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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82년(고종 19년) 10월 4일(음력 8월 23일), 조선과 청나라가 체결한 양국간의 수륙 양면에 걸친 통상에 관한 규정을 정한 조약. 100년이 넘은 아직까지 그 효력을 상실하지 않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현대에 들어 조약이 행사되지는 않는다.당시의 정식 명칭은 양측 모두 중조상민수륙무역장정(中朝商民水陸貿易章程)이었고, 장정 본문에서도 청나라를 청이 아닌 '중국'으로만 표기하고 있다. 1899년 한청통상조약이 체결되기 전까지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외교 문서에는 청(淸)이란 표현이 일절 사용되지 않았다.
청에서는 진해관도(津海關道) 주복(周馥)과 후선도(候選道) 마건충(馬建忠), 조선에서는 진주정사(陳奏正使) 조영하, 진주부사(陳奏副使) 김홍집 그리고 문의관(問議官) 어윤중이 체결하였다.
2. 배경
○ 이날에, 조선국왕 이종(李倧, li dzung)이 문서를 보내어 아뢰기를, "조선국왕 신(臣) 이종은 삼가 대청국(大清國)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 폐하께 글을 올립니다. …… 지금 그런 까닭으로 칭신(稱臣)과 봉표(奉表)하여 번방(藩邦)으로 삼아주시기를 원합니다.
《太宗文皇帝實錄》 卷33 숭덕2년 정월 24일 2번째 기사
1637년 삼전도의 굴욕 이후 조선은 청의 조공국이었다.[1] 난징조약 이래 1860년대까지 조선의 요청을 계기로 조선이 청과 열강이 체결한 조약의 적용 범위 안에 포함된다고 주장했으나, 1866년 병인양요와 1876년 강화도 조약 등을 거치면서 조선의 자주 측면을 강조하였다.[2][3]《太宗文皇帝實錄》 卷33 숭덕2년 정월 24일 2번째 기사
제가 제안한 관원을 조선에 파견하여 대신 외교를 주지하는 일과 조선으로 하여금 조약을 체결케 하도록 유지(諭旨)를 청하는 일은 지금으로서는 바로 실행하기 곤란한 것 같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조선이 이전에 일본과 조약을 맺었는데 조약 중에 조선이 자주지방(自主之邦)이라는 한마디가 있었습니다. …… 순편하게 중국속국(中國屬國)이라는 영자(影子)를 노출한다면 곧 외인(外人)들이 자주지방임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향후 아무 일이 없을 때는 서로 연락하면서 크게 응원할 수 있고, 일이 있을 때는 서로 책응(策應)하면서 중립의 입장을 취할 필요가 없습니다.
『淸季中日韓關係史料』 2, 문서번호 349, p. 456.
그러나 청은[4] 청과 조선 간의 종주-종속 관계를 국제법적으로 명문화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5] 하여장(何如璋)을 비롯한 외교가의 추동에 따라 1882년 5월 17일 진해관도 주복(周馥)은 어윤중과의 회담 과정에서 조약에 '속국'을 명기할 것을 분명히 했으며, 북양대신이 상무를 맡을 관원을 파견할 것을 제안했다. 1882년 5월 22일, 이홍장은 속방조관을 거부당한 대신 조선으로 하여금 미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한 직후 속방조회를 보내게 하여 속방(屬邦)의 위상을 자인하게 했다.[6] 『淸季中日韓關係史料』 2, 문서번호 349, p. 456.
1882년 7월 23일, 임오군란이 발발하자, 일본은 자국민의 피해를 빌미로 8일 뒤 일본군의 파병을 결정하였으며, 8월 2일, 조선 측의 요청으로 청군 또한 5일만에 조선에 출병하였다. 마건충은 일본 측과 회담을 가져 청 황제가 책봉하여 국주로 삼은 조선국왕의 자주권을 회복할 것을 촉구하였으며, 8월 26일에는 흥선대원군을 유인하여 "왕을 무시한 것은 기어이 황제를 경시한 것이니, 그 죄는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체포 후 압송했다.[7] 이렇게 청은 군란을 진압하고 조선 조정으로 하여금 일본에 배상을 요구하게 함으로써, 일본의 영향력을 차단하였다.[8]
3. 내용
조선은 오랫동안의 번방(藩邦)으로서 전례(典禮)에 관한 것에 정해진 제도가 있다는 것은 다시 의논할 여지가 없다. 다만 현재 각국(各國)이 수로(水路)를 통하여 통상하고 있어 해금(海禁)을 속히 열어, 양국 상인이 일체 상호 무역하여 함께 이익을 보게 해야 한다. 변계(邊界)에서 호시(互市)하는 규례도 시의(時宜)에 맞게 변통해야 한다. 이번에 제정한 수륙 무역 장정은 중국이 속방(屬邦)을 우대하는 뜻이며, 각국과 일체 같은 이득을 보도록 하는데 있지 않다. 이에 각 조항을 아래와 같이 정한다. 제1조: 앞으로 북양대신(北洋大臣)의 신임장을 가지고 파견된 상무위원은 개항한 조선의 항구에 주재하면서 전적으로 본국의 상인을 돌본다. 해원과 조선 관원이 내왕할 때에는 다같이 평등한 예로 우대한다. 중대한 사건을 맞아 조선 관원과 마음대로 결정하기가 편치 않을 경우 북양 대신에게 상세히 청하여 조선 국왕에게 자문을 보내 그 정부에서 처리하게 한다. 조선 국왕도 대원(大員)을 파견하여 천진(天津)에 주재시키고 아울러 다른 관원을 개방한 청나라의 항구에 나누어 파견하여 상무위원으로 충당한다. 해원이 도(道)·부(府)·주(州)·현(縣) 등 지방관과 왕래할 때에도 평등한 예로 상대한다. 해결하기 어려운 사건을 만나면 천진에 주재하는 대원에게 상세히 청하여 정탈한다. 양국 상무위원이 쓸 경비는 자비에 속하며 사사로이 요구할 수 없다. 이를 관원이 멋대로 고집을 부려 일처리가 부당할 때에는 북양대신과 조선 국왕은 피차 통지하고 즉시 소환한다. 제2조: 청나라 상인이 조선 항구에서 만일 개별적으로 고소를 제기할 일이 있을 경우 청나라 상무위원에게 넘겨 심의 판결한다. 이밖에 재산 문제에 관한 범죄 사건에 조선 인민이 원고가 되고 청나라 인민이 피고일 때에는 청나라 상무위원이 체포하여 심의 판결하고, 청나라 인민이 원고가 되고 조선 인민이 피고일 때에는 조선 관원이 피고인의 범죄 행위를 청나라 상무위원과 협의하고 법률에 따라 심의하여 판결한다. 조선 상인이 개항한 청나라 항구에서 범한 일체의 재산에 관한 범죄 등 사건에 있어서는 피고와 원고가 어느 나라 인민이든 모두 청나라 지방관이 법률에 따라 심의하여 판결하고, 아울러 조선 상무위원에게 통지하여 등록하도록 한다. 판결한 사건에 대하여 조선 인민이 승복하지 않을 때에는 해국(骸國)의 상무위원이 대헌(大憲)에게 청원하여 다시 조사하여 공정성을 밝힌다. 조선 인민이 본국에서 청나라 상무위원에게 혹은 청나라의 각 지방관에게 청나라 인민이나 각읍(各邑)의 아역인 등을 고소할 때에는 사적으로 한 푼의 수수료도 요구하지 못한다. 위반한 자는 조사하여 해관의 관원을 엄중하게 처벌한다. 양국 인민이 본국에서 또는 피차의 통상 항구에서 본국의 법률을 범하고 사사로이 피차의 지계로 도피한 경우에는 각 지방관은 피차의 상무위원에게 통지하고 곧 대책을 세워 체포하여 가까운 곳의 상무위원에게 넘겨 본국에 압송해서 처벌한다. 다만 도중에서 구금을 풀 수 있고 학대하지 못한다. 제3조: 양국 상선은 피차 통상 항구에 들어가 교역을 할 수 있다. 모든 싣고 부리는 화물과 일체의 해관에 바치는 세금은 모두 양국에서 정한 장정에 따라 처리한다. 피차 바닷가에서 풍랑을 만났거나 얕은 물에 걸렸을 때에는 장소에 따라 정박하고 음식물을 사며 선척을 수리할 수 있다. 일체의 경비는 선주의 자비로 하고 지방관은 타당한 요금에 따른다. 선척이 파괴되었을 때에는 지방관은 대책을 강구하여 구호해야 하고, 배에 탄 여객과 상인과 선원들은 가까운 항구의 피차 상무 위원에게 넘겨 귀국시켜 앞서 서로 호송하던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 양국 상선이 풍랑을 만나 손상을 입어 수리해야 할 경우를 제외하고 개방하지 않은 항구에 몰래 들어가 무역을 하는 자는 조사하여 체포하고 배와 화물은 관에서 몰수한다. 조선의 평안도, 황해도와 청나라의 산동, 봉천 등 성(省)의 연해 지방에서는 양국의 어선들이 내왕하면서 고기를 잡을 수 있고, 아울러 해안에 올라가 음식물과 식수를 살 수 있으나, 사적으로 화물을 무역할 수 없다. 위반하는 자는 배와 화물을 관에서 몰수한다. 소재 지방에서 법을 범하는 등의 일이 있을 경우에는 곧 해당 지방관이 체포하여 가까운 곳의 상무 위원에게 넘겨 제2조에 준하여 처벌한다. 피차의 어선에서 징수하는 어세(魚稅)는 조약을 준행한 지 2년 뒤에 다시 모여 토의하여 작정(酌定)한다. 제4조: 양국 상인이 피차 개항한 항구에서 무역을 할 때에 법을 제대로 준수한다면 땅을 세내고 방을 세내어 집을 지을 수 있게 허가한다. 토산물과 금지하지 않는 물건은 모두 교역을 허가한다. 입항하고 출항하는 화물에 대해 납부해야 할 화물세와 선세를 모두 피차의 해관 통행 장정에 따라 완납하는 것을 제외하고 토산물을 이 항구에서 저 항구로 실어가려고 하는 경우에는 이미 납부한 출항세 외에 이어 입항할 때에는 완납한 사실을 확인하고 출항세의 절반을 납부한다. 조선 상인이 북경(北京)에서 규정에 따라 교역하고, 청나라 상인이 조선의 양화진과 한성(漢城)에 들어가 영업소를 개설한 경우를 제외하고 각종 화물을 내지로 운반하여 상점을 차리고 파는 것을 허가하지 않는다. 양국 상인이 내지로 들어가 토산물을 구입하려고 할 때에는 피차의 상무위원에게 품청하여, 지방관과 연서(連署)하여 허가증을 발급하되 구입할 처소를 명시하고, 거마(車馬)와 선척을 해당 상인이 고용하도록 하고, 연도(沿途)의 세금은 규정대로 완납해야 한다. 피차 내지로 들어가 유력(遊歷)하려는 자는 상무위원에게 품청하여, 지방관이 연서하여 허가증을 발급해야만 들어갈 수 있다. 연도 지방에서 범법 등 일이 있을 때에는 모두 지방관이 가까운 통상 항구로 압송하여 제2조에 의하여 처벌한다. 도중에서 구금을 풀 수 있고 학대하지 못한다. 제5조: 과거 양국 변계의 의주, 회령, 경원 등지에서 호시가 있었는데 모두 관원이 주관하여 매번 장애가 많았다. 이에 압록강 건너편의 책문과 의주 두 곳을 그리고 두만강 건너편의 훈춘과 회령 두 곳을 정하여 변경 백성들이 수시로 왕래하며 교역하도록 한다. 양국은 다만 피차 개시(開市)하는 곳에 해관과 초소를 설치하고 비류(匪類)를 살피고 세금을 징수한다. 징수하는 세금은 나가는 물건이나 들어오는 물건을 막론하고 홍삼을 제외하고는 모두 100분의 5를 징수하고, 종전의 객사와 식량, 꼴, 영송 등의 비용을 모두 없앤다. 변경 백성의 전재(錢財)의 범죄 등 사건에 대해서는 피차 지방관들이 규정된 법률에 의하여 처리하는데, 일체의 상세한 장정은 북양 대신과 조선 국왕이 파견한 관원이 해처(該處)에 가서 조사하여 협의하고 품청하여 결정한다. 제6조: 양국 상인은 어느 항구와 변계 지방을 막론하고 모두 수입 아편과 토종 아편 그리고 제작된 무기를 운반하여 파는 것을 허가하지 않는다. 위반하는 자는 조사하여 분별하여 엄격하게 처리한다. 홍삼에 대해서는 조선 상인이 으레 청나라 지역으로 가지고 들어갈 수 있도록 허가하며, 납부할 세금은 가격에 따라서 100분의 15를 징수한다. 청나라 상인이 특별 허가를 받지 않고 조선 국경 밖으로 사사로이 내가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조사하여 물건을 관청에서 몰수한다. 제7조: 양국의 역로(驛路)는 책문으로 통한다. 육로로 오가는데 공급이 매우 번거롭고 비용이 많이 든다. 현재 해금이 열렸으니 각자 편의에 따라 바닷길로 왕래하는 것을 승인한다. 다만 조선에는 현재 병상(兵商)의 윤선이 없다. 조선 국왕은 북양대신과 협의하고 잠시 상국(商局)의 윤선을 매월 정기적으로 한 차례 내왕하도록 할 수 있으며, 조선 정부에서는 선비(船費) 약간을 덧붙인다. 이밖에 청나라 병선이 조선의 바닷가에 유력하고 아울러 각 처의 항구에 정박하여 방어를 도울 때에 지방 관청에서 공급하던 것을 일체 면제한다. 식량을 사고 경비를 마련하는 것에 있어서는 모두 병선에서 자체 마련하며, 해당 병선의 함장 이하는 조선 지방관과 동등한 예로 상대하고, 선원들이 상륙하면 병선의 관원은 엄격히 단속하여 조금이라도 소란을 피우거나 사건을 일으키는 일이 없도록 한다. 제8조: 이번에 정한 무역장정은 아직 간략하나 양국 관리와 백성이 정한 조항을 일체 준수하고, 이후 증손(增損)할 일이 있을 경우 수시로 북양 대신과 조선 국왕이 협의하여 적절하게 처리한다. 광서(光緖) 8년 8월 중국 2품함(二品銜) 진해관도(津海關道) 주복(周馥) 2품함 후선도(候選道) 마건충(馬建忠) 조선국 진주정사(陳奏正使) 조영하(趙寧夏) 진주부사(陳奏副使) 김홍집(金弘集) 문의관(問議官) 어윤중(魚允中) |
내용을 보면 우선 전문에서 대놓고 중국의 속방(속국)을 우대한다고 표현하고 있으며, 제1조는 조선 국왕과 중국의 북양대신이 사실상 동급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리고 제2조는 '조선인이 중국에서 범죄시 중국법으로 처벌, 중국인이 조선에서 범죄 시 중국 법으로 처벌한다'는 매우 노골적인 치외법권 조항이다. 다른 국가와의 치외법권 조항의 경우 상대국에서의 규정이 빠져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조차도 불공정 조약으로 취급되지만, 무역장정에서는 대놓고 자국 상인과 조선 상인의 차별 대우를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청이 속국 조선을 대놓고 하대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제4조를 통해서 청나라 상인이 양화진과 한성에 영업소를 개설하고 상업 행위가 가능하게 되었다. 물론 조선 상인들도 북경에서 영업을 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당시 상업 능력이나 자본 수준에서 조선 상인들은 청나라 상인들에 비해 명확히 밀렸을 뿐더러 2조의 치외법권 때문에 조선에 대한 청의 일방적 경제적 침탈이 심화되었다. 이 장정은 서구 열강들이 식민지화할까 말까 하는 국가들에게 강요한 전형적인 불공정 조약들과 일면 유사하다.
4. 결과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의 체결 결과 조선으로선 외국(청나라)의 상인을 최초로 내국에까지 끌어들이게 된 계기가 되었다. 청의 상인들이 조선 내륙으로 진출하자 일본도 다음해에 조일통상장정을 통해 최혜국 대우를 조항으로 집어넣고 이를 내세워 일본 상인도 조선 내륙으로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청상의 내지통상권을 허용하는 반대급부로 조선 상인 역시 청국에서 내지 통상이 가능해지게 되었다.[9]무엇보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은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한 청의 행동이었다. 무역장정의 성격을 두고 해방 이후 한국 학계에서는 '식민지화' 및 '속국화'[10]로 해석했으나,[11] 근래에는 조공책봉질서 국제법 질서의 연속성에 주목하여 '이중적 외교'로 해석하는 연구도 있다.[12] 더나아가 그 동안의 선행 연구에서는 청이 전통적인 중화질서에 따른 ‘屬邦自主’로 일관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었지만[13] 학계 일부에서는 《만국공법(Elements of International Law)》과 《공법회통(Das moderne Volkerrecht der Civilisierten Staten)》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비록 두 질서가 다른 성질을 지니되, 봉건적인 종주(Suzerain)-봉신(Vassal) 관계를 상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양자의 본질적 차이가 없다는 것을 지적하며, 청말의 대조선 외교는 이중적, 이원적이었던 것이라기 보단 재확인과 재배치를 통한 재창출에 불과했다는 구체적인 연구도 제기됐다.[14] 물론 이에 대해서는 학계의 다른 반론들과 설명이 좀더 필요하다는 의견들 또한 팽팽히 존재하는 상황이다.[15]
생각건대, 태서(泰西) 통례(通例)에 모든 속국의 정치는 자주(自主)로 할 수 없습니다. 고로 남들과 조약을 체결할 때 그 통할(統轄)의 나라가 정사(政事)를 주정(主政)합니다. 즉 반주지국(半主之國, Semi-Sovereign State)은 가히 조약에 임할 수 있습니다. 또한 단지 능히 통상만 의판(議辦)할 수 있을 뿐 수호(修好, alliance or confederation)는 할 수 없습니다. …… 조선은 동삼성(東三省)의 병폐(屛蔽)입니다. 조선이 위태로워 망하면 중국의 세가 다시 급해질 것입니다. 이러한 무사한 때를 틈 타 대신(大臣)을 파견하고 주재하도록 하여 통상을 주지(主持)한다는 명목을 빙자하여 …… 조선을 보호하면 곧 우리의 국경을 굳힐 수 있으니 또한 태서 속국의 예와 서로 들어맞습니다.
《淸季中日韓關係史料》 第三卷, 編號624, p.1032.
《淸季中日韓關係史料》 第三卷, 編號624, p.1032.
원(元) 때에 여러 번 감국(監國)을 파견하였으나 그 직권이 일치하지 않았고 분란이 익히 일어났습니다. 만약 조정과 왕을 폐하고 이를 고쳐 행성(行省)으로 삼는다면 거동이 기이하고 독특하게 일어날 것입니다. 하물며 오늘날은 각국이 이미 더불어 조약에 임하여 통상(通商)하고 있는데 러일[俄日]이 그 틈을 엿보아 필히 어지러운 일이 일어나는 틈을 탈 것이니 반란을 다스리고자 하여도 사세(事勢)가 아마 행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李鴻章全集》 33, G11-06-021
1882년 임오군란을 기점으로 청의 종주권이 강화된 것을 두고 양국관계가 획기적인 변화를 겪었다는 기존의 통설은, 1842년 난징 조약 이래[16] 국제법 질서가 동아시아를 석권하기 시작할 무렵부터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까지 청이 일관적으로 조선을 청의 속국이라는 입장을 고수, 관철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성립하기 어렵다. 무역장정은 어디까지나 중화질서상 속국 지위를 국제법 질서상 속국.반주지국으로 재창출하는 장치였으며, 청은 무역장정 등을 통해 영국으로부터 조선의 종속성(depedency)을 인정받았고, 이미 몇개월 전 유사 속국(a semi-dependant state)의 위상을 관철시킨 미국으로부터는 침묵을 받아냈다.[17]《李鴻章全集》 33, G11-06-021
물론, 이에대한 반론 또한 존재한다. 18세기에 편찬된 明史 에서 조선을 ‘외국’으로 분류한 것과는 달리, 1920년대에 초고가 일단락 된 淸史稿 에서는 조선을 ‘속국’으로 분류했다.[18] 이는 조선의 위상이 명・조선 관계에서보다 청・조선 관계에서 더 격하된 것처럼 오해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한다. 그렇지만 이는 1920년대 당시에는 중화민국의 지식인들이 이미 서양의 萬國公法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만국공법의 ‘vassal state’를 기존에 이미 널리 쓰이던 屬國이라는 말로 문자적으로 번역해 이해한 결과였을 뿐이었다.[19]
다른 말로, 이전부터 널리 쓰이던 속국이라는 용어의 개념을 아편전쟁(1839-1842)이후 만국공법이 널리 유통됨에 따라, 또한 1882년 이후 청나라가 조선의 내정에 노골적으로 개입함에 따라 서양 개념의 vassal state로 자의적으로 재해석해 사용한 결과였던 것이다. 오히려, 18세기에 편찬된 '명사'에 조선이 외국으로 분류된 이유는 당시 청에서 조선을 외국으로 보고 있었다는 반증이 되며, 1920년대에 급조된 청사고에서 조선이 속국으로 분류된 것은 당시 중화민국의 지식인들이 과거의 조선을 그렇게 소급해서 이해했다는 증거가 된다. 따라서 만국공법 이전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무대에서 쓰이던 속국의 의미가 서양의 근대 개념으로서의 vassal state와 같다고는 결코 볼 수 없다. 실제로, 개항(1876) 이전의 청나라 사람들은 조선을 외국으로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결국 서양 학자들의 눈으로 보기에도, 중국의 역사기록에 보이는 속국이나 번국을 각기 독자적 권력체계와 영토주권을 갖춘 외국, 곧 주권국으로 보지 않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20]
무엇보다 전근대 동아시아의 조공책봉 제도는 큰나라와 작은나라 간의 국제적 상호승인을 위한 의례적 성격이 강했으며, ‘속국(조공국)’은 책봉국의 정치적 간섭 없이 내정과 외교 등 제반 국사를 자주적으로 처리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그것은 서양의 ‘피보호국(protectorate)’ 또는 ‘반주권국(semi-sovereign state)’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었으며, ‘속국=dependent state’라는 인식 또는 의미의 변질은 19세기 이후 서양 국제법의 전파와 중국의 조선 속국화 정책 추진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21] 실제로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속국(屬國)’의 의미는 다양했으나, 일반적으로는 ‘조공국’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며 『만국공법』에 따르면, “만약 그 국사를 자치하여 타국으로부터 명을 받지 않는다면 그 국가는 자주국(independent state)라고 할 수 있다.(凡有邦國 無論何等國法 若能自治其事 而不聽命於他國 則可自主者矣)”라고 규정되어 있으므로 이에 따르면 전통적 의미의 ‘속국=조공국’은 곧 ‘자주국(independent state)’에 해당하였다.[22]
《청광서 조중법 교섭사료》
“중국의 이른바 ‘속국’은 바로 외국에서 말하는 ‘보호국’입니다. 이유없이 다른 나라를 침범하거나 화호를 맺은 동맹국을 침범하는 것은모두 만국공법에서 반드시 금하는 것입니다. 살펴보건대 법월화약(프랑스가 베트남을 사실상 보호령으로 삼은 1874년 사이공 조약을가리킴-인용자)에 ‘프랑스는 베트남이 자주권을 가져서 어떤 나라에든지 복종하지 않음을 분명히 인식한다. 혹시 내란 및 외국의침략이 생기면 프랑스가 즉시 원조한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베트남이 중국의 속국이 아니요, 스스로 원조를 할 권한을 인정하여마치 일본이 류큐를 멸망시킨 고지(故智)와 같이 보호를 가탁해서 그 잠식하는 음모를 수월케 하고자 함을 명백히 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국이 베트남을 다투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속국’의 이름을 다투어야 하고, ‘속국’의 이름을 존속시키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보호’의 실제를 남겨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清光緒朝中法交涉史料》, 4권,〈内閣學士周德潤請用兵保護越南摺〉 광서 9년 4월 7일, p. 6., "中國所謂屬國 卽外國所謂保護 無故侵人之國 及侵和好之與國 皆萬國公法所必禁者也 査法越和約云 法國明知越國係操自主之權 非有遵服何國儻有匪梗 幷外國侵擾 法國卽當幫助 是明謂越南非中國之屬國而欲以自許幫助 假託保護 以自便其蠶食之謨 如日本滅琉球故智 然則中國欲爭越南 必先爭屬國之名 欲存屬國 必先存保護之實"
“중국의 이른바 ‘속국’은 바로 외국에서 말하는 ‘보호국’입니다. 이유없이 다른 나라를 침범하거나 화호를 맺은 동맹국을 침범하는 것은모두 만국공법에서 반드시 금하는 것입니다. 살펴보건대 법월화약(프랑스가 베트남을 사실상 보호령으로 삼은 1874년 사이공 조약을가리킴-인용자)에 ‘프랑스는 베트남이 자주권을 가져서 어떤 나라에든지 복종하지 않음을 분명히 인식한다. 혹시 내란 및 외국의침략이 생기면 프랑스가 즉시 원조한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베트남이 중국의 속국이 아니요, 스스로 원조를 할 권한을 인정하여마치 일본이 류큐를 멸망시킨 고지(故智)와 같이 보호를 가탁해서 그 잠식하는 음모를 수월케 하고자 함을 명백히 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국이 베트남을 다투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속국’의 이름을 다투어야 하고, ‘속국’의 이름을 존속시키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보호’의 실제를 남겨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清光緒朝中法交涉史料》, 4권,〈内閣學士周德潤請用兵保護越南摺〉 광서 9년 4월 7일, p. 6., "中國所謂屬國 卽外國所謂保護 無故侵人之國 及侵和好之與國 皆萬國公法所必禁者也 査法越和約云 法國明知越國係操自主之權 非有遵服何國儻有匪梗 幷外國侵擾 法國卽當幫助 是明謂越南非中國之屬國而欲以自許幫助 假託保護 以自便其蠶食之謨 如日本滅琉球故智 然則中國欲爭越南 必先爭屬國之名 欲存屬國 必先存保護之實"
1882년 베트남 문제로 청과 프랑스 간에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청의 내각학사(內閣學事) 주덕윤(周德潤)이라는 인물은 ‘속국’을 지키기 위해선 ‘보호’를 제공해야 함을 상주함은 중국 내에서 ‘속국=조공국’을 ‘속국=dependent state’로 재정의하기 위해선 ‘보호’의 책임이 수반되어야 함을 주장한 최초의 사례로서, 이는 당대 청나라 스스로도 전근대 속국과 근대 국제법적 의미의 속국간에 의미 차이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결국 1880년대에 이르러 중국은 ‘속국’의 의미를 전유(appropriation)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조공책봉 질서하의 ‘속국=조공국’을 근대 국제법적 의미에서의 ‘속국=dependent state’으로 일방적으로 재해석하는 결과를 초래하였지만 이러한 규정 자체가 1880년대 중국의 정치적 의도에 따른 일방적 주장으로서 역사적 사실의 왜곡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23]
그럼에도, 복잡하게 해석할 필요 없이 이러나 저러나 조선은 청 제국의 중흥의 일부로서 신강, 대만, 만주에서의 변방 지방화 정책과 유사한 '다국적 제국주의',[24], 전통적인 양국 관계의 틀을 넘는 '근대 식민지적 지배',[25] 피보호국[26]을 법적으로 명문화하거나, 실제로 경험한 것이라면, 사실상 일제의 국권 침탈 이전에 이미 체험을 해본 셈이된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청 말기 청의 대조선 정책을 보호국화가 아닌 조공책봉 관계의 연장선상에서 국제법 체계의 종주관계로 변용, 재편하고자 한 것에 불과하다는 반론도 존재하는 상황이며[27] 또한 청이 조선에 대해 '식민 정책'을 펼쳤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식민주의'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기보다는 '속국=식민지'라는 등가관계를 설정하고 조선을 근대적 '속국'으로 만들려는 청의 정책을 곧 식민주의로 이해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는 점은 유의할 필요가 있다라는 반론이 학계내에서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28]
한편, 문명기는 19세기 말 한중관계사에 관한 국내 연구가 청조의 '제국주의적'(또는 '억압적') 성격을 과도하게 강조하여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체결의 두 주체 중 하나였던 조선 정부를 비주체화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지적하였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체결과 관련하여 조선 정부는 사실 매우 적극적이었으며, 이는 대외 통상을 통한 재원 확보의 목적에서였다는 것이다. 김형근 역시 1883~1884년에 걸쳐 이루어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제4조의 개정에 대하여 청조 측이 조선 내지에서 청상의 통상권을 취득하기 위해 일방적이고 강압적으로 진행하였다는 기존의 통설에 반론을 제기하였다. 조선과 청조 양쪽에 개정의 필요성과 동력이 존재했으며 「조청장정」의 개정은 '쌍방향성'을 가지고 진행되어서, 즉 청상의 내지통상권을 허용하는 반대급부로 조선 상인 역시 청국에서 내지 통상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요컨대 21세기 이전까지의 19세기 말 조청 관계에 대한 연구가 조선의 자주적인 근대화와 독립국가 건설이 실패한 외적 요인으로서 청조의 조선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략을 부각시키거나, 또는 동아시아의 전통 질서와 근대적 질서 사이의 충돌로 이해되었다면, 최근 십여 년 동안의 연구는 이러한 거대담론에 대하여 새로운 시각의 문제 제기를 시도하고, 나아가 19세기 후반의 상황을 실증적으로 재검토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 한국 학계의 근현대 한중관계사 연구의 새로운 성과, <동북공정 이후 현황과 동북아 역사 문제>, 2020, 동북아역사재단 지음.
요컨대 21세기 이전까지의 19세기 말 조청 관계에 대한 연구가 조선의 자주적인 근대화와 독립국가 건설이 실패한 외적 요인으로서 청조의 조선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략을 부각시키거나, 또는 동아시아의 전통 질서와 근대적 질서 사이의 충돌로 이해되었다면, 최근 십여 년 동안의 연구는 이러한 거대담론에 대하여 새로운 시각의 문제 제기를 시도하고, 나아가 19세기 후반의 상황을 실증적으로 재검토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 한국 학계의 근현대 한중관계사 연구의 새로운 성과, <동북공정 이후 현황과 동북아 역사 문제>, 2020, 동북아역사재단 지음.
최근에는 청조의 '제국주의적'(또는 '억압적') 성격만을 과도하게 강조하여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체결의 두 주체 중 하나였던 조선 정부를 비주체화하는 주장들에 대해 반박하는 연구들도 나오는 중이다. 즉, 청조 측이 조선 내지에서 청상의 통상권을 취득하기 위해 일방적이고 강압적으로 진행하였다는 기존의 통설에 반론을 제기하며 해당 조약은 조선 정부 또한 매우 적극적이었고 이는 대외 통상을 통한 재원 확보의 목적에서였으며, 청상의 내지통상권을 허용하는 반대급부로 조선 상인 역시 청국에서 내지 통상이 가능해졌고 「조청장정」의 개정은 '쌍방향성'을 가지고 진행되었다는 것이다.[29] 또한 이후에 새롭게 체결된 한청통상조약으로 인해 해당 조약상에서의 일부 불평등 문제는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한편 일본의 입장에서는 그간의 독점 무역이 깨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청 상인의 공세를 방어하기 위해서 1882년 조일수호조규속약(거류지 범위 50리로 늘림[30])과 1883년 조일통상장정(최혜국 대우, 관세부과, 방곡령)을 통해 조선에게 새로운 이권을 요구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조치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무역량에서 청의 비중이 차츰 상승해 일본을 위협할 만큼이 되자 일본은 더는 묵과 할 수 없어 청을 공격하게 됨에따라 청일전쟁이 터지는 원인들 중 하나가 되었다. 그 외에도 중국 상인들과 주민들이 조선으로 대폭 유입되어 한반도에서 화교가 형성되는데 기여하였다.[31]
5. 같이 보기
[1] 유바다(2017),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p. 53.[2] 이동욱(2020), "1840-1860년대 청조의 ‘속국’ 문제에 대한 대응", 《中國近現代史硏究》 86.[3] 이를 불간섭 정책의 일관으로 해석하기도 하나, 어디까지나 외교권에 따른 자주성이 보장되었냐 통제되었냐의 차이일 뿐, 1866년 병인양요 때부터 청의 종주권은 국제법적으로 어느정도 확인됐다. 1871년 청일수호조규를 체결 당시에는 청의 소속방토(所屬邦土)로서의 지위가 주어졌으며, 종주권은 결코 탈각되지 않았다.
* 유바다(2017),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p. 25, 378.[4] 김형종(2017), "19세기 근대 한·중 관계의 변용", 《동양사학연구》, 140, p. 243.[5] 유바다(2017),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p. 157~158; 이동욱(2019), "청말 종주권 관념의 변화와 조선 정책의 전환", 《史叢》 96.[6] 유바다(2017),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p. 150.[7] 유바다(2017),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p. 153~155.[8] 유용태(2020), "淸의 駐韓公館과 韓淸 近代外交 硏究",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p. 89.[9] 한국 학계의 근현대 한중관계사 연구의 새로운 성과, <동북공정 이후 현황과 동북아 역사 문제>, 2020, 동북아역사재단 지음.[10] 여기서 말하는 '속국'은 국제법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이 결여된 탓에 사실상 식민지에 준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유바다(2017),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p. 235, "半主 屬國은 「만국공법」에 따르면 일정 부분 立約權, 通使權을 행사하는 등 제한적이나마 주권을 보유할 수 있었지만 특정 국가 의 管轄에 屬하는 존재였다. 따라서 "자주권이 없는 근대적 속국"이라는 것은 국제법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고, 주권이 없다면 그것은 속국이 아니라 식민지(Colony)에 해당하는 것이었다."[11] 朴日槿(1968), 《近代韓美外交史》; 金正起(1994), 《1876~1894년 淸의 조선정책 연구》; 具仙姬(1999), 《韓國近代對淸政策史硏究》.[12] 권혁수(2000), 《19세기말 한중 관계사 연구》; 權赫秀(2009), "晩淸對外關係中的“一個外交兩種體制”現象追議", 《中國邊疆史地硏究》 19(4); 盛利(2009), "清朝對朝鮮外交体制變研究-以19世紀60年代至19世紀80年代中期為中心", 산동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유용태(2020), "淸의 駐韓公館과 韓淸 近代外交 硏究",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13] 신기석, 韓末外交史硏究, 일조각, 1967, 44-58쪽 ; 권석봉, 淸末對朝鮮政 策史硏究, 일조각, 1986, 80쪽 ; 권혁수, 근대 한중관계사의 재조명, 혜안, 2007 참고[14] 유바다(2017),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15] 김종학,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는가?: 한중관계사 속에서 ‘속국’의 의미,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 2020년 12월 ; 계승범, 16-17세기 明・朝鮮 관계의 성격과 조선의 역할 ; 정동연, 淸의 駐韓公館과 韓淸 近代外交 硏究 2021, vol., no.158, pp. 159-198 (40 pages)[16] 이동욱(2020), "1840-1860년대 청조의 ‘속국’ 문제에 대한 대응", 《中國近現代史硏究》 86.[17] 유바다(2017),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관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p. 5~6, 143~150, 379.[18] 최소자, 淸과 朝鮮: 근대 동아시아의 상호 인식 (서울: 혜안, 2005), 180-183.[19] 개항 이후 청의 내정 간섭 시기에 속국의 개념과 관련해 외교적으로 문제가 된 조공과 책봉의 성격에 대한 연구사 정리로는 구선희, “근대 한중관계사의 연구경향과 쟁점 분석,” 한중일 학계의 한중관계사 연구와 쟁점 (서울: 동북아역사재단, 2009) 참조.[20] 16-17세기 明・朝鮮 관계의 성격과 조선의 역할(계승범)[21] 무엇보다 이러한 인식은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속국=조공국’과 근대 국제법적 의미의 ‘속국=dependent state’를 혼동한 것이라는 점에서 전통적 조공책봉 관계를 국제법적 의미의 ‘종주국-종속국’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은 심각한 역사 왜곡이라고 볼 수 있다.[22]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는가?: 한중관계사 속에서 ‘속국’의 의미,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 2020년 12월[23]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는가?: 한중관계사 속에서 ‘속국’의 의미,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 2020년 12월[24] 윌리엄 T. 로(2014), 《하버드 중국사 청 | 중국 최후의 제국》, p. 398~399.[25] 구선희(2009), "근대 한중관계사의 연구경향과 쟁점 분석",《한중일 학계의 한중관계사 연구와 쟁점》, p. 386.[26] 손기영(2020), "실패국가, 실패패권, 근대국가의 홀로코스트 삼중주: 청일전쟁과 일본의 동학농민군 대량학살의 개념적 분석", 《청일전쟁과 근대 동아시아의 세력전이》.[27] 유바다(2016),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28] 그러나 구선희가 '식민주의'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기보다는 '속국=식민지'라는 등가관계를 설정하고 조선을 근대적 '속국'으로 만들려는 청의 정책을 곧 식민주의로 이해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는 점은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한국 학계의 근현대 한중관계사 연구의 새로운 성과, <동북공정 이후 현황과 동북아 역사 문제>, 2020, 동북아역사재단 지음.)[29] 한국 학계의 근현대 한중관계사 연구의 새로운 성과, <동북공정 이후 현황과 동북아 역사 문제>, 2020, 동북아역사재단 지음.[30] 개항장인 인천에서 50리, 20km면 그 당시 서울(궁궐 중심)에 닿는 거리다.[31] 사실 그 이전에도 명청 교체기 당시에 조선으로 들어온 명나라 유민들의 사례 처럼 일명 향화인(向化人)이라 불리는 많은 중국인들이 조선에 거주했으나 조선의 동화 정책으로 인하여 사실상 조선인으로 완전히 동화된 상태였다.
* 유바다(2017),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p. 25, 378.[4] 김형종(2017), "19세기 근대 한·중 관계의 변용", 《동양사학연구》, 140, p. 243.[5] 유바다(2017),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p. 157~158; 이동욱(2019), "청말 종주권 관념의 변화와 조선 정책의 전환", 《史叢》 96.[6] 유바다(2017),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p. 150.[7] 유바다(2017),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p. 153~155.[8] 유용태(2020), "淸의 駐韓公館과 韓淸 近代外交 硏究",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p. 89.[9] 한국 학계의 근현대 한중관계사 연구의 새로운 성과, <동북공정 이후 현황과 동북아 역사 문제>, 2020, 동북아역사재단 지음.[10] 여기서 말하는 '속국'은 국제법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이 결여된 탓에 사실상 식민지에 준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유바다(2017),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p. 235, "半主 屬國은 「만국공법」에 따르면 일정 부분 立約權, 通使權을 행사하는 등 제한적이나마 주권을 보유할 수 있었지만 특정 국가 의 管轄에 屬하는 존재였다. 따라서 "자주권이 없는 근대적 속국"이라는 것은 국제법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고, 주권이 없다면 그것은 속국이 아니라 식민지(Colony)에 해당하는 것이었다."[11] 朴日槿(1968), 《近代韓美外交史》; 金正起(1994), 《1876~1894년 淸의 조선정책 연구》; 具仙姬(1999), 《韓國近代對淸政策史硏究》.[12] 권혁수(2000), 《19세기말 한중 관계사 연구》; 權赫秀(2009), "晩淸對外關係中的“一個外交兩種體制”現象追議", 《中國邊疆史地硏究》 19(4); 盛利(2009), "清朝對朝鮮外交体制變研究-以19世紀60年代至19世紀80年代中期為中心", 산동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유용태(2020), "淸의 駐韓公館과 韓淸 近代外交 硏究",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13] 신기석, 韓末外交史硏究, 일조각, 1967, 44-58쪽 ; 권석봉, 淸末對朝鮮政 策史硏究, 일조각, 1986, 80쪽 ; 권혁수, 근대 한중관계사의 재조명, 혜안, 2007 참고[14] 유바다(2017),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15] 김종학,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는가?: 한중관계사 속에서 ‘속국’의 의미,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 2020년 12월 ; 계승범, 16-17세기 明・朝鮮 관계의 성격과 조선의 역할 ; 정동연, 淸의 駐韓公館과 韓淸 近代外交 硏究 2021, vol., no.158, pp. 159-198 (40 pages)[16] 이동욱(2020), "1840-1860년대 청조의 ‘속국’ 문제에 대한 대응", 《中國近現代史硏究》 86.[17] 유바다(2017),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관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p. 5~6, 143~150, 379.[18] 최소자, 淸과 朝鮮: 근대 동아시아의 상호 인식 (서울: 혜안, 2005), 180-183.[19] 개항 이후 청의 내정 간섭 시기에 속국의 개념과 관련해 외교적으로 문제가 된 조공과 책봉의 성격에 대한 연구사 정리로는 구선희, “근대 한중관계사의 연구경향과 쟁점 분석,” 한중일 학계의 한중관계사 연구와 쟁점 (서울: 동북아역사재단, 2009) 참조.[20] 16-17세기 明・朝鮮 관계의 성격과 조선의 역할(계승범)[21] 무엇보다 이러한 인식은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속국=조공국’과 근대 국제법적 의미의 ‘속국=dependent state’를 혼동한 것이라는 점에서 전통적 조공책봉 관계를 국제법적 의미의 ‘종주국-종속국’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은 심각한 역사 왜곡이라고 볼 수 있다.[22]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는가?: 한중관계사 속에서 ‘속국’의 의미,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 2020년 12월[23]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는가?: 한중관계사 속에서 ‘속국’의 의미,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 2020년 12월[24] 윌리엄 T. 로(2014), 《하버드 중국사 청 | 중국 최후의 제국》, p. 398~399.[25] 구선희(2009), "근대 한중관계사의 연구경향과 쟁점 분석",《한중일 학계의 한중관계사 연구와 쟁점》, p. 386.[26] 손기영(2020), "실패국가, 실패패권, 근대국가의 홀로코스트 삼중주: 청일전쟁과 일본의 동학농민군 대량학살의 개념적 분석", 《청일전쟁과 근대 동아시아의 세력전이》.[27] 유바다(2016),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28] 그러나 구선희가 '식민주의'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기보다는 '속국=식민지'라는 등가관계를 설정하고 조선을 근대적 '속국'으로 만들려는 청의 정책을 곧 식민주의로 이해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는 점은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한국 학계의 근현대 한중관계사 연구의 새로운 성과, <동북공정 이후 현황과 동북아 역사 문제>, 2020, 동북아역사재단 지음.)[29] 한국 학계의 근현대 한중관계사 연구의 새로운 성과, <동북공정 이후 현황과 동북아 역사 문제>, 2020, 동북아역사재단 지음.[30] 개항장인 인천에서 50리, 20km면 그 당시 서울(궁궐 중심)에 닿는 거리다.[31] 사실 그 이전에도 명청 교체기 당시에 조선으로 들어온 명나라 유민들의 사례 처럼 일명 향화인(向化人)이라 불리는 많은 중국인들이 조선에 거주했으나 조선의 동화 정책으로 인하여 사실상 조선인으로 완전히 동화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