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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18:14:57

지노 콜라우시

지노 콜라우시의 수상 이력
{{{#!folding ▼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 ||
이탈리아의 前 축구선수
파일:Gino Colaussi.png
<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000,#e5e5e5> 이름 지노 콜라우시
Gino Colaussi
본명 루이지 콜라우시
Luigi Colaussi
출생 1914년 4월 3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그라스디카 디손초
사망 1991년 7월 27일 (향년 77세)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국적
[[이탈리아|]][[틀:국기|]][[틀:국기|]]
포지션 아웃사이드 레프트 포워드, 센터 포워드
신체조건 163cm | 66kg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000,#e5e5e5> 선수 US 트리에스티나 칼초 1918 (1930~1940)
유벤투스 FC (1940~1942)
LR 비첸차 (1942~1945)
US 트리에스티나 칼초 1918 (1945~1946)
칼초 파도바 (1946~1948)
AC 티에네 (1948~1949)
테르나나 칼초 (1949-1950)
SPD 타로스 (1950~1951)
올비아 칼초 (1951~1952)
감독 AC 티에네 (1948~1949)
테르나나 칼초 (1949~1950)
SPD 타로스 (1950~1951)
올비아 칼초 (1951~1952)
SSC 캄포바소 (1956~1957)
알바 알카모 1928 (1959~1961)
US 트리에스티나 칼초 1918 (1963)
비토리아 (?~?)
카니카티 (?~?)
알바 알카모 1928 (1967~1968)
라티나 칼초 (1969~1970)
국가대표 26경기 15골 (이탈리아 / 1935~1940)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선수 생활2.3. 감독2.4. 이후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4. 뒷이야기5. 수상
5.1. 선수
5.1.1. 클럽5.1.2. 국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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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의 전 축구 감독. FIFA 월드컵 역사상 최초의 결승전 멀티골[1] 기록 보유자이다.

2. 생애[2]

2.1. 어린 시절

콜라우시는 그라스디카 디손초(Grasdica d'Isonzo)에서 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원래 그라스디카 디손초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였지만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이탈리아 왕국령이 되었다. 그리고 콜라우시가 태어날 때 그의 성은 콜라우시그(Colàusig)였지만 무솔리니 통치기에 콜라우시(Colaussi)로 성이 바뀌었다.

콜라우시는 축구 선수로 데뷔하기 전에 구두 수선공으로 일했는데 한 켤레당 2리라를 받았다고 한다.

2.2. 선수 생활

2.2.1. 클럽

콜라우시를 처음 주목한 팀은 트리에스티나였다. 트리에스티나의 회장이었던 첼소 체레티(Celso Cerretti)가 개인적으로 팀의 감독 토트 이슈트반(Tóth István)에게 콜라우시를 데려오라 지시했고 콜라우시는 트리에스티나에 입단하게 되었다.

낡은 자전거 한대를 타고 트리에스티나 구단의 훈련장을 오가던 콜라우시는 1930년 9월 28일, 16세의 나이에 세리에 A 데뷔 경기를 치렀고 첫 골은 같은 해 11월 2일의 인터 밀란전에서 넣었다. 그는 10시즌간 트리에스티나에서 활약하면서 이탈리아 최고급의 아웃사이드 레프트 포워드로 명성을 떨쳤다.

1940년, 콜라우시는 전성기에서 내려온 유벤투스 FC의 이적 제안을 받아들여 유벤투스의 줄무늬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이적료는 45만리라. 하지만 전쟁으로 인해 콜라우시의 팀 합류는 늦어졌고 합류 이후에도 트리에스티나에서 보여준 실력보다는 떨어진 모습을 보였다. 유벤투스에서 콜라우시는 단 2시즌밖에 있지 못했고 그나마 2번째 시즌에는 스쿼드에서 빠지는 일도 잦았다. 언론들로부터 즙빠진 레몬(un Limone Spremuto)이란 굴욕적인 표현을 듣기도 했다. 그나마 유벤투스가 1942년 코파 이탈리아에서 우승함으로써 콜라우시는 그의 클럽 커리어에서 유일한 우승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1942년, 유벤투스를 떠난 콜라우시는 LR 비첸차에서도 예전의 기량을 회복하지 못했다. 3년 후인 1945년에 친정팀에 다시 돌아온 콜라우시는 1시즌간을 트리에스티나에서 보냈고 팀은 세리에 A 8위를 기록했다.

콜라우시는 입단 당시 세리에 B 소속이었던 칼초 파도바에서 2년간 몸담으면서 파도바를 세리에 A 무대로 승격시켰다. 이후는 하부 클럽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지냈다.

2.2.2. 국가대표

1935년 10월 27일, 콜라우시는 아르헨티나로 돌아간 라이문도 오르시를 대신해 이탈리아 대표팀에서 첫 선을 보였다.

1938년 월드컵에서 이탈리아의 첫경기였던 노르웨이전에서 콜라우시는 벤치를 지켰다. 하지만 콜라우시는 이후 3경기에 모두 출전해 4골을 넣어 이탈리아의 두 번째 우승에 큰 공헌을 했다.

월드컵 이후에 콜라우시의 자리는 피에트로 페라리스카를로 레구초니에게 서서히 넘어갔고 콜라우시는 이탈리아 대표팀에서 26경기 출전, 15골을 기록했다.

2.3. 감독

주로 하부 리그에서 감독 생활을 했다.

2.4. 이후

축구 감독 생활도 마무리한 콜라우시는 바사노 델그라파(Bassano del Grappa)에 술집을 열었지만 생계를 꾸리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1938년 월드컵의 우승 메달도 팔 약속을 했지만 그나마 1986년부터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연금을 받게 되었다.

콜라우시는 1991년에 트리에스테의 산토리오 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향년 77세.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빠르고 잽싸며 좋은 슈팅을 가졌던 아웃사이드 포워드.그래서 콜라우시는 체구가 작았음에도 피치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돋보이게 할 수 있었다.

그는 왼발잡이였지만 오른발 사용에도 능숙했고 크로스를 올리는 것 역시 상당한 경지에 올라 있었다. 그래서 이탈리아 대표팀의 전임 아웃사이드 레프트 포워드 라이문도 오르시와 많이 비견되었다.

피에로 파시나티와 더불어 트리에스티나의 30년대를 대표하는 선수이다. 그의 트리에스티나 출전 기록은 275회로 역대 4위[3]이고 47골의 득점 기록은 역대 7위이다.

4. 뒷이야기

5. 수상

5.1. 선수

5.1.1. 클럽

5.1.2. 국가대표



[1] 콜라우시는 1938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실비오 피올라와 함께 각각 2골씩을 기록했지만 각각 한 골씩 넣은 상황에 콜라우시가 3번째 골을 넣어 시간상으로 피올라보다 앞서 멀티골을 넣을 수 있었다. 그리고 월드컵 결승전에서 멀티골을 넘어 해트 트릭을 달성한 선수는 현재까지 2명으로 잉글랜드제프 허스트프랑스킬리안 음바페이다.[2] 출처: 위키피디아, 11v11[3] 현역 시절엔 2위였다. 1위가 344회의 파시나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