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존 챈더스 John Chandos | |
생몰년도 | 1320년경 ~ 1369년 12월 31일 | |
출생지 | 잉글랜드 왕국 더비셔 래드본 | |
사망지 | 프랑스 왕국 비엔 강변 모더메르 성(현재 프랑스 발디비엔) | |
아버지 | 에드워드 챈더스 | |
직위 | 가터 기사단 단원, 생소뵈르르비콩트 자작, 아키텐 무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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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기사. 백년전쟁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활약했다. 흑태자 에드워드의 친구이자 동지로 유명하다.2. 생애
1320년경 잉글랜드 왕국 더비셔의 레드본의 토지를 경영하는 젠트리 가문의 가주인 에드워드 챈더스의 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일찍이 출세를 위해 기사의 길에 들어섰고, 1339년 캉브레 공방전에 참여해 두각을 드러내면서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주목을 받았다. 1340년 6월 23일 오후 플란데런 해안에 도착한 에드워드 3세는 블랑켄베르크에 정착한 뒤, 저녁에 스터버러의 콥함 남작 레이놀드, 해군 장성 스티븐 램킨, 그리고 챈더스에게 척후선을 이끌고 가서 슬로이스 항구에 정박한 프랑스 해군을 살펴보라고 지시했다. 세 사람은 프랑스 해군 지휘관 위그 키에레와 니콜라 바후셰가 함대를 3개 대열로 나란히 배치하고 작은 나무 발코니인 브레타슈(bretasches)로 배들을 묶어놓은 채 3마일 너비의 항구 입구를 틀어막은 것을 확인하고 밤 늦게 돌아와서 에드워드 3세에게 알렸다. 이후 챈더스는 다음날인 6월 24일 벌어진 슬로이스 해전에 참여해 아군의 대승에 일조했다.1346년 에드워드 3세의 노르망디 원정에 참여했으며, 크레시 전투에서 흑태자 에드워드의 부대에서 선봉대를 이끌고 프랑스 중기병들의 돌격을 장궁병들을 잘 활용해 격퇴해 잉글랜드군의 대승에 기여했다. 뒤이은 1차 칼레 공방전에 참여했으며, 이후 왕으로부터 흑태자 에드워드의 군사 훈련을 지도하는 임무를 맡았다. 1348년 4월 가터 기사단이 창설되었을 때 단원에 선임되었다. 당대 연대기 작가 장 프루아사르에 따르면, 흑태자 에드워드는 챈더스를 부하가 아니라 친구이자 가족으로 여겼고, 그의 조언을 소중히 여겼다고 한다.
1355년 흑태자의 슈보시에 참여했고, 1356년 흑태자의 2차 남프랑스 원정에서는 독자적으로 분견대를 이끌고 오비니를 공략하고 약탈한 뒤 로모랑탱에서 본대와 합류했다. 1356년 9월 푸아티에 전투에서, 그는 에드워드 왕자에게 프랑스군을 적절하게 상대할 수 있는 진형 및 전투 방식을 조언했고, 에드워드는 이를 그대로 따라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장 프루아사르에 따르면, 푸아티에 전투 전날에 열린 회담에서, 프랑스 선봉대 지휘관 장 드 클레르몽은 챈더스의 문장이 자신의 것과 비슷한 걸 보고, 잉글랜드인은 독창성이 없어서 남들이 발명한 좋은 것을 훔치는 것밖에 못한다고 비웃었다. 이에 원한을 품은 존 챈더스는 그를 생포하지 않고 사살했다고 한다.
1360년 브레티니 평화 협약 협상에 참여했으며, 1361년 아키텐 무관장이자 잉글랜드의 손에 넘어간 모든 프랑스 영토의 보안관이 되었다. 또한 노르망디의 생소뵈르르비콩트 자작에 선임되었다. 그는 브레티니 조약에 따라 잉글랜드에 넘겨진 푸아투, 바스 생통주, 앙구무아, 리무쟁, 페리고르, 카호르생 등지를 순찰하며 현지 영주와 관료들로부터 잉글랜드 국왕에 대한 충성 맹세를 접수하고 새로운 행정부를 세웠다. 1364년, 에드워드 3세로부터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을 종결하기 위해 장 4세 드 브르타뉴를 도우라는 지시를 받고 브르타뉴로 이동했다.
장 4세 드 브르타뉴는 브르타뉴 서부 해안의 항구 도시들 중 오래도록 몽포르 가문과 대적한 잔 드 팡티에브르와 남편 샤를 드 블루아를 지지하는 몇 안 되는 도시인 오레를 포위했다. 이에 샤를 드 블루아는 이들을 물리치기 위해 베르트랑 뒤 게클랭과 함께 진군했다. 1364년 9월 29일 오레 외곽 북동쪽에 샤를 드 블루아의 군대가 도착하자, 장 4세 드 몽포르의 포위군은 마을 북쪽에 있는 호수를 옆에 낀 채 전투 대형을 편성했다. 존 챈더스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은 우익을 맡았고, 장 4세는 중앙 부대를 이끌었으며, 로버트 놀스의 또다른 잉글랜드군은 좌익을 맡았다. 그리고 휴 칼블리는 예비대를 이끌었다. 이에 맞서는 샤를 드 블루아의 군대 역시 3개 대열을 결성했다. 샤를 본인은 우익을 지휘했고, 게클랭은 중앙을 이끌었으며, 오세르 백작 장 3세는 좌익을 이끌었다. 누가 프랑스군 예비대를 이끌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장 4세와 샤를은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사절을 보내 협상을 시도했다. 두 사람은 오랜 내전에 지칠대로 지쳐 있었고, 브르타뉴를 나눠 가지는 선에서 전쟁을 끝내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장군들은 그렇게 어중간하게 끝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샤를이 추가 제안을 하려 한다면 그가 보낸 사절을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게클랭을 비롯한 블루아 지지자들 역시 비타협적으로 나왔고, 협상은 결국 결렬되었다. 협상이 잘 돼서 평화롭게 끝나기를 바랐던 양측의 많은 브르타뉴인들은 이에 실망해 탈영했다. 이후 벌어진 오레 전투에서, 존 챈더스의 잉글랜드 우익 부대가 오세르 백작의 좌익 부대를 압도했다. 오세르 백작은 눈 하나를 잃고 포로가 되었고, 그의 부하들은 게클랭이 이끄는 중앙 부대로 도주했다. 이로 인해 중앙 부대의 대열이 흐트러지자, 챈더스는 이 호기를 놓치지 않고 적 중앙 부대 측면을 요격했다.
아군이 위급한 것을 본 샤를 휘하 우익 부대 상당수가 도주했고, 후방에 있던 예비대 역시 패주했다. 장 4세와 로버트 녹스는 존 챈더스와 함께 중앙의 게클랭 부대를 포위 공격했고, 예비대를 이끌던 휴 칼블리도 전장에 뛰어들었다. 결국 전의를 상실한 블루아군은 패주했고, 샤를 드 블루아는 전사했다. 게클랭은 필사적으로 항전했지만 완전히 포위되자 항복했다. 이날 전투에서 블루아 가문의 브르타뉴-프랑스 동맹군은 800명이 죽고 1,200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몽포르 가문의 브르타뉴-잉글랜드 연합군의 피해는 알려진 바 없지만 상대적으로 적었을 것이다. 이리하여 장 4세 드 브르타뉴는 20여 년간 지속되었던 내전을 종식하고 브르타뉴 공작에 선임되었다. 또한 그는 베르트랑 뒤 게클랭을 포로로 잡아뒀다가 프랑스 국왕 샤를 5세로부터 10만 프랑에 달하는 몸값을 받고 풀어줬다.
1367년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페드로의 복위를 이루기 위해 이베리아 반도로 진군한 에드워드 왕자를 따랐다. 그해 4월에 벌어진 나헤라 전투에서, 그는 최전선에 배치된 맨앳암즈를 곤트의 존 왕자와 함께 이끌어 엔리케 2세와 게클랭이 이끄는 카스티야-프랑스 연합군을 격파하고 게클랭을 또다시 생포했다. 그 후 아키텐으로 돌아온 에드워드 왕자가 이베리아 원정에 들어간 막대한 군자금을 만회하기 위해 영주들로부터 난로세를 강제로 받아내려 하자 강력히 반대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왕자가 끝내 강행하자, 그는 깊은 실망감을 느끼고 노르망디의 영지로 은퇴했다.
1369년 프랑스 국왕 샤를 5세가 대대적인 공세를 개시하고 에드워드 왕자의 지배를 받던 영주들이 대거 호응하면서 많은 영토를 상실하자, 에드워드 왕자는 챈더스를 급히 소환했다. 챈더스는 푸아투의 세네샬을 맡아서 푸아티에로 진군한 뒤 그곳을 되찾으려는 프랑스군의 공세를 격퇴하고 역공을 가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던 1369년 말, 브르타뉴인 장 케를루에와 뤼지냥 영주인 루이 드 생 줄리앙 트리무이유가 푸아티에에서 몇 마일 떨어진 라 로슈포제와 생사뱅을 점령했다. 이 소식을 접한 챈더스는 밤에 기습 공격을 가해 생사뱅을 탈환하기로 했다.
1369년 12월 말, 챈더스는 비엔 강변의 루삭레샤토로 이동해서 다리를 건너 생사뱅을 기습하려 했다. 그런데 프랑스 장병들이 푸아티에를 급습하고자 루삭 다리로 이동하는 모습이 포착되자, 챈더스는 즉시 이들을 공격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패퇴했고, 챈더스는 도망치는 적군을 추격하다가 서리가 잔뜩 낀 다리 때문에 미끄러 넘어졌다. 이때 프랑스 기사 기용 보이텔의 종자인 생마르탱의 자크가 창으로 챈더스를 공격해 그의 얼굴의 눈 아래 부위를 찔렀다. 챈더스의 종자 중 한 명이 즉시 반격을 가해 생마탱의 자크의 양쪽 다리를 찔러 제압했다. 자크는 생포된 뒤 푸아티에로 끌려갔고, 사흘 후에 사망했다. 챈더스는 큰 방패에 실린 채 가장 가까운 요새인 모더메르 성으로 이송되었고, 12월 31일 이른 밤에 사망했다. 향년 55세.
존 챈더스가 전사했다는 소식은 잉글랜드와 프랑스 양국 모두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고 전해진다. 장 프루아사르에 따르면, 프랑스의 유명한 기사들은 그가 생포되지 않고 살해된 것에 몹시 유감스러워하며, 매우 현명하며 계략이 많은 그였다면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에 평화를 확립할 수단을 찾았을 것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그러면서 프루아사르는 챈더스가 "이후 100년간 잉글랜드인 사이에서 그보다 더 정중하고 모든 미덕과 좋은 자질이 충만한 사람은 없었다"라고 평했다. 잉글랜드 측은 그가 쓰러진 장소를 기념하기 위해 기념비를 세웠다. 오늘날 이 기념비는 마제롤 코뮌의 '존 챈더스 거리'에 조성된 정원에서 여전히 유지, 관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