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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01 09:57:53

차범근/선수 경력/SV 다름슈타트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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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V 다름슈타트 98 로고(1971~2005).svg
차범근의 선수 경력
프로 데뷔 이전 SV 다름슈타트 98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차범근
1978-1979
파일:차붐 다름슈타트.png
▲ 78/79 시즌 차범근
소속팀 <colbgcolor=#ffffff,#191919>SV 다름슈타트 98 (분데스리가)
등번호 11
기록
파일:분데스리가 로고.svg
1경기
0득점 1도움
합산 성적
1경기
0득점 1도움

1. 개요2. 상세
2.1. 활동2.2. 계약 파기
3. 기록
3.1. 1978-79 시즌

[clearfix]

1. 개요

차범근의 선수 경력 중 SV 다름슈타트 98에서의 커리어를 서술한 문서이다.

2. 상세

2.1. 활동

파일:차붐 다름슈타트2.png
파일:차붐 다름슈타트.png
78/79 시즌 분데스리가 데뷔전을 치르는 차범근

차범근은 군복무를 마치고 SV 다름슈타트 98에 입단하게 된다. 여기서 이후에 벌어질 군문제를 이야기하기 위해 70년대 병역 방침을 살펴봐야 하는데, 차범근이 입대할 당시 공군의 복무기간은 35개월이었다. 그러나 공군 측에서는 팀 전력의 강화를 위해서 제13대 공군참모총장이었던 주영복의 권한으로 육군의 복무기간과 같은 30개월이 되면 의가사 전역을 시켜주는 조건을 내세워 공군 축구단(성무)에 입단을 제의하였다.[1] 게다가 차범근은 대졸자이기 때문에 교련과목 이수로 인한 3개월 단축 혜택을 합치면, 공군에서 약속한 군 복무기간은 27개월이 된다. 이를 표로 정리하면 아래의 표와 같다. 이러한 이유로 차범근은 공군 축구단으로 입대하였으며, 제대 후 분데스리가 진출 계획을 세우게 된다.
35개월(공군 군 복무기간) - 5개월(공군과 육군의 군 복무기간 차이) - 3개월(교련과목 이수 혜택) = 27개월

1976년 10월에 입영하여 27개월 뒤인 1978년 12월에 전역했다고 판단하고 독일로 건너가 SV 다름슈타트 98와 계약하며 분데스리가에 입성한 최초의 한국인 선수가 되었다. 다름슈타트에서 차범근은 VfL 보훔을 상대로 77분을 뛰었고 3:1의 팀 승리에 기여하였다. 차범근은 이 경기에서 키커 평점 3점[2]을 받는 등 좋은 활약을 펼쳤고 앞으로의 활약이 기대되었으나...

2.2. 계약 파기

한 경기를 출전한 상태에서 별안간 차범근의 병역 기간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차범근에게 5개월 면제라는 특별혜택을 준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5개월 의가사 면제를 제안했던 공군 측 인물은 사망한 뒤라 차범근은 공군 측과 얘기해봐야 별 소용도 없었고, 국방부와 대한체육회, 축구협회도 다른 건 다 들어줘도 병역 문제만큼은 특별대우를 해 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나중에 차범근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거짓말과 불공정함에 어이가 없어서 기자회견을 하려고 했었는데 옆에 공군 대령이 다가와서 인터뷰를 하지 못하도록 입막음을 했다고 한다. 또한, 북한과의 아시안 게임 경기를 위해 체육회 측에서 독일 진출에 제동을 거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아시안 게임에는 프로 선수가 출전할 수 없기도 했다. 운동선수에 대한 병역 특례는 당시에도 있었으나 기준이 엄격했다.[3]

결국 출국 11일 만에 귀국한 뒤 나머지 5개월의 복무 기간을 채워 1979년 5월 31일에 만기 전역했다. 이로 인해 SV 다름슈타트와의 계약은 파기되었으며, 설상가상 다름슈타트와의 가계약과 1경기 출전 경력으로 인해 차범근은 '프로 선수'로 분류되어 전역 전까지 국내에서 공식 경기 출전을 하지 못하게 된다.[4] 이때문에 차범근은 남은 5개월 복무 기간 동안 그저 개인 훈련만 했다고 한다.[5]# 일반적으로 기초군사훈련을 받거나 2군 무대 혹은 벤치를 지키며 공식 경기를 갖지 못하면 프로 선수들의 폼이 떨어지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차범근은 다행히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군 복무를 마저 채우고 전역 한 차범근은 1979년 6월 17일 연고대 OB 올스타전을 마치고 서독으로 향하고, 다행히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와 계약에 성공하며 분데스리가에 재입성하게 된다.

지금이나 당시의 시선으로 봐도 적지 않은 나이에 이뤄진 해외 진출이기 때문에 1년이라도 분데스리가에서 먼저 뛸 수 있었던 SV 다름슈타트 98 시절이 아쉽게 느껴진다. 특히 차범근은 최하위권 팀이었던 다름슈타트에 메어있을 생각이 아니라 독일 리그에 대한 적응기 겸 더 큰 팀에 가려는 발판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계약 자체를 6개월 단기 가계약으로 선을 긋고[6] 계약 중계를 담당했던 스위스 바두스 사와의 스폰서 계약[7] 역시 정식 입단전까지만 받기로 하는 등 서독 진출에 있어 전략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던 상황이라 군부대로의 복귀는 차범근 개인에게도 아픔이 컸다.

게다가 6개월 내에 더 큰 구단으로 이적하려는 차범근의 계획은 데뷔 전이었던 보훔전 이후 탄력을 받는 상황이었는데, 당장에 SV 다름슈타트 98에서는 보훔 팀과의 경기를 지역 방송을 통해 15분간 특집 방영하며 2년 정식 계약을 강력하게 어필했고 데뷔 전을 본 함부르크 SV를 비롯한 상위권 분데스리가 팀들이 접촉을 해오기도 했다.

참고로 차범근이 다름슈타트로 진출할 당시 국내의 반응이 참 가관인데, 입단 테스트라는 개념 자체가 낯선 시절이라 국가대표 선수가 입단 테스트를 보는 게 말이 되냐며 차범근이 자존심도 없고, 국가를 망신시킨다는 이야기부터 해외 이적을 당시 만연하던 광부나 간호사 파견처럼 외화를 벌러 떠나는 것과 동일시해서 돈 벌기 위해 국가를 등지고 독일로 떠난다느니 어린이들의 우상이 사라진다느니 하는 기사가 많다. 대한 축구 협회에서조차 아시안게임에 나가야 한다며 서독 진출을 반대했다. '한나라의 이름이 걸린 빅게임의 중요 포지션을 외국에서 뛰다 온 선수에게 바로 맡길 수 없고(????), 어느 정도 팀플레이의 연습 기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8] 그래서 입단 테스트를 받더라도 아시안 게임 끝나면 가서 받고, 만약 계약을 맺게 되면 계약서에 1년마다 방한 및 친선경기를 치르는 조항을 삽입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이런 게 정당화되던 시절이다.

한편 일련의 상황을 모르는 서독에서는 그저 답답하기만 했는데, 특히 군문제로 인해 국내로 복귀한 차범근이 도통 돌아올 기미가 안 보이자 광적인 축구팬이었던 독일 하원 부의장인 헤르만 슈미트 보켄하우젠 의원이 차범근을 서독으로 빨리 보내달라는 서한을 한국 국방부와 문교부[9]에 보내기까지 했다. #

다름슈타트는 그 해 2부로 강등되었고 1980년에 차범근의 고등학교 2년 선배인 김진국을 영입하였으며, 2018년 1월에는 FC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지동원을 임대 영입하기도 했다. 이듬해인 2019년 여름 이적시장에서 백승호를 영입하는 데 성공해 한국인 선수와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3. 기록

파일:SV 다름슈타트 98 로고(1971~2005).svg SV 다름슈타트 98 시절 기록
(1978.12.30)[10]
파일:SV 다름슈타트 98 로고(1971~2005).svg 통산 1경기 1도움(분데스리가 1경기 1도움)

3.1. 1978-79 시즌

1978/79 시즌: 1경기(선발 1경기) 1도움
77분 교체 아웃
분데스리가: 1경기
[1] 당시는 지금처럼 국군체육부대로 통합된 형태가 아닌 육(웅비), 해(해룡), 공군별로 축구단을 운영하고 있었고, 축구단별로 서로 경쟁 아닌 경쟁을 하던 시절이었다.[2] 당시 독일의 평점은 내신등급처럼 낮을수록 좋았다. 즉, 1점이 우리가 흔히 아는 10점이다. 3점을 받았으니 평점 7점으로 좋은 활약을 펼친 셈이다. 지금도 키커지의 점수는 이 기조를 유지하고 있으며, 평가의 디테일을 위해 소수점 점수(0.5)가 추가되었다.[3] 사실 이것도 말이 좋아 엄격한 것이지, 차범근이 군에서 복무하던 시기인 1970년대 후반기에 합법적 병역 특례인 예술체육요원을 받은 사람은 고작 두 명에 불과했으며,(그나마도 한 명은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2위를 차지한 정명훈이다. 나머지 한 명은 1976년 몬트리올 하계올림픽 당시 프로레슬링 종목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양정모다.) 그나마도 정명훈과 양정모가 혜택을 얻은 이후로는 한동안 신규 편입이 중단되었다가 차범근이 만기전역하고 난 이후인 1980년대부터 활성화되기 사작했다. 다시 말해, 차범근이 병역특례를 받을 기회는 처음부터 없었던 셈. 그나마 받을 수 있었던 방법은 군에 입대하기 몆 달 전에 있었던 몬트리올 올림픽에 나가서 최소한의 법적 기준인 3위, 넉넉하게는 양정모처럼 1위를 차지했어야 했으나 지역예선에서 탈락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물론 이후에 차범근이 군 복무 도중에 나간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 본선 당시에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따라서 지금 시점에서 보면 이론상으로는 병역혜택을 받을 수 있었지만 실제로는 1980년대까지 예술체육요원 제도가 유명무실하게 된 지라 그러지 못 했다. 거기다가 2010년까지는 현역 혹은 보충역 복무자가 국제대회인 올림픽에서 3위 이내의 성적을 거두거나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는 등(단, 차범근의 현역 시절까지는 아시안게임도 3위 이내였다.)의 성적을 내도 조기전역을 시켜줄 법적 근거가 없었던지라 만기전역일이 될 때 까지 계속 복무했다. 그리고 방콕 아시안게임 남자 축구 부문 결승이 열렸던 당시 한국의 높으신 분들 입장에서 보면 상대팀으로 만난 북한과 비기는 바람에 공동 우승이란 결과를(이는 과거 아시안게임 축구 부문 규정을 보면 결승전에서 연장전까지 갔는데도 승패가 결정되지 않으면 공동 우승 처리를 했기 때문이다.) 받아들여야만 했던 상황에서 대회에 참가한 미필 선수들에게 병역 혜택을 부여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21세기 시점에서 보면 법에 근거가 있는데도 이랬다는 점이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지만, 1978년 당시 남북은 한창 체제경쟁을 벌이고 있었던 데다 반북/혐북 감정이 지금보다 훨씬 강했던 시기였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4] 당시 프로 리그가 없던 한국은 모든 축구선수가 아마추어 신분이었다.[5] 자서전에 따르면 하루에 천번 넘게 시멘트 블록을 뛰어넘고(...), 줄넘기, 혼자서 리프팅 등을 했다고.[6] 보스만 룰이 없던 시절이라 이적에 있어 선수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하던 시절이다.[7] 월 4천 마르크(당시 한화 140만 원 상당)[8] 당시 아시안게임에 프로선수가 출전할 수 없는 것도 반대 이유였지만 예외적인 경우가 있어 무조건 출전이 안 된다기 보다 미지수인 상황이었다.[9] 당시 문체부 역할을 겸하고 있었다.[10] 차범근의 SV 다름슈타트 98 이적 후 첫 경기 보훔 전 날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