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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5 18:07:23

중항열

중행열에서 넘어옴
관직 환관 → 연지(閼氏)의 보좌관
이름 중항열(中行說)[1]
국적 전한흉노
주군 한문제
노상선우
군신선우
종족 한족
생몰 ? ~ ?

1. 개요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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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흉노의 대신, 생몰연도는 불명. 원래 연나라(燕) 출신의 환관이었으나 후에 흉노에 귀순하여 정치, 경제, 문화적 역량을 향상시켰다.

2. 행적

한족인 그가 흉노에서 벼슬을 하게 된 연유는 이렇다. 흉노의 선우 묵돌이 죽고 그 아들 계죽이 노상선우로 즉위했다. 이에 한나라에서는 황족의 여인을 선우의 연지(閼氏=后妃, 비)로 보냈는데 중항열은 이 황녀의 보호관 신분으로 파견되었다. 당시 흉노는 땅끝 몬스터 소굴 정도로 여겨졌던 탓에 중항열도 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고 한다. 하지만 "너 안 가고 목이 날아갈래? 아니면 살아서 갈래?" 라는 강압에 결국 어거지로 끌려가게 되자 "흉노에 가면 한나라의 재앙이 되겠다"는 폭언을 남겼는데 한문제는 그냥 홧김에 하는 소리인 줄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중항열은 진짜로 도착하자마자 귀순해 버렸고 여러 가지 쓸모 있는 것들을 알려주었기 때문에 노상 선우는 그를 매우 아꼈다.

그가 흉노에서 한나라를 엿먹인 일들은 아래와 같다.

심지어 한나라 사신들과의 설전에서 자기가 그렇게 싫어했던 흉노의 풍속과 습관, 문화에 대해 우월성을 극력 어필하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중항열이 주고 받은 한 사신과의 문답은 중화사상이나 정착민의 편견이 들어간 시각에 치우치지 않고 흉노의 입장에서 유목 민족으로서의 그들의 사회상을 증언하고 또 변호해 주는 사료[9]가 되기도 한다. 사마천은 중항열이 한 사신과 주고 받은 그 문답을 자신이 저술한 사기 흉노 열전에 모두 수록했고, 이 기록은 오늘날 흉노의 사회 구조를 연구하는 중요한 1차 문헌 자료로 쓰이고 있다.

노상 선우가 죽고 아들 군신선우가 즉위한 후에도 중항열은 한과의 전쟁을 계속 간했다. 군신선우는 그 말에 따라 극심한 약탈을 자행했는데 한군은 막을 방도가 없었다. 편제를 바꿔 북쪽의 요충지에 군대를 주둔시켰으나 흉노군이 워낙 기동력이 뛰어났던 탓에 원군이 제때 도착하기는 매우 힘들었다. 그렇다고 요새 밖 국경을 넘어서 기마 부대와 싸우겠다는 것은 여간한 전력으로는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라 하릴없이 철수하곤 했다.

약탈은 문제의 뒤를 이은 경제 대까지 이어졌다. 오초7국의 난이 있은 후 경제는 우호 정책을 썼다. 화친의 맹약을 확실히 하고 교역을 열었으며 물자를 후하게 보내주었다. 이는 확실히 먹혀들어 흉노는 정말로 한과 친해져서 만리장성 근처의 국경에서까지 교류하게 되었다. 한의 입장에서도 흉노와의 화친은 잇따른 전란에서 회복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흉노에게 있어서는 중항열이 남긴 씨앗이 좋기만 했다고 보기도 어려운데, 이후 흉노가 하도 행패를 부리자 한나라로서는 점점 더 견디기가 어려워졌고, 얼마 후 등장한 한무제는 풍족해진 국가 재정을 가지고 대규모 원정을 기획하여 이광, 위청, 곽거병 등을 주축으로 하여 흉노와의 전쟁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차피 중항열은 흉노가 좋아서 편을 든 게 아니라 순전히 한나라를 엿먹이기 위한 것이었고, 어쨌든 한나라가 흉노와의 전쟁으로 국력을 거하게 말아먹었으니 나름 성공한 셈이다. 게다가 본인도 과거에 흉노에 오는 걸 그렇게도 싫어했으니 어떻게 보면 본인이 과거에 싫어했던 나라와 지금 원한을 가진 나라를 싸움붙여서 둘 다에게 빅엿을 먹인 게 된다. 거기에 본인 대에서 실컷 한나라 엿을 먹이고 죽어서 흉노가 몰락했을 때 딱히 보복을 받지도 않았으니 탁월하게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한편으로 보면 환관 출신이라지만 꽤나 유능한 인물임을 엿볼 수 있다. 그의 선우에게 흉노의 정체성을 유지해야 강함을 유지할 수 있다는 조언은 간단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말로써 위에 나왔듯 가의가 정반대로 흉노의 정체성을 흐리게 하여야 한다고 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 조언은 정확했다. 심지어 가의는 불과 20세에 박사가 되었을 정도로 유능했고 제후왕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제후들의 봉토를 갈라서 여러 제후들을 임명하여 세력을 약화 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한무제 시기에 추은령 실행으로 구체화되었다.

게다가 흉노 이후의 유목민족들을 봐도 중항열의 지적은 옳았다. 위진남북조 시대에 많은 이민족들이 중원으로 침투하여 나라를 세우게 되지만 이들은 모순을 겪게 되는데 한족화하지 않고 정체성을 유지하자니 국가가 오래 가지 못하고 한족화하면 국가를 안정화시키는데는 도움되지만 필연적으로 민족성이 약해져 끝내는 민족 정체성이 사라져버리며 그게 아니더라도 한족화한 집단과 그렇지 못한 집단의 차이가 벌어져 국가적으로 문제가 되었다. 근본적으로 인구 수에서 한족에 형편없이 밀렸기 때문에 정복한 곳의 주류 문화가 되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이후에 등장한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 같은 이민족 국가들 역시도 비슷한 문제를 겪는데 각자 나름의 방안을 마련했지만 결국 안정적인 한족 지배와 민족 정체성 유지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지는 못했다.

[1] 中行이란 성씨는 본디 군대 용어였기 때문에 行伍를 '항오'로 읽는 것처럼 '중항'으로 읽으며, 옛 사람 이름에서 說은 悅(기쁠 열)로 읽는 사례가 많다.[2] 가의는 중국의 발달되고 아름다운 문물에 흉노가 취하게 만들어 흉노 사회의 본질을 파괴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는데 일종의 문화공세인 셈이다.[3] 사실 맞는 말이기는 하다. 일단 가죽옷이 방한에서는 가장 성능이 뛰어나며 세탁하면 질이 떨어지고 누에나방이든 뽕나무든 흉노족에게는 없어 구하기도 사용하기도 불편한 견직물과는 달리 가죽옷은 그냥 아무 가축에게서 구하면 되고 튼튼하고 오래 간다. 진짜로 흉노족 입장에서는 비단옷이 아니라 가죽옷이 더 쓸모있는 셈[4] 특성상 농경 민족보다 인구가 적을 수 밖에 없는 유목 민족은 보통 농경 민족을 4 ~ 5번 더 이긴다고 해도 딱 1번 진 순간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제국을 세울 정도로 몸빵력과 동원력이 뛰어난 농경 민족인 경우에는 말이 필요 없을 정도.[5] 예를 들어서 노상 선우가 한문제에게 답장을 보낼 때 간독을 한 자 두 치라는 규격으로 보내서 도발했는데, 사실 한나라에서 한 자 한 치라고 오직 황제만 쓸 수 있는 간독규격이 있었기에 저런 결정을 한 것이다.[6] 훗날 송나라의 관료 배송지유표를 엄청난 역적으로 평가했는데, 그 이유가 형주목밖에 안 되는 관직을 갖고도 거만하게 황제의 옷을 평상복으로 입고 다녔기 때문이다.[7] 한나라 사신은 흉노가 군신간의 예의도 없다는 등 온갖 비난을 했다. 그러나 중항열은 오히려 우린 그런거 없어도 될 정도라는 식으로 맞받아친다. 사실 원래 유목민족은 자리를 놓고 패륜을 서슴지 않긴 하는데 그래도 중항열 시대의 흉노족은 안정기라 그런지 무난하게 물려받아 재위하고 물려준다.[8] 외부로부터 침략당하는 입장의 한에 대해 "그렇게 남 탓 하지 말고 자기부터 돌아보지 그래?"라는 비꼬기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당장 중항열 본인부터가 흉노 땅에 가기 싫은 걸 한 조정이 억지로 떠밀어 보낸 탓에 흑화해 버린, 어찌 생각하면 한 왕조의 흉노 달래기 정책에 떠밀려 인생 조진 피해자의 한 사람이었으니까. 심지어 이 시기의 한나라도 내부적으로 문제가 없는 건 아니라서 문제 자신도 정치투쟁을 겪고 황제가 된 사람이다. 거기다가 아직 유씨 황족들이 제후왕으로서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등 영 불안정했다.[9] 한 설전에서는 한나라 사신이 흉노는 노인을 천대하는 관습이 있다면서 그 증거로 좋은 건 젊은이에게만 주고 노인은 별 볼것 없는 것만 먹는다는 걸 근거로 내세웠는데 중항열은 한나라에서도 군대에 들어가는 젊은이에게 부모가 좋은 거 먹여주지 않냐고 말하고는 이렇게 반박했다. 흉노는 전투를 자주 한다.-그런데 늙은 사람이 싸울순 없다.-그런고로 좋은 건 젊은이에게 주어 잘 싸울 수 있게 하고 그 젊은이가 노인까지 지키는 거다. 라고 했다. 또 한나라 사신이 "그럼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는 건 어떻게 설명할 거냐?" 라고 하자 "그건 대를 잇기 위함이다. 그리고 한나라에서도 가족끼리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죽이는 일이 생기면서 뭔 소리? 멋대로 기준삼아 얘기하지 마시오" 라고 반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