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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4 04:20:53

중전차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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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티거 2를 사열 중인[1] 국방군 제503 중전차대대.

1. 개요2. 부대 일람
2.1. 국방군 소속대대2.2. 무장친위대 소속 대대
3. 편제 및 차량 번호 부여법4. 철십자 훈장 수훈자 목록

1. 개요

重戦車大隊/Schwere Panzer-Abteilung[2]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나치 독일독일 국방군, 무장친위대에서 운용한 기갑부대로서 야전군사령부 혹은 군단사령부 직속의 독립부대. 다양한 기갑부대에 배속되었던 3, 4호 전차 및 5호전차 판터와는 달리, 티거, 티거 2와 같은 독일군의 중전차들은 주로 이 부대들에서 집중운용되었다. 최초에는 티거의 생산량이 충분치 않은 관계로 7.5cm 단포신 전차포를 장비한 3호 전차가 편제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별다른 효용성을 입증하지 못했기에 이후에는 중전차만으로 편성되었다. 대전말에는 상황이 어려워지면서부터 몇몇 중전차대대는 판터는 물론이고 헤처, 야크트판터 등도 급한대로 장비하여 운용하였다.

실제 전선에 파견될 때에는 대대단위로 움직이는 경우는 흔치 않았고 일반적으로는 중대 혹은 소대 단위로 쪼개져 전선에 위치한 부대에 배속되는 경우가 많았다.

나치 독일은 대전 내내 총 14개의[3] 중전차대대를 운용했다. 비싼 장비를 운용하는 독립부대인 만큼 최정예의 인원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에 따라 전투에서 다대한 전과를 올렸다. 중전차대대에서 복무했던 유명인에는 502 중전차대대의 오토 카리우스 중위와 SS 501 중전차대대의 미하엘 비트만 대위, 그리고 503 중전차대대의 쿠르트 크니스펠 기갑상사가 있다. 초기에 편성된 부대에 비해서 후기에 편성된 부대들은 비교적 훈련이나 경험이 부족했으며 이는 전과로도 드러난다. 여담으로 대전 막판에 들어서 독일군은 15번째 중전차대대인 SS제104 중전차대대의 편성도 계획 했으나 이는 장비와 인력 부족으로 취소된다.

2. 부대 일람

2.1. 국방군 소속대대











2.2. 무장친위대 소속 대대

처음에는 무장친위대 소속 기갑사단들에 좋은 장비를 줄 목적으로 중대 규모의 티거를 지급한데서 출발했으나 이들의 전과가 훌륭했던 관계로 대대규모로 확대한다. 대전말기 어떤 이유에선지 국방군 501,502,503대대의 명칭을 이들에게 부여했다.


3. 편제 및 차량 번호 부여법

중전차대대는 전장상황에 따라 임시로 4중대가 생기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3개 중대가 기본이다. 각 중대에는 3개 소대씩 편제된다. 3개 중대의 각 소대(총 9개 소대)당 4대씩 총 36대, 여기에 중대별로 중대장 직속 차량 2대씩, 대대본부 소속 통신차량 3대, 모두 합하여 45대가 정수가 된다. 수식으로 정리하자면 "[{(4대×3개 소대)+중대장 직속 2대}×3개 중대]+대대본부 3대=45대"

차량번호는 3자리로 만들었으며 첫 자리는 중대번호, 두번째 자리는 소대번호, 세번째 자리는 소대소속 차량번호이다. 예를들어 오토 카리우스의 차량 217번은 2중대 1소대 7번 차량이 되고[42] 미하엘 비트만의 차량 212번은 2중대 1소대 2번 차량이 되는 것이다.

대대장에게 배치 된 차량은 S01, 혹은 01과 같은 식으로 2자리로, 중대장 휘하의 차량은 301과 같은 방식으로 소대번호만 0이 된다. 물론 수리 상황에 따라 남의 소대 차량도 당겨 쓰거나 하는 일은 비일비재 했다. 또 부대에 따라서는 에이스 전차장이 그날 그날 상태가 양호한 차량을 골라타기도 하였다.

4. 철십자 훈장 수훈자 목록

등급/서훈 순서로 기술 함.
중전차대대 인물은 아니지만 연대급 이상의 지휘관중 중전차대대와 관련 깊은 인물은 ●로 표시함

히아친트 그라프 슈트라흐비츠 폰 그로스-자우헤운트캄미네츠(Hyazinth Graf Strachwitz von Gross-Zauche und Camminetz)●[43]
훈장번호 11, 국방군 소장, 북부집단군 전차부대 총사령관, 1944년 4월 15일, 관련 공적 나르바 공방전

히아친트 그라프 슈트라흐비츠 폰 그로스-자우헤운트캄미네츠(Hyazinth Graf Strachwitz von Gross-Zauche und Camminetz)●
훈장번호 27, 국방군 대령, 그로스도이칠란드 전차연대 사령관, 1943년 3월 28일, 관련 공적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프란츠 베케 박사(Dr. Franz Bäke)●[44]
훈장번호 49, 국방군 중령, 베케 중전차연대 사령관, 1944년 2월 21일, 관련 공적 제2차 키예프 전투,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

미하엘 비트만(Michael Wittmann)
훈장번호 71, 무장친위대-대위, 101중전차대대 2중대장, 1944년 6월 22일, 관련 공적 빌레르보카쥬 전투

요아힘 파이퍼(Joachim Peiper)●
훈장번호 119, 무장친위대-중령, SS 1기갑연대 연대장, 1945년 1월 11일, 관련 공적 아르덴 대공세

베른하르드 자우판트(Bernhard Sauvant)
훈장번호 260,국방군 소령, 505중전차대대 대대장, 1943년 6월 28일, 관련 공적 쿠르스크 전투

요아힘 파이퍼(Joachim Peiper)●
훈장번호 377, 무장친위대-중령, SS 1기갑연대 연대장, 1944년 1월 27일, 관련 공적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

미하엘 비트만(Michael Wittmann)
훈장번호 380, 무장친위대-소위, 제1 SS기갑사단 'LSSAH' 13중대 소대장, 1944년 1월 30일, 관련 공적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

에리히 뢰베(Erich Löwe)
훈장번호 385, 국방군 소령, 501중전차대대 대대장, 1944년 2월 8일, 드네프르 저지대 공세중 실종, 전사처리되며 서훈

클레멘스-하인리히 그라프 폰 카게네크(Clemens-Heinrich Graf von Kageneck)
훈장번호 513, 국방군 대위, 503중전차대대 대대장, 1944 6월 26일, 전투 지휘중 중상.[45]

오토 카리우스(Otto Carius)
훈장번호 535, 국방군 중위, 502중전차대대 2중대장, 1944년 7월 27일, 관련공적 마르나파 전투

요하네스 뵐터(Johannes Bölter)
훈장번호 581, 국방군 중위, 502중전차대대 1중대장, 1944년 10월 10일, 티거 승차 도중 포탄 파편으로 중상
5회 부상으로 황금전상훈장을 받고 종전까지 전차장 양성 교관으로 활동, 교관으로 임명되며 서훈

일반 철십자 훈장은 2급과 1급을 합쳐서 7~80만, 혹은 2급 230만, 1급 33만여개[46]가 수여되었기 때문에 그 수가 너무 많아 생략.


[1] 전차량이 화차 수송용 협궤도를 장착하고 있다. 따라서 전선으로 출동전 기차에 적재하기 위한 사열을 받고있는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적재를 위홰 화차폭 보다 큰 사이드 스커트도 제거된 상태이다.[2] 발음은 "슈베레 판처아프타일룽".[3] 11개는 국방군 소속, 3개는 무장친위대 소속 대대였다.[4] 속칭 포르셰 티거[5] 벨라루스는 당시 전선에서 가장 돌출된 지역이었다.[6] 이 때 노획된 킹타이거 중 한 대는 현재 러시아 쿠빈카 전차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7] 이 항복은 전장의 상황은 모르고 책상에 앉아서 지도만 보고 일선 병력 하나하나를 지시한 히틀러의 대표적 삽질 사례로 60톤이 넘는 티거2들을 전부 늪지대로 보내버렸다. 발이 묶인 이들은 몇차례 탈출을 시도했으나 기동불능에 빠져 결국 항복한 것. 거기다 전임 대대장은 숙청까지 당했으니 이런 정신나간 명령에 거부조차 못한 것.[8] 종전까지 105~107대의 티거, 8대의 티거2를 지급받고 1400대의 전차와 2000문의 화포를 격파. 전투손실 교환비는 18:1정도.[9] 현재의 라트비아 서북부지역.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중부집단군을 분쇄한 붉은군대 주력이 그대로 북상을 시도했다. 이에 북부집단군은 황급히 철수를 시도했고 이 두 군세가 충돌한 지점이 바로 쿠를란트 지역이다.[10] 아카데미과학에서 발매한 최후기형 킹타이거가 이 물건이다.[11] 정상적인 상황에서 티거 차량 넘버는 소대 정원수인 4번까지이다.[12] 이는 포르셰 티거가 방산 비리로 발주도 없이 생산 된 것이 아니라는 증거이다.[13] 스코어가 정말 흠좀무하다. 쿠르스크 (3대 손실 385대 격파), 키예프(4대 손실 240대 격파), 코르순 체르카시(5대손실 267대격파), 손실은 대부분 퇴각중 자폭이나 친위대의 오인사격과 같은 이유로 발생했다.[14] 정비중대가 기습을 당해 수리중인 티거 23대가 노획당하는 참사가 일어난다. 이후 탈출과정에서도 대부분의 차량을 자폭[15] 이 때부터 부다페스트 공방전 직전까지 비전투차량을 포함 각종 차량 약 1500대 격파[16] 전차연대장은 베케 전투단을 이끌었던 프란츠 베케 박사.[17] 전투 일지가 분실되어 1945년 2월까지의 스코어만 확인한 자료이다.[18] 문서 상단 사진이다.[19] 이 때 1중대 3소대 1호차 티거를 영국군에게 노획당하는데 이것이 영화 퓨리에 나온 그 유명한 131호차 티거이다.[20] 1대가 배편으로 퇴각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도 있다.[21] 작전이 연기되면서 쿠르스크 전투 모의 훈련을 엄청나게 했다고 한다.[22] 적전차 220대 이상 격파. 공세 당시 북익의 발터 모델 휘하 9군의 진격은 지지부진했으나 막판 쿠르스크 전선의 균열을 열었는데 505중전차대대가 이룬 업적이라고 한다.[23] 기사의 투구가 뾰족하여 생쥐의 주둥이 같다는 의미에서 붙은 이름일 뿐, 기사가 생쥐인 것은 아니다!![24] 타미야사의 티거 후기형 구형모델의 박스아트(배경이 아직 그려지던 시절의 박스아트)에는 제505 중전차대대 소속의 전차가 그려져 있다. 신형모델에는 제502 중전차차대대 소속 티거가 그려져 있다.[25] 이들도 포르셰포탑 사양을 다수 인도 받는다.[26] 발터 모델 원수 최후의 명령 항목 참조[27] 지형에 대한 이해 없이 기동중에 전차가 과열로 엔진이 폭발하거나, 산악지형의 연비를 생각못하고 기동 계획을 짰다가 그대로 연료가 바닥나 19대의 신품 티거를 자폭시키는 등...[28] 티거 사진 중 옆으로 자빠져 미군 병사들의 기념촬영 명소로 쓰인 매우 굴욕적인 사진이 있는데 바로 이 부대가 안치오 상륙 저지를 위해 기동 중 삽질로 전복되자 그냥 전투한번 안하고 버리고 간 차량이다.[29] 당시 티거의 가격은 4호 전차 같은 타 전차들에 비해 2배 정도 더 비쌌고, 전투 불능 판정을 받은 티거도 어떻게든 다시 정비창으로 끌어와 재생시키거나 연합군에게 노획되는 것을 막으려 자폭시켰다. 이렇게 애지중지하며 쓰는 전차로 졸전을 치른 것도 모자라서 버리고 도망까지 갔으니 히틀러가 화를 안 낼 리가...[30] 본국에서 티거2를 준다고 했지만 티거 1대와 판터 6대만 도착했다. 1중대가 이를 장비하고 나머지는 보병으로 싸웠다고 한다.[31] 처참한 전과와 오명덕에 모형으로 접하는게 불가능에 가깝지만 서비스 정신이 투철한 아카데미 과학에서 중기형 티거에 부대마크인 물소 데칼을 넣어주었으니 참고하자. 또한 타미야에서도 자사 후기형 티거에 물소데칼을 넣어준다.[32] 구데리안의 회고에 따르면 이들은 훈련이 충분치 않은 상태에서 차출되었고, 구데리안은 이에 크게 반발했었다고 한다.[33] 오해의 소지가 있어서 덧붙이자면 소련군 1개 전차군단(tankovy korpus)는 타국의 1개 기갑사단급 편제이다. 어찌되었건 509대대가 올린 전공이 전설적인 활약인 것임은 틀림없다.[34] 생존차량은 다수 있었으나 연료부족, 고장, 교량붕괴등으로 모두 손실한다.[35] 여담이지만 이미 전군이 와해되다시피 하여 연합군에게 항복하려 패주하던 이 시점에서 독일군 보병부대에게 기갑병과의 위상은 상상 이상이었다. 얇은 포위망을 돌파해 주거나 부상병이나 최소한의 보급품 정도는 실어서 후퇴 속도를 올려주거나, 강력한 전투력으로 소련군의 공격으로부터 후위를 맡아 시간을 벌어줄 수도 있기 때문.[36] 실제로 어떤 판터 전차장의 회고를 보면 단차로 후퇴하던 중 퇴각하던 보병부대와 합류했는데, 보병부대에 상급 장교가 있었음에도 부사관급인 자신이 지휘를 맡았다고. 계급장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고 전차 승무원복이 곧 권위였다고 한다. 여담으로 이들도 티거 2 1대와 합류했는데, 소련군의 매복에 걸렸을 때 그 티거 2가 시간을 벌어줘서 탈출할 수 있었다. 그 티거 2는 분노한 소련군의 가차없는 화염병 세례에 결국 엔진이 불타 끔찍한 최후를 맞았다.... 판터도 보병들을 패닉으로 몰아넣은 소련 전차 수 대를 격파하며 대활약했다. 이 회고를 남긴 판터 전차장은 미군 점령지까지 도달해 전차를 파괴하고 항복해 무사할 수 있었다. 이 전차들의 활약이 없었다면 그 보병들은 소련군에게 전멸당하거나 생포당해 시베리아로 보내졌을 것이다.[37] 국내엔 유명하지 않지만 전후 생존하여 회고록을 남겼다.[38] 전차병들이었는데 창설당시엔 잠시 보병으로 편성됐었다.[39] 9군휘하 11 SS 노트르란트 사단에 다시 합류.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40] 고작 전차4대라고 가볍게 보고 JS-2나 T-34/85, ISU-152들을 회랑으로 축차투입했으나 전부 호랑이 밥이 됐다고 한다. 2개 소대가 로테이션으로 회랑을 사수했다고 하며 그 중 한대의 주인은 카를 쾨르너 상사[41] 제국의사당의 전투를 이끈 게오르그 디어스의 경우에도 5월 2일 마르틴 보어만 등이 포함된 탈출 그룹을 이끌 던 중 아군의 대전차 지뢰에 기동불능에 빠져 전차를 자폭 처분했다. 이 그룹은 탈출에 실패하고 소련군에 사로잡힌다.[42] 이는 다소 특이한 경우다. 중전차 대대의 한 소대의 티거 정원은 4대인데 카리우스의 경우는 7이다. 이는 당시 카리우스가 속해있던 502 중전차 대대는 본국에서 계산미스로 티거 전차를 충분히 보충해주고도 무려 3번씩이나 더 보내 준 탓에 임시로 저렇게 소대정원을 늘려서 편제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한다.[43] 전차백작이라는 별명이 있는 오토 카리우스의 자서전에 나오는 그분이 맞다. 슈트라흐비츠는 슐레지엔의 유서깊은 영주급 백작 가문 계승자로 귀족 계층의 나치화 포섭에 회유돼서 43년엔 나치당에 가입하고 모든 가족이 전장에 나갔다. 하지만 종전 후 각고의 노력으로 미군에 투항, 별 처벌은 받지 않고, 전쟁으로 영지(동독령 슐레지엔)와 후손을 모두 잃은 그는 시리아 군사고문을 역임하다 가문을 이어가기 위해 무려 40살쯤 차이나는 20세 여성과 결혼하고 서독에서 남은 여생은 잘 지내다 폐암으로 사망했고 지금도 슈트라흐비츠 가문이 이어지고 있다.[44] 치의학 박사, 당시 유럽은 박사학위를 함부로 주지 않기 때문에 박사 학위자를 부를때는 귀족을 호칭하듯 반드시 박사라고 명시한다. 최종계급은 소장이었으며 국방군최고사령부(OKW) 모두가 그를 전차부대 야전사령관의 최고실력자로 평가하고 포위를 당하는 등 급박한 문제가 발생 할 경우 제일 먼저 투입할 소방수의 역할을 부여했다. 특히나 독일군도 절망적으로 봤던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에서 적군의 포위를 열어낸 것은 이 사람의 공이 가장 크다. 연대장급 지휘관이면서도 수 많은 격파수를 기록했으며, 심지어 혼자서 판처파우스트로 적 전차를 격파한 일도 3번이나 있다. 이렇게 동부전선에서 역전의 용사들과 기적을 일으키던 그 조차도 아라쿠르에서는 반 이상이 새로 징집된 소년병인 휘하 판터부대가 전투시작과 동시에 차량을 버리고 도주하는 것을 참담하게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종전후엔 잠시 미군 포로 생활 후 다시 본업인 의사로 돌아간다.[45] 덕택에 포로가 되지 않고 종전을 맞는다. 전후 부하들의 명예가 더렵혀지는 것을 참지 못하고 503중전차대대의 활약과 일화들을 모아 회고록을 남긴다. 때문에 503중전차대대의 44년 여름까지의 활약상은 상당히 잘 알려져 있으나 그 이후 부다페스트 전투등의 사료는 부족한 편이다.[46] 자료마다 수치가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