 판결 후 조영남은 CBS 박재홍의 한판승부에서 "조자룡처럼 싸워준 진중권, 평생 은인"이라고 고마워하였다. 그는 진중권이 자신을 도와준 유일한 사람이라고 하였고 이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이지만 법정에서 전문가 증인으로까지 나와 주었다고 하였다.


법적으로 무죄를 받았으나, 상처뿐인 승리가 되었다. 단지 배경에 살짝 덧칠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법적인 여부를 떠나 사기를 당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생겨 환불을 요구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환불을 요청한 사람이) 한 20명 가까이 됐다. 그러는 통에 내가 벌어놓은 돈을 집만 남기고 다 날아갔다. 생전 처음으로 은행에서 대출까지 받았다. 나는 최소한 3억 정도는 받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1억밖에 안된다더라. 아파트가 비싼데 내가 은행 거래를 한번도 안해서 안된다더라”며 “1억원을 대출 받아 다 환불해줬다.”라고 말하였다.


[1] 사)한국미술협회, 사)한국전업미술가협회, 사)서울미술협회, 사)한국수채화협회, 사)현대한국화협회, 사)목우회, 사)구상전, 대한민국회화제, 대한민국구상화원로작가협의회, 미술단체 신기회, 미술단체 창작미술협회[2] 수묵화의 경우 덧그리기 어려워서 그렇지 유화와 비교하면 손이 덜 간다. 물론 규모가 큰 산수화나 꼼꼼한 초상화를 그린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3] 이미 1963년에 로버트 모리스는 '섬미적 철회 선언(Statement of Aesthetic Withdrawal)'을 통해 개념과 예술가의 선언이 예술 행위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바 있다.[4] 암실형 바늘구멍 사진기와 같은 원리의 구조물[5] 잠망경처럼 거울에 비친 상을 통해 그림을 그리도록 한 도구[6] 피에르는 특히 초상화에 주력하는 예술가다. 여러 인물들과 작업하는데 해외 유명인사는 물론이고 CL과 빅뱅 TOP의 초상화를 작업하기도 했다.[7] 이러한 작업 방식은 피에르의 정체성과 아이디어를 대표하며 엄연한 예술작품으로 인정받는다.[8] 참고로 조영남의 이름으로 팔린 그림들은 평균적으로 한 점에 약 800만원 정도의 가격이 매겨졌다. 조영남이 "나는 돈 받고 판 적이 없다."고 거짓말한 것도 문제가 되었다.[9] 1) 작품의 기본 설계인 콘셉트를 작가가 가지고 있어야 하고, 조수들은 단지 그 콘셉트를 실물로 제작할 때 필요한 기계적 반복작업을 위해 노동력을 제공하는 역할만 맡는다. 2) 작가는 조수에게 숙식이든 노하우 전수든 급료 지불이든 충분한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 3) 작가는 자신의 작업이 타인의 도움을 받아 '협업'한 것임을 투명하게 밝혀야 한다.


파일:CC-white.svg 이 문단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r348
, 번 문단
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단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r348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