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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견직물(絹織物)은 누에나방의 고치에서 나온 실을 가지고 만든 섬유이다. 양모와 함께 인류 역사상 오랫동안 사용된 동물성 천연 섬유의 대표 격이고, 효율적인 합성섬유가 많아진 오늘날에도 고급소재로 손꼽힌다.2. 명칭
영어로는 실크(silk). 한자로는 견(絹) 또는 금(錦)이라고 하며 비단(緋緞), 명주(明紬)라는 명칭으로도 자주 쓰인다.비단, 명주[1] 등 여러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비단은 견직물 중에서도 특히 광택이 나게 짠 것, 명주는 무늬 없이 성글게 평직으로 짠 직물이다. 그 외에도 '코쿠라', '견벵갈린', '견보일', '견브로케이디드 벨벳', '견사', '사라사'[2] 등의 종류도 있다.
벨벳은 짧고 부드러운 솜털이 일어나게 짠 것이다. 다만 요즘은 일부 최고급품을 제외하면 대부분 레이온을 섞거나 그 외에도 린넨, 울, 면, 폴리에스테르, 나일론, 아세테이트 등 다른 섬유가 쓰인다.
인견(人絹)은 레이온이 인공적이지만 견직물 같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3. 특징
광택이 나며 부드럽다. 시원한 감촉이 느껴지면서도 보온성이 뛰어나고, 수분도 일정량 함유하여 정전기가 거의 생기지 않는다.하지만 알칼리에 약해서 함부로 물세탁을 하면 섬유가 손상되므로[3] 반드시 유기용매를 이용한 드라이클리닝을 해야만 한다. 자외선에도 약해서 직사광선에 오래 노출시키면 누렇게 변하거나 섬유가 손상되므로 주의해야 한다.
비단은 천연섬유 중에선 거의 유일한 필라멘트 섬유이다. 필라멘트 섬유란 긴 섬유 한 올을 그대로 실로 짜내는 것으로, 양털이나 목화, 모시와 같은 다른 천연섬유는 짧은 섬유 여러 개를 연결해서 실로 짜내는 스테이플 섬유이다.
4. 제작 방법
국가무형문화재 양잠 영상 |
'누에나방을 우화시킨 뒤 남은 고치를 비단으로 만들면 안 되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번데기째로 삶아버리면 고치 하나를 통째로 실로 만들 수 있지만, 안의 번데기가 탈출한 뒤의 고치는 실이 계속 중간에서 끊겨서 생산성이 크게 떨어지게 된다.
삼베나 모시 등 다른 전통 섬유가 실을 만드는 과정이 어렵다면 견직물은 실을 뽑은 후의 과정이 더 어렵다. 누에실은 젖은 상태에서 서로 달라붙는 성질이 있으므로 뽑아낸 실은 젖었을 때 가닥가닥 찢은 후 말려 왕채로 다시 감아야 한다.
정경 과정이 특히 어려운데, 세리신으로 덮인 상태의 견사는 표면이 까끌까끌한데 굵기도 가늘어 잘 끊어지기 때문이다. 모시는 십이세, 삼베는 팔세 정도부터 고운 베로 부르지만 견직물은 보통 십이삼세, 고운 베는 보름세로 짓는다. 견사 자체의 인장 강도는 높으나 꼬임사를 사용하면 직물의 형태가 달라지고 바디[4]의 수명이 짧아지므로 지양한다.
정경이 끝나고 베틀에 올라가도 미친듯이 끊어지기 때문에 고운 명주는 짜는 시간이 반, 고치는 시간이 반이라고 한다.
한편 섬유 구조는 7~8할의 피브로인 가닥을 2~3할의 고무와 비슷한 성분인 세리신이 감싸고 있는 형태인데, 보통 이대로는 광택이 나지 않는다. 보통 더운 물이나 초산 등에 담그는 등 과정을 거쳐서 세리신을 녹여 광택이 나게 한다.
5. 용도
고대 세계에서는 이보다 더 좋은 천을 찾을 수가 없었고, 현재도 세계 최고까지는 아니지만[5] 최고급 천으로 평가받는다. 가볍고, 아름답고, 부드럽고, 흡습성도 좋고, 상당히 질긴 편이며, 방한 성능도 뛰어나다. 위에서 보듯 드라이클리닝이 강제되어 관리가 어렵다는 점이 유일한 단점이다. 이 때문에 현대에도 고급의류용 섬유로 통하며, 비단으로 만드는 옷은 고급스러운 드레스 따위가 많다.매우 비쌌지만 실용성도 있어서 중국과 몽골에서는 갑옷 안에 입어서 갑옷의 방어력을 높이는 일종의 전투복으로 입었다. 장수들은 관우의 상징인 풀빛 비단옷처럼 비단옷을 입었고, 일반 병사들은 풀솜이라 해서 비단을 만들고 남은 찌꺼기 같은 것을 이용한 옷을 입었다. 몽골도 비단 전투복을 입었는데, 질긴 성질 덕에 화살을 맞아도 옷이 찢어지는 게 아니라 같이 감싸고 들어오면서 약간의 보호 효과도 있고, 비단옷만 당기면 화살을 쉽고 확실하게 뺄 수 있다는 처치의 용이성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화살이나 탄환은 1차로 맞아서 생기는 부상도 있지만 빼내는 과정에서 생기는 2차 부상이 더 심한 경우가 많은데, 비단이 2차 부상을 상당부분 줄여준 것.
18세기 서구에서도 권총을 이용한 결투를 할 때는 아예 상의를 다 벗어 맨몸으로 싸우거나 실크 셔츠를 입고 싸웠는데, 비단옷이 당시의 권총탄까지는 화살을 맞을 때와 같은 원리로 작동했기 때문이다. 권총 기준 제1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는 유효했으나 가격이 너무 비쌌고, 제대로 된 소총탄부터는 유효사거리에서 막아주지 못했기 때문에 도태되었다.
수술용 봉합사로도 사용했다. 쉽게 말해서 수술 부위를 꿰메는 용도. 비단은 섬유가 가늘면서도 질기고 신체의 부작용도 크지 않아서 봉합사에 적합했다. 역시 현대에는 더 튼튼하면서도 유연하고 몸에 흡수까지 되는 특수 섬유로 만든 봉합사를 사용하기 때문에 사용 빈도가 적다.
낙하산으로도 쓰였다. 그래서 미 육군에선 일부 참전용사들은 사용 후 회수한 낙하산을 집에 보내 결혼할 여성에게 웨딩 드레스를 만들어 선물하기도 했다.[6] 그러나 요즈음에는 이러한 용도로 더 적합한 나일론이 등장하면서 비단을 쓰지는 않게 되었다. 그래서 누에를 군수용품으로 팔던 곳은 나일론 등장 이후 타격이 컸다고 한다.
필라멘트 섬유라는 비단의 특성을 활용하여 전자기기와 결합하여 사용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시 중 하나가 스피커. 트위터의 진동판 재질에 실크가 활용된다.
사치품 내지 품위를 위한 용도로는 왕실을 포함한 상류 사회에서 음악회, 연회 등의 공식 행사 등에 참석할 때 입는 턱시도, 연미복같은 옷에 장식을 위해 덧대는 것이 대표적이다. 상술한 성직자 수단 역시 옷 전체를 비단으로 만들진 않더라도 비단이 사용되는 부분이 은근히 많다. 그 외에 최고급 양복을 지을 때 비단의 질감과 가벼움 등은 얻고 광택은 줄일 수 있도록 울에 실크와 리넨을 섞어 옷을 짓기도 한다.
6. 가격
과거에는 금에 필적하는 사치품으로 신분이 높은 사람들만이 비단옷을 입을 수가 있었다.[7] 그 중에서도 야생 누에인 산누에나방이 짜낸 실로 만든 비단은 천잠사라고 해서 일반 비단보다 훨씬 귀한 취급을 받았다. 노란색을 띄고, 일반 비단보다 곱게 짜기가 더 힘들다.로마 제국으로 들어간 비단은 실제로 같은 무게의 금과 동일한 가치를 지녔던 적이 있었다. 금과 비단의 상대가치가 계속 바뀌었기 때문에 일정치는 않았지만,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의 재위기간에는 금값이 곧 비단값이었다. 비단 1파운드가 금 1파운드와 동가였는데, 당시 금 1파운드의 금는 1만 2천 데나리에 해당했다.
7. 지역별 쓰임
7.1. 한국에서
- 삼국시대
한국에서도 근대 이전까지 당연히 옷감 및 중요 문서 기록용으로 써왔으며, 국가에서 양잠산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초대 왕 박혁거세부터 누에치기를 권장했다고 나오며, 일본에서 발견된 민정문서에 따르면 신라는 3년에 한 번씩 뽕나무의 숫자를 구체적으로 기록하면서 관리할 정도로 비단 생산과 관리에 국가적으로 힘을 쏟았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 민정문서에 따르면 가령 사해점촌[8] 마을의 뽕나무는 1004그루였는데 3년간 심은 것이 90그루, 그 전부터 있던 것이 914그루라고 기록되었다. 이는 기록된 다른 나무보다 훨씬 많은 숫자다. -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왕비가 친히 누에를 치는 친잠(親蠶) 의식을 하며 백성들에게 양잠을 장려하기도 했다.[9] 조선 시대의 법전인 경제육전(經濟六典)에 따르면 큰 집에는 뽕나무 300그루, 중간쯤의 집에는 뽕나무 200그루, 제일 작은 집에는 뽕나무 100그루를 심도록 했다. 만약 규정대로 심지 않으면 그 지역의 수령을 파면했다.
서울 마포구 절두산 순교성지는 형세가 누에 머리를 닮았다 하여 옛 지명이 잠두봉(蠶頭峰, 누에 머리 산봉우리)이었고, 산 아래에 뽕나무밭을 조성해 누에가 뽕잎을 먹을 수 있게 했다고 한다. 절두산 순교성지 아래에 잠원동(蠶院洞)이란 지명으로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지명에 있는 누에 잠(蠶) 자를 볼 것. 조선시대에 한양에서 양잠을 하던 잠실(蠶室)이 2군데 있었는데 서울 잠실동과 잠원동 근처였다. 잠원 역시 원래는 잠실이라 불렸으나, 행정구역을 정리하면서 송파구 잠실동과 구분하기 위해 잠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잠원역 승강장에는 벽에 타일 모자이크로 누에가 그려져 있다.
한편 서울 성북동에 선잠단(先蠶壇)을 세워 음력 3월 사일(巳日) 중 길한 날을 골라 서릉(西陵)씨[10]에게 제사를 지냈다. 당시에는 선농단 제사와 마찬가지로 선잠단 제사도 중사(中社)로 등급을 매겨 순위가 꽤 높았으니, 조선이 그만큼 양잠산업을 중요히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순종황제 2년(1908)에 서릉씨 신위를 선농씨 신위와 합치면서 선잠단에서는 제사를 지내지 않게 되었고, 경술국치 이후에는 당연히 제사 자체가 사라졌다. 광복 후에는 문화유산 체험 차원에서 선잠단 자리에서 왕실 제례에 맞춰 제사를 매년 거행한다. - 현대
1960~70년대까지만 해도 집집마다 방 하나에 누에를 키우고 아이들이 뽕잎을 해와서 먹여다 고치를 공장에 팔았고 부산물로 번데기도 생산되었으나, 농약의 사용과 가격도 품질도 월등한 중국산 비단[11]으로 인해 국산 비단은 사실상 숨통이 끊겼고, 과거 비단실을 잣던 누에들은 이제는 동충하초 등 건강식품 용도로 전용된다. 현대에는 각종 섬유 기술이 매우 발달해서 비단옷의 실용적 이점도 덜하고 양 자체는 많지 않지만, 그래도 비단 자체의 아름다움과 희소성 때문에 고급 옷감으로 사용되고 있다. 거의 씨가 마르다시피 하긴 했어도, 어찌어찌 살아남은 소수 양잠업체들이 국산이라는 것을 메리트로 버티고 있긴 하다.
혼수를 맞추러 가면 흔히 천연염색한 국산 전통 손명주 한복이라면서 추가금을 받는데 택도 없다. 전통 베틀은 폭이 좁아 치마 한 단이 35 cm를 넘길 수 없다. 수입산 개량 직기는 36인치(90 cm)까지 수제작이 가능하지만 직조는 폭이 늘어날수록 작업 난이도가 높아진다. 평생 직조만 해 온 장인도 한 벌 분량을 짜려면 최소 열흘이 걸린다. 인건비만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 만약 대여라면 명주가 맞는지부터 의심하자. 실크는 인체의 분비물에 약해 몇 번만 대여해도 폐기해야 하는데 바느질도 합성 섬유보다 훨씬 어렵다. 양심적으로 진짜 견직물을 쓰는 업체가 몇이나 될까? 광택과 구김성, 옷깃의 바랜 정도, 바느질 구멍 등을 잘 보자.
인간문화재 조옥이(1920~ 2007)가 살던 경상북도 상주시가 명주로 유명하여 상주시 함창읍에는 명주박물관이 존재한다. 2006년부터는 상주 명주 패션 디자인 페스티벌도 매년 개최할 정도. 다만 조옥이 선생의 작고 후 전통 방식은 사장되었고, 모두 기계화되었다.
경상남도 진주시가 실크로 유명하며 한국 비단의 70~80%를 생산하고 있다. 1970~80년대에는 전국 각지에서 진주에 찾아와 사갈 정도로 매우 인기가 많았다.
경상북도 경주시 두산리에서는 마을 주민들이 모여 (사)두산손명주연구회를 만들고 국가무형문화재 인정을 받았다. 현재로서는 전통 명주가 생산 및 판매되는 유일한 지역. 경주시전통명주전시관에서 시연을 보이고 있으며, 시티투어 코스에도 포함되어 있다. 주민들이 만든 손명주 판매도 하는데, 1필에 80만 원 정도.[12]
7.2. 중국에서
중국은 양잠업의 발상지로 비단은 중국의 특산물이기도 했는데 이것을 해외에 팔면 많은 이윤을 얻을 수 있었다.[13] 서양으로 가는 교역로에 실크로드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 그 점을 잘 말해준다. 중국에서는 대표적으로 쓰촨성의 비단이 유명했으며 이 지방 비단은 촉금이라고 하여 높은 품질로 유명했다.그래서인지 촉한의 유비가 조조의 조문에 비단을 보냈다든지 제갈량의 재산 목록 상당수가 뽕나무 밭이었다든지 하는 이야기가 남아 있다. 이 지방의 누에고치 생산량은 지금도 중국 전체에서 2위라고 한다. 이는 쓰촨성 사람들의 자부심으로도 이어져서, 고우영의 말에 따르면 쓰촨성의 중심지인 청두에서는 앞서 언급한 실크로드의 종착지가 장안이 아닌 청두로 이어진다고 주장한단다.
이러한 이유로 중국에서는 비단 제조법이 다른 나라로 퍼지는 것을 엄격히 막으려 했지만 몰래몰래 새어나가 결국 여러 나라에서 제작하게 되었다. 서양에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시절 이미 비단이 전래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552년에 페르시아인 사제가 중국에서 대나무 지팡이에 누에고치를 숨겨 가지고 왔다고 한다.[14] 또한 웬만한 나라마다 누가 누에나방의 알과 뽕나무 씨앗을 숨겨왔다는 이야기가 전할 정도. 당나라에서 화번공주로서 티베트의 왕 송첸감포에게 시집갔던 문성공주 역시 티베트에 누에 농자를 가지고 가서 티베트에 비단 직조를 전파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문익점의 목화 밀반입 이야기는 후세의 창작인데, 이 일화가 변형되어 전해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고급 옷감이었다.
삼국지나 역사책을 보면 금, 보석, 쌀 등과 마찬가지로 상대 국가에 대한 귀중한 진상품으로도 많이 사용했다.
모든 실크 생산의 시작이 중국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정확히 말하자면 양잠 방법과 품종, 제사 방법이라는 것이 옳을 것이다. 전파 전에도 토착종의 나방 고치를 이용한 직물은 있었으나, 당시에는 필라멘트 섬유가 아닌 스테이플 섬유 취급이었고 고치마다 실의 굵기와 색상이 균일하지 않았으며 직물의 광택도 떨어졌다.
7.3. 일본에서
오늘날에는 크게 쇠퇴했지만,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전반의 일본의 주력 산업은 비단을 포함한 제사업이었다. 일본의 비단 제조는 에도 시대부터 산업화되어가기 시작했고, 메이지 유신으로 외국의 기술을 들여와 제사업 기계화에 매진했다. 이것이 성과를 보이고, 더불어 비슷한 노력을 했던 청나라가 청일전쟁 이후 대혼란에 빠져 비단 수출에 차질이 생기자 그 자리를 일본이 대체했다.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미국에 비단(생사 포함)을 가장 많이 수출하던 나라가 일본이었다. 하지만 일본이 만주사변으로 미국과의 사이가 나빠지자 미국이 일본제 비단 수입을 규제했다. 이른바 1930년대의 Silk Boycott. 당시 일본의 농촌 경제는 양잠업으로 유지되었는데, 안 그래도 세계대공황으로 경제가 어려운 판에 실크 보이콧으로 농촌 경제가 붕괴 직전까지 내몰렸고, 이는 일본이 군국주의 국가로 나가는 한 원인이 되었다.
패전 이후로는 레이온이 크게 발달한 영향으로 일본의 제사업은 크게 쇠퇴했다. 일본은 오늘날에도 세계 제 5위의 비단 생산국이지만 그보다 위에 있는 중국, 인도, 브라질, 우즈베키스탄에 비하면 새발의 피.
7.4. 기타
유럽에서 옷을 순수 비단으로 지어 입은 사람들은 성직자들이다. 최고위 성직자인 교황대사(대주교), 추기경, 교황은 자신의 가대복 수단 등을 모조리 모이레 실크로 만들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이런 풍조가 사라져 현대에는 보기가 좀 어렵지만 허리띠나 의전망토는 여전히 비단으로 만든다.보통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오로지 여성들만이 비단옷을 입을 수 있다. 양대 사치품인 금과 비단은 남성에게 금지되어 있으니 이쪽 사람들에게 선물할 때는 주의하자. 다만 이슬람 문화권도 매우 넓으니 문화권에 따라, 그리고 개인 성향에 따라 상관 않는 사람들도 있긴 하다. 본래는 무함마드가 사치를 방지하기 위해 선포했지만 이 금기사항을 정당화하기 위해서인지 '남자가 비단옷을 걸치면 여자처럼 된다.' 같은 미신도 횡행하는 중. 하지만 100% 순수 비단이 아닌 견혼방 같은 섬유는 이 금기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다. 오스만 제국 시절 술탄의 옷은 모두 천의 씨실은 면이되 날실은 비단인 혼방섬유를 사용했으며, 가지안테프 지방에는 이 시절 만들어진 전통 옷감[15]이 아직도 수공업으로 제조된다.
8. 여담
- 헤르만 괴링은 자신의 제복을 비단으로 지어 입었다는 일화로 유명한데, 워낙 사치스럽고 제복이나 장식에 집착하는 괴링의 성계 때문에 와전된 모양이다. 한국에선 특히 이대영의 알기 쉬운 세계 제2차대전사가 그 소문의 원흉(?)으로 추정된다. 현대 제국 전쟁 박물관 등지에 남아 있는 괴링의 실물 제복을 보아도 비단인 제복은 없고, 관련 설명에서도 겉감까지 순수 실크라는 표현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안감은 비단을 사용한 것이 맞는다. 당대 제복 안감으로는 면이 흔하게 사용되긴 했으나 장교들은 사비로 제복을 맞춰 입곤 했기 때문에 안감이 새틴이나 실크인 경우는 꽤 흔했다.
괴링은 오히려 흰색 면직물 제복을 선호했다. 고도비만인데다 땀을 워낙 많이 흘려서 옷이 금방 젖는데 일반적인 모직 제복은 세탁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괴링이 입었던 실물 제복의 안감은 대개 땀과 같은 분비물로 오염되었으므로 이런 흔적들도 제복의 진위 여부를 감정하는 요소로 사용된다. 그러나 괴링이 드레스셔츠, 속옷 혹은 조끼, 카디건 등을 비단으로 지어 입었음은 사실이다.
그런데 독일 국방군에서 일부 장교들은 제복 자체까지는 아니더라도 정모와 같은 부속물은 비단을 사용해 주문 제작했던 경우가 있고 실물도 때때로 발견된다. 다만 전시에 비단값이 올랐기에 보다 저렴한 레이온도 굉장히 많이 쓰였다.
- 견직물을 뽑기 위해서는 누에가 성충이 되기 전에 죽여야 한다. 누에나방이 성충이 되려면 고치를 뚫고 나와야 하는데 이러면 실이 끊어지고 누에의 침이 닿은 부분이 변성되어 생산성과 품질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전에 죽이는 결과물이 이게 우리가 먹는 번데기이다. 이 때문에 간디는 비단을 비판했고, 인도는 남은 고치로 비단을 생산하는 특허 기술을 만들었다. 아힘사(불살) 실크, 비건 실크로 불린다. 의외겠지만 야생 실크도 마찬가지다. 우화 후인 고치만 골라서 채집하기에는 생산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개량된 실크누에보다 뻣뻣하고 염색이 어렵다.
9. 관련 문서
[1] 원래 면주(綿紬)라고 한 것이 변해서 명주가 된 것.[2] 포르투갈이 원산지이다.[3] 염기성 물질은 단백질을 녹인다. 손을 비누로 씻으면 미끌미끌해지는 것도 염기성 물질 때문에 연마되기 때문이다. 락스가 피부에 닿아도 같은 원리로 이태리 타올로 민 것처럼 피부가 부으면서 따갑다. 심지어 공포영화 큐브에서는 염기성 물질로 사람을 끔살시키는 장면도 있을 정도.[4] 전통 바디는 대나무로 만든다.[5] 가격으로 세계 최고는 비쿠냐 울이 현재 압도적인 1위를 자랑한다.[6]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도 장교 한 명이 본토의 아내에게 드레스 원단으로 선물하기 위해 보조낙하산을 낙하 후에도 영국으로 철수하기 전까지 계속 가지고 다니는 장면이 나온다.[7] 《사기》에 기록된 바, 당시 비단 가격이 1필에 대략 6백 전, 고급은 8백 전까지 갔는데, 당시 물가로 비단 1필이 백미 6석(720 kg)에 해당하는 가격으로 120 kg에 1백 전쯤 했다고 한다. 20 kg 쌀을 5만 원으로 잡으면 180~240만 원에 이르는 고가템. 당나라 개원 13년(725)부터 천보 연간까지 장안과 낙양의 쌀값은 항상 1말에 15~20문 정도였고, 비단도 줄곧 1필에 200문 선을 유지했다고 하니 이 당시엔 쌀 1석당 비단 1필은 되었을 것이다. '부유한 사람'이 아니라 '신분이 높은 사람'임에 주목할 것. 실제로 많은 국가들에서 비단옷을 입을 수 있는 신분을 법으로 정했고, 규제가 상세한 경우에는 신분에 따른 비단의 품질도 규제 대상이었다. 경제가 발전하고 신분제가 약화됐다는 송나라 때에도 상인은 비단옷을 입고 집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다.[8] 오늘날 충청북도 청주시 일대[9] 친잠은 중국이나 일본 등 동양권에서 두루 찾아볼 수 있었다. 일본 황실에서는 오늘날도 황실 여성들이 친잠을 하여 그 비단으로 기모노를 지어 입기도 한다.[10] 중국 전설에 따르면 서릉씨는 황제(黃帝) 헌원씨의 부인이다. 어느 날 서릉씨가 뽕밭 아래에서 뜨거운 차를 마시는데 야생 누에의 고치가 찻물 속으로 떨어졌다. 서릉씨가 고치를 꺼내려 하자 실이 줄줄 풀려나오는 모습을 보고 깨달은 바가 있어 누에고치에서 처음으로 비단실을 자아 헌원씨에게 옷을 지어 입혔다고 한다. 이 전설 때문에 서릉씨를 처음으로 양잠을 시작한 자, 양잠의 시조로 기렸다.[11] 그럴 만도 한 게 아직도 세계 1위의 비단 생산국은 중국이다. 비단 산업의 원산지이자 발상지이기도 하고.[12] 2017년 당시[13] 근대로 들어가면 수입 측에선 비싼 완제품인 비단보다는 그 전 단계의 반제품인 상대적으로 저렴한 생사(生紗: 누에고치에서 뽑아낸 비단의 원료가 되는 실)를 수입해서 비단으로 완성하는 쪽으로 간다. 원가만이 문제가 아니라 각국의 문화마다 다른 색상이나 문양 등의 취향과 예측이 어려운 유행에 즉각 대응할 수 있는 쪽이 판매에 유리하고 이것이 또 자체 비단산업의 육성과 유지에 더 나으므로 완제품 보단 반제품 수입으로 가게 된 것이다.[14] 이후 비단 직조는 동로마 제국 정부의 전매산업이 되었다.[15] Kutnu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