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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9:04:19

차범근/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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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클럽 경력

1.1. 학창시절과 독일로 진출하기까지

농부의 아들로 경기도 화성군 안룡면 송산리(現 경기도 화성시 송산동)에서 태어난 차범근은 고추장보리밥을 비벼 먹고 참기름을 살 돈조차 없어 비빔밥에 참기름 넣어 먹는 것조차 사치로 느낄 정도로 가난한 유년 시절을 보낸다.
학교가 끝나면 농부의 아들로서 소의 여물을 주거나 논/밭일을 도와주는 것이 그의 어린 시절이었고, 맛있는 것을 배불리 먹는 것이 소원이었던 소년이었다. 하지만 타고난 신체와 운동신경이 탁월했는지 화산초등학교 4학년 때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했다. 축구, 핸드볼, 육상씨름까지 했다. 빠른 데다 운동신경이 뛰어나니 못할 게 없었고, 그러다 보니 혼자 바빴다고 한다.
이 동네에서 핸드볼 예선을 뛰고, 저 동네로 날아가 축구 준결승을 뛰었을 정도로 운동신경이 좋아서 동네를 대표하는 운동선수로 어릴 적부터 이미 소문이 자자했다. 아버지 차금동씨는 이런 차범근에게 운동선수의 재능을 알아봤고, 겨울이면 한푼두푼 어렵게 모은 돈으로 스케이트를 사서 마을 저수지로 데려가 차범근에게 신기고 계속 저수지를 돌게 하면서 하체 운동을 시켰다. 새벽이면 계속되는 운동은 아직까지 차범근이 아침 운동을 열심히 하는 계기가 되었고 차범근은 후일 아버지에게 배운 새벽 운동이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이라고 회상했다. #
여러 종목을 다 잘 했지만, 특히 축구에서 가장 재능을 보였고, 차범근은 축구부가 있던 영도중학교로 진학했으나, 유니폼을 입기도 전에 축구부가 해체되는 불운을 겪는다. 그 바람에 팔자에도 없는 필드하키 선수가 되었고, 공도 못 차면서 영등포구까지 그 먼 길을 통학했다.
축구선수가 되고 싶어 했던 차범근은 집에 전학 얘기를 꺼냈고, 전학가는 데 적잖은 돈이 들었던 그 당시에 아들의 운동을 하고자 하는 정신과 근성을 간파한 아버지는 삶의 터전인 땅을 쪼개 팔아서 차범근의 전학을 돕는다. 또한 당시 경신중학교 축구부 코치였던 장운수가 중학교 때까지 하키 선수였던 차범근의 잠재력을 높게 평가하여 당대 최고의 축구 명문[1]이었던 경신중 축구부로 들어갈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결국 2학년 2학기 때 경신중학교로 전학에 성공한 차범근은 본격적으로 축구를 하고 기량을 키웠지만, 목표했던 경신고등학교[2] 진학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그 대신 경성고등학교로 진로를 타진한다.
그런데 뒤늦게 이 사실을 안 경신고 교장이 노발대발하면서 난리를 쳤고, 경성고 입학시험 치는 날 감독과 선배들이 들이닥쳐 경신고로 다시 진로를 돌려놨다. 한데 이 과정에서 학교 교장에게서 큰 대접을 받고 있는 차범근을 보고 선배들이 대놓고 불만을 나타냈다. 운동부 군기가 군대 뺨치던 시절에 차범근은 겁에 질려 순간 엉뚱한 결정을 내리고 만다. "선배들 구타가 너무 두려워 가출했습니다. 서울 친구 집에 일주일을 숨어 있었어요. 근데 친구는 학교 가고 저는 집에 있으니 친구 어머니 눈치가 보여 더는 못 있겠더라고요." 농사짓는 집에서 땅을 팔아 전학까지 시켜줬는데 아들이 가출을 했으니 부모님에겐 다시 없는 불효였다.
결국 큰형에게 연락해 다시 화성 본가로 내려갔고, 아버지 손에 이끌려서 경신고 장운수 감독 손에 넘겨졌는데, 생각보다 일이 잘 풀렸다. 장 감독이 축구부 선배들에게 "다시 한번 차범근에게 손대면 내가 혼내주겠다"라고 으름장을 놓으며 방어막을 쳐준 것이다. 만에 하나 삐끗했더라면 그저 그런 필드하키 선수가 됐거나, 가출 청소년이 될 뻔했다. 그랬으면 대한민국은 축구 영웅을 갖지 못했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고교 2학년 때 청소년 국가대표가 됐고, 고교 3학년 때 A 대표팀으로 발탁됐다. 1972년 태국에서 열린 1972 AFC 아시안컵 태국 이라크와의 조 편성 경기가 데뷔전이 됐다.
섭씨 35도가 넘는 날씨에 혀를 빼 문 선배들은 경기만 뛰면 항상 "범근아"만 외쳐댔다. 죽으라 뛰었지만 0:0이 되고 결국 PK로 승부를 가려야 했다. 지친 선배들은 후배들을 앞세웠다. 청소년대표인 차범근과 황재만(당시 고려대학교 1학년)이 등을 떠밀렸고, 공교롭게도 둘 다 헛발질을 하고 말았다. 결국 2-4로 패배한다.
차범근이 힘껏 때린 볼은 순간적으로 시야에서 사라져 관중석에 떨어졌다. 한 마디로 하늘 높이 새를 잡은 것이다. "선배들이 집합을 시켰어요. 외국에서 '옥상으로 올라와'를 한 거죠. 정말 라자 호텔 옥상에 올라갔습니다. 다행히 맞지는 않았지만" 천하의 차범근이 태극마크 신고식을 혹독하게 치른 셈이다.[3] 아무튼 청소년 대표까지 했던 차범근은 축구 명문인 고려대학교에 순조롭게 입학하게 되었을까? 아니다. 차범근의 고려대행은 그의 고등학교 진학 과정보다 훨씬 더 버라이어티했다.
근본적인 문제는 경신고 교장 이하영과 축구부 감독 장운수의 대립이었다. 이하영은 연세대학교, 장운수는 경희대학교 출신으로, 모교로부터 차범근을 빼내달라는 압력을 받고 있었다. 차범근의 친가에서는 명문인 연세대학교를 희망하고 있었고 차범근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교장과 감독의 대립 속에서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 차라리 축구를 포기하려 하는 상황에 내몰렸다. 둘 다 허구한 날 시간 날 때마다 불러대서 "너는 연세대로 가야 한다/너는 경희대로 가야 한다" 하고 압박을 하고 있으니 심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았다.
결국 이에 시달린 나머지 1971년 11월, 숙소를 이탈하면서 집으로 귀향한다. 그리고 고향에서 동네 1년 선배이자 고려대 축구부 1학년 황재만[4]을 만난다. 황재만은 차범근의 상담을 듣고 아예 이도 저도 말고 제3의 길인 고려대를 권유했다. 교장과 감독의 다툼에 지쳐버린 차범근은 동네 선배의 친절한 권유에 마음을 돌려서 바로 고려대행을 결정지었다.
당연히 경신고, 연세대, 경희대, 고려대 모두 뒤집어졌다. 앞의 셋은 충격과 공포에 빠졌고, 고려대는 "이게 웬 떡이냐!" 같은 반응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연세대나 경희대에서 납치[5]를 할지 모른다는 우려와 경신고 내에서 차범근을 감금하는 일 같은 막장 짓거리를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당시 경신고 축구부 내 코치 이경이는 고려대 축구부 감독과 절친이었기에 이 정보는 고려대에 거진 실시간으로 전달되었다. 당연히 고려대의 입장에서는 넝쿨째 들어온 호박인 차범근을 다른 대학교로 빼앗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
같은 해 12월 중순, 청소년대표 최종 선발전에 출장한 차범근이 귀가를 하려고 하자 검은색 지프가 나타났다. 그리고 대한민국 해군 장교 출신 고려대 럭비팀 트레이너 김영복을 필두로 한 다수의 행동 대원이 주변을 철통같이 에워싸고 고려대행을 권유한 당사자 황재만이 차범근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고려대는 경신고가 손을 쓸 수 없는 청소년대표 선발전 종료 직후라는 그 타이밍을 노려서 전격적으로 차범근을 데려간 것이다. 차범근 본인의 동의가 없었으면 영락없는 납치였을 상황이다. 결국 고려대 축구부 및 운동 계열 수뇌부들의 열렬한 환영 속에 바로 입학을 확정지으면서 연세대와 경희대를 벙찌게 만들었다. 2020년대의 요즘같으면 어림도 없을 촌극이었다.
이후 대학 재학 중 당시 최연소로 국가대표로 발탁이 되며 이후 신탁은행과 공군에 입단하여 뛰어난 활약을 펼친다. 원래는 해군 축구단에 입단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대한민국 공군 측에서 부상 시 의병 전역과 복무 단축을 조건으로 제시해서 낚아채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복무 단축에 관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이는 결국 차범근의 첫 분데스리가 진출에 해당하는 SV 다름슈타트 98와의 가계약이 취소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차범근의 이름을 알리게 한 것은 국대에서의 뛰어난 활약 때문이었다. 이때 스탯이 엄청난데, 국대 데뷔 때부터 대한민국에 있던 때인 72년부터 78년까지 무려 118경기 55골을 넣었으며, 24세 139일로 세계 최연소 센추리 클럽 가입자이다. 당시에는 세계 축구의 변방이었던 아시아에서 한국을 비롯해 태국,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의 국가 주최로 자체적으로 많은 컵 대회들(메르데카컵, 박스컵 등등)을 개최했었고 종종 해외 클럽들을 초청하여 친선경기를 치렀는데, 박스 컵에서 열린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와의 경기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게 되고 슐테 프랑크푸르트 코치 측이 박동희 대한축구협회 국제부장을 통해 분데스리가 진출을 타진하게 되며 결국 78년 12월 다름슈타트에 입단한다.
슐테 코치가 직접 차범근의 플레이를 보고 박 교수에게 제의를 한 것이고 링크참고, 박스컵 이전 5월 재팬 컵에서 보루시아 묀헨글라드바흐와의 경기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서 우도 라텍 감독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차범근의 현역 시절, 특히 국가대표 차범근은 이른바 박지성, 손흥민 세대인 현시대 적지 않은 라이트 팬이나 축알못 들에게 심하게 저평가되고 있다. 이유는 첫째, 차범근이 뛰던 시기의 국가대표 경기 기록이나 영상 상당 부분이 유실되어 차범근의 젊은 시절 국가대표 경기, 대표적으로 코리아컵 국제축구대회 1976년 대회때 나온 6분 해트트릭같은 20대 차범근의 활약상을 지금 거의 볼 수 없고, 둘째, 차범근이 현역 에이스였던 86년 이전의 대한민국 축구는 월드컵 본선 진출은커녕 아시안컵에서도 힘겹게 경쟁하는 중상위권 국대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국대 축구팬이나 축구협회나 그 시기를 아예 없던 시기로 치부하고 86년 월드컵부터 시작된 FIFA 월드컵 9회 연속 본선진출만 강조하고 있기에 차범근이 아무리 국대를 캐리했다고 한들 "월드컵 진출도 못 시켜서 86년 멕시코때 무임승차한 선수가 에이스가 무슨 에이스? 박지성, 손흥민 미만잡" 이런 논리에 동조하는 국대 FC 코리아들이 매우 많다는 점. 셋째, 차범근의 활약을 실제 본 장년, 노인세대들 중 후배들인 어린 국대 축구팬들에게 이를 전할 한국 사람이 정치적인 이유를 포함한 대한축구협회 수뇌부에서 차범근을 홀대하는 복잡한 문제로 인해 거의 없어서 구전조차도 전해지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

이 때문에 차범근의 선수 경력에 대해 그를 아는 해축빠, 전문가들과 한국 축구팬들과의 온도차가 극명한 것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신문선같은 핫바리를 제외하면 현 세대의 축구인들은 차범근을 저평가하는 태도에 "그게 무슨 헛소리냐?" 라면서 코웃음을 친다.
파일:external/66.media.tumblr.com/tumblr_obwg8hrBOy1sqk8veo8_r1_540.png

차범근의 서독 진출로 인해 불똥이 튄 쪽들은 다름 아닌 현대그룹과 한국축구계인데, 당시 현대그룹에서는 스타 선수들을 끌어 모아 축구단을 만들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한국축구계는 이를 계기로 프로축구를 출범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스타 선수의 정점이 바로 차범근이었던 것. 그러나 차범근이 서독으로 가면서 현대는 축구단 창단을 포기했고 프로축구 출범도 연기되고 말았다.

참고로 다름슈타트의 제안이 차범근의 해외 진출 첫 제안은 아니다. 1977년 캐나다 밴쿠버 화이트캡스 FC에서 제안이 온 적이 있는데, 당시 창단된 지 3년 밖에 안된 신생팀이었지만 1968년 대한민국 청소년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던 에크하르트 크라우춘(Eckhard Krautzun)[6]이 감독으로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메리트가 있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차범근은 군인 신분이기도 했거니와 해외 진출을 한다면 분데스리가로 진출하고 싶다는 생각이 확고해서 진행되지 않았다. #

차범근이 서독 진출을 처음 꿈꾸던 것은 우연히 TV에 나온 푸른 잔디 위에서 경기를 뛰는 프란츠 베켄바워의 모습을 봤을때라고 한다. 경기를 끝마치고도 멀끔한 베켄바워의 모습은 일종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당시 대한민국의 경우 잔디 구장은 커녕 국가대표 조차 시멘트 바닥이나 흙으로 된 경기장에서 연습을 하던 가난한 시절로, 경기를 끝마치고 흙먼지로 뒤덮이는 게 일쑤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축구에 대한 성취도나 성적마저 대한민국에 비해 월등히 높았던 세계 무대는 차범근에게 궁금증과 도전의 대상이었다.

2021년 6월 방영된 대화의 희열 시즌3에 출연 중 회고하기로 당시 한국 축구 선수들 모두 자신의 신발을 직접 수선해 신었다고 한다. 특히 스터드의 경우 워낙 저품질이라 경기를 할 때마다 닳기 일쑤였는데, 그때마다 못으로 스터드를 교체하였고 잘못 수선하면 못이 신발 안으로 파고들어 피가 나기도 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유희열은 수선을 잘하는 선수는 국대에 뽑혔겠다는 드립을 쳤는데, 그에 차범근은 너무나 담담하게 당시에 그걸(스터드 교체) 못하면 축구를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1.2. SV 다름슈타트 98

파일:차붐 다름슈타트2.png
파일:차붐 다름슈타트.png
78/79 시즌 분데스리가 데뷔전을 치르는 차범근
파일:SV 다름슈타트 98 로고(1971~2005).svg SV 다름슈타트 98 시절 기록
(1978.12.30)[7]

1978/79 시즌: 1경기(선발 1경기) 1도움
77분 교체 아웃
분데스리가: 1경기
파일:SV 다름슈타트 98 로고(1971~2005).svg 통산 1경기 1도움(분데스리가 1경기 1도움)
차범근은 군복무를 마치고 SV 다름슈타트 98에 입단하게 된다. 여기서 이후에 벌어질 군문제를 이야기하기 위해 70년대 병역 방침을 살펴봐야 하는데, 차범근이 입대할 당시 공군의 복무기간은 35개월이었다. 그러나 공군 측에서는 팀 전력의 강화를 위해서 제13대 공군참모총장이었던 주영복의 권한으로 육군의 복무기간과 같은 30개월이 되면 의가사 전역을 시켜주는 조건을 내세워 공군 축구단(성무)에 입단을 제의하였다.[8] 게다가 차범근은 대졸자이기 때문에 교련과목 이수로 인한 3개월 단축 혜택을 합치면, 공군에서 약속한 군 복무기간은 27개월이 된다. 이를 표로 정리하면 아래의 표와 같다. 이러한 이유로 차범근은 공군 축구단으로 입대하였으며, 제대 후 분데스리가 진출 계획을 세우게 된다.
35개월(공군 군 복무기간) - 5개월(공군과 육군의 군 복무기간 차이) - 3개월(교련과목 이수 혜택) = 27개월

1976년 10월에 입영하여 27개월 뒤인 1978년 12월에 전역했다고 판단하고 독일로 건너가 SV 다름슈타트 98와 계약하며 분데스리가에 입성한 최초의 한국인 선수가 되었다. 다름슈타트에서 차범근은 VfL 보훔을 상대로 77분을 뛰었고 3:1의 팀 승리에 기여하였다. 차범근은 이 경기에서 키커 평점 3점[9]을 받는 등 좋은 활약을 펼쳤고 앞으로의 활약이 기대되었으나...

한 경기를 출전한 상태에서 별안간 차범근의 병역 기간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차범근에게 5개월 면제라는 특별혜택을 준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5개월 의가사 면제를 제안했던 공군 측 인물은 사망한 뒤라 차범근은 공군 측과 얘기해봐야 별 소용도 없었고, 국방부와 대한체육회, 축구협회도 다른 건 다 들어줘도 병역 문제만큼은 특별대우를 해 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나중에 차범근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거짓말과 불공정함에 어이가 없어서 기자회견을 하려고 했었는데 옆에 공군 대령이 다가와서 인터뷰를 하지 못하도록 입막음을 했다고 한다. 또한, 북한과의 아시안 게임 경기를 위해 체육회 측에서 독일 진출에 제동을 거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아시안 게임에는 프로 선수가 출전할 수 없기도 했다. 운동선수에 대한 병역 특례는 당시에도 있었으나 기준이 엄격했다.[10]

결국 출국 11일 만에 귀국한 뒤 나머지 5개월의 복무 기간을 채워 1979년 5월 31일에 만기 전역했다. 이로 인해 SV 다름슈타트와의 계약은 파기되었으며, 설상가상 다름슈타트와의 가계약과 1경기 출전 경력으로 인해 차범근은 '프로 선수'로 분류되어 전역 전까지 국내에서 공식 경기 출전을 하지 못하게 된다.[11] 이때문에 차범근은 남은 5개월 복무 기간 동안 그저 개인 훈련만 했다고 한다.[12]# 일반적으로 기초군사훈련을 받거나 2군 무대 혹은 벤치를 지키며 공식 경기를 갖지 못하면 프로 선수들의 폼이 떨어지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차범근은 다행히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군 복무를 마저 채우고 전역 한 차범근은 1979년 6월 17일 연고대 OB 올스타전을 마치고 서독으로 향하고, 다행히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와 계약에 성공하며 분데스리가에 재입성하게 된다.

지금이나 당시의 시선으로 봐도 적지 않은 나이에 이뤄진 해외 진출이기 때문에 1년이라도 분데스리가에서 먼저 뛸 수 있었던 SV 다름슈타트 98 시절이 아쉽게 느껴진다. 특히 차범근은 최하위권 팀이었던 다름슈타트에 메어있을 생각이 아니라 독일 리그에 대한 적응기 겸 더 큰 팀에 가려는 발판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계약 자체를 6개월 단기 가계약으로 선을 긋고[13] 계약 중계를 담당했던 스위스 바두스 사와의 스폰서 계약[14] 역시 정식 입단전까지만 받기로 하는 등 서독 진출에 있어 전략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던 상황이라 군부대로의 복귀는 차범근 개인에게도 아픔이 컸다.

게다가 6개월 내에 더 큰 구단으로 이적하려는 차범근의 계획은 데뷔 전이었던 보훔전 이후 탄력을 받는 상황이었는데, 당장에 SV 다름슈타트 98에서는 보훔 팀과의 경기를 지역 방송을 통해 15분간 특집 방영하며 2년 정식 계약을 강력하게 어필했고 데뷔 전을 본 함부르크 SV를 비롯한 상위권 분데스리가 팀들이 접촉을 해오기도 했다.

참고로 차범근이 다름슈타트로 진출할 당시 국내의 반응이 참 가관인데, 입단 테스트라는 개념 자체가 낯선 시절이라 국가대표 선수가 입단 테스트를 보는 게 말이 되냐며 차범근이 자존심도 없고, 국가를 망신시킨다는 이야기부터 해외 이적을 당시 만연하던 광부나 간호사 파견처럼 외화를 벌러 떠나는 것과 동일시해서 돈 벌기 위해 국가를 등지고 독일로 떠난다느니 어린이들의 우상이 사라진다느니 하는 기사가 많다. 대한 축구 협회에서조차 아시안게임에 나가야 한다며 서독 진출을 반대했다. '한나라의 이름이 걸린 빅게임의 중요 포지션을 외국에서 뛰다 온 선수에게 바로 맡길 수 없고(????), 어느 정도 팀플레이의 연습 기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15] 그래서 입단 테스트를 받더라도 아시안 게임 끝나면 가서 받고, 만약 계약을 맺게 되면 계약서에 1년마다 방한 및 친선경기를 치르는 조항을 삽입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이런 게 정당화되던 시절이다.

한편 일련의 상황을 모르는 서독에서는 그저 답답하기만 했는데, 특히 군문제로 인해 국내로 복귀한 차범근이 도통 돌아올 기미가 안 보이자 광적인 축구팬이었던 독일 하원 부의장인 헤르만 슈미트 보켄하우젠 의원이 차범근을 서독으로 빨리 보내달라는 서한을 한국 국방부와 문교부[16]에 보내기까지 했다. #

다름슈타트는 그 해 2부로 강등되었고 1980년에 차범근의 고등학교 2년 선배인 김진국을 영입하였으며, 2018년 1월에는 FC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지동원을 임대 영입하기도 했다. 이듬해인 2019년 여름 이적시장에서 백승호를 영입하는 데 성공해 한국인 선수와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1.3.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파일:cha 아인트라흐트 시절.jpg
파일:차범근 프랑크푸르트 UEFA컵 우승 세레모니.jpg
79/80 시즌 UEFA컵 우승 트로피를 드는 차범근
파일:컬러복원.jpg
80/81 시즌 DFB-포칼 우승 트로피를 드는 차범근
파일:프랑크푸르트4.gif
81/82 시즌 분데스리가 14R SV 베르더 브레멘전 골[17]
파일:ezgif-2-d58a0e26c5b1.gif
82/83 시즌 분데스리가 11R 1. FC 쾰른전 골[18]
아인트라흐트가 춤춘다, 차-차 차!
차범근 활약 당시 독일 빌트 차이퉁(Bild Zeitung) 기사 제목
파일: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로고(1977~1999).svg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시절 기록[참고1][참고2]
(1979.08.11~1983.06.04)[21]

1979/80 시즌: 46경기(선발 46경기) 15골 19도움
풀타임 45경기(UEFA 1경기 교체 아웃)
대회 경기 득점 도움
분데스리가 31 12 11
DFB-포칼 4 - 5
UEFA컵 11 3 3
합계 46 15 19
Kicker 분데스리가 평점: 2.45
(1점 5회, 2점 10회, 3점 13회, 4점 3회)
Kicker 랑리스테 전반기: 2.12
(WK 월드클래스/외국인 선수 1위)
Kicker 랑리스테 후반기: 2.86
(IK 인터내셔널클래스/외국인 선수 5위)

Kicker 분데스리가 주간 MVP: 1회 (14 라운드) #
Kicker 분데스리가 주간 베스트 11: 8회 (1,3,5,11,14,16,20,21 라운드) # # # # # # # #
79/80 시즌 Kicker 분데스리가 올해의 팀(BEST 11) #
팀 성적: 분데스리가 9위, DFB포칼 16강, UEFA컵 우승(구단 역사 최초)

1980/81 시즌: 38경기(선발 38경기) 16골 10도움
풀타임 34경기(리그 3경기/UEFA 1경기 교체 아웃)
대회 경기 득점 도움
분데스리가 27 8 8
DFB-포칼 6 6 2
UEFA컵 5 2 -
합계 38 16 10
Kicker 분데스리가 평점: 2.85
(1점 2회, 2점 8회, 3점 8회, 4점 8회)
※ 3라운드 부상 전반 16분 교체로 평점 X
Kicker 랑리스테 전반기: 2.55
(K 리그 내 경쟁력 있는/외국인 선수 4위)
Kicker 랑리스테 후반기: 3.07
(K 리그 내 경쟁력 있는/외국인 선수 7위)

Kicker 분데스리가 주간 MVP: 1회 (10 라운드) #
Kicker 분데스리가 주간 베스트 11: 4회 (2,10,18,21 라운드) # # # #
팀 성적: 분데스리가 5위, DFB-포칼 우승, UEFA컵 16강

1981/82 시즌: 38경기(선발 38경기) 12골 7도움[22]
풀타임 35경기(리그 3경기 교체 아웃)
대회 경기 득점 도움
분데스리가 31 11 6[23]
DFB-포칼 1 - -
UEFA컵 위너스컵 6 1 1
합계 38 12 7
Kicker 분데스리가 평점: 2.87
(1점 1회, 2점 10회, 3점 13회, 4점 6회, 5점 1회)
Kicker 랑리스테 전반기: 2.87
(K 리그 내 경쟁력 있는/외국인 선수 7위)
Kicker 랑리스테 후반기: 2.88
(K 리그 내 경쟁력 있는/외국인 선수 6위)

Kicker 분데스리가 주간 베스트 11: 1회 (26 라운드) #
팀 성적: 분데스리가 8위, DFB포칼 64강, UEFA 위너스컵 8강

1982/83 시즌: 34경기(선발 34경기) 15골 10도움[24]
풀타임 32경기(리그 2경기 교체 아웃)
대회 경기 득점 도움
분데스리가 33 15 10[25]
DFB-포칼 1 - -
합계 34 15 10
Kicker 분데스리가 평점: 2.52
(1점 5회, 2점 9회, 3점 16회, 4점 3회)
Kicker 랑리스테 전반기: 2.38
(IK 인터내셔널클래스/외국인 선수 2위)
Kicker 랑리스테 후반기: 2.65
(K 리그 내 경쟁력 있는/외국인 선수 2위)

Kicker 분데스리가 주간 MVP: 3회 (9,25,27 라운드) # # #
Kicker 분데스리가 주간 베스트 11: 6회 (2,9,11,13,25,27 라운드) # # # # # #
팀 성적: 분데스리가 10위, DFB포칼 64강
파일: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로고(1977~1999).svg 통산 156경기 58골 46도움(분데스리가 122경기 46골[26][27] 35도움[28]/DFB포칼 12경기 6골 7도움/UEFA컵 22경기 6골 4도움)
파일:20210802_003839.png
79/80 시즌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시절 차범근
1979년 6월 22일 독일로 떠난 차범근은 7월 15일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팀 관계자들 앞에서 테스트를 받았다. 당시 A 팀과 B 팀으로 나누어 진행한 연습 경기에서 A 팀에 속한 차범근은 두 골을 어시스트하며 A 팀의 2:1 승리를 이끌고 이에 만족한 프랑크푸르트 관계자들은 바로 다음 날인 7월 16일 정식 계약을 맺는다.[29][30] 이는 구단 역사상 역대 열 번째 외국인 선수이자, 최초의 비유럽 및 동양인 선수 영입에 해당한다.[31]

프랑크푸르트에 합류 후 아홉 차례의 친선 경기에서 다섯 골을 넣으며 팀 적응을 마친 차범근은 1979년 8월 11일 15:30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의 분데스리가 1라운드 홈경기에 선발 출전하며 구단 데뷔 전을 치렀다. 풀타임을 소화한 차범근은 경기 자체는 아쉽게 0:1로 패배했지만 무득점임에도 경기를 뛴 선수 중 최고 평점인 2점을 받을 정도로 맹활약하였고, 분데스리가 1라운드 베스트 11에 선정된다.

차범근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데뷔 시즌은 놀라운 수준인데, 병역 문제로 공군에 돌아간 뒤 만기 제대까지 5개월간 경기 자체를 뛰지 못한 상태로 만 26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분데스리가에 진출했음에도 데뷔 시즌에 랑리스테 월드클래스 등급[32]과 시즌 평점 공격수 부문 3위를 기록하고[33] 구단 최초의 UEFA컵 우승[34][35] 까지 이뤄냈을 뿐 아니라, 라운드 베스트 11(Elf des Tages)[36]에 8회 선정되며 키커 분데스리가 올해의 팀(Elf der Saison)에 선정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분데스리가 12골을 기록하며[37] 팀 내 득점 1위를 기록한 차범근은 구단 역사상 데뷔 시즌 팀 내 득점 1위를 기록한 역대 세 번째 선수이자, 데뷔 시즌에 10골 이상을 넣은 아홉 번째 선수가 되었다.
파일:1980년 독일올해의축구선수 득표수.png 파일:800107 키커.png
1980년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 득표수 1980년 1월 7일 Kicker 메인 표지[38]
아시아 선수 최초로 독일 스포츠 기자 협회(VDS)와 키커지가 주관하는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 명단에 포함되기도 하였다.[39] 명단에 오른 외국인 선수는 차범근을 포함해 단둘뿐이었는데, 다른 한 명은 78, 79년 발롱도르 수상자였던 케빈 키건이다. 결과적으로 총 5표를 받아 12위에 올랐는데 당시 서독이 UEFA 유로 1980 우승을 차지한지 두 달이 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독일 선수들 사이에 동양인 선수가 유효표를 받아 명단에 들었다는 점은 그만큼 차범근의 활약이 대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파일:external/image.chosun.com/2013031201881_0.jpg
파일:푸스발 관련 기사.png
79/80 시즌 슈포르트 빌트 분데스리가 올해의 베스트 11 1980년 푸스발 보헤(fußball-woche) 관련 기사
또한 당시 서독에서 Kicker와 축구 전문지 양대 축을 이루던 푸스발 보헤(fußball-woche)에서[40] 선정하는 베스트 11에도 선정되었다. 차범근은 푸스발 보헤 소속 스포츠 전문 기자들이 자체적으로 부여한 평가 점수 60점을 받으며 프랑크푸르트 선수들 중에는 1위, 전체 선수 2위에 올랐는데 푸스발은 1979년 스타플레이어로 차범근을 뽑으며 이례적으로 성탄 메시지를 한글 자필 그대로 싣기도 했다.

여기에 유력 일간지였던 빌트가 선정하는 79/80 시즌 분데스리가 베스트 11에 선정되었다. 빌트의 경우 본지인 빌트 자이퉁(Bild Zeitung)과 자매지인 슈포르트 빌트(Sport Bild) 모두 차범근에 대한 초반 평가가 유일하게 안 좋았던 스포츠 매체였는데 점차 평가가 좋아지더니 최종적으로 빌트 자이퉁에서는 79/80 시즌 선수 랭킹 3위, 슈포르트 빌트에서는 분데스리가 베스트 11에 선정하였다.[41] 여담이지만 1979년 발행부수 500만 돌파를 기념하는 행사에 프랑크푸르트시의 스포츠 선수로는 유일하게 차범근을 초대하기도 했다. 당시 함부르크에 본사를 두고 있던 빌트가 굳이[42]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선수를 초청했다는 점은 당시 차범근의 인기를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80/81 시즌의 경우 첫 경기에서 무득점임에도 평점 2점을 받았고, 두 번째 경기에 멀티골을 넣으며 평점 1점을 기록하는 등 데뷔 시즌의 활약을 이어가는 듯 보였지만 선수 생명에 위협이 될 정도의 큰 부상을 연이어 당해 그 여파가 꽤 큰 시즌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DFB-포칼 우승을 이끌었는데, 당시 두 차례의 멀티골을 포함해 6경기 6골을 기록하며[43][44] 포칼 득점 순위 상위에 랭크되는 등 맹활약했고 리그와 UEFA컵을 포함해 시즌 16골로 오히려 데뷔 시즌보다 더 많은 골을 넣으며 차붐의 건재함을 알렸다.

81/82 시즌 역시 분데스리가 11골을 넣어[45] 팀 내 득점 1위를 기록한 차범근은 82/83 시즌 자신의 프랑크푸르트 시절 리그 최다 득점인 15골을 기록하는데 이는 팀의 리그 득점 31.25%에 해당했으며[46][47] 팀 내 최다 득점은 물론 구단 역사상 한 시즌 분데스리가 역대 득점 7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다. 이에 힘입어 82/83 시즌 라운드 베스트 11(Elf des Tages) 6회에 선정되어 전체 선수 순위 상위에 랭크되었을 뿐 아니라 라운드 최우수선수[48](Spieler des Tages)에도 전체 선수 1위에 해당하는 3회 선정되었다. 랑리스테 역시 전반기 랑리스테 IK(인터내셔널 클래스)를 시작으로 전후반기 통틀어 전체 외국인 순위 2위, 분데스리가 시즌 평점 공격수 부문 3위를 기록하는 등 데뷔 시즌 못지않은 평가를 받았다. 이렇듯 차범근은 매 시즌 10골 이상을 넣었으며 멀티골만 12차례[49] 기록하는 등 팀 내 득점 순위 1위에 해당하는 득점력을 과시하며 팀의 주축 공격수로서 활약했다. 또한 단순 득점뿐만 아니라 경기 장악력과 기회 창출도 뛰어났기 때문에 시즌별 경기 평점도 상당히 높았다.
파일:차붐의 영입은 로또 당첨과 같다.png 파일:키커 차붐 기사.png
차범근의 영입을 로또 당첨에 비유한 당시 서독 신문 기사 79/80 시즌 전반기 차범근의 Kicker 랑리스테 평가 기사
차범근은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에서 네 시즌 동안 분데스리가에서 평점 2점대를 유지했고, 주간 MVP(Spieler des Tages) 5회, 주간 베스트 11(Elf des Tages)에 19회 선정되었으며, 모든 시즌 랑리스테 등급을 받았다.[50][51] 이와 같은 활약에 현지 언론에서 차범근의 영입을 로또 당첨에 비유하기도 했다.(괜히 네 시즌만 뛰고 구단 역대 베스트 11에 뽑힌 게 아니다.)

잠깐 랑리스테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자면 차범근의 WK(월드 클래스) 등급은 랑리스테의 평가 기준을 까다롭게 책정 중이 던 Kicker에서 예외를 둔 몇 안 되는 사례기도 하다. 80년대의 WK 등급에 선정되기 위해서는 리그에서 활약도 활약이지만 각 소속 국가대표에서 최소 IK(인터내셔널 클래스) 정도의 활약을 해야 했다. 당시 국가대표를 뛰지 않던 차범근은 이런 WK 등급 기준을 충족할 수 없었지만 키커지에서는 국가대표 활약과 상관없이 차범근의 분데스리가와 UEFA 컵에서의 활약만으로도 WK 등급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기 때문에 이번만큼은 예외를 뒀다는 코멘트를 남긴다. 후반기가 시작되고 차범근의 플레이를 분석한 각 구단에서 대비책을 내놓자 차범근은 전반기만큼의 퍼포먼스를 보여주지는 못했는데, 키커 역시 상대의 집요한 견제와 주변 동료들의 부족한 지원 속에 홀로 고군분투했지만 전반기만큼의 매서움을 보여주지 못했다며 IK(인터내셔널클래스) 등급을 매겼다. 다시 말하자면 평가가 떨어졌는데도 국제적 수준의 선수에게 부여하는 인터내셔널 등급을 받은 것이다. 79/80 시즌 차범근의 분데스리가 퍼포먼스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평가이다.
헨샤인트의 차범근 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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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mne auf Bum Kun Cha(1979)”

Schön ist, Mutter Natur, deiner Erfindung Pracht,
Die den großen Gedanken vermochte, den
Knaben zu träumen, zu denken - und dann auch zu
Bilden mit den schnellen, beseelten, jauchzenden
Füßen des Jünglings: Flink, flitzend,
Flirrend und flackernd - nicht lange fackelnd,
Doch feuernd und feiernd; den fühlenden Herzen
Frankfurts zur Freude.
Bum Kun Cha! Freund aus dem Osten! Fremdling bist
Du nicht länger - nicht bitt'res Los ist Exil
Dir! Heimat, die zweite, du fandst sie.

Wunderbar ist die Gunst denn des Gottes des
Fußballs. Zwar niemand weiß, wann und von wannen
Er schenket nach Puskas und Pele und Kempes den
Neuen Erwählten - nie doch und nimmer vergißt
Er sein hoffendes Volk. Über Indien hinaus
Und den Ganges spähet sein
forschender Blick, ins ferneste Land, da
Seit Alters Männermut blühet und hoher Sinn.
Tapf'res Korea! Du schenktest uns Cha!

Festlicher klinge mein Saitenspiel! Denn lang
Lieb ich dich, Cha, schon, drei Monde -
Drei Monde schon fällt dein verjüngendes
Licht auf die scheinbar gealterte Eintracht. Wir
Sahen dich erstmals, Lieblicher, gegen Stuttgart,
- und das Herz war bezaubert, verzaubert bald
Gar. Ach! Wie du da Förster, den Holzer,
Versetztest und Martin, den Rammler, so daß selbst
Sie dein Lob dann sangen - wie du dich
Schlängeltest durch die Abwehr - um endlich,
Endlich, kurz nach der Halbzeit, hoch in die
Lüfte dich reckend, die Flanke von Borchers
Nahmst mit der Stirn, der klugen, das
Leder versenktest im rechtesten Toreck - es war
Wie ein Herzkrampf, ein schöner, in Freude und
Ahnendem Jubel in eins.

Am Abendhimmel blühte ein Frühling auf, und
Sein Name war Cha. Die Eintracht aber, jahrlang
Von Klippe
Zu Klippe
Geworfen, glühte mit dir, o mein Trauter, zu
Neuschönem Glanze. Aus dem Schlaf des
Dornröschens erwachte die alte, die beinah
Vergeß'ne Primadonna sehr rasch. Vergessen das Alter
Grabowskis, vergessen der Streit mit dem Trainer.
O neues heilig' Herz der Mannschaft! Uns zur
Erhabenen Lust stürmst du, Schönster, so viel ich
Sah, seither, wie der Vogel des Waldes über die
Wipfel fliegt, schwingst du, Zierer, leichter und
Mühlos und sonder Gewalt dem Tore dich zu, dem
Beschützten - Östling unter Deutschen,
Und ihnen dennoch verwandt in der Seele,
Nah auch in Tordrang und Technik und
Teilung des Raumes in all seiner
Tiefe . . .

Kenntnisreicher Künstler am schwarweißen Balle!
Der Mann aus Korea allein hat die Präzision deines
Abspiels. Trocken schlägst du die Pässe, den
Kurzpaß sowie auch den raumgreifenden Vetter, den
Steilpaß. Nicht fremd ist dir der
Fallrückzieher, wir sahen's. Du zeigtest, daß
Auch in Asia, dem fernen, bekannt ist der Trick
Mit dem kunstreichen Haken - doch mehr noch
Erstaunen den Gegner die nicht-orthodoxen, die
Tricks, die im Lande noch unbekannt. Freilich,
Nie ähneln sie je doch der Tücke des Panthers,
Nie schielet Verschlagenheit Asiens durch -

Fair play ist Bum Kun Chas Religion!

Ach, abermals weiden die Augen auf dir! Hurtig
Treibst du das Leder nach links, kühner umkurvst
Du den grätschenden Stopper, zaubernden Fußes
Entläßt du den Lib'ro in Scham. Leichthin,
Euphorion erinnernd, vergleichbar auch durchaus
Der zarten Gazelle, dribbelst du torwärts und
Spannst doch den Fußnerv alljetzt schon zur Bombe -
Denn kaum hinkt die Macht deines Schusses der
Pracht nach Bernd Nickels, genannt "Dr. Hammer":
Dem du, so liest man, längst Brücken der
Freundschaft gebaut hast, auch menschlich . . .
Herzschöner Mann! Flutlichtumschwärmt auf den
Flügeln der Flanke, jetzt plötzlich der rechten,
Füllhorn der Technik, Fülle des Seins!
Samtschwarzen Seraphkopfs sehr schönen Scheins!
Seht nur den Doppelpaß jetzo mit Nachtweih und
"Holz"! Tripelpaß ewiger Klarheit!
Genius des Ostens! Sel'ges Korea!

Ein Flankengott jener Abramczik? Da lachen die
Gütter des alten Olymp! Sie lachen Schorsch
Volkerts und
Lächeln ob jenem, der, unrhythmisch seltsam,
Rummenigge sich nennt! Wer kennt Okudera? Cha
Aber - ob er nun "Cha Bum Kun" heißt, so wie die
"Frankfurter Rundschau" es will; oder doch
"Bum Kun Cha", wie die FAZ ihn besingt; oder
"Tscha Bum", wie "Bild" ihn begrüßte - dich,
Cha, kennt Deutschland, kennt Asien, die Welt so und so - -
Ew'ges Korea!

Im Winde klirret die Fahne zum Eckstoß. Gefahrstufe
Eins. Anläuft Cha Bum, herrlich die Flank' in die
Fluten der Zeit! Schon steht Cha Bum wieder nah
Dem Elfmeter, lauert des Zuspiels, hilft
Hinten aus. Schneisen schlägt er in Spielfeldmitte,
Schleusen öffnet sein schneller Fuß: Sammelnd der
Gegenwart hohes Vergang'nes, einend die Künste
Grabowskis mit denen des Pfaff, Kressens gedenkend
Und eingedenk Sztanis. Fußball berückend - und
Rührend selbst Toni, den treuedlen Zeugwart, der
Dir, Cha, im Air-Bus von Braunschweig nach
Frankfurt die Wange gar küßte; so stand's in der "Rundschau" . . .
Geh' unter, HSV! Trunken dämmerte die
Seele selbst dir (3 : 2)!

Ja, in den Ozean all deiner Tricks will ich mich
Stürzen, Bum, sturztrunken einfallen laut in die
Chöre des Jubels, Sohn einer fußballträumenden
Mutter. Anbeten will ich - gleich dir, der du
Betest vor Spielbeginn und auch während des
Kampfs "ständig vertieft bist im Gebet", wie
Wieder die "Rundschau" weiß. Anbeten will ich,
Singen dein Lob all mein Lebtag und
Endlich, wenn's gut geht, warte nur balde,
Berückt in Verzückung unendlicher Schöne vergeh'n - - -

Nur, Bum, daß du, folgt man einem Bericht in
der FAZ, nach deiner Aktiven-Laufbahn Deutsche
Predigend zu Gott bekehren willst, das, Bum,
Muß ja wohl nicht sein.

"차범근 찬가(1979) 에크하르트 헨샤이트
아름다워라, 어머니 자연이여, 당신의 피조물의 모습은,
원대한 뜻을 품게 하였으니,
소년을 꿈꾸고, 생각하고, 또한 만들어낼 수 있는,
그 젊은이의 빠르고, 혼이 깃든, 경쾌한
발을 지닌. 그가 민첩하게, 쏜살같이,
윙윙대며, 멈칫하다, 이내 질주하니,
축포를 쏘고 축제를 벌이며, 프랑크푸르트 인들의
뜨거운 가슴에 환희의 불씨를 지폈노라.
차 범 근! 동방에서 온 친구! 당신은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노라. 귀화도 당신에겐 쓰라린
운명이 아니노라! 고향을 당신은 찾았으니, 제 2의 고향을.

축구 신의 은총은 놀라워라.
아무도 몰랐노라, 언제 그리고 어디서
그가 푸스카스와 펠레와 겜페스 후임으로
선택받은 자를 새로 보내줄지. 하지만 신은 학수고대하는
자신의 백성을 잊지 않고, 인도와
갠지스 강을 건너 아주 먼 나라로
탐색의 눈초리를 번뜩였노라. 그곳에는
오래전부터 남자들의 기상과 고상한 기운이 꽃피우고 있으니.
용맹스런 코리아여! 당신은 우리에게 차를 보내주었노라!

나의 연주여, 더 멋지게 울려 퍼져다오! 오래전부터
나는 당신을 사랑하노니, 석 달 전,
벌써 석 달 전부터 당신의 청춘의 빛이
노쇠한 아인트라흐트에 비추고 있나니. 우리는,
사랑하는 이여, 슈트트가르트와의 시합에서 당신을 처음 보았노라.
심장은 무엔가 홀린 듯, 아니 마법에 걸린 듯.
아! 그 때 당신이 나무꾼 같은 푀르스터와
수토끼 같은 마르틴을 제치는 모습이란, 그들조차도
당신을 칭찬해마지 않았으니. 당신이
빗장수비를 뚫고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모습이란, 마침내,
마침내, 하프타임이 끝나자마자, 당신은 공중
높이 몸을 솟구쳐 보르헤르스의 크로스를
이마로, 영리한 이마로 받더니
골문 맨 오른쪽 구석에 넣었노라. 그 순간
심장에 경련이 일어난 듯, 아름다운 경련, 기쁨과
환호성으로 하나 되는.

저녁하늘에 봄꽃이 피었으니,
꽃의 이름은 바로 차. 아인트라흐트는 여러 해 동안
추락에
추락을
거듭하더니, 당신과 함께, 오 나의 사랑이여,
화려한 광채를 내뿜으며 다시 불타오르고 있노라. 잠자는
숲 속의 공주의 잠에서 거의 잊힌, 노쇠한
프리마돈나는 황급히 깨어났노라. 그라보브스키의
나이도 잊고, 트레이너와의 불화도 잊고.
오, 팀의 성스런 신형엔진이여! 그 때부터 당신은
우리에게 짜릿한 기쁨을 안겨주기 위해 돌진하나니,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이여, 숲의 새가 우듬지 위로
날아오르는 것처럼, 멋쟁이, 당신은 가볍고
날렵하게, 반칙 하나 범하지 않고 철통같은
골문을 향해 치닫노라. 동양인이지만
영혼은 독일인에 가깝고,
골문으로 돌진하는 힘이나 개인기,
빼어난 공간 파악 능력도 독일인과
비슷하나니...

흑백 공의 노련한 예술가여!
코리아에서 온 당신만이 패스가 날카롭도다.
당신은 서슴없이 패스를 날리니,
짧은 패스, 드루 패스, 크로스 할 것 없이.
우린 보았노라, 당신에게는 백패스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을. 당신은 보여주었노라,
머나 먼 아시아에도 노련한 페인트 모션이 있다는 것을.
더구나 비정통적인 트릭은 적수를 놀라게 하노라,
아직 국내에는 알려지지 않았으니. 물론,
그 트릭은 표범의 술수와는 다르니,
아시아의 교활은 절대로 노회하지 않도다.
페어플레이는 차범근의 종교로다!


아, 당신을 볼 때마다 눈은 즐겁구나! 당신은
잽싸게 왼쪽으로 공을 몰아, 두 발을 벌리며
가로막는 스토퍼를 과감하게 따돌리고, 마법의 발로
리베로를 무색하게 만드노라. 가볍게,
오위포리온을 연상시키고, 부드러운 영양과도
비교될 정도로, 당신은 골문을 향해 드리블하며
폭탄을 날리기 위해 발의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노라.
당신의 멋진 강슛은 일명 “해머 박사”라고 하는
베른트 니켈스 이후 거의 망설인 적이 없으니.
듣기에 당신은 그와도 우정의
다리를 놓았노라, 인간적으로도....
마음이 아름다운 이여! 측면 양 날개에서 야간조명등의
집중세례를 받으며, 지금은 갑자기 오른쪽에서,
개인기의 달인이여, 풍요의 뿔 같은 존재여!
칠흑 같이 검어, 매우 아름다운 세라프 천사의 머리칼이여!
성스런 밤, 응원용 “목관악기”를 불며 당신의 더블패스를
보노라! 송곳 같은 드리플 패스도!
동방의 수호신이여! 지복한 코리아여!

크로스의 화신 저 아브람칙? 고대 올림포스의
신들이 비웃노라! 그들은 쇼르쉬 폴커르츠도
비웃노라,
그리고 이름이 이상야릇한
루메니게라는 자도 비웃노라! 누가 오쿠데라를 아는가?
그러나 차는, 그가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지에서처럼
“차 범 근”으로 불리든, 혹은 “파쯔”지에서처럼 “범 근 차”로 불리든, 혹은
“빌트”지에서처럼 “차 붐”으로 불리든, 당신
차는 독일은 알고, 아시아는 알고, 세계는 아노라,
어찌됐건.
영원한 코리아여!

바람에 코너킥 신호 깃발이 나부끼노라. 1급
위급상황. 차 붐이 달려오고, 절묘한 크로스가
시간의 물결을 타고 이어지노라! 차 붐은 이미
페널티킥 가까이에 서서, 후방을 지원하다가,
패스를 이어받노라. 이내 그는 미드필드에 숲길을 내고,
그의 빠른 발은 수문을 여노라. 현재는 사라진
과거의 영광을 모아서, 그라보브스키와
파프의 기술과 통일하고, 크레센도 연상시키고,
스츠타니스도 생각나게 하며. 공을 홀린 듯하니,
무뚝뚝한 골키퍼 토니조차도 감동하여,
브라운슈바이크에서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당신의 볼에 키스했노라. “룬트샤우”지엔
이렇게 실렸노라...
HSV 침몰! 당신조차 술 취한 듯 정신이
얼얼했도다(3:2)!


아, 나는 당신이 구사하는 개인기의 바다에
풍덩 빠지고 싶노라. 붐, 환희의 합창에 흠뻑 취해
큰 목소리로 함께 노래하고 싶노라, 축구를 꿈꾸는
어머니의 아들이여. 나도 기도하고 싶노라.
시합 전, 그리고 “룬트샤우” 지에 실린 것처럼,
시합 중에도 “언제나 깊이 기도에 잠겨있는”
당신처럼 기도하고 싶고,
내 일생 당신을 찬양하고 싶노라. 그리고
잘만 된다면, 끝내 기다리리라,
황홀한 순간에 무한히 아름다운 이가 퇴장하기를...


다만, 붐, 당신은, 파쯔에 실린 뉴스를 따르자면,
현역 생활을 마감하고 독일인들에게
설교하며 하나님에게 귀의하려 하나니, 붐,
아마 그럴 필요 없으리라.

출처: 에크하르트 헨샤이트: 『매력적인 농부』, 프랑크푸르트 1980.
(※ 시가 매우 길다. 펼침 주의)
1979년, 이와 같은 활약에 감명을 받은 독일의 작가 에크하르트 헨샤인트(eckhard henscheid)[52]가 차범근을 찬양하는 시를 쓰기도 했다. 국내에 '차붐, 자네를 오랫동안 사랑하리'라는 구절로 유명한 바로 그 시다. 헨샤인트의 글은 관찰을 통한 숭배 속에 풍자를 담는 것을 기조로 삼고 있는데, 이 시 역시 그 특징을 물씬 살려 엄청난 찬양이 담겨있다.[53]
파일:4-3-3..png 파일:80-81 시즌 4-4-2.png
차범근의 4-3-3 포메이션 위치 차범근의 4-4-2 포메이션 위치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시절 차범근은 최전방 공격수로 활약했는데 배치되는 위치에 구애받지 않고 좌우 중앙 할 것 없이 전방위적인 활동량을 보여주었다. 이 당시 분데스리가는 70년대 주요 전술로 여겨지던 4-3-3 전술과 새롭게 떠오른 4-4-2 전술이 혼재하던 시기로 점차 대부분의 구단들이 4-4-2를 기본 전술로 받아들이자 공격수에게 요구되는 조건도 달라지게 된다. 단순히 중앙에 머물러 득점을 노리는 전통적인 공격수보다 기동성을 이용한 활동 범위가 넓은 공격수를 선호하게 된 것인데 이에 따라 단순히 중앙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좌우 측면을 넘나들며 공격을 이끄는 새로운 스타일의 공격수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들의 전술적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그중 한 명이 바로 차범근이었다. 센터 포워드임에도 불구하고 좌우 중앙 할 것 없이 빠른 주력을 이용해 돌파하거나 미드필더 라인까지 내려와 공격의 흐름을 통제하고 활로를 모색하는 차범근의 플레이 스타일은 80년대 분데스리가에서 높게 평가되었고 당시로서는 드물게 수비 가담까지 적극 참여했던 만큼 경기장에서 득점 여부와 상관없이 돋보이는 존재감을 과시했다.

팀 공격진을 서포터 해주며 이타적인 플레이를 선보였던 차범근은[54] 현재로 따지면 세컨드 스트라이커로서 활약했다고 할 수 있는데, 79/80~82/83 시즌 동안 분데스리가 상위 5위권 팀들을 상대로 55경기 23골을 기록하는 등 강팀 약팀 할 것 없이 균일한 득점력을 선보이며 주력 득점원으로서의 역할도 훌륭히 소화해내었다.[55]

비슷한 스타일의 공격수 중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케빈 키건과 같이 한 차원 높은 수준의 선수보다 완성도나 유연함이 다소 떨어진다는 평가도 있지만 주어진 기회를 마무리하는 능력과 상대방 진영 전체를 활보하는 플레이를 통해 당대 분데스리가 공격수들과 비교했을 때 충분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여기에 탁월한 피지컬과[56] 강력한 슈팅 및 헤더 능력까지 겸비한 차범근은 당대 발롱도르 위너들과 꾸준히 비견되는 정상급 선수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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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80 시즌 분데스리가 세 경기 연속 득점 79/80 시즌 분데스리가 20-25 라운드 득점 기록
선수 시절을 넘어 평생을 불리게 될 '차붐'이란 애칭 역시 이 프랑크푸르트 선수 시절 지어졌다. 독일어로 '쾅!', 대포나 둔탁한 타격 음을 나타내는 'Bum'에서 착안된 호칭에 걸맞게 파워풀한 골을 넣었던 차범근은 데뷔 시즌부터 3라운드에서 5라운드까지 세 경기 연속 골을 넣거나 20,21라운드와 23,25라운드 연속 골을 넣는 등 매 시즌마다 골을 몰아치는 모습을 자주 보여줬다. 참고로 차범근은 구단 역사상 데뷔 시즌에 세 경기 연속골을 넣은 역대 다섯 번째 선수이기도 하다.

당시 득점랭킹 상위에 존재하는 공격수들 대부분이 무득점 경기에서 3점~4점의 평점을 받는 경우가 많은 것에 비해 차범근은 상대적으로 무득점 경기임에도 2점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프랑크푸르트 시절은 그 빈도가 유독 높았는데, 심지어 무득점임에도 1점을 받은 경기도 존재한다. 한마디로 골을 넣는 것만큼의 활약을 보여준다는 것인데 이로 인해 무득점이 이어져도 다른 공격수들에 비해 부진하다는 평가를 받는 경우가 덜 한 편이었다.[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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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80 시즌 분데스리가 공격수 부문 평점 순위 82/83 시즌 분데스리가 공격수 부문 평점 순위
이렇듯 차범근의 활약은 평점 면에서 더욱 도드라진다. 전 시즌 분데스리가 평점 2점대를 기록했는데 이렇게 네 시즌 동안 연이어 2점대를 기록한 공격수는 80년대를 통틀어도 손에 꼽힌다.[58] 그만큼 꾸준하고 지속적인 활약을 했다고 볼 수 있는데 네 시즌 평균 평점이 무려 2.6725점에 이르며 이는 해당 기간 동안 활약한 분데스리가 전체 공격수 중 2위에 해당한다.[59] 시즌 별로 따지더라도 공격수 부문 3-6-7-3위로 당대 공격수들 중 상위에 속하는 평점이다.[60]

각 시즌별 평점은 전체 분데스리가 선수 중 25-77-78-20위에 해당한다. 수치만 놓고 보면 생각보다 낮은 순위라 느껴지겠지만 당시 80년대 분데스리가의 평점은 공격수에게 굉장히 짠 편이어서 보통 10위 안쪽의 선수 대부분은 골키퍼나 수비수였고, 20위 안쪽 역시 수비수 혹은 미드필더 포지션의 선수가 차지했다.

80년대 통틀어 공격수로서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한 것이 루메니게가 오른 7위였을 정도로 공격수에게 상당히 박한 평점을 주었는데 차범근이 프랑크푸르트에서 뛰었던 4년간 평점 순위 20위 안에 들어간 공격수는 단 4명, 30위 안에 들어간 공격수로 쳐도 겨우 한 명이 추가된 5명에 불과하다. 차범근은 이 모든 그룹에 포함되며 특히 두 차례 이상 30위 안에 들어간 선수는 루메니게와 차범근 단둘뿐이다.

또한 분데스리가에서 1점과 2점을 받은 경기가 50회에 이르는데(1점 13회+2점 37회) 골을 기록해도 3~4점을 받는 경우가 있을 정도로[61] 7~80년대 분데스리가 공격수들에게 1점과 2점은 득점 유무를 떠나 경기 자체를 이끈 선수만이 받을 수 있는 점수였다. 다시 말하자면 차범근은 10경기를 뛰면 4경기는 이런 최상위 점수를 받은 것이다. 여기에 Good 정도에 해당하는 3점을 받은 경기 역시 50회나 되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차범근은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에서 뛴 122경기 중 82%에 해당하는 100경기에서 발군의 기량을 선보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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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80 시즌 분데스리가 전반기 공격수 평점 순위
참고로 랑리스테 WK-1로 대변되는 데뷔 시즌 전반기 종합 평점은 2.12로 전체 공격수 중 1위, 전체 외국인 선수 중 1위, 전체 선수 중 7위에 해당한다. 심지어 첫 5경기는 3연속 골과 함께 평균 평점 1.8(1점 1회 2점 4회)을 받았는데 데뷔 경기를 포함해 라운드 베스트 11(Elf des Tages)에 세 차례 선정되었다. 이목을 사로잡을 수밖에 없는 강렬한 등장이다.

동양인 선수가 이토록 적응기와 기복 없이 활약했다는 것도 대단하지만 가장 놀라운 점은 시즌마다 모든 출전 경기를 선발로 뛰었다는 점과 경기 대다수를 풀타임 소화했다는 점인데, 특히 데뷔 시즌은 무려 45경기 풀타임을 뛰었으며. 유일한 교체 경기인 UEFA컵 8강 2차전 역시 86분을 뛰고 교체되었다. 한창 손흥민의 혹사 논쟁 때 못지않은 수준으로 당시 차범근의 체력이나 신체능력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차범근 역시 혹사의 여파를 피해가진 못했고, 79년 8월 11일부터 80년 3월 1일까지 총 33경기(리그 23경기+포칼 4경기+UEFA 6경기)를 연속해서 선발 풀타임 출전을 하던 중 오른쪽 허벅지 근육에 문제가 생겨 치료를 받았다.# 이로 인해 24라운드 함부르크 전에 결장했는데, 25라운드 뮌헨글라드바흐 전에 바로 복귀하여 선발 풀타임 출전과 1골을 기록하며 팀의 5:2 승리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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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스위스 Edi Naegeli 토너먼트 대회 결승 관련 기사[62] 1981년 헤르타 BSC와의 친선 경기 관련 기사[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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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80 시즌 8-9라운드 프랑크푸르트 경기 일정
사실 비공식 경기까지 포함하면 해당 기간 동안 45경기를 연속 출전했고 79/80 시즌에만 80경기 이상을 뛰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80년대 유럽에서 축구란 스포츠는 가장 큰 오락거리다 보니 당시만 하더라도 온갖 친선 경기가 성행하던 시절이었고 리그 시작 전과 끝나고 뿐만 아니라 리그 중에도 친선 경기가 있을 정도였다. 일례로 1979/80 시즌 분데스리가 8라운드가 끝난 10월 6일 바로 다음 날인 10월 7일부터 14,17일까지 연이어 세 번의 친선 경기를 뛴 뒤에 10월 20일 분데스리가 9라운드 경기를 소화하는 식이다.

물론 매번 풀타임으로 출전하지는 않았고 선발 출전 후 교체되거나 교체 출전을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당시의 친선대회는 요즘처럼 2군을 운용하는 경기가 아닌 주전 선수 대부분이 뛰었기 때문에 경기의 피로도가 상당했다. 이런 상황이 가능했던 이유는 친선 경기가 구단에게 꽤나 쏠쏠한 수익을 안겨주었기 때문인데 당시 선수와 구단 간의 계약 관계가 구단에게 유리해 출전이 불가피한 것도 있었지만 수익의 50%를 떼어가는 독일의 세금정책 상 많은 선수들이 부가적인 수익을 위해 광고나 사인회를 적극적으로 참여하던 시대였고 이 친선경기 역시 그 일환이었기 때문에 프랑크푸르트뿐만 아니라 다른 팀의 주전 선수들 대부분이 친선 경기를 뛰었다. 이에 따라 친선경기임에도 대단한 규모의 관중이 모여들었는데, 프랑크푸르트만 해도 적게는 2,000여 명 많게는 40,000명이 넘는 관중들이 친선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찾아왔다. 특히 단순히 단판 경기가 아닌 각종 친선 토너먼트 대회도 진행되었기 때문에 독일 내 구단끼리의 대결뿐 아니라 타국 리그의 프로 팀과의 경기가 대회 규모로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차범근은 프랑크푸르트 시절 이런 친선 경기만 143경기를 뛰었고 101골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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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실내축구 대회 관련 기사 1982년 베를린에서 열린 실내축구 대회 관련 기사
여담으로 차범근이 독일에서 유명세를 떨친 건 팀에서의 활약도 활약이지만 실내축구 대회에서의 활약 덕도 꽤 있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겨울철 실내에서 따듯하게 축구를 즐길 수 있는 실내축구가 동계 스포츠로 큰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서독에서도 겨울 시즌 베를린과 프랑크푸르트에서 분데스리가 4개 팀이 참여하는 실내축구 경기 대회가 개최됐다.[64] 대회가 연고지에서 열리다 보니 차범근 역시 참가하게 되는데 여기서 2회 연속 팀 우승과 득점왕, 인기상을 휩쓸었고, 특히 81년 12월에 열린 대회에서 4경기 11골을 넣어 프랑스 왕복 여행권과 20,000 마르크(당시 600만 원 상당)의 상금을 받기도 했다.##[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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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벤츠를 타고 훈련장에 도착한 차범근[66] 1980년 프랑크푸르트 팬 사인회에 참여한 차범근[67]
이런 출중한 활약은 몸값으로 이어져 1년에 42만 마르크(당시 약 1억 3천만 원 상당)를 받았는데 80년대는 주급이 아닌 월급 형식으로 지급하였기 때문에 게임 수당을 포함, 한 달에 35,000 마르크(당시 약 1,100만 원 상당)를 받았다.[68] 이는 당시 분데스리가에서 3위에 해당하는 수준이며[69] 여기에 기본적으로 서독 축구 연맹이 들어주는 다리 보험금 15만 마르크(당시 약 5,000만 원)을 포함해 구단과 개인이 든 보험까지 차범근의 다리에 걸린 보험금은 10억 원이 넘어갔다. #

1979년 프랑크푸르트와의 첫 계약 당시 차범근은 연봉과 더불어 디첸바흐(Dietzenbach)에 위치한 20평 규모의 아파트와 79년형 벤츠 S 클래스 280 SEL를 제공받았는데 1980년 재계약을 하며 연봉이 오르자 구단에서 제공하던 아파트와 차량을 처분하고 프랑크푸르트 교외 지역인 바트필벨(Bad Vilbel)에 위치한 대저택[70]과 80년형 벤츠 S 클래스 450SEL 모델을 구입했다.[71] 특히 벤츠 450SEL은 당시 서독의 부유층들이 타고 다니는 차로 유명했기 때문에 차범근이 훈련장에 차를 타고 올 때마다 동료 선수들이 굉장히 부러워했다고 한다.[72]

또한 팬 사인회를 통해 부가적인 수입도 가져갔다. 당시 팬 사인회는 분데스리가 선수들의 주요한 수익원 중 하나로써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팀 내의 주요 선수 몇 명만 참여할 수 있었다. 팬 사인회의 참여로 받는 금액은 모든 선수가 동일했지만 횟수의 차이가 있었다. 차범근이 프랑크푸르트에서 활동하던 시기인 1979년~1983년 사이에 사인회에서 받는 금액은 보통 1회당 4,600 마르크에서 5,600 마르크, 당시 한화로 140~170만 원 선이었는데 이는 사인회에 참여하는 모든 선수가 동일하게 받는 금액이었다. 다만 선수의 인기에 따라 사인회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달랐는데 보통 구단에서 진행하는 사인회보다 백화점이나 기업이 주최하는 사인회에서 수익이 났고 이런 행사는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인기 있는 선수들이 좀 더 많은 사인회에 초청받을 수 있었다.

워낙 수요가 적다 보니 웬만한 선수들은 사인회 자체를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차범근 역시 많은 기회를 갖진 못했지만 프랑크푸르트 선수 중에는 베른트 횔첸바인, 브루노 페차이와 함께 팬 사인회에 참여하는 단골 선수 중 한 명이었고 보통 한 달에 2~4회 정도 참여하여 한 달에 최대 23,000 마르크, 당시 한화로 약 700만 원 정도의 수익을 얻었다.[73] 참고로 차범근은 당시 360여 명 가량의 분데스리가 선수들 중 12~18위 정도의 인기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74]

여담으로 이런 차범근의 사인회의 수익은 대한민국 스포츠계에 큰 충격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의 사인회는 일종의 서비스 차원의 개념이라 기업이든 구단이든 선수에게 사인회에 대한 금액을 지불하지 않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한국에서도 해외 취재팀의 인터뷰를 비롯한 각종 행사에 선수들이 일정 금액을 받기 시작하는 등 부가 수입에 대한 개념이 성립되기 시작했다. 다만 차범근이 받은 사인회 수익은 말 그대로 행사 차원에서 섭외비 명목으로 지급받은 것인데 이것이 분데스리가에서는 경기 후 팬들에게 사인해 줄 때 돈을 받는다는 식으로 와전되어 80년대 한국 프로 선수들 중 "앞으로 우리도 해외처럼 팬들에게 사인해 줄 때 돈을 받아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선수가 생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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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Bild Sport에 실린 차범근 부상 관련 기사 및 자필 편지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발트슈타디온에 설치된 한글 전광판
독일에서 활약이 시작되고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홈경기에서 차범근이 골을 넣으면 전광판에 한글로 '차범근'이라 쓰여 나갔다. # 분데스리가 전체 역사를 놓고 봐도 굉장히 이례적인 일인데, 당시 독일로 파견 온 광부와 간호사를 비롯해 현지 교민들이 경기장을 찾았다가 이를 보고 감격해서 우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75]

차범근은 데뷔 이후 상대팀에게 엄청난 견제를 받았고, 폭발적인 돌파로 경기장을 휘젓고 다니는 차범근을 막기 위해 거친 반칙을 가하는 경우가 많았다. 애초부터 유럽에서 거칠기로 유명한 분데스리가인데다 자존심에 금이 간 독일 선수들의 감정이 고스란히 담긴 태클로 인해 차범근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고 인터뷰했다.

대표적으로 두 번째 시즌인 80/81 시즌에 겔스도르프에 의한 부상을 들 수 있는데, 요추뼈가 부러지는 선수 생명에 위협을 받을 정도의 큰 부상을 당했다. 당시 분노한 프랑크푸르트 팬들이 겔스도르프에게 살해 위협을 가하기도 했고 구단에서도 고소를 준비하고 있었다. 미디어 매체에서도 이 사건을 크게 보도했는데 서독 헤센 방송국에서는 차범근의 부상을 특집으로 다룬 토크쇼를 방송했고 bild-sport 신문에서는 부상을 걱정하는 팬들에게 보내는 차범근의 자필 편지를 한글 그대로 1면에 실어 발간하기도 했다.

차범근은 이 상황에서 겔스도르프를 용서하겠다며 고소를 취하했는데 이 결정이 독일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켜 차범근의 평가가 더욱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76] 현재까지도 분데스리가 부상 관련 사례로 언급되기도 한다.#

차범근이 당한 부상이라고 하면 흔히 갤스도르프에 의한 부상만 언급되지만 사실 그에 못지않게 큰 부상을 한 번 더 당하게 되는데, 바로 한스 페터 브리겔에 의한 부상이었다. 한스 페터 브리겔은 당대 서독 최고의 수비수 중 한 명이었지만[77] 유독 차범근에게 약한 모습을 보인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차범근이 강한 면모를 보이던 팀 중 하나가 브리겔의 소속팀이던 1. FC 카이저슬라우테른이었다보니[78] 매번 경기를 하면 키커나 푸스발 등 당시 독일 유수의 축구 전문지에서 차범근을 막지 못한 브리겔 때문에 졌다든지 효과적으로 막지 못했다는 식의 기사를 냈고, 이에 자존심이 상했던 브리겔은 결국 겔스도르프의 부상에서 돌아온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차범근의 대퇴부를 들이받아 68분 만에 교체 아웃되게 만들었다.[79] 부상 수준은 갤스도르프 때의 부상이 더 컸지만 이 사건은 차범근의 부상으로 인해 분데스리가에 전반적으로 파울 완화 분위기가 형성된진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벌어진 일이다 보니 차범근 역시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고 분데스리가내에서도 상당한 파장을 몰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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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차범근 관련 키커 특집 기사
이런 상황 속에 구단을 비롯한 팀 동료 및 감독도 차범근의 컨디션 회복에 각별한 노력을 기하는데 1981년 11월 19일 발매된 키커에는 차범근을 위해 팀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나와있다.

키커는 81/82 시즌 분데스리가 14 라운드 SV 베르더 브레멘전에서 멀티골을 뽑아내며 팀의 9:2 승리[80]를 이끈 차범근의 활약을 집중 조명하며 특집 기사를 냈는데 타이틀 제목은 '발트[81]가 다시 붐을 일으키게 하다'였다. 키커에 따르면 당시 팀 동료였던 브루노 페차이[82]카를하인츠 쾨르벨[83]은 차범근의 연이은 부상을 걱정하며 감독에게 대처를 요구했고 이에 로타르 부크만 감독은 차범근에게 한동안 득점보다 어시스트 위주의 플레이를 하도록 지시했다고 하며 구단에서도 차범근의 전담 심리치료팀을 꾸려 한동안 경기가 끝날 때마다 케어를 하게끔 했다고 한다.

이와 함께 키커는 차범근을 가리켜 분데스리가에서 활약 중인 선수들 가운데 살인적인 태클로 연거푸 부상당한 선수라고 강조하며 스타플레이어에 대한 견제에 앞서 상대방을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

이런 거친 반칙에도 불구하고 차범근은 분데스리가 시절 경고 1번을 받을 정도로 페어플레이를 보였는데, 프랑크푸르트 시절에는 前 서독 대통령인 발터 셸이 수여하는 80년도 분데스리가 페어플레이상을 받았고,[84] 부상으로 상금 170만 원과 순은제 트로피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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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차범근 이적 관련 독일 기사 80년대 차범근 이적 관련 한국 기사
요즘 해외파 축구 선수들이 그렇듯, 차범근 역시 한 시즌이 끝날 때마다 이적 링크가 있었다. 보통 그 당시 분데스리가 상위권 팀과의 이적 이슈가 많았는데, 여기서 다소 황당한 점은 독일과 국내 언론의 시각적 차이가 너무 심했다는 것. 독일에서는 리그에서 상위 성적을 거두던 함부르크 SVFC 바이에른 뮌헨, 혹은 세리에 A 팀들과의 이적설을 보도하는 반면, 국내에서는 뜬금없이 홍콩 퍼스트 디비전의 사우스 차이나 AA나 슈퍼리그[85]대우 로얄즈를 주요 이적 팀으로 보도하였다. 물론 국내에서도 해외 구단의 이적을 언급하는 기사도 존재하지만 유럽 구단 자체의 인지도나 위상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듯한 기사 내용 역시 꽤나 존재한다. 한창 프랑크푸르트에서 활약할 때 그 활약에 힘입어 홍콩 리그로 이적을 추진하고 있다는 식으로,[86] 분데스리가와 홍콩 리그의 수준 차이를 파악하지 못하는 기사부터 국내 프로팀으로 복귀를 한다는 기사가 주를 이룬다.

이미 유명한 이야기지만 당시 특파원으로 파견된 기자들의 갑질로 차범근은 언론과의 인터뷰를 극히 꺼린 것도 한몫했다. 이를 고깝게 보던 기자들은 멋대로 사실 확인도 안된 기사를 쏟아냈는데, 대표적으로 위에서 언급한 겔스도르프와 브리겔에 당한 연이은 부상으로 출전을 못하던 80/81 시즌 상황을 마치 감독에게 배제당했다는 식으로 보도했고 심지어 부상 복귀 후에는 어린 선수들에게 포지션 경쟁에서 밀려 교체 출전 위주의 벤치 멤버로 전락했고,[87] 출전 경기마다 무명의 수비수들에게 공격이 막히며 홈 팬들에게 야유를 받고 있으며,[88] 분데스리가에서의 몸싸움 경쟁을 위해 근육량을 늘린 것을 진출했을 때보다 몸무게가 4kg 늘어 헤딩도 못한다, 안 뛰어도 수당을 받을 수 있어 게으름을 피운다 등 악의적으로 왜곡된 기사를 썼다. '차붐은 사라지는가'라는 제목은 덤. # (기레기 of 기레기)[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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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11월 25일 프랑스 풋볼 표지 80/81 시즌 프랑스 풋볼 차범근 관련 기사
몇몇 국내 언론사들의 말도 안 되는 곡해와는 달리 유럽에서의 차범근의 위상은 여전히 대단했는데 80/81 시즌 UEFA 컵 16강 1차전을 앞두고 발롱도르 주최사로 유명한 프랑스 최대 축구 전문지 '프랑스 풋볼'에서 차범근을 메인 표지 모델로 선정하기도 했다.

당시 UEFA 컵 16강 전에서 프랑스 팀인 FC 소쇼몽벨리아르AS 생테티엔이 각각 독일 팀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함부르크 SV와 맞붙게 되었는데 풋볼지에서 상대팀의 대표 에이스인 차범근호르스트 흐루베슈(차범근 뒤에 서있는 선수)를 표지 메인으로 선택한 것이다.

'우리(프랑스 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priez pour nous!)라는 풋볼지의 표지 타이틀이 인상적인데 프랑스 팀들과 맞붙는 상대가 하필 세계 1위 리그였던 분데스리가의 팀인데다 함부르크는 당시 78/79 시즌 분데스리가 우승, 79/80 시즌 준우승의 성적을 거두고 있던 분데스리가 최상위 팀이었고 프랑크푸르트는 UEFA 컵 디펜딩 챔피언이었기 때문에 프랑스 언론의 결과 예측은 회의적이었다.

무엇보다 프랑스 풋볼은 차범근의 존재를 경계했다. 풋볼지에 수록된 기사 내용을 살펴보면 당시 소쇼의 감독인 장 포베르그는 프랑크푸르트와의 UEFA 컵 16강 1차전을 앞두고 차범근을 '슈퍼 선수'(Super-joueur)라고 칭하며 '모든 팀들의 가장 큰 적이 될 것'이라는 평가를 했으며 풋볼지 역시 '경계 대상 1호'로 차범근을 꼽으며 그를 잘 막아야 승리할 수 있다는 코멘트를 적었다.

차범근에 대한 우려는 현실이 되어 UEFA 컵 16강 1차전은 프랑크푸르트가 4:2로 승리를 거두었는데 차범근은 골을 넣지는 못했지만 경기 이후 프랑스 언론에서 '날렵한 고양이 같은 선수', '활력이 넘치는 선수'라고 호평할 정도로 맹활약했다.# 경기 시작 전 프랑스 중계방송에서 몸을 푸는 차범근을 카메라에 담으며 가장 경계해야 할 선수 중 한 명으로 언급하기도 했는데, 그에 상응하듯 4-4-2 포메이션의 왼쪽 최전방 공격수로 출전한 차범근은 좌우 중앙 할 것 없이 말 그대로 상대 진영 전체를 휘젓고 다니며 끊임없이 소쇼를 괴롭혔다. 특히 하프라인 아래까지 내려가 수비 가담까지 하는 등 엄청난 활동량을 선보였으며 심지어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고 공중볼까지 경합하니 소쇼로서는 차범근 한 선수를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느낌이 컸다.[90]

다만 이러한 1차전 승리에도 불구하고 최종 결과는 예상외로 소쇼가 8강에 진출했다. 진출 가능성이 희박하던 소쇼는 2차전 홈경기에서 기적적으로 2:0 승리를 거두며 원정 다득점 원칙에 따라 8강 진출에 성공하였는데[91] 1차전 4:0 이후 선수들의 무질서로 인해 후반 막판 2실점을 한 것에 강한 질타를 했던 로타르 부흐만 프랑크푸르트 감독은 2차전 경기 이후 부주의와 오만에 따른 끔찍한 패배라고 말했고 프랑스 풋볼에서는 이러한 소쇼의 8강 진출을 기적이라 평하기도 했다. 프랑스 내에서도 이 경기의 임팩트가 컸는지 40년이 지난 2020년 프랑스 일간지 L'Est Republicain에서 해당 경기를 FC 소쇼 몽벨리아르의 유럽 클럽 대항전 역사상 최고의 승리로 꼽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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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83 시즌 차범근 분데스리가 100경기 관련 기사
82/83 시즌 10월 30일 1. FC 쾰른과의 분데스리가 11라운드 경기에서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소속으로 100번째 분데스리가 출전을 기록한다. 이는 구단 역사상 아시아 선수로서는 최초이자 외국인 선수로서는 세 번째에 해당한다. 이 경기에서 1골을 넣고 모든 득점에 관여하는 등 팀의 3:0 승리를 이끌며 자신의 구단 100회 출전을 자축한 차범근은 평점 1점과 함께 11라운드 베스트 11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독일 언론에서도 차붐의 분데스리가 100경기 출전을 앞다투어 기사를 썼는데 위에 있는 기사는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구단 신문으로 타이틀을 번역하면 '분데스리가 100경기 출전에서 최고의 경기를 펼친 차범근'이며 경기를 지배한 차범근의 활약상을 다루고 있다.

차범근은 프랑크푸르트 소속으로 뛴 분데스리가 100경기에서 37골을 기록했으며, 이는 당시 구단에서 100경기를 뛴 선수들 중 역대 4위에 해당하는 득점 기록이었다.[92]

사실 차범근 개인적인 분데스리가 100경기 출전은 이 전 경기인 10월 23일 헤르타 BSC와의 분데스리가 10라운드 경기였는데, 78/79 시즌 SV 다름슈타트 98 소속으로 치른 1경기가 있기 때문이다. 단 한경기 출전 후 군대로 복귀했기 때문인지 당시 서독 신문이나 국내 신문에서 차범근의 100회 출전을 위의 쾰른 전으로 착각한 기사들이 꽤 있다. 차범근은 본인의 분데스리가 100번째 경기에서도 팀 내 최고 평점인 2점을 받으며 맹활약했는데, 아쉽게도 팀은 0:1로 패배했다. 당시 차범근의 분데스리가 100경기를 취재 나간 프랑크 루셈 키커 편집장의 회고에 따르면[93] 헤르타 베를린의 골키퍼 그레고르 콰스텐의 '인생 경기'급 선방으로 경기는 아쉽게 패배했지만 차범근을 막을 수 있던 필드 플레이어는 없었다고 할 정도로 뛰어난 활약을 했다고 한다.#[94]

여기서 주목할 점은 바로 이 헤르타 베를린과의 경기가 레버쿠젠이 차범근을 영입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는 점이다. 바로 현장에 레버쿠젠의 칼문트 단장이 와있었기 때문인데, 베를린과의 경기에서 활약한 차범근의 모습을 보고 "골운이 없었을 뿐 혼자서 베를린을 헤집어 놨다"라는 평가와 함께 구단 간부들에게 차범근을 영입해야 하는 이유와 계약 추진 의사를 보고하기에 이른다. 프랑크 루셈 편집장의 얘기로는 레버쿠젠에서는 같은 해 8월 24일에 열린 분데스리가 2라운드의 경기 후 이미 차범근을 영입 대상에 올려두고 있었는데, 프랑크푸르트가 5:0 승리한 레버쿠젠과의 2라운드 경기에서 2골을 넣는 등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인 차범근을 보며 레버쿠젠 관계자들이 "대체 그라운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가"라는 평을 남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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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80 시즌 UEFA컵 64강 2차전 퍼거슨 인터뷰
1979년 9월 19일과 10월 3일, 퍼거슨이 이끌던 애버딘 FC와의 UEFA컵 64강전에서 차범근은 1차전 1골, 2차전 1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맹활약했는데, 2차전이 끝난 후[95]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96] 막을 수 없는 존재였다며 차붐을 극찬했다.[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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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분데스리가를 함께한 오쿠데라와 차범근
당시 독일에 진출했던 일본 선수 오쿠데라 야스히코는 차범근의 포스에 눌려서 많이 가려졌다.[98] 특히 79/80 시즌만 하더라도 차범근과 오쿠데라를 비교하며 누가 연봉이 높은지, 활약도는 어떤지 등 국내 언론에서 부담스러운 비교 기사를 남발하였는데 79년 11월 24일 14라운드에서 두 사람의 첫 대결이 펼쳐졌고, 이 경기에서 차범근이 2골을 넣으며[99] 팀의 3:0 승리를 이끌자 이후 두 사람의 라이벌 기믹이 눈 녹듯 사라졌다. 오쿠데라가 분데스리가에 있는지조차 의문이 들 정도로 관심이 사라졌는데, 한 시즌이지만 2부 리그 팀에서 뛸 때조차 그 비교 좋아하는 국내 언론에서 기사 하나가 없었다. 애초에 분데스리가 진출 이전부터 차범근이 오쿠데라보다 한수 위라는 식의 평가를 내리던 국내 언론 입장에선 기대를 모은 첫 대결에서 차범근은 평점 1점과 함께 14라운드 베스트 11과 MVP를 차지한 반면[100] 오쿠데라는 팀 내 최저 평점인 4점을 받자 라이벌 기믹을 계속 유지하기에는 무리라 판단한듯하다. 이런 언론의 유난과는 달리 분데스리가의 몇 안 되는 동양인 선수들이다 보니 서로 경기에서 만나면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였다고 한다.

오쿠데라와는 별개로 프랑크푸르트 시절 차범근1. FC 쾰른에게 천적과도 같은 존재였는데 본인이 출전한 쾰른과의 여섯 차례의 경기에서 4골을 기록하고 팀 전적 4승 2무를 이끌며 단 한차례의 패배도 허용하지 않았다.

쾰른의 구단 신문에서도 이런 차범근을 '프랑크푸르트 최고의 선수'라고(der starksten frankfurter spieler) 지칭했으며 # 이 강력하고 거슬리는 존재를 막아야만 승리할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특히 차범근이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한 두 번의 경기에서는[101] 프랑크푸르트를 이길 절호의 기회가 왔다며 승리를 촉구하기도 했는데 실제로 이 두 번의 경기에서 프랑크푸르트는 0:5, 0:2로 무득점 패배하였다.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시절 서독 신문 기사를 찾아보면 차범근과 함께 자주 언급되는 선수가 있는데 바로 팀 동료인 미드필더 베른트 니켈이다.[102] 수비의 브루노 페차이, 공격의 차범근과 함께 프랑크푸르트를 이끈 선수 중 한 명인데 특히 차범근과 콤비를 이루며 서독 내에서 이 둘을 '꿈의 파트너'라고 불렸다고 한다. 니켈 스스로도 차범근과의 합이 만족스러웠는지 당시 키커와의 인터뷰에서 "차범근과 나의 콤비 플레이는 몸이 움직이는 축구에 국한되는 게 아니다. 텔레파시처럼 정신적으로 알 수 없는 연결고리가 있는 것 같다"라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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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근과 프리델 라우쉬 감독 차범근과 로타르 부흐만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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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무트 제네코비치 감독 베른트 니켈, 브란코 제베츠 감독, 차범근
차범근은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에서 네 시즌 동안 4명의 감독을 겪었다. 이는 당시 프랑크푸르트의 내부 상황이 썩 좋지 못했던 것에 기인하는데, 감독의 성적 부진도 있었지만 선수와 감독 간의 불화나 경영진의 방만한 운영에 희생된 감독도 있을 정도로 대외적으로 감독 이탈률이 가장 높은 구단으로 악명이 높았다.[103]

차범근을 영입한 프리델 라우쉬(Friedel Rausch) 감독 역시 78/79 시즌 감독이었던 오토 크네플러(Otto Knefler)가 뜬금없이 교통사고를 당해 시즌 중 조기 사퇴한 상황에서 급히 부임했었던 상황이었다. 독일 출신인 라우쉬 감독은 어수선한 팀을 추스르며 분데스리가 5위에 안착시키고 UEFA 컵 진출을 이끌며 팬들에게 큰 사랑을 받던 감독이었지만 다음 시즌인 79/80 시즌을 맞아 점진적인 세대교체를 주장하며 당시 팀 주장이자 구단의 레전드 선수였던 위르겐 그라보브스키에게 은퇴를 권고하여 구단 선수진들과 불화를 야기했다.[104] 원클럽맨인데다 분데스리가에서도 손꼽히는 공격 자원이던 선수를 대우하지 않았다는 불만이 가득하던 상황에서 때마침 대체자처럼 등장한 차범근은 억울하게도 팀 동료들에게 한동안 견제와 미움을 받기도 했다.[105] 하지만 그라보브스키는 차범근을 마음에 들어 해 직접 나서서 팀 동료들의 오해를 풀고 구단 생활에 적응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고, 1979년 10월에 진행된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팀 창단 80주년 기념 파티에 차범근과 함께 단둘만 초대되기도 하는 등[106] 여전히 구단의 주요 선수로 남아 있었다. 이렇게 선수들과 감독 간의 마찰은 있었지만 곧 다시 화합한 프랑크푸르트는 UEFA 컵 우승이라는 큰 영예를 안았는데 결국 라우쉬 감독은 이 시즌을 끝으로 페네르바흐체 SK로 감독직을 옮겼고, 갈등의 원인이었던 그라보브스키는 시즌 말미에 로타어 마테우스에 의해 큰 부상을 당하며 은퇴를 하게 된다. 차범근은 라우쉬 감독과 함께했던 1시즌 동안 46경기 15골을 기록했다.

이후 독일 출신 로타르 부흐만(Lothar Buchmann) 감독이 부임하여 80/81부터 81/82 시즌까지 지휘하게 된다. 하필 새로운 감독의 부임 첫 시즌에 선수 생명에 영향을 끼칠만한 큰 부상을 당해 경쟁에서 밀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었지만 부흐만 감독은 78/79 시즌 당시 차범근을 SV 다름슈타트 98로 영입한 감독으로 여전히 꾸준한 신뢰를 보내고 있었고, 군문제로 한 경기만 보냈던 지난날을 보상받듯 함께 DFB-포칼 우승을 일궈내었고 자신의 생일에 집에 차범근의 가족을 초대하는 등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하지만 리그 5위와 DFB 포칼 우승을 일구며 성공적인 시즌을 보내던 부흐만 감독은 경영진의 미비한 투자와 성적 압박에 갈등을 빚다 사퇴한다. 차범근은 부흐만 감독과 함께했던 2시즌 동안 77경기 28골을 기록했다.

차범근의 프랑크푸르트에서의 마지막 시즌이었던 82/83 시즌 역시 감독의 교체는 계속되었는데 새로 부임한 오스트리아 출신의 헬무트 제네코비치(Helmut Senekowitsch) 감독은 구단의 역대 4번째 외국인 감독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초반 5경기에서 1승 4패를 거두며 조기 경질되었고[107]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브란코 제베츠(Branko Zebec)가 감독으로 부임한다. 제베츠의 경우 지금까지 차범근이 만난 감독 중 가장 인지도가 높은 감독이었는데, 애초에 제베츠 본인부터 유고슬라비아의 전설적인 선수였을 뿐 아니라 감독으로서는 GNK 디나모 자그레브를 이끌고 인터-시티 페어스컵을 우승시키며 동유럽 클럽 최초의 국제 타이틀을 따냈으며[108] FC 바이에른 뮌헨을 이끌고 분데스리가 우승과 DFB 포칼 우승을 이뤘으며[109] 함부르크 SV로 부임한 후도 분데스리가 우승과 유러피언컵 준우승을 이끈 분데스리가의 대표적인 명장 중 하나였다. 다만 제베츠 감독 역시 말년으로 갈수록 음주 문제를 비롯해 사생활적으로 문제가 많았던 감독인데다 강압적인 훈련 방식을 선호하다 보니 구단 및 선수들과 불화와 성적 부진으로 한 시즌만에 경질되며 프랑크푸르트의 불명예스러운 감독 교체 역사에 한 페이지를 작성하고 만다. 차범근은 제베츠 감독과 함께했던 1시즌 동안 27경기 12골을 기록했다.

참고로 게르트 뮐러베켄바워, 케빈 키건, 호르스트 흐루베슈같은 역대급 선수들을 지도해왔던 제베츠의 눈에도 차범근의 기량이 무척 만족스러웠는지 굉장한 애정을 보였다. 특히 공격적인 성향의 전술을 구사하던 만큼 그 핵심으로 차범근을 두었는데 이로 인해 시즌 말미 함부르크가 차범근에게 강력한 러브콜을 보내자 다음 시즌에 반드시 필요한 선수라며 결사반대를 하기도 했으며 결국 구단의 재정 악화로 레버쿠젠으로 이적을 하자 잘못된 경영으로 귀중한 선수를 잃었다며 구단 경영진을 비난하기도 했다.[11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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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2월 17일 Kicker 메인 표지 1983년 7월 21일 Kicker 메인 표지
1980년대 분데스리가에는 큰 재정적 위기가 찾아왔고 많은 대형 선수들이 해외로 이적하기에 이른다. 프랑크푸르트 역시 이런 재정적 위기를 피해 가지 못하고 차범근을 비롯한 주력 선수들을 매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특히 차범근의 이적은 당시 분데스리가에서도 상당한 이목이 집중되던 사안이었다. 독일의 대표적인 축구 전문지였던 키커에서도 '차범근이 없는 프랑크푸르트는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타이틀을 내걸며 차범근의 이적에 따른 프랑크푸르트의 전력 손실과 그로 인한 영향에 대해 다루는 특집 기사를 쓰기도 했으며 '숨바꼭질하는 차범근, 모두를 안달 나게 하다'라는 타이틀과 함께 당시 분데스리가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차범근에게 오퍼를 넣었던 함부르크 SV, FC 바이에른 뮌헨, 1. FC 뉘른베르크, 바이어 04 레버쿠젠, VfB 슈투트가르트를 비롯하여 세리에 ASSC 나폴리, AC 밀란,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등 각 구단들의 조건들을 비교하며 뚜렷한 결정을 내리지 않고 있던 차범근의 이적 향방을 다루기도 했다.

기사에 따르면 이외에도 프랑스, 스페인, 스위스 등 다른 나라에서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는 내용과 함께 여러 구단 중 가장 파격적인 조건을 내건 팀은 AC 밀란으로 이탈리아 생활에 필요한 집과 차는 물론 자녀들의 학비를 지원해 줄 뿐 아니라 프랑크푸르트에서 받던 연봉을 그대로 유지하는 대신 국가에 내는 연봉의 세금을 구단에서 전액 부담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고 한다.[112]

차범근 역시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의 우승국이었던 이탈리아에서 뛰고 싶은 의중을 비췄다고 하는데 사실 차범근은 이 당시 부동산 사기로 인해 자금적인 문제가 크게 온 상황이었어서 당시 막대한 자본으로 세계 유수의 선수들을 모으던 이탈리아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상황인즉, 차범근은 1980년 재계약을 맺은 뒤 프랑크푸르트의 부회장이자 건축업자였던 볼프강 젠커( Wolfgang Zenker)에게 약 90만 마르크(당시 약 2억 7천만 원 상당) 금액으로 바트필벨(Bad Vilbel)에 위치한 저택을 매입했는데 알고 보니 원래 부동산 가격의 2배를 더 주고 매입한 것이었다. 이는 당시 차범근의 회계 담당이었던 홀게르 클레머(Holger Klemme)에 의해 밝혀졌는데 매입할 때 구입 금액의 50만 마르크를 융자 받아 매년 4만 5천 마르크의 이자를 내고 있던 차범근은 젠커 부회장에게 강하게 항의하며 이자 납부를 중지하게 된다. 하지만 법에 저촉되지 않게 미리 조치를 해놓았던 젠커 부회장은 오히려 이것을 꼬투리 잡아 법적 절차를 통해 차범근의 급료를 압류처분하는 적반하장식 태도를 보였다.[113] 부동산 사기의 피해자였던 차범근은 융자금을 낼 수도, 집을 팔수도 없는 와중에[114] 급료까지 압류당하는 상황에 처해버린 것인데 결국 해당 사안이 수면 위로 올라와 팬들을 비롯한 서독 사회의 맹렬한 비난을 받으며 젠커 부회장은 파면되었고 프랑크푸르트 이사회 자체가 와해되기에 이른다.[115]

이런 상황들과는 별개로 여전히 부동산을 처분해야 했던 차범근은 당면한 금전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풍족한 조건을 제시하던 이탈리아로 이적을 타진했는데 하필 이 시점에 법적인 문제가 있는 선수는 그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 해외로의 이적이 불가하도록 분데스리가 이적 관련 법이 바뀌어버려서 합의 직전까지 갔던 이탈리아 진출은 무산되고 분데스리가 내에서 이적 팀을 찾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다.[116]

부동산 사기를 비롯해 당면한 상황에 진절머리가 난 차범근은 때마침 슈퍼리그의 대우 축구단에서 적극적으로 오퍼가 들어와[117] 유럽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할지 고민했고 실제로 한국에 한동안 체류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좀 더 유럽 무대를 경험하고 싶다는 일념 하에 서독에 머물기로 한 차범근은 상황을 주시하며 기회를 엿보던 바이어 04 레버쿠젠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다.[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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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근 이적 관련 제베츠 감독 인터뷰 82/83시즌 27R 헤르타 BSC전 차범근 평가 기사
차범근의 이적과 관련해 제베츠 감독과 구단 신문 기자의 만담 비슷한 인터뷰 내용이 존재한다. 1983년 4월 9일 헤르타 BSC와의 82/83 시즌 분데스리가 27라운드 경기에서 차범근은 2골을 넣으며 평점 1점을 받고 라운드 베스트 11과 라운드 MVP에 선정되었는데 이 시기는 차범근이 프랑크푸르트를 떠나기로 마음먹고 대외적으로 이적 협상을 벌이던 때였다. 경기 직후 이에 관한 방안을 묻는 구단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제베츠 감독은 "우리는 차(Cha)가 (우리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지 알고 있지만 차(Cha) 없이 살 수 있는 법을 배워야 한다. 오늘 경기한 베를린도 차범근 없이 살고 있다.", "바이에른 뮌헨 역시 파울 브라이트너 없이 잘 살 수 있어야 한다."[119], "좋은 예가 있다. 슈투트가르트는 한시 뮐러[120] 없이 강력한 팀을 이뤄냈고,[121] 브레멘은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성공했다.[122] 현재 계획은 차범근의 연봉을 이용해 2명의 일류 공격수를 영입할 계획을 가지고 있고 이것을 최고 경영진과 상의할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재밌는 점은 기사에 적힌 감독의 인터뷰 내용마다 짤막하게 인터뷰 기자의 속마음이 쓰여있는데, 가장 압권은 '베를린도 차범근 없이 살고 있다'라는 멘트에 '네, 그래서 그들은 강등될 거예요...'(Schon, aber die werden wohl auch absteigen …)'라는 첨언이다.[123]

추가적으로 기사 내용을 살펴보면 헤르타 BSC의 게오르그 갈리첵(Georg Gawliczek) 감독이 "아인트라흐트가 차범근을 가지고 있는 것은 행운이라 생각한다. 우리에게 저런 선수가 있었다면 5,6점은 더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차범근은 절대적으로 월드클래스이다."라고 차범근을 극찬한 인터뷰가 실려있고 이에 대해 프랑크푸르트 구단 신문은 '차범근 혹은 그와 동등한 선수가 없다면 프랑크푸르트는 내년에 강등과 싸우게 될 것'이라는 걱정과[124] '분데스리가에는 대체할 수 없는 두 명의 선수가 있는데, FC 바이에른의 루메니게와 우리와 함께하고 있는 차범근이다. 그는 아직 가지 않았다.'라는 애틋한 일말의 희망, 그리고 '차범근의 절친한 동료인 카를하인츠 쾨르벨이 "차범근은 한번 '아니오'라고 하면, 그 결정을 고수하는 매우 강인한 성격이다."라고 말했다'라며 어떤 식으로든 차범근을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예감하는 듯한 기사가 쓰여있다.

1.4. 바이어 04 레버쿠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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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88 시즌 UEFA컵 우승 트로피를 드는 차범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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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87 시즌 분데스리가 6R 함부르크 SV전 골[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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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85 시즌 분데스리가 5R 묀헨글라트바흐전 골
“차범근을 영입함으로써 레버쿠젠을 상위로 끌어올리겠다”
데트마어 크라머[126], 83년 7월 차범근 영입 후 언론사 인터뷰
파일:바이어 04 레버쿠젠 로고(1984~1987).svg 바이어 04 레버쿠젠 시절 기록
(1983.08.13~1989.06.17)[127]

1983/84 시즌: 35경기(선발 35경기) 12골 8도움
풀타임 33경기(리그 2경기 교체 아웃)
대회 경기 득점 도움
분데스리가 34 12 8
DFB-포칼 1 - -
합계 35 12 8
Kicker 분데스리가 평점: 2.91
(1점 2회, 2점 11회, 3점 12회, 4점 6회, 5점 3회)
Kicker 랑리스테 전반기: 2.71
(K 리그 내 경쟁력 있는/외국인 선수 3위)
Kicker 랑리스테 후반기: 3.12
(K 리그 내 경쟁력 있는/외국인 선수 5위)

Kicker 분데스리가 주간 베스트11: 3회 (14,17,27 라운드) # # #
팀 성적: 분데스리가 7위, DFB포칼 64강

1984/85시즌: 32경기(선발 32경기) 14골 2도움
풀타임 27경기(리그 4경기/포칼 1경기 교체 아웃)
대회 경기 득점 도움
분데스리가 29 10 1
DFB-포칼 3 4 1
합계 32 14 2
Kicker 분데스리가 평점: 3.31
(1점 0회, 2점 8회, 3점 8회, 4점 9회, 5점 4회)
Kicker 랑리스테 전반기: 3.44
(B 눈여겨 볼만한)
Kicker 랑리스테 후반기: 3.15
(B 눈여겨 볼만한)

Kicker 분데스리가 주간 MVP: 1회 (21 라운드) #
Kicker 분데스리가 주간 베스트 11: 4회 (6,21,23,26 라운드) # # # #
팀 성적: 분데스리가 13위, DFB포칼 8강

1985/86 시즌: 38경기(선발 38경기) 19골 7도움
풀타임 33경기(리그 4경기/포칼 1경기 교체 아웃)
대회 경기 득점 도움
분데스리가 34 17 6
DFB-포칼 4 2 1
합계 38 19 7
Kicker 분데스리가 평점: 3.18
(1점 1회, 2점 9회, 3점 11회, 4점 9회, 5점 4회)
Kicker 랑리스테 전반기: 3.05
(IK 인터내셔널클래스/외국인 선수 2위)
Kicker 랑리스테 후반기: 3.33
(IK 인터내셔널클래스/외국인 선수 5위)

Kicker 분데스리가 주간 베스트 11: 6회 (6,13,15,18,20,31 라운드) # # # # # #
85/86 시즌 Kicker 분데스리가 올해의 팀(BEST 11) #
팀 성적: 분데스리가 6위, DFB포칼 8강

1986/87 시즌: 38경기(선발 38경기) 9골 15도움[128]
풀타임 33경기(리그 5경기 교체 아웃)
대회 경기 득점 도움
분데스리가 33 6 13[129]
DFB-포칼 2 1 1
UEFA컵 3 2 1
합계 38 9 15
Kicker 분데스리가 평점: 3.38
(1점 1회, 2점 4회, 3점 10회, 4점 16회, 5점 1회)
※ 30라운드 부상 전반 26분 교체로 평점 X
Kicker 랑리스테 전반기: 3.00
(등급 X)
Kicker 랑리스테 후반기: 3.75
(B 눈여겨 볼만한)

Kicker 분데스리가 주간 베스트 11: 2회 (7,9 라운드) # #
팀 성적: 분데스리가 6위, DFB포칼 32강, UEFA컵 32강

1987/88 시즌: 35경기(선발 34경기) 6골 12도움
풀타임 30경기(리그 1경기 교체 출전, 3경기 교체 아웃/UEFA컵 1경기 교체 아웃)
대회 경기 득점 도움
분데스리가 25(24) 4 9
DFB-포칼 - - -
UEFA컵 10 2 3
합계 35 6 12
Kicker 분데스리가 평점: 3.21
(1점 0회, 2점 6회, 3점 9회, 4점 7회, 5점 2회)
※ 3라운드 부상 전반 16분 교체로 평점 X
Kicker 랑리스테 전반기: 3.31
(B 눈여겨 볼만한)
Kicker 랑리스테 후반기: 3.09
(K 리그 내 경쟁력 있는/외국인 선수 12위)

Kicker 분데스리가 주간 베스트 11: 1회 (23 라운드) #
팀 성적: 분데스리가 8위, DFB포칼 64강, UEFA컵 우승(구단 역사 최초·유일)

1988/89 시즌: 37경기(선발 35경기) 3골 6도움
풀타임 32경기(리그 1경기 교체 출전, 5경기 교체 아웃/포칼 1경기 교체 출전)
대회 경기 득점 도움
분데스리가 30(29) 3 3
DFB-포칼 5(4) - 3
UEFA컵 2 - -
합계 37 3 6
Kicker 분데스리가 평점: 3.11
(1점 0회, 2점 6회, 3점 13회, 4점 9회)
※ 11라운드 후반 82분 교체 출장, 33라운드 부상 전반 30분 교체로 평점 X
Kicker 랑리스테 전반기: 3.14
(등급 X)
Kicker 랑리스테 후반기: 3.07
(K 리그 내 경쟁력 있는/수비형 미드필더 8위)

Kicker 분데스리가 주간 베스트 11: 1회 (28 라운드) #
팀 성적: 분데스리가 8위, DFB포칼 4강, UEFA컵 64강
파일:바이어 04 레버쿠젠 로고(1984~1987).svg 통산 215경기 63골 50도움(분데스리가 185경기 52골[130][131] 40도움[132]/DFB포칼 15경기 7골 6도움/UEFA컵 15경기 4골 4도움)
파일:20210802_003726.png
83/84 시즌 바이어 04 레버쿠젠 시절 차범근
프랑크푸르트의 재정악화와 부동산 문제로 인해 당시 고 연봉자였던 차범근은 83/84 시즌 레버쿠젠으로 이적하게 된다.[133] 바이엘 주식회사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던 바이어 04 레버쿠젠은 프랑크푸르트에 이적료 100만 마르크(당시 약 3억 2천만 원 상당)를 지급하였고[134] 차범근과 연봉 52만 마르크(당시 1억 5천6백만 원 상당)에 계약했는데, 이는 당시 레버쿠젠 구단 최고 연봉 및 분데스리가에서 6번째에 해당하는 수준이었으며, 구단 역사상 최초의 비유럽인 및 아시아 선수이자 세 번째 외국인 선수 영입에 해당한다.

구단의 기대에 걸맞게 차범근의 이적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이적 첫 시즌인 83/84 시즌 분데스리가 순위 10위 권이 목표이던 바이어 04 레버쿠젠은 전반기에만 8골을 넣으며 맹활약하는 차범근을 보며 부랴부랴 목표 순위를 조정하기도 했고, 선수 개인으로서는 리그 12골을 기록하며 구단 역사상 첫 시즌에 10골 이상을 넣은 역대 세 번째 선수가 되었다. 이후에도 84/85 시즌 DFB-포칼에서 3경기 4골을 기록하며 포칼 득점 랭킹 2위, 85/86시즌 분데스리가에서만 17골을 넣으며 리그 득점 순위 4위에 오르는 등 수위급 활약을 펼쳤다.

특히 85/86 시즌의 경우 선수 개인으로서 의미 있는 기록들을 수립한 시즌이었다. 우선 1985년 11월 9일 분데스리가 14라운드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전에서 개인 통산 분데스리가 200회 출전 기록을 세웠다. 후반 80분 리그 9호 골을 넣으며 팀의 극적인 2:2 무승부를 이끈 차범근은 이로써 분데스리가 200경기 77골을 기록하게 된다. 또한 분데스리가 진출 이후 본인의 역대 한 시즌 최다골인 시즌 38경기 19골(리그 34경기 17골)을 기록하였는데 당시 아시아 선수 유럽 4대 리그 최다골[135]이자 구단 역사상 한 시즌 분데스리가 최다골로써 현재까지도 역대 6번째 기록에 해당한다. 해당 시즌 라운드 베스트 11(Elf des Tages)도 6회 선정되었는데 이는 전체 선수 중 4위, 공격수 2위에 해당하는 횟수로 커리어 두 번째로 키커 분데스리가 올해의 팀에 선정되었으며 전후반기 랑리스테 IK(인터내셔널 클래스)를 받으며 최고의 시즌을 보내게 된다.
파일:Abendpost an starparade 1985-86.png
파일:1986년 독일올해의축구선수 득표수 cha.png
85/86 시즌 아벤트포스트 분데스리가 올해의 선수상 1986년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 득표수
오랜만에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 명단에 오르기도 하는데 단 한표에 그치며 22위에 올랐다. 명단에 오른 외국인 선수는 차범근을 포함해 총 다섯 명으로 팀 동료였던 안드레스 기스케(Anders Giske)(1표, 22위), 디에고 마라도나[136](2표, 17위), 장마리 파프(10표 12위), 쇠렌 레르비(Søren Lerby)(45표 5위)[137]였다. 프랑크푸르트 시절 후보에 들었던 그 해에 유로 80이라는 큰 대회가 있었던 것처럼 개인 최다 득점을 기록한 1986년 역시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가 끝난 지 한 달 밖에 안된 시점이라, 준우승을 차지한 서독 선수들을 비롯해 월드컵에서 활약한 선수들 사이에 낀 것이 대단하면서도 한편으론 활약이 상대적으로 저평가 받은 아쉬운 결과였다.

여기에 프랑크푸르트시의 최대 석간지 중 하나였던 아벤트포스트에서 선정하는 85/86 시즌 분데스리가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참고로 아벤트포스트는 독일 내에서 손꼽히는 신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국내에서 인식되는 것처럼 아류로 취급되는 신문은 아니었다.[138] 정치나 시사 관련 논조가 빈약해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진 않았지만 축구를 비롯한 스포츠 관련 기사의 경우 전문 기자들이 양질의 기사를 쓰다 보니 꽤 많은 축구팬들이 애독했다. 80년대 당시 서독 축구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던 축구 관련 매체는 단연 축구 전문 잡지였던 키커였고 스포츠 주간지 푸스발 보헤(fußball-woche)와 일간지 빌트[139]가 2순위였는데, 다소 격차는 있지만 이 뒤를 잇고 있던 스포츠 관련 언론지가 헤센주를 연고로 하는 오펜바흐지와 아벤트포스트였다.

차범근이 받은 아벤트포스트 분데스리가 올해의 선수상 역시 비록 정식으로 공인된 상은 아니었지만 소속 전문기자들이 해마다 매주 데이터를 조합해 점수를 매겨 연말에 선정하였던 상인만큼 당시 선수들에게는 자신의 활약을 인정받는 여러모로 의미가 있는 상이었다.[140] 수상자는 황금카드(goldene karte)라고 불리는 18K로 도금된 상패가 들어있는 액자를 받았다. 여담이지만 독일 eBay파울 브라이트너의 79/80 시즌 아벤트포스트 분데스리가 올해의 선수상을 2만 유로(약 2700만 원)에 판매한다는 글이 올라와 잠깐 이슈가 되기도 했다.[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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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88 시즌 UEFA컵 결승 2차전 RCD 에스파뇰전 골
차범근은 데뷔 시즌인 83/84 시즌부터 85/86 시즌까지 세 시즌 연속으로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하며[142] 매 시즌 하위권에 머물던 팀을 기어이 6위까지 끌어올렸을 뿐 아니라 구단 역사상 첫 유럽 대항전 출전권을 선사했다.[143] 86/87 시즌 레버쿠젠의 첫 UEFA 컵 대회에서 3경기 2골을 넣는 활약에도 불구하고 아쉽게 32강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FK 두클라 프라하에게 패배하며 고배를 마신 차범근은 87/88 시즌 연이어 진출한 UEFA 컵에서[144] 구단 역사상 최초이자 지금까지도 유일한 UEFA컵 우승에 지대한 공헌을 하며[145][146] 레버쿠젠에서의 활약에 방점을 찍었다.

1989년 4월 15일 1. FC 쾰른과의 분데스리가 26라운드 경기에서 분데스리가 역사상 최초로 비유럽 선수로서 리그 300경기를 치른 차범근은[147] 이후 여덟 경기를 더 뛰어 1989년 6월 17일 1. FC 카이저슬라우테른과의 분데스리가 34라운드에서 본인의 마지막 경기를 치르며 분데스리가 308경기라는 당시 아시아 및 비유럽 선수 최다 출전 기록[148]을 수립했고, 여기에 1989년 3월 11일 분데스리가 11라운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전에서 자신의 분데스리가 98번째 골을 넣으며 당시 분데스리가 역대 외국인 선수 통산 최다 골 기록과 분데스리가 역대 통산 득점 28위에 해당하는 기록을 수립하며 커리어 마지막 시즌을 영예롭게 마무리했다.
파일:레버쿠젠 라인업.png 파일:마지막 시즌 미드필더.png
차범근의 3-5-2 포메이션 위치 88/89 시즌 미드필더로 출전한 차범근
80년대 중반 독일 축구는 4-4-2 전술에서 두 명의 센터백 뒤에 리베로를 세우는 3-5-2 전술을 주요 전술로 채택하기 시작한다. 애초에 측면 플레이가 강했던 차범근은 특유의 플레이 스타일에 탄력을 받아 3-5-2 전술에 성공적으로 적응하였으며 피지컬도 한층 더 발전하여 이전보다 볼 경합 및 몸싸움 능력이 강해졌음은 물론 노련미까지 더해져 공격수로서 이전보다 더욱 파괴력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이와 별개로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차범근의 강인한 신체 능력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라 할 수 있다.

또한 현대에 각광받는 컴플리트 포워드를 연상케 할 만큼 다양한 역할을 하며 팀을 보조하였는데 특히 구단에서의 존재감은 프랑크푸르트 시절보다 더욱 공고해졌다. 이는 차범근이 온전히 공격수로 활약했던 83/84 시즌부터 85/86 시즌까지의 레버쿠젠 리그 득점 비중을 살펴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이 기간 동안 레버쿠젠의 리그 득점에서 차범근이 넣은 골의 비중은 각 시즌마다 24%, 19.23%, 26.98%에 이르는데 해당 세 시즌 동안 구단에서 기록한 리그 득점의 23.63%에 해당하는 골을 넣었다. 당시 절정의 기량을 보이던 루디 푈러가 같은 기간에 SV 베르더 브레멘 득점의 20.88%를 기록했던 것을 보면 차범근의 레버쿠젠에서의 존재감은 절대적인 수준이었다고 할 수 있다.[149]

분데스리가 8년 차에 접어든 86/87 시즌부터는 단순히 최전방 공격수 뿐 아니라 윙 포워드를 비롯해 미드필더를 겸하며 멀티플레이어로서 활약하기 시작했다. 물론 한 시즌 개인 최다 골을 넣은 85/86 시즌에 이미 만 33세의 나이었던 만큼[150] 어쩔 수 없는 노쇠화로 인해 레버쿠젠의 여섯 시즌 중 세 시즌은 공격수보다 미드필더로 출전하는 횟수가 이전에 비해 더 많아졌고 마지막 시즌에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출전하기도 하였지만 이런 포지션 변화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주전으로 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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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15일 레버쿠젠 구단 신문 메인 표지 1988년 5월 19일 Kicker 메인 표지
여기서 인상적인 점은 선수 생활의 황혼기에 접어든 차범근이 바이어 04 레버쿠젠의 라인업에서 배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보통 에이징 커브가 온 선수들은 서서히 라인업에서 제외되거나 방출되는 경우가 허다함에도 불구하고 레베쿠젠은 30대 중후반의 공격수를 제외는커녕 다른 포지션으로 활용하며 주전으로 기용했다.

특히 레버쿠젠은 분데스리가에서 드물게 기업의 재정 지원을 받는 구단으로 80년대 재정위기가 찾아온 분데스리가 내에서도 충분한 자금력을 갖추고 있었던 몇 안 되는 팀이었다. 심지어 당시 분데스리가는 경기당 출전 가능한 외국인 선수를 두 명으로 제한하는 외국인 쿼터제를 운영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팀 전력의 중요한 요소인 외국인 용병 자리는 조금만 부진하면 다른 외국인 선수에게 자리를 빼앗기는 치열한 경쟁이 동반되는 자리였다. 그럼에도 대체자 영입 없이 외국인 용병 자리를 할애하며 끊임없이 기용한 것을 보면 레버쿠젠에서의 입지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으며 한편으로는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 가능했던 차범근의 축구 능력을 확인할 수 있다.

차범근 역시 이런 믿음에 부응하며 젊은 선수들을 이끄는 팀의 리더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는데 당시 구단주였던 라이너 칼문트(Reiner Calmund)는 '외국인이었지만 젊은 독일 선수들에게 그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던 특별한 존재'였다고 회고했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87/88년 레버쿠젠이 들어 올린 UEFA 컵은 차범근과 레버쿠젠 간의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낸 성공적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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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근의 레버쿠젠 시절 교체 출전 기록
다만 차범근 개인으로서는 분데스리가 진출 11년 동안 단 두 번뿐인(컵 대회 포함 세 번) 교체 출전을 겪기도 하고 평점 면에서는 프랑크푸르트 시절보다 4,5점 빈도가 잦는 등 부침이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애초에 분데스리가 생활 내내 한국 언론으로부터 노장 소리를 듣던 차범근은 시즌이 끝날 때마다 국내 복귀를 예상하는 기사가 절정으로 쏟아지던 시기이기도 한데, 1983년을 기점으로 한국에도 프로 축구가 생겨나면서 유난히 외지인 취급을 받기도 했다. 국내 기사 역시 차범근의 활약상보다 국내 축구 선수들과의 기량 비교를 하는 내용에 초점이 맞춰져있었고 이 때문에 오히려 프랑크푸르트 시절보다 활약상에 대한 자료를 찾기 어렵다. 2000년대 초반까지도 그랬지만 80년대 당시는 지금보다 훨씬 애국주의가 만연하던 시절이다 보니 국가 차원에서 자국 중심의 발전과 홍보에 주력했고 '제2의 차붐' 혹은 해외에 진출할 새로운 국내 선수들을 띄우기 위해 차범근은 좋은 매개체였다. 따라서 레버쿠젠과의 계약 당시 축구 협회를 통해 차범근에게 '반드시' 국내 프로팀 혹은 국가대표와 매해 친선 경기를 하는 조항을 넣어 계약하기를 '명령'하기도 했다. 특히 레버쿠젠과 화랑(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옛 명칭)과의 경기가 있을 때면 아예 외국인 취급을 받기도 했는데 화랑이 이기기라도 하면 '화랑의 통쾌한 승리', '차범근을 누른 국가대표 OOO'라는 식의 신문 타이틀이 쏟아지기도 했다. 또한 매 시즌이 끝날 때마다 차범근은 국내에 들어오면 반강제적으로 슈퍼리그 경기를 관람했는데 그때마다 기자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독일에 비해 어느 정도 수준인지 평가를 물었고 이와 함께 언제 국내에 복귀해 한국 프로 축구 발전에 이바지할 거냐는 질문을 해댔다.

무엇보다 오랜만에 진출한 86년 월드컵 본선과 88올림픽에 모든 관심이 쏠렸던 만큼 이와 같은 상황이 계속 유지되었는데 86 멕시코 월드컵 대표팀에 합류한 차범근은 대표팀의 월드컵 대비 유럽 전지훈련에 활용(?) 되기도 하였다. 당시 축구 협회에서 친선경기를 제안한 유럽 7개 국에 모두 거절당한 상황이었는데 차범근과 크라머 前 레버쿠젠 감독의 도움으로 유럽 클럽들과의 친선 경기를 주선해 43일간의 유럽 전지훈련을 치른다.[151]

차범근의 영입과 함께 성적이나 스쿼드의 격이 이전에 비해 올라가긴 했지만 구단 자체의 평가는 그다지 좋지 않았는데, 지금이야 레버쿠젠이 분데스리가에서 우승 경쟁도 하는 강호이지만 그 당시에는 차범근이 기틀을 닦아줬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하위권 팀이었다.[152] 당시 레버쿠젠의 위상을 알 수 있는 일례가 있는데, 87/88 시즌 UEFA컵 FC 바르셀로나와의 8강전 바르셀로나 홈구장에서는 경기 포스터가 A4용지에 간단히 붙어있을 정도로 레버쿠젠을 가벼운 상대로 보았고 레버쿠젠의 홈경기에선 레버쿠젠 홈구장 규모가 작다는 이유로 FC 쾰른의 홈구장을 빌려 경기를 진행하는 굴욕을 당했다.#[153][154] 차범근 개인적으로도 당시 팀의 위상에 아쉬움이 있었던 모양인데, 2020년 포포투에서 진행한 인터뷰에 따르면 바이어 04 레버쿠젠 입단 후 2~3년간 본인 스스로도 만족할 정도로 활약을 했음에도 프랑크푸르트 시절에 비해 이상하리 만큼 평점도 낮고 라운드 베스트에 드는 횟수가 적었다고 말하며 구단이 프레스 즉, 기자들에게 영향력이 약해서 그랬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범근바이어 04 레버쿠젠에서 여섯 시즌 동안 분데스리가 시즌 평점 2점대 한 번과 3점대 초반을 꾸준히 유지했고, 주간 BEST 11(Elf des Tages)에 17회, 주간 MVP(Spieler des Tages) 1회에 선정되는 등 전반적으로 준수한 평가를 받았다.

차범근이 레버쿠젠에서 활약한 여섯 시즌의[155] 평균 평점은 3.183점에 이르는데, 이는 같은 기간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한 공격수 중 3위에 해당하며[156] 시즌 별 공격수 부문 평점 순위의 경우 6-9-5-13-5-1위를 기록했다.[157]

차범근의 시즌 별 평점은 당시 분데스리가 신인상과 득점왕,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상까지 휩쓴 위르겐 클린스만과 비견되는 수치로 정확히 따지자면 87/88 시즌을 제외하고 활동이 겹치는 모든 시즌에서 차범근의 평점이 조금 더 우위에 있다. 특히 레버쿠젠에서 뛴 분데스리가 185경기 중 1점과 2점을 받은 경기가 48회, 3점을 받은 경기까지 포함하면 111회로 60%에 해당하는 경기에서 최소 평균 이상의 활약을 보여 팀 에이스로서 활약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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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84 시즌 분데스리가 네 경기 연속 득점 85/86 시즌 분데스리가 6-15 라운드 득점 기록
또한 프랑크푸르트 시절부터 보여준 몰아치는 득점이 레버쿠젠에서도 이어졌다. 레버쿠젠에서의 첫 시즌인 83/84 시즌부터 2,3라운드 단 두 경기 동안 3골을 몰아치더니 14라운드부터 17라운드까지 4경기 연속 골을 넣었는데, 이 4경기 연속 골은 구단 역사상 데뷔 시즌에 4경기 연속골을 넣은 최초의 사례이자, 역대 두 번째 기록에 해당한다. 이뿐 아니라 개인 최다 골을 넣은 85/86 시즌에는 6라운드부터 15라운드까지 총 10골을 넣었으며 두 차례 3연속 골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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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함부르크 구단 신문 메인을 장식한 차범근.jpg
1985년 9월 18일 레버쿠젠 구단 신문 메인 표지 1986년 4월 18일 함부르크 구단 신문 메인 표지
차범근이 영입되고 난 후 바이어 04 레버쿠젠분데스리가 순위와 함께 눈에 띄게 거둔 성과는 바로 열세였던 구단들과의 상대 전적 변화이다.

포르투나 뒤셀도르프는 레버쿠젠이 79/80 시즌 분데스리가 승격 후 차범근이 영입되기 전인 82/83 시즌까지 상대 전적 1승 4무 4패, 분데스리가 이전의 전적 역시 4승 4무 10패를 거두며 절대적인 열세를 보인 팀이었는데[158] 차범근이 합류한 뒤 83/84 시즌부터 88/89 시즌까지 5승 1무 3패를 거두며 여섯 시즌 기준 처음으로 상대 전적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차범근은 뒤셀도르프를 상대로 9경기 6골을 넣으며 강한 면모를 보여주었는데 이는 당시 두 팀 간의 경기에서 한 선수가 기록한 누적 득점 1위에 해당했다.[159] 또한 바이어 04 레버쿠젠 소속으로 출전한 분데스리가 100번째 경기 상대가 뒤셀도르프일 정도로 묘한 인연을 보이기도 했다. 86/87 시즌 1986년 8월 23일 3라운드에서 뒤셀도르프를 상대로 구단 소속 100번째 경기를 치른 차범근은 1골을 넣고 평점 2점을 받으며 맹활약하였고 팀의 5:0 승리를 이끌었다.

이 경기를 통해 차범근은 각기 다른 두 팀에서 분데스리가 100경기 출전 기록을 이룬 최초의 아시아 선수이자 비유럽 선수가 되었다.[160] 여기에 레버쿠젠 소속으로 분데스리가 100경기를 뛴 최초의 아시아 선수와 역대 두 번째 외국인 선수[161]에도 이름을 올렸으며 100경기 동안 40골을 기록하여 당시 레버쿠젠에서 100경기를 뛴 역대 선수들 중 최다 골 기록을 수립하기도 했다.[162]

뒤셀도르프 외에도 당시 유난히 레버쿠젠에게 강세를 보였던 함부르크 SV[163]VfB 슈투트가르트[164] 같은 강팀들에게도 상대 전적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함부르크를 상대로 79/80~82/83 시즌까지 1승 1무 6패를 거두었던 레버쿠젠은 83/84~88/89 시즌 동안 11경기에서 6골을 넣으며 맹활약한 차범근을 앞세워 5승 2무 4패로 근소 우위의 상대 전적을 거두었다. 특히 차범근이 기록한 6골은 당시 두 팀 간의 경기에서 한 선수가 기록한 역대 최다골 기록에 해당했다.[165] 이와 같은 활약 때문에 1985년 10월 8일 함부르크 SV 구단 신문에서는 레버쿠젠과의 분데스리가 3라운드 경기를 앞두고 '레버쿠젠의 차범근을 다시 만난다'라는 문구와 함께 차범근을 메인 표지 모델로 세우기도 했으며 대비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166]

슈투트가르트의 경우 79/80~82/83 시즌 동안 2무 6패로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는데 차범근 합류 후 2승 5무 2패로 팽팽한 균형을 이루어내었고 프랑크푸르트 시절부터 슈투트가르트에 강세를 보였던 차범근은 9경기에서 2골과 함께 평균 3점대의 평점을 기록하며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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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89 시즌 푸스발데어강 연수 시절 차범근[167]
차범근은 레버쿠젠에서의 마지막 두 시즌 동안 쾰른 체육 대학에서 지도자 코스를 연수 받으며 뛰기도 했다. 분데스리가 진출 목적이 개인의 욕심도 있었지만 한국 축구 발전이라는 사명감이 있었던 만큼 제대로 된 축구 교육을 받아 귀국하길 원했고 구단 차원에서도 적극적으로 지원을 해주었다. 구단과 30분 거리에 있는 쾰른 체육 대학(Sporthochschule Köln)에서 지도자 연수를 시작한 차범근은 선수 생활을 하며 지도자 교육을 이수했던 만큼 교육 자체에 오롯이 매진할 수는 없었지만 착실히 교육 과정을 이수하여 87년 2급 자격증, 89년 1급 자격증을 취득한다. 이로써 차범근은 대한민국 축구계에서 유일한 정식 코치 라이선스를 획득한 축구인이 되었는데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 활동하는 감독이나 코치 중 정식 교육을 받거나 공인된 자격증을 가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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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근과 데트마어 크라머 감독 차범근과 에리히 리베크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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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누스 미헬스 감독 위르겐 겔스도르프 감독
차범근은 바이어 04 레버쿠젠에서 보낸 여섯 시즌 동안 네 명의 감독과 함께 했는데, 역시 모든 감독들에게 중용 받으며 구단의 핵심 선수로 활약했다. 팀의 인지도치고 전체적인 감독들의 이름값은 프랑크푸르트 시절보다 높았는데 83/84 시즌부터 84/85 시즌까지 두 시즌을 함께한 데트마어 크라머 감독의 경우 바이에른 뮌헨의 유러피언 컵 2연패와 인터컨티넨탈 컵 우승을 이뤘고 특히 '일본 축구의 아버지'라 불릴 정도로 일본 축구를 한 단계 끌어올린 업적이 있어 그만큼 동양 선수들에 대한 이해력이 높아 차범근을 잘 활용한 감독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다. 1984년 차범근을 영입하기 위해 총력을 다했던 대우 로얄즈의 이재명 단장에게 '차범근을 자신의 아들과 같이 사랑한다'라는 말과 함께 팀에게 꼭 필요한 선수라고 역설하며 대우 측의 영입 제안을 완곡히 거절하기도 했다. 또한 차범근과의 인연을 통해 이후 대한민국의 올림픽 감독 겸 고문을 맡기도 했다.[168] 차범근은 크라머 감독과 함께했던 2시즌 동안 67경기 26골을 기록했다.

이후 크라머가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고 에리히 리베크가 부임하는데, 85/86시즌부터 87/88 시즌까지 세 시즌을 함께한다. 차범근은 이 기간에 자신의 분데스리가 한 시즌 최다골은 물론 두 번째 UEFA 컵까지 들어 올리며 영예로운 시즌을 보내게 된다. 리베크 감독 역시 자신의 감독 커리어 중 가장 훌륭한 성적을 거둔 시기였기 때문에 차범근에 대한 애정이 대단했다. 특히 87/88 시즌 UEFA컵 결승전 이후 우승이 확정되자 차범근을 끌어안고 기쁨을 나누는 모습은 레버쿠젠 팬들에게 아직도 회자되는 장면 중 하나이다. 차범근은 리베크 감독과 함께했던 3시즌 동안 111경기 34골을 기록했다.[169]

UEFA컵 우승 이후 리베크 감독은 휴식이 필요하다며 사임하고 이후 바이에른 뮌헨 감독으로 부임하게 된다. 이 빈자리에 부임한 감독이 UEFA 선정 10대 감독 중 한 명인 리누스 미헬스이다. 요한 크루이프와 함께 토탈 풋볼을 완성시키며 AFC 아약스, FC 바르셀로나, 네덜란드 등의 전성기를 이끌며 세계적인 명장으로 대접받던 그에게 차범근 역시 큰 감명을 받았는데 단 한 시즌 지도를 받았지만 지금까지도 가장 존경하는 스승으로 미헬스를 꼽을 정도로 차범근 개인에게 영향을 많이 끼친 감독이었다. 미헬스 역시 마지막 시즌 쾰른 체육 대학에서 푸스발데어강(독일 축구 지도자 교육 코스)을 받던 차범근을 적극적으로 도와주기도 했다.[170]

88/89 시즌 후반기 미헬스 감독이 리그 9경기를 남겨 놓고 건강상을 이유로 급작스레 사임하고 당시 수석코치가 감독으로 부임하는데 바로 프랑크푸르트 시절 큰 부상을 안겼던 위르겐 겔스도르프이다. 차범근이 레버쿠젠으로 이적한 후 세 시즌을 함께 뛰기도 했는데 커리어 마지막 시즌엔 감독으로 만나게 되며 상대편 선수와 팀 동료, 감독으로 만나게 되는 묘한 인연이 되었다. 차범근과 선수 대 감독으로 함께한 건 불과 10경기에 불과했지만[171] 겔스도르프는 살해 위협까지 당하던 그를 용서해 준 차범근에게 항상 고마운 마음이 있었던 만큼 커리어 마무리를 잘 할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를 해주었다.

여담으로 바이어 04 레버쿠젠차범근은 유독 숫자 3으로 엮이는 부분이 많다. 이를테면

1.5. 총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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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라는 자존심과 독일에 파견된 간호사, 광부들의 아픔을 안고 전투를 치르듯 경기를 뛰었다. 사느냐 죽느냐의 싸움 속에, 정말 기계처럼 산 10년이었다.”
차범근, 축구 매거진 포포투+ 창간호 인터뷰 中
통산 372경기 121골 97도움[172] (분데스리가 308경기 98골 76도움[173]/DFB포칼 27경기 13골 13도움/UEFA컵 37경기 10골 8도움)
흔히 말하는 국뽕을 빼더라도 대한민국 축구 역사에서 국제적 위상을 가진 몇 안 되는 선수이다. 이른바 신계의 영역이나 80년대 최고의 선수까지는 아니었지만, 당대[174] 최고의 리그였던 분데스리가에서도 손꼽히는 외국인 선수이자 팀을 대표했던 간판 선수였으며, 심지어 한때는 월드 클래스라는 평가를 받은 적도 있는, 한국 축구와 분데스리가 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선수라는 것은 분명하다.

득점이 주력이 아닌 돌파와 연계 플레이를 바탕으로한 플레이메이킹을 주 역할로 한 세컨드 스트라이커였음에도 준수한 득점력을 갖춘 만능형 선수였다. 이에 더불어 왕성한 활동력까 갖췄기에 팀에 대한 기여도가 높아 팬들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선수였다.[175]

차범근의 현역 시절을 평가함에 앞서 우선적으로 인식해야 할 것은 현재와 최소 10년 이상의 간극이 있는 선수들의 기록이나 업적은 시대상을 적용하여 '당시'의 기준을 통해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록의 산물인 스포츠의 특성상 현재와 완전히 단절시킬 수는 없지만 과거의 세계기록이 지금에 와서는 평범한 수준의 기록으로 느껴지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무작정 현재의 기준을 적용하여 판단하여서는 안 된다. 물론 펠레나 마라도나와 같이 시대를 뛰어넘는 활약을 보인 선수도 존재하지만 어디까지나 극소수에 불과한 것으로 그들이 특별한 이유기도 하다.

차범근분데스리가 선수 생활 중 모두가 쉽게 간과하는 부분이 세 가지 있는데, 첫 번째는 바로 출전 기록이다.

차범근이 달성한 분데스리가 308경기의 출전 기록은 당시 역대 외국인 선수 2위,[176] 아시아 선수 1위[177]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하지만 여기에 가려져 있는 것이 선발 출전과 풀타임 경기 횟수이다. 차범근은 10년의 분데스리가 선수 생활 동안 총 372경기에서 369경기를 선발 출전했다. 교체로 출전한 것은 단 세 차례뿐으로(리그 2회와 컵대회 1회) 이마저도 커리어 말년에 이뤄졌다. 그뿐만 아니라 무려 335경기를 풀타임 출전했으며 교체된 경기가 34회에 지나지 않는다. 차범근의 팀에서의 입지와 엄청난 신체 능력이 돋보이는 기록이다.

심지어 이는 공식적인 경기만 따진 것이고 친선 경기를 감안한다면 경악스러운 스케줄을 소화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80년대 유럽에서 축구란 스포츠는 가장 큰 오락거리다 보니 당시만 하더라도 온갖 친선 경기가 성행하던 시절이었고 리그 시작 전과 끝나고 뿐만 아니라 리그 중에도 친선 경기가 있을 정도였다. 일례로 1979/80 시즌 분데스리가 8라운드가 끝난 10월 6일 바로 다음 날인 10월 7일부터 14,17일까지 연이어 세 번의 친선 경기를 뛴 뒤에 10월 20일 분데스리가 9라운드 경기를 소화하는 식이다. 게다가 요즘처럼 2군을 운용하는 친선경기가 아닌 주전 선수 대부분이 뛰었기 때문에 관중 수도 적게는 2천 명에서 많게는 4만 5천 명에 다다랐다.[178] 참고로 차범근은 프랑크푸르트에서 뛴 네 시즌 동안에만 143경기의 친선 경기를 치렀고 101골을 넣었다.[179][180]

두 번째는 등번호다. 차범근은 현역 시절 내내 백넘버 11번을 달았다. 언뜻 보면 뭐가 대단한가 싶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지금껏 아시아 출신으로 유럽 클럽에 진출해 처음부터 메인 등번호를 받고 그 번호를 커리어 내내 유지한 선수가 없다.[181] 특히 메인 번호의 경우 부진할 경우 한 클럽은 커녕 새 시즌이 시작될 때 다른 선수에게 번호를 뺏기는 경우도 있고, 다른 클럽으로 이적 시에도 큰 기대를 받지 않는 이상 당장 남아 있는 번호 중에 등번호를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군 문제로 단 한 경기에 그쳤던 78/79시즌 다름슈타트 98에서조차 차범근의 등번호는 11번이었다. 정확히는 '프로 데뷔' 이후 뛴 세 곳의 클럽에서 모두 11번을 단 것인데, 이 때문에 당대 분데스리가에서는 물론 현재까지도 차범근의 등번호를 연상하면 11번이 떠오른다. 아시아 선수가 유럽에서 뛰는 것 자체가 없다시피하던 시절, 동양인 선수가 유럽 첫 진출부터 메인 등번호 중 하나를 부여받아 10년 넘게 고정적으로 달았다는 건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지막 세 번째는 당시 함께 뛰며 경쟁한 선수들이다. 차범근이 뛰었던 1970~80년대는 그야말로 전설들의 시대였다. 차범근과 동시대에 경쟁한 분데스리가 선수만 해도 국내에 익숙한 프란츠 베켄바워, 클라우스 피셔,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파울 브라이트너, 위르겐 클린스만, 로타어 마테우스, 안드레아스 브레메, 루디 푈러현재 독일의 전설로 불리는 선수들이다. 이외에도 케빈 키건을 비롯해 국내에 익숙지는 않지만 커리어를 보면 역대에 손꼽히는 선수들이 즐비하였으며 차범근이 분데스리가에 입성하기 단 1년 전까지만 해도 게르트 뮐러가 뛰던 시기이기도 하다. 다른 리그에는 디에고 마라도나, 미셸 플라티니, 요한 크루이프, 게리 리네커, 케니 달글리시, 파올로 로시, 우고 산체스, 울리 슈틸리케, 루드 굴리트, 마르코 판바스턴, 프랑크 레이카르트 등등 수많은 유럽 축구 역사의 별들이 뛰었고 심지어 파넨카 킥의 창시자인 안토닌 파넨카도 이 당시 사람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렇게 전설적인 선수들과 경쟁을 했다'가 아닌 이미 이런 선수들의 플레이를 보며 지내던 유럽 사람들, 특히 당시 UEFA 리그 랭킹 1위에 있던 분데스리가 관중들에게 차범근의 플레이가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그것도 차붐이란 애칭까지 생기면서 말이다.

심지어 당시 분데스리가에서 한 팀이 경기에 기용할 수 있는 외국인 선수는 오로지 2명에 불과했다. 지금에야 EU(유럽연합) 소속 국적 선수들은 외국인으로 취급하지 않는다지만, 그 당시에는 독일인이 아닌 모든 선수들, 즉 브라질 아르헨티나 영국 스페인 이탈리아 같은 나라의 선수들도 모두 외국인으로 취급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팀당 2명에 불과한 외국인 용병 자리는, 조금만 부진하여도 라인업에서 제외되거나 다른 외국인으로 교체됐을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였다. 즉, 차범근은 팀당 단 2명만 경기에 기용할 수 있던 외국인 쿼터 제도를 운영하던 세계 최고의 리그에서,[182] 외국인으로서 10년 내내 주전 자리를 지킨 것이다.

차범근의 활약은 단순히 이룬 업적만 보아도 무시할 수 없다. 분데스리가 308경기에서 98골을 달성했는데, 이는 당시 분데스리가 역대 외국인 최다 골 기록이었으며[183] 분데스리가 역대 통산 득점 28위에 해당했다.[184] 여기서 더 대단한 점은 단 한차례도 페널티킥 골을 넣지 않았다는 것.[185]

그리고 UEFA컵을 각각 다른 팀에서 들어 올렸는데[186], 이렇게 각기 다른 팀에서 두 번 이상 우승한 커리어를 이뤄낸 선수는 현재에도 전 세계를 통틀어서 16명 밖에 되지 않는다.[187]특히 차범근이 들어올린 UEFA컵은 각 구단의 처음이자 유일한 UEFA 우승컵이다.

더불어 1900년대 유일무이하게 유럽 빅 리그뿐 아니라 유럽 전체 리그에서 아시아 국적 선수로 리그 10골 이상을 여러 시즌 연속으로 기록했다. 81/82 시즌부터 85/86 시즌까지 5회 연속 리그 10골 이상을 기록했는데[188] 이후 아시아 선수 중 이렇게 5시즌 연속으로 골을 넣은 선수는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프리미어리그에서 2016/17 시즌부터 2023-24시즌까지 8시즌 연속으로 10골 이상을 기록한 손흥민 외에 존재하지 않는다.

두 시즌 이상 연속으로 유럽리그에서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한 선수를 따져도 2022년까지 10명뿐인데, 이마저도 2번째부터는 모두 2000년대에 와서야 이뤄진 것으로 2002/03 시즌부터 우크라이나 리그에서 3회 연속 리그 10골을 넣은 막심 샤츠키흐가 두 번째다. 그와 같이 분데스리가에서 같은 시즌인 2002~03시즌에 리그 10골,다음 03~04시즌에 16골을 넣은 이란 선수 바히드 하셰미안이 공동 2번째이며 4번째로 손흥민이 분데스리가에서 2012/13~14/15 시즌 동안 3회 연속 10골 이상을 기록했으며 분데스리가 13-14시즌에 15골, 다음 시즌 리그 12골을 넣은 오카자키 신지가 5번째. 15~16시즌에 네덜란드에서 리그 10골, 다음 시즌에 21골을 넣은 알리레자 자한바크슈가 6번째, 15-16.16-17시즌 리그 11골씩 벨기에리그에서 넣은 쿠보 유야가 7번째. 8번째는 이란 선수인 사르다르 아즈문이 러시아 리그에서 2회 연속 10골을 넣었으며, 9번째로 이란 선수인 메흐디 타레미가 포르투갈 리그에서 2회 연속 10골을 넣었다. 그리고, 10번째로 황의조가 프랑스 리그1에서 2020-21시즌에 12골 21-22 시즌에 11골을 기록하고 있다.

개인 적인 수상으로 봐도 주간 MVP(Spieler des Tages) 6회, 주간 BEST 11(Elf des Tages) 36회, 분데스리가 올해의 팀에 두 차례 선정되었고, 20회의 Kicker 랑리스테 중 18회 등급 선정과[189](WK 1회, IK 4회, K 9회, B 4회) 당해 공격수 평점 순위 1위 1번(88/89)[190], 3위 2번(79/80, 82/83), 80년대 상반기(79/80~83/84) 분데스리가 공격수 부문 평점 2위, 80년대 하반기(84/85~88/89) 분데스리가 공격수 부문 평점 5위를 기록했다.[191]

더욱이 이 모든 것들이 K리그가 출범 전이던 시절, 군 만기 전역 후 만 26세의 나이에 해외로 건너가 이룬 업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차범근이 일반 사람처럼 군 생활을 한 것은 아니었고, 공군 소속으로 경기를 뛰거나 국가대표로 차출이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군사 훈련을 받은 시기도 분명 존재하며,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1970년대는 프로 축구라는 것이 없는, 대한민국 모든 축구선수가 '아마추어' 신분이었던 시절이다. 차범근 본인의 말에 따르면 SV 다름슈타트 98 첫 경기에서 가장 놀란 점은 자신이 제쳤던 선수가 다시 따라붙었다는 점인데 아시아에서는 자신이 골을 몰고 선수를 제치면 못 따라 왔었기 때문이었다.[192] 이 정도로 유럽과 아시아의 축구 격차는 컸기 때문에 군시절 경기를 뛰었다한들 당시 훈련 수준이나 경기력 향상이 유럽 선수들에 비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특히 차범근은 군 문제로 복귀한 후 5개월간은 다름슈타트와의 계약으로 인해 경기 출전을 하지 못한다. 5개월을 공군에서 개인 훈련만 한 것이다. 제아무리 명문팀 소속의 선수라도 2군 경기나 벤치 멤버로 출전을 못한다면 폼이 떨어지는데, 군대에서 5개월을 보내고 분데스리가에 진출하여 저런 성적을 낸 것이다.

간혹 차범근이 속한 팀의 순위와 득점 순위 및 득점력을 들며 폄하는 경우가 있는데 단순 수치만 놓고 본다면 팀의 성적이 아쉬운 건 사실이다.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의 경우 차범근이 오기 전 네 시즌의 성적은 9-4-7-5위로 중상위 수준의 팀이었고 차범근 역시 레버쿠젠보다 프랑크푸르트가 구단 위상이 더 높았다고 얘기할 정도로 분데스리가에서 강호에 속했다. 차범근이 오고 나서의 성적은 9-5-8-10인데 리그 순위만 봐서는 성적이 다소 떨어졌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할 점은 바로 대회 우승 유무다. 차범근이 오기 전 네 시즌(74/75~78/79)에 프랑크푸르트가 얻은 트로피는 전무하다. 하지만 차범근 영입 당해 연도에 UEFA컵 우승과 다음 시즌 DFB-포칼 우승을 차지한다. 여기서 단순히 우승 멤버가 아닌 주요한 활약을 펼쳤는데, UEFA컵에서는 11경기에서 3골을 기록했지만 11경기 전부 선발 출장에 10경기를 풀타임으로 뛰었으며[193] 64강, 32강, 16강 경기에 각 한 골씩 넣고 나머지 경기에서 골 없이도 경기 MVP에 선정될 정도의 활약을 펼쳤다.[194] 또한 DFB-포칼 우승 당시에는 6경기에 선발 출장해 풀타임을 뛰고 6골을 넣었는데 준준결승전까지 두 차례 멀티 골을 뽑아내었고 준결승전과 결승전에 연속 골을 이끌며 맹활약한다. 이것만 봐도 차범근이 팀을 이끌어 나가던 대표 선수였다는 걸 알 수 있지만 팀 자체도 리그 중위권 성적을 거뒀어도 당시 거둔 성과가 결코 미비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차범근이 레버쿠젠으로 이적 후 프랑크푸르트의 성적도 주목할만한데, 중위권을 유지하던 팀 성적이 여섯 시즌 동안 16-12-15-15-9-16위로 하위권으로 곤두박질치며 기나긴 침체기를 겪는다.[195] 심지어 여섯 시즌 동안 팀 내 리그 10골 이상을 기록한 선수가 단 두 번 존재했다.

바이엘 04 레버쿠젠 시절은 오히려 리그 순위를 보면 그 성과가 확연히 드러난다. 차범근 영입 후 레버쿠젠의 분데스리가 순위는 7-13-6-6-8-8위로, 단순 수치만 보자면 저 정도의 중위권 성적이 뭐가 그리 대단하냐 할 수 있겠지만 차범근이 오기 전 레버쿠젠의 리그 순위는 12-11-16-11위로, 1979년 2부 리그에서 승격한 후 네 시즌동안 10위 안으로 들어가 본적이 단 한번도 없었던 팀이었고, 구단 자체적으로 잡은 시즌 목표 순위도 10위권이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이를 생각한다면 성공적인 시즌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DFB-포칼의 성적 역시 확연히 차이가 나는데 네 시즌 동안 3라운드 진출이 최고 성적이었던 구단이 8강 2번에 4강 1번을 기록한다. 이뿐만이 아니라 87/88 시즌에는 구단 최초로 UEFA컵까지 우승한다.[196] 과연 팀 성적이 별로였다 치부할 수 있을까?

차범근의 득점력도 마찬가지다. 애초부터 늦은 나이에 진출한 만큼 노쇠화로 인해 커리어 후반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미드필더로 뛰기도 하였고(심지어 마지막 시즌은 수비형 미드필더로 출전하는 경기도 있었다.) 해당 세 시즌만 해도 110경기에서 18골을 기록했다. 이외에 공격수로 뛴 일곱 시즌 동안 262경기에서 103골을 넣었는데 2.5경기당 1골을 넣는 수준이고, 공격수로 뛴 기간에 있어서도 차범근은 온전히 정통적인 센터포워드로서 뛰었다고 볼 수 없다. 현대로 따지면 세컨드 스트라이커 개념의 역할을 했는데, 차범근의 경기 영상을 찾아보면 쉽게 알 수 있듯 당시 1선에서 골만을 노리던 전통적인 공격수가 아닌 좌우 측면을 넘나들며 공격의 활로를 뚫고 허리 라인까지 내려가 수비 가담까지 해주는 공격수였다. 후술하겠지만 차범근이 무득점 경기에서 높은 평점을 받은 경기가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단순히 공격적인 역할뿐 아니라 여러 역할을 수행하며 팀 자체를 보조하는 스트라이커로서 요즘 현대 축구에서 각광받는 컴플리트 포워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멀티플레이를 선보였던 차범근은 리그만 따진다면 여섯 시즌, 시즌으로 본다면 일곱 시즌 모두 10골 이상을 넣었고 멀티골만 20차례 기록했다. 득점력이 매우 높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적다고 무시할 수준이 결코 아니다.

리그 득점 순위에 있어서도 공격수로 뛰던 시절 12-39-25-10-18-27-4위를 기록했는데 득점 순위 4위를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상위권이라 할 수 없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차범근은 중위권 구단의 공격수였다. 매 시즌 성적은 변화하고 구단에 뛰어난 동료가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객관적인 팀 전력에서 소위 명문 팀들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고, 상위권 팀의 공격수들에 비해 득점에 한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80년대 득점 순위표를 보면 알 수 있듯 당시 상위 득점 랭킹은 대다수 당시 리그 상위 팀들의 공격수들의 차지였다. 그럼에도 차범근은 여러 시즌 동안 꾸준히 10골 이상씩 넣어주며 구단의 득점을 책임지었고 득점 랭킹 4위를 차지하기까지 한 것이다.[반론1] [반론2]

애초에 골 기록만 놓고 본다면 8-12-11-7-10-11-4-15번째 수준의 득점 횟수인데다 당시 로타어 마테우스파울 브라이트너, 한스 페터 브리겔, 빌프레트 하네스처럼 미드필더나 수비수임에도 상위 득점 순위를 기록한 선수들도 있었기 때문에[199] 차범근의 득점 기록은 분데스리가에서 뛰던 100여 명의 공격수 중 11-29-17-10-14-22-4위에 해당한다. 특히 당시 외국인 용병 중 차범근보다 많은 골을 넣은 선수가 거의 없었다. 79/80 시즌부터 85/86 시즌까지 외국인 선수 중 1-8-4-2-2-2-1위에 해당하는 기록으로, 당시 용병들 중 손꼽히는 득점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단순히 외국인으로 분류했을 때뿐만 아니라 팀 내 득점 순위로 봐도 1-3-1-1위 (프랑크푸르트)/2-2-1-3-6-7위(레버쿠젠)로 두 구단에서 상위권의 득점을 기록했다.

이를 보고 당시 팀에 마땅한 선수가 없었던 것 아니냐 생각이 들 수 있는데,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에는 베른트 횔첸바인[200], 바이어 04 레버쿠젠에는 헤르베르트 바스[201]라는 걸출한 공격수가 있었다.

또한 차범근이 활동한 79/80 시즌부터 88/89 시즌까지 10여 년 간 외국인 선수가 분데스리가 득점 순위 5위 안에 든 경우가 단 두 번 존재하는데, 82/83 시즌 3위에 오른 아틀리 에드발드손(Atli Edvaldsson)[202]85/86 시즌 4위를 기록한 차범근이다.

참고로 분데스리가 최초의 외국인 선수(비 독일인) 득점왕은 차범근 은퇴 다음 시즌인 1989/90 시즌에 이르러서야 탄생한다. (욘 안데르센[203]- 18골)

분명히 득점 순위는 공격수에게 평가의 주요한 지표 중 하나로, 특히 실제로 경기를 볼 수 없었던 선수일수록 수치의 중요성은 크다. 하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득점 순위가 공격수 혹은 선수의 평가를 하는데 전부가 될 수는 없다.

앞서 말한 대로 득점력 자체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거니와 무엇보다 차범근은 골 결정력이 높은 선수였다. 차범근에 관해 함께 뛴 동료나 경쟁한 선수들의 증언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내용 중 하나가 '골 기회가 생기면 어김없이 득점했다'라는 것인데 이는 차범근의 골 결정력을 말해주는 일례라 할 수 있다. 만약 골 찬스 대비 득점 횟수가 적었다면 절대 이런 평가가 나올 수 없다.

현재 뛰고 있는 해외 선수들 중에서도 수치 상 높은 득점 기록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골 결정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경우가 있을 정도로 골 결정력은 공격수로서 평가를 내릴 때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는데 차범근은 중위권 팀의 공격수로서 끊임없이 공격 활로를 뚫으며 팀의 공격을 주도하며 한정된 골 기회를 높은 확률로 득점하는 선수였다. 그리고 이는 차범근이 당시 분데스리가에서 손꼽히는 공격수로 평가받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단순히 수치만으로 섣부르게 선수를 평가하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흔히 과거의 선수들을 평가할 때 나타나는 현상으로 차범근같이 과거의 경기 영상을 확인하는 데 한계가 있는 선수들의 경우 수치화된 기록들이 평가의 기준점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선수의 경기력을 배제한 채 골의 개수나 득점 순위만으로 평가하기에는 분명 무리가 있다. 득점 왕을 차지했는데도 종합적인 활약도가 떨어져 방출 대상이 되는 선수가 있는 것처럼 한 선수를 평가할 때는 종합적인 부분을 모두 따져 평가해야 한다.

차범근 역시 마찬가지인데, 분데스리가에서 손꼽히는 공격수라 하기에 모자라 보이는 득점 순위를 보완해 주는 것이 바로 평점이다.

공격수로서의 차붐의 위상은 평점으로 확인 가능하다. 당시 분데스리가 선수들의 평점들을 보면 단순히 골을 넣었다고 평점이 좋지 않았다. 오히려 골을 넣지 않고도 고평점을 받는 선수들이 꽤 있었는데, 차범근도 마찬가지였다. 현역 당시 차범근은 분데스리가에서 평점 1점 17회와 2점 81회를 받았는데, 특히 2점을 받은 경기 중 골을 넣지 않은 경기가 45회나 된다.

보통 1점이나 2점은 득점 유무와 상관없이 경기 자체를 지배하거나 특출난 활약을 한 선수들에게 부여했던 점수였고, 3점 역시 Good 정도에 해당하는 점수로 골을 넣어도 3점을 받는 선수가 대단히 많았다. 차범근은 분데스리가 308경기를 뛰는 동안 211경기에서 1~3점의 평점을 받았는데(1점 17회+2점 81회+3점 113회) 이는 약 전체 경기 중 70%에 육박하는 수치로 10경기를 뛰면 6~7경기 정도는 못해도 Good에서 최상급의 활약을 보였다고 유추할 수 있다.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시절은 이 비율이 82%에 이른다.[204]

또한 79/80 시즌부터 88/89 시즌까지 차범근의 한 시즌 평균 평점 순위는 분데스리가 선수 220명 中[205] 25-77-78-20-57-106-84-117-83-63위에 해당한다. 이는 전 포지션을 통틀었을 때의 순위로, 단순 수치만 보면 기대 이하거나 좋게 봐줘도 분데스리가 전체에서 중상위 그룹에 해당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역시 당대 시대 상황과 분야별 평점 순위로 본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80년대 분데스리가의 평점은 골키퍼와 수비수들에게 굉장히 후한 편이었고 반면에 공격수들에게는 매우 짠 편이었다. 독일 역대 최고의 공격수인 게르트 뮐러 조차 분데스리가 한 시즌 최다 득점인 40골을 넣은 71/72 시즌 평점 순위가 15위에 불과하다. 특히 차범근이 뛰었던 79년부터 89년까지 10년간의 평점 순위를 보면 1위부터 10위까지의 선수들 대다수가 골키퍼나 수비수들이고 간혹 드물게 미드필더가 섞여 있는 상황이다. 해당 10년 동안 공격수 중 10위 안에 들어간 선수는 루디 푈러카를하인츠 루메니게 뿐이며[206] 푈러는 10위에 한 번, 루메니게 역시 10위 한 번에 7위에 두 번 든 것이 전부다. 범위를 20위까지 넓히더라도 겨우 5명이 추가되는데 그중 한 명이 다름 아닌 차범근이다.[207] 범위를 더 넓혀 30위까지 늘려도 11명 밖에 되질 않으며(한 시즌이 아니다. 10년 동안 평점 순위 30위 안에 든 공격수가 11명 뿐인 것이다.)[208] 심지어 84/85시즌에는 평점 순위 30위 안에 든 공격수가 단 한 명도 존재하질 않는다.

이렇게 저평가되던 포지션이었음에도 차범근은 꾸준히 분데스리가 평균 평점 2점 중후반 혹은 3점 초반을 유지했는데, 이는 분데스리가 공격수들만 놓고 봤을때 50명 中[209] 3-6-7-3-6-9-5-13-5-1위에 해당하고, 팀 내 공격수 기준으론 1-2-1-1-1-1-2-2-1-1위에 해당한다.[210] 더욱이 랑리스테 평점으로 본다면 외국인 공격수 중 3위 밑으로 떨어진 적이 없다.[211] 다시 말해서 당대 분데스리가의 주전 공격수들 중 상위 평점을 받은 것이다.(괜히 공격수 부문 평점 2위겠나)

쉽게 감이 안 오는 사람들을 위해 당대 유명했던 공격수들과 비교를 해보자면 81/82 시즌 27골로 분데스리가 득점왕에 오른 호르스트 흐루베슈[212]의 평점은 3.12로 해당 시즌 전체 평점 순위 140위에 불과했으며, 79/80 시즌부터 82/83 시즌까지 득점 순위 2-4-1-5위를 기록했지만 2.97의 평점 외에 전부 3점대의 평점을 기록했다. 또한 85/86 시즌 22골로 득점왕을 차지한 슈테판 쿤츠[213] 역시 평점 3.39에 평점 순위 139위에 랭크됐다. 두 선수 모두 득점 랭킹 상위에 당대를 포함 분데스리가 역사를 놓고 봐도 손꼽히는 공격수들이지만 차범근보다 평점이 높았던 적이 단 한차례도 없다. 이들보다 국내 팬들에게 친근한 선수인 위르겐 클린스만의 경우 분데스리가에서 활동한 7시즌 동안 평점 2점대를 받은 적이 한 번 존재하는데, 87/88시즌 자신의 리그 최다 골인 19골을 넣고 득점왕과 함께 평점 2.74를 받았고 전체 평점 순위 20위를 기록했다. 이 시즌을 제외하면 전부 3점대 평점을 받았으며, 클린스만 역시 차범근과 활동 시기가 겹치는 84/85시즌부터 88/89시즌까지의 기간 동안 앞서 말한 87/88시즌을 제외하면 차범근보다 평점이 좋았던 적이 없다.[214]

무엇보다 차범근은 다섯 시즌 연속으로 분데스리가 시즌 평점 2점대를 받았는데, 이렇게 5회 연속으로 시즌 평점 2점대를 받은 공격수는 1980년대를 통틀어서 차범근루메니게[215] 단 두 사람뿐이다. 당시 득점왕이나 꾸준히 상위 득점 순위에 들었던 선수들조차 연속은 고사하고 평생 커리어에서 2점대 평점을 한두번 받은 것이 전부일 정도로 시즌 평점 2점대를 받기 어려웠는데, 이는 루디 푈러(8시즌 2회)나 클린스만(7시즌 1회) 같은 선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216]

정리하자면 차범근은 꾸준히 10골 이상을 넣으며 팀 내 득점 1위를 고수하던 선수로, 평점에서도 분데스리가 전체 공격수 중 상위에 속하는 공격수였다. 이런 선수를 단지 득점 순위가 낮다는 이유로 폄하할 수는 없다. 학교로 따진다면 전국 1위의 명문 학교에서, 매 학기 반 1등 혹은 최소 상위의 성적을 내며 전교 등수 4등을 한 적도 있는 학생으로, 성적 우수자에 여러 번 뽑히거나 한 해 동안 가장 공부 잘한 학생 11명에 두 차례 뽑히고 전국의 성적 우수 학교들이 참여하는 전국 경시대회에서 학교 대표로 나가 두 차례나 우승을 했음에도 단순히 전교 등수가 낮다는 이유로 공부를 못하거나 평범한 수준의 학생이었다고 취급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당장에 팀 순위 및 득점 순위가 선수를 평가하는데 절대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것은 현재 뛰고 있는 해외파 선수를 봐도 알 수 있는데, 2020/21 시즌 황의조만 하더라도 팀성적 12위에 12골로 득점 순위 14위를 기록했음에도 몸값이 100만 유로가 뛰었고 프랑스 리그1 올해의 팀 공격수 후보에 올랐다. 보르도 현지 매체에서는 무려 킬리안 음바페에 비유하며 경의를 표했다. 현재 아시아 최고의 선수이자 세계적인 반열에 올랐다는 손흥민은 어떤가, 손흥민은 2016/17 시즌부터 20/21 시즌까지 팀 순위는 2-3-4-6-7위에 득점 랭킹은 13-10-16-18-4위었다. 그럼에도 이 기간동안 수많은 개인 수상과 영국 현지의 극찬은 물론 FIFA FIFPro 월드 XI의 공격수 부문에 2년 연속 선정되고 발롱도르 후보 30인에도 들어갔으며 PFA 올해의 팀에도 선정되었다.[217]

결론적으로 차범근은 당대 독보적인 톱클래스의 선수는 아니었지만 분데스리가와 팀을 대표하는 에이스급 선수 중 한 명이자 국제적 수준의 명성을 가진 선수였다. 각 팀 시절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 당시 언론의 말도 안 되는 곡해와 시대적 상황으로 온전히 축구에 집중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고, 차범근 스스로도 그런 주변의 오해와 갈등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처음 분데스리가에서 뛰었을 때의 열정이 사라져 루메니게브라이트너와 같은 초일류 선수들의 경지에 도전하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지만 데뷔 시즌부터 전체 외국인 선수(전체 포지션) 1위에 랭크되며 랑리스테 WK(월드클래스)를 받았고, 경쟁이 치열하던 용병의 위치에서 10여 년간 붙박이 주전을 꿰찼을 뿐 아니라 공격수로서 상위 평점을 유지하며 중위권 팀을 이끌고 두 번의 유럽 대항전 우승을 일궈낸 당대 분데스리가에서 손꼽히는 주축 공격수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가 남긴 기록들은 은퇴 후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쉽사리 지워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한국 축구사에 있어서는 21세기의 이영표, 박지성, 박주호, 손흥민 등으로 이어지는 해외파 선수의 선구자이자 아무도 걷지 않았던 길을 처음으로 써내려갔던, 대한민국 축구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2. 국가대표 경력

2.1. 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

1970년 청소년 국가대표로 발탁되었고 1971년과 1972년 연속으로 아시아 청소년 축구대회에 참가하였다.

2.2.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고려대학교 학생 신분이던 1972년에 당시 최연소의 나이로 국가대표에 발탁되어 5월 7일 이라크와의 AFC 아시안컵 경기를 통해 국가대표팀에서 데뷔하였고 대회 준우승을 이끌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1322225
1972년 6월 2일 펠레의 산투스와의 친선전에 참가해 69분 팀의 첫번째 골을 터뜨리면서 선전했지만 2:3으로 패배했다.[218] 1978년 아시안 게임 금메달과 당시 아시아 3대 대회라 불리며 주요한 국제 대회 중 하나였던 메르데카컵을 4회 우승했다. 1986년 FIFA 월드컵 24개국 본선에 출전하였던 1986년 6월 10일 이탈리아와의 경기가 자신의 마지막 A매치가 되었으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출전한 월드컵에서 득점은 기록하지 못했다.

국가대표로 136경기에 출전해 58골을 넣었는데 A매치 58골은 대한민국 선수 중 A매치 최다 골 기록이다.
찼다 찼다 차범근 센터링 올렸다. 떴다 떴다 김재한 헤딩슛 골인
1970년대 동요 종이비행기를 개사한 이 노래의 내용으로도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이지만 본인 스스로나 함께 국가대표를 뛰었던 선수들, 전문가 및 중계진들의 증언에 따르면 국가대표에서는 윙 포워드로 뛰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를 생각했을 때 정말 엄청난 득점 기록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센추리 클럽에 가입했고 이는 세계 최연소 센추리 클럽 가입 기록이다. (24년 139일)


국가대표로 발탁된 이후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말레이시아전에서 1-4로 뒤지고 있을 때 6분 만에 해트트릭을 기록하면서 무승부로 만든 일화가 유명하며 특히 일본과의 한일정기전을 치를 때마다 눈부시게 활약하였고, 차범근이 출전했던 한일전에서는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이 당시의 유명한 일화가 뉴스 기사로 정리되어있다. 관련 기사 

1972년 데뷔하여 1979년 프랑크푸르트 진출전까지 국가대표로 차출되었으며, 1979년 이후로는 국가대표를 은퇴했었다. 여러 정황을 보면 자의반 타의반으로 보이는데, 독일 진출과 계약서에서 국가대표 차출과 관련된 내용이 명확히 되지 않아 후자와 같이 월드컵 예선 참가 요청에도 불발된 경우가 있다. 일단 기록상으로는 1979년과 1986년 월드컵 본선 사이에 엔트리에 포함된 기록이 없다. 1982년 스페인 월드컵 예선에서 축협이 합류를 요청했으나 계약상의 문제로 불발되었다.

이후 1986년에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이 32년만에 1986 멕시코 월드컵 24개국 본선에 진출하면서 레버쿠젠과의 계약에서 국가대표 차출 문제가 해결되고 차범근을 다시 불러야한다는 목소리가 다시금 높아지게 되었는데 이에 차범근 본인은 처음에는 본인이 아예 기여하지 않은 성과인데다가 나이도 이미 상당했기에 후배들을 위해 출전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일부에서도 "예선전에 참가하지 않은 선수를 대표 팀에 넣는 게 말이 되느냐?"는 반대여론도 있었지만 활약상이나 실력 등을 고려해 그냥 기용하는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었다. 실제로 차범근의 명성이 잘 알려진 해외, 특히 독일에서는 "차범근을 대표선수로 뽑지 않아도 될 정도로 엔트리에 여유가 있다면 한국은 우승후보가 분명하다."는 평가를 하기도 했다. 당시 차범근의 월드컵 차출 과정에 문제가 되던 것 중 하나가 차범근에 걸린 보험비였는데 레버쿠젠에서는 차범근이 다쳤을 시 보험금을 한국측에서 부담하도록 요구를 했고 당시 돈으로 10억 원이라는 엄청난 액수였던 만큼 한국에서는 난색을 표하며 차범근의 차출을 보류하기에 이른다. 결국에는 양자간의 합의가 잘 끝나긴 했지만 레버쿠젠 구단에서는 차범근에 대해 신경을 많이 쓰고 있어서, 부상을 대비한 전담 의료팀을 따로 파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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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경기에서는 월드컵 직전 복숭아뼈 아래 인대가 파열되는 부상을 입었던데다 타 팀 선수들의 집중견제로 큰 활약은 못했다. 상대팀의 마인드가 '무조건 차붐만 막으면 된다.' 였기 때문에 공을 갖고 있든 안 갖고 있든 무조건 수비수 2명이 기본적으로 달라붙어 있었기 때문이다.[219] 경기 시작 전부터 전력 평가에 차범근이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했는데 정작 부상으로 한국 경기에 출전하지는 않았지만 이탈리아의 파올로 로시는 차범근을 '현역 최고의 선수 중 하나'라고 칭하며 "차범근을 막지 못하면 한국에게 당할 수 있다."라고 평했으며[220] 불가리아의 이반 부초프(Ivan Vutsov) 감독은 "한국에 차범근이라는 우수한 선수가 있기는 하지만 축구는 11명이 하는 것이지 그 혼자만이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으며 덧붙여 "우리는 최강의 선수가 가득한 이탈리아의 공격도 묶었다.[221] 한국 정도의 공격력은 안중에도 없다."라는 도발적인 멘트를 날리기도 했다. 다만 아르헨티나의 카를로스 빌라르도 감독은 유일하게 차범근에 대해 별다른 코멘트를 하지 않고 "한국은 스피디한 역습을 지닌 무시할 수 없는 팀으로 자만하지 않고 임하겠다"라는 멘트만 했는데 그 당시의 아르헨티나가 워낙 쟁쟁한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팀인지라 세르히오 바티스타에게 철저하게 지워져 버렸다. 차범근이 바티스타에게 지워지는 바람에 허정무가 무리하게 되었고 결국 허정무는 디에고 마라도나에게 본의 아니게 태권킥을 시전하고 만다[222]. 이탈리아 상대로 2-3, 더군다나 그 중 하나가 조광래자책골인지라 이탈리아와 불가리아를 상대로 호각의 경기력을 보였고 한국이 일방적으로 밀린 유일한 상대가 아르헨티나였다. 특히, 유럽팀 불가리아를 상대로 1:1 무승부 첫 승점 1점을 획득하였다. 실제로도 차범근이 막히자 수비진을 뚫을만한 공격수도 없었고. 그리고 당시 차붐의 나이는 한국나이로 이미 34세로,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대였다. 게다가 최전방 스트라이커도 아니고 클럽과 달리 윙에서 뛰었으니.. 결과적으로 24강 조별리그에서 16강은 실패하였으나, 대한민국은 첫 승점 1점 1무 2패 월드컵 20위를 기록하며 자신의 처음이자 마지막 월드컵을 마무리한다.

86년도 월드컵과 차범근에 대한 축구팬의 회고링크를 참조하면 당시 차범근의 활약상이 지금 우리의 생각과는 조금은 다름을 알 수 있다. https://mlbpark.donga.com/mp/b.php?m=search&p=1&b=bullpen&id=201902180028035668&select=sct&query=%EC%B0%A8%EB%B2%94%EA%B7%BC+86%EB%85%84&user=&site=donga.com&reply=&source=&pos=&sig=h6jLHltYghRRKfX2h4aXGg-Yhhlq

여담으로 화려한 클럽 경력과 국대에서의 골 수, 경기 수에 비해 월드컵 출전은 위의 86년 월드컵뿐인데 이만한 선수가 왜 월드컵 경력이 1회뿐이냐고 묻는다면 그 이전의 월드컵은 78월드컵까지는 전세계 지역예선에서 본선 월드컵에 들어갈 수 있는 자리가 단 16자리, 82월드컵부터 본선 월드컵에 들어갈 수 있는 자리가 24자리로 확대되었고 현재 32자리 ~ 48자리 본선 월드컵에 들어가는 것보다 월드컵에 들어가는 것이 더 어려웠기 때문이다[223].

또한 윗 문단에도 나와있듯이 차범근은 24세 139일의 나이로 센추리 클럽에 가입한, 역대 최연소 센추리 클럽 가입자다. 또한 1978년 다름슈타트에 입단하면서 사실상 국가대표를 은퇴한 상황. 그의 마지막 A매치 경기 득점도, 1978년에 이루어졌으며, 화려한 분데스리가 생활 때는 A매치에 소집되지 않았었다. 당시는 A매치 데이 같은 시스템이 정착되기 전이었고, 냉전시대였기 때문에 소련과 중국 등 공산권 영공을 통과하지 못해 서독으로 가려면 알래스카를 경유해야만 했다. 그러다가 1986년 월드컵에 드디어 대한민국이 24개국 본선에 진출했고, 차범근은 8년만에 국가대표에 복귀해서 24강 조별리그 3경기를 뛰고 정식으로 국가대표를 은퇴했다. 74년 월드컵 아시아+오세아니아 합동예선의 경우, 호주와 1장(우승)의 16개국 본선 진출티켓을 놓고 홈앤 어웨이를 모두 비기고, 마지막 홍콩에서의 재경기에서 대한민국이 패배하면서 74월드컵 16개국 본선에 진출을 실패했는데, 차범근은 이 호주와의 3경기에서 모두 득점을 하지 못했기에 월드컵에 나가지 못했다. 1978년 월드컵 아시아+오세아니아 합동예선에서 한국은 5강 결승리그[224]에 진출하였으나, 이란이 우승으로 16개국 본선 월드컵에 진출하여 아쉽게도 한국은 아시아+오세아니아 합동예선 준우승으로 78월드컵 16개국 본선에 진출을 하지 못했다. 특히 이 당시 쿠웨이트의 기세가 매서웠는데 한국은 2000년대까지 쿠웨이트와의 상대전적에서 밀렸다. 차범근은 1차예선에서 2골, 최종예선에서 3골을 넣었음에도 조국의 탈락을 바라봐야만 했다. 82년은 A매치를 뛰지 않았었기에 86년 월드컵에 드디어 첫 출격을 하게 된 케이스다.[225]

이렇듯 7년간 130여경기를 출전하며 국가대표에서 엄청난 활약을 펼쳤고, 이를 바탕으로 독일로의 진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 지금으로 따져도 매년 20여 경기를 소화한 수준인데 당시는 A매치의 개념이 명확하지 않았고 대한민국의 스포츠 국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아시아에서도 축구 변방으로 이런저런 경기를 많이 뛰었고 그러면서도 꾸준히 활약했다는 점에서 국가대표에서 차범근의 위엄을 알 수 있는 부분. 이 때문에 정작 신체적 전성기였던 20대 초반 국가대표 활약 시기에 관심이 쏟아지지만 당시의 경기 영상은 물론 텍스트, 기사등 그 당시를 복기할 수 있는 자료 자체가 많이 남아 있지 않아서 차범근의 20대 국가대표 경기 장면이 남아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1] 경신학교 축구부는 1904년 창단되었고, 1세대 원로 김용식 옹을 배출한 축구부라 명성이 높았다.[2] 경신중학교와 경신고등학교는 같은 경신학원이다. 참고로, 차범근은 경신 12대 제자 중의 한 사람이다.[3] 그리고 이 사건 이후부터 차범근은 PK를 자신없어해서 나서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4] 황재만 선수도 이젠 거의 잊혔지만, 1970년대 국가대표에서 주전 붙박이 레프트백이었다. 차범근과 같이 국가대표 경기를 뛴 적도 있었으니 기묘한 인연이다.[5] 장난 식으로 서술되어 있지만, 실제로 당시 대학에서는 상대 대학에 좋은 선수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안달이었고, 보통은 스카우트할 적에 고등학교 졸업반에서 해당 선수와 친한 선수 몇몇을 뽑아다 같이 데려와서 대어 선수를 모셔오는 게 기본이었고, 안된다 싶으면 집요하게 따라오거나 계약서에 사인하기 전까지 음식점 같은 곳에 붙잡아놓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 예로 한양대학교빙그레 이글스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한 박찬호도 하마터면 빙그레에게 납치를 당할 뻔했다.[6] 한국 역사상 첫 외국인 국가대표 감독이다.[7] 차범근의 SV 다름슈타트 98 이적 후 첫 경기 보훔 전 날짜[8] 당시는 지금처럼 국군체육부대로 통합된 형태가 아닌 육(웅비), 해(해룡), 공군별로 축구단을 운영하고 있었고, 축구단별로 서로 경쟁 아닌 경쟁을 하던 시절이었다.[9] 당시 독일의 평점은 내신등급처럼 낮을수록 좋았다. 즉, 1점이 우리가 흔히 아는 10점이다. 3점을 받았으니 평점 7점으로 좋은 활약을 펼친 셈이다.지금도 키커지의 점수는 이 기조를 유지하고 있으며, 평가의 디테일을 위해 소수점 점수(0.5)가 추가되었다.[10] 사실 이것도 말이 좋아 엄격한 것이지, 차범근이 군에서 복무하던 시기인 1970년대 후반기에 합법적 병역 특례인 예술체육요원을 받은 사람은 고작 두 명에 불과했으며,(그나마도 한 명은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2위를 차지한 정명훈이다. 나머지 한 명은 1976년 몬트리올 하계올림픽 당시 프로레슬링 종목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양정모다.) 그나마도 정명훈과 양정모가 혜택을 얻은 이후로는 한동안 신규 편입이 중단되었다가 차범근이 만기전역하고 난 이후인 1980년대부터 활성화되기 사작했다. 다시 말해, 차범근이 병역특례를 받을 기회는 처음부터 없었던 셈. 그나마 받을 수 있었던 방법은 군에 입대하기 몆 달 전에 있었던 몬트리올 올림픽에 나가서 최소한의 법적 기준인 3위, 넉넉하게는 양정모처럼 1위를 차지했어야 했으나 지역예선에서 탈락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물론 이후에 차범근이 군 복무 도중에 나간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 본선 당시에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따라서 지금 시점에서 보면 이론상으로는 병역혜택을 받을 수 있었지만 실제로는 1980년대까지 예술체육요원 제도가 유명무실하게 된 지라 그러지 못 했다. 거기다가 2010년까지는 현역 혹은 보충역 복무자가 국제대회인 올림픽에서 3위 이내의 성적을 거두거나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는 등(단, 차범근의 현역 시절까지는 아시안게임도 3위 이내였다.)의 성적을 내도 조기전역을 시켜줄 법적 근거가 없었던지라 만기전역일이 될 때 까지 계속 복무했다. 그리고 방콕 아시안게임 남자 축구 부문 결승이 열렸던 당시 한국의 높으신 분들 입장에서 보면 상대팀으로 만난 북한과 비기는 바람에 공동 우승이란 결과를(이는 과거 아시안게임 축구 부문 규정을 보면 결승전에서 연장전까지 갔는데도 승패가 결정되지 않으면 공동 우승 처리를 했기 때문이다.) 받아들여야만 했던 상황에서 대회에 참가한 미필 선수들에게 병역 혜택을 부여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21세기 시점에서 보면 법에 근거가 있는데도 이랬다는 점이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지만, 1978년 당시 남북은 한창 체제경쟁을 벌이고 있었던 데다 반북/혐북 감정이 지금보다 훨씬 강했던 시기였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11] 당시 프로 리그가 없던 한국은 모든 축구선수가 아마추어 신분이었다.[12] 자서전에 따르면 하루에 천번 넘게 시멘트 블록을 뛰어넘고(...), 줄넘기, 혼자서 리프팅 등을 했다고.[13] 보스만 룰이 없던 시절이라 이적에 있어 선수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하던 시절이다.[14] 월 4천 마르크(당시 한화 140만 원 상당)[15] 당시 아시안게임에 프로선수가 출전할 수 없는 것도 반대 이유였지만 예외적인 경우가 있어 무조건 출전이 안 된다기 보다 미지수인 상황이었다.[16] 당시 문체부 역할을 겸하고 있었다.[17] 2014년 분데스리가 선정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역대 Top 10 Goals 10위[18] 1982년 10월 30일 차범근의 프랑크푸르트 소속 100번째 분데스리가 출전 경기로 팀의 3:0 승리와 함께 평점 10점과 라운드 베스트11, 라운드 MVP를 차지하였다.[참고1] 차범근의 분데스리가 평점과 수상 내역은 1920년에 설립된 Kicker를 기반으로 한다. 한 매체의 평가가 절대적일 수는 없겠지만 분데스리가는 공식협회(DFL)에서 주는 올 시즌의 선수가 2019년에 시작되었고, 프로 축구선수협회(VDV)에서 선정하는 올 시즌의 선수와 올해의 팀 역시 1997년부터 시작될 정도로 공식적인 수상이나 평점이 없던 리그다. 이런 분데스리가에서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지던 수상은 키커가 60년대부터 선정한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상으로 지금까지도 가장 유서 깊고 중요한 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또한 키커가 선정하는 랑리스테의 경우 분데스리가 설립 이전부터 매겨지며 독일 국가대표 선발에 참고가 되던 등급이었다. 이렇듯 독일에서의 Kicker지의 위상은 대단히 높아서 80년대 분데스리가 역시 키커의 평가는 언론뿐 아니라 리그를 뛰던 선수들에 있어 공식적인 평가로 인식될 정도로 특수한 영향력이 있었고 키커에서 선정하는 주간 베스트 11(Elf des Tages), 올해의 팀은 선수들에게 자신의 활약을 인정받는 유의미한 수상이었다. 따라서 이런 분데스리가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키커의 평가를 기반으로 삼고, 여기에 확인할 수 있는 당시 언론사 평가 및 경기 기사를 최대한 종합하여 서술한다.[참고2] 차범근의 기록 중 어시스트 기록은 집계 누락 및 정보 부족으로 부득이하게 제외한다. 차범근은 플레이 스타일 상 득점만큼 상당히 많은 도움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당장에 79/80 시즌 UEFA 컵 경기만 하더라도 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어시스트만 4회가 있음에도 공식 기록에 집계되어 있지 않다. 유럽 축구 통계 사이트인 트랜스퍼마크트(transfermarkt)에도 어시스트 기록이 2022년 1월 16일 기준으로 리그 7회만 측정되어 있고, 키커를 비롯한 각종 사이트에서도 정확한 도움 기록 확인이 어렵기 때문에 해당 문서에서는 어시스트 관련 내용과는 별개로 차범근의 득점 기록만을 통산 기록으로 서술한다.[21] 차범근의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이적 후 첫 경기인 도르트문트 전과 마지막 시즌 마지막 경기 뒤셀도르프 전 날짜[22] PK 유도 1회[23] PK 유도 1회[24] PK 유도 3회[25] PK 유도 3회[26]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역대 분데스리가 득점 8위[27] 프랑크푸르트에서 40골 이상을 기록한 선수 중, 소속 기간이 네 시즌 이하인 선수는 차범근 포함 3명뿐이다.[28] PK 유도 4회[29] 당초 SV 베르더 브레멘에서 강력히 계약을 희망했는데, 사실 프랑크푸르트보다 앞선 7월 11일 테스트 경기를 치렀다. 여기서 차범근은 4골을 기록했고, 다음 날인 12일 계약 직전까지 갔으나 당시 프랑크푸르트 코치였던 슐터가 여우종 서독 교민회장을 통해 급하게 접선했다고 한다.#[30] 프랑크푸르트 슐테 코치 인터뷰[31] 71/72 시즌에 뛴 터키 출신의 엔더 콘카의 경우 터키 1부 리그(쉬페르리그 옛 이름)가 UEFA 리그로 분류되고 있었기 때문에 제외하였다.[32] WK-1, 포지션 통틀어 외국인 전체 1위[33] 공격수 평점 1위는 뮌헨의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2위는 함부르크의 케빈 키건. 누군지 잘 모르겠다면 키건은 78, 79년, 루메니게는 80, 81년 발롱도르 수상자.[34]UEFA 유로파 리그의 전신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준UEFA 챔피언스 리그쪽에 더 가깝다. 당시 유러피언컵(현재의 UEFA 챔피언스 리그)은 유럽 각국의 리그 우승 팀만이 참가할 수 있었고, 자국 리그 우승을 놓친 팀 중 FA컵 우승 팀을 제외하고 아무리 강팀이라도 UEFA컵에 나가야 했기 때문에, 소수의 팀이 경쟁하는 유러피언컵보다 오히려 UEFA컵이 흥행성이 더 높았다. 물론 흥행성 얘기다. 더 많은 팀들이 출전하는 UEFA컵이 흥행성은 더 높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권위나 위상은 각 리그 우승 팀들이 맞붙는 유러피언컵이 언제나 최고였다. 하지만 차범근의 UEFA컵 우승이 지금의 유로파리그 우승보다 대단한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참고로 20/21 시즌 결과를 가지고 차범근 시절 기준 UEFA컵에 진출할 팀을 뽑자면 4대 리그만 해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리버풀 FC, 첼시 FC,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 레알 마드리드 CF, 세비야 FC, 레알 소시에다드, 레알 베티스 발롬피에,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아탈란타 BC, SSC 나폴리, SS 라치오, RB 라이프치히, VfL 볼프스부르크,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이다.[35] 2021-22시즌 프랑크푸르트는 42년만의 우승을 차지했다.[36] '엘프 데스 타게스'라 불리는 주간 베스트 11은 선정된 횟수를 합산하여 키커 분데스리가 올해의 팀을 뽑을 정도로 중요도가 높은 선정이었다. 특히 지금처럼 분데스리가나 독일 축구선수협회(VDV)에서 주는 공식적인 올해의 팀과 올 시즌의 선수와 같은 상이 전혀 없던 시절이기 때문에, 키커에서 선정하는 주간 베스트 11과 올해의 팀은 당시 선수들에게 자신의 활약을 인정받는 주요한 수상으로 인식되었다. 참고로 2011/12 시즌 이후부터 키커 올해의 팀의 선정 방식이 평점을 보고 뽑는 것으로 변경되었다.[37] 시즌 15골[38] 차범근은 아시아 및 비유럽 선수 최초로 키커지 메인 표지를 장식했으며 해당 호에서 발표된 랑리스테에서 WK(월드클래스) 등급을 받고 분데스리가 최고의 외국인 선수에 선정되었다.[39] 1960년부터 시상한 독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권위 있는 축구상이며, 분데스리가에 소속된 전체 선수 및 해외 리그에서 활동하고 있는 독일 국적의 축구 선수를 대상으로 독일 스포츠 기자 협회 회원들의 투표를 통해 선정되었다. 대부분 독일 국적의 선수가 뽑혔고 상위 득표수를 차지했다. 비 독일인으로는 2004년에 아이우통이 최초로 수상하였는데 비 독일 수상자는 아이우통을 포함해 2021년까지 6명에 불과하다.[40] 공식적인 명칭은 Berliner Fußballwoche로 1923년 설립되어(1950년 재창간) 베를린에 본사를 두고 한 달 발행부수 200만 부 규모를 자랑하던 서독 스포츠 주간지다. 현재 SPM 스포츠 플라츠 미디어(SPM sportplatz media)에 속해있다. 당시 한 달 발행부수 350만 부를 기록하던 키커 다음으로 꼽히던 스포츠 전문 매체였다. 키커에 비해 공신력은 다소 떨어졌지만 자체적인 점수 체계와 '톱스타 퍼레이드'라는 선수 랭킹이 존재하기도 했다.[41] 푸스발 보헤와 빌트 모두 당시 키커처럼 라운드 베스트 11과 선수 랭킹을 부여했는데 차범근도 굉장히 많은 주간 베스트와 높은 랭킹을 획득하였다. 다만 공신력을 떠나 키커에 비해 인터넷으로 확인 가능한 기사나 자료가 현저히 부족해 추가하기가 어렵고 이 문서는 키커의 자료를 기본 골자로 삼고 있기 때문에 굳이 추가하지 않는다.[42] 2021년 교통편으로도 자동차로 4시간 50분, 비행기로 1시간 5분 거리다.[43] 포칼 최다 득점이 6-7골 선에서 나오는 걸 생각해 보면 대단한 기록이다. 참고로 80/81 시즌 DFB 포칼 최다 득점 역시 7골이었다.[44] 유럽 축구 통계 사이트인 트랜스퍼마크트(transfermarkt)에는 79/80 시즌 프랑크푸르트의 DFB-포칼 1라운드와 2라운드 경기 기록이 소실되어 차범근의 DFB 포칼 기록이 5경기 4골로 기재되어 있는데 Kicker를 비롯한 당시 언론사의 경기 기사를 보면 1980년 10월 4일 VFB Friedrichshafend와의 2라운드 경기에서 41분과 79분에 골을 기록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Kicker의 경우 모바일앱으로 확인해야 경기 상세 기록이 뜬다.) 분데스리가 공식 기록에도 차범근의 80/81 시즌 포칼 기록이 6경기 6골로 되어 있다.[45] 시즌 12골[46] 이해를 돕기 위해 당시의 유명 선수의 팀 리그 득점에 대한 비중을 살펴보면 82/83 시즌 당시 루메니게는 팀 리그 득점의 27.08% 정도를 기록했으며 현재 선수 중 팀 리그 득점의 30% 이상을 책임진 선수로는 20/21 시즌 해리 케인모하메드 살라가 각각 33.82%와 32.35%를 기록했다. 물론 이는 팀에서의 영향력을 느낄 수 있는 지표일 뿐이지 해당 선수들과 득점력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다.[47] 차범근은 프랑크푸르트에서 활약한 4시즌 동안 팀의 리그 득점 17.89%에 해당하는 골을 기록했다. 당시 정상급 공격수였던 케빈 키건함부르크 SV에서 팀 리그 득점의 14.22%를 기록한 것을 보면 차범근이 팀에서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해당 수치가 와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좀 더 최근 선수에 대입해 본다면 첼시 FC에서 4시즌 동안(15/16~18/19 시즌) 팀 리그 득점의 17.84%를 기록한 에당 아자르리버풀 FC에서 4시즌 동안(17/18~20/21 시즌) 팀 리그 득점의 18.71%을 기록한 사디오 마네와 비슷한 수준이다.[48] '슈필러 데스 타게스'라 불리며 선정 횟수가 분데스리가 올해의 팀과 직결되는 Elf des Tages에 비해 중요도는 떨어졌지만 말 그대로 해당 라운드 MVP를 선정하는 만큼 선수들에게 영예로운 수상 중 하나였다. 보통 한 시즌 최다 선정 횟수가 2회 정도였는데 기본적으로 라운드 베스트 11에 해당하는 선수들 중 가장 잘한 1인을 뽑는 것이다 보니 선수들의 활약도가 비등할 경우 선정하지 않는 라운드도 존재했으며 한 시즌 동안 선정이 없던 적도 7~80년대에 세 차례나 존재한다. 70~80년대 통틀어 한 시즌 최다 선정 횟수는 3회로 70년대에는 71/72 시즌 프란츠 베켄바워게르트 뮐러, 귄터 네처, 73/74 시즌 울리 회네스가 3회 선정되었고 80년대는 82/83 시즌에 차범근이 최초로 3회 선정되었다. 참고로 70/71 시즌부터 89/90 시즌까지 20년간 한 시즌에 Spieler des Tages 3회 선정된 선수는 12명에 불과하다.[49] 리그 9회+포칼 2회+UEFA 1회[50] 랑리스테란 Kicker지에서 전반기와 후반기에 선정하는 선수들의 등급으로 분데스리가 창설 이전인 1955년부터 독일에서 뛰던 선수들에게 부여하던 평가 등급이다. 한 시즌에 아예 나오질 않거나 웬만한 선수는 평생에 한 번 받기도 어렵다는 WK(월드클래스) 등급, 국제적 수준의 리그 톱클래스 선수에게 부여하는 IK(인터내셔널 클래스), 독일 내에서(분데스리가+DFB 포칼 등) 두각을 나타내며 국가대표로 거론될만한 선수인 K 등급, 기복은 있지만 주목할 만한 경기력을 보여주는 선수에게 부여하는 B 등급 등 총 4가지 등급으로 나뉘는데, 현재는 20/21시즌을 기점으로 K 등급의 세부 명칭이 'im weiteren Kreis'에서 'Nationale Klasse'(내셔널 클래스)로 변경되었고 B 등급은 뽑지 않게 되며 3가지 등급이 부여된다. 참고로 2. 분데스리가의 선수들은 Herausragend(뛰어난 수준)과 Auffallig(눈여겨볼 만한 수준)으로 평가된다.[51] 흔히 차범근이 WK(월드클래스) 등급을 받은 것에 집중하지만 사실 랑리스테 등급을 받는 것 자체도 어려운 편이다. 일례로 아시아 출신 중 차범근 이후 분데스리가에서 가장 성공했다는 카가와 신지는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한 7시즌 동안 14차례의 랑리스테 등급에서 8회(WK 1회, IK 2회, K 4회, B 1회)만 받았고 손흥민 역시 6시즌 중 4회(K 2회, B 2회), 구자철은 12시즌 동안 3회(K 1회, B 2회)를 받은 게 전부다.[52] 국내에는 단순 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시, 소설, 동화, 논평, 수필 등 다양한 장르를 다루는 작가로 독일 문학 관련 상을 여럿 수상한 독일 문학계에서 꽤 명성 있는 작가다.#[53] 좀 더 깊게 들어가자면 '신' 혹은 '영웅'을 찬양하는 독일 전통 시 찬가(Hymne) 형식을 빌려 쓴 것으로 워낙 고문체(古文體)인데다 어려운 단어가 많고 문장이 이어지다 다음 행으로 뚝뚝 끊어지게 쓴 글이다 보니 부분적인 번역은 있어도 시 전체의 정확한 번역은 없던 시였다. 위에 첨부한 것은 도깨비뉴스에서 김원익 연세대 독문학 박사를 통해 완역한 것으로 풍자 작가답게 차범근 외 프랑크푸르트 선수들의 부진과 구단 내부 문제를 풍자하는 것은 물론 다른 팀 선수들을 은근 까내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54] 이런 플레이 스타일로 인해 득점만큼 다수의 키패스와 어시스트를 기록했다고 하는데 이런 종류의 기록이 공식적으로 측정되지 않던 시절이라 정확한 수치를 확인할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55] 함부르크 SV(2-2-1-1위) 6경기 2골, 1. FC 카이저슬라우테른(3-4-4-6위) 9경기 4골, VfB 슈투트가르트(3-3-9-3위) 9경기 4골, 1. FC 쾰른(5-8-2-5위) 6경기 4골, SV 베르더 브레멘(17-X-5-2) 5경기 3골, FC 바이에른 뮌헨(1-1-3-4위) 10경기 1골을 기록했다. 다른 팀들에 비해 바이에른 뮌헨에겐 유독 득점력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바이에른과의 리그 8경기에서 평균 평점 2.875를 받을 정도의 준수한 활약을 보였으며 UEFA 컵 4강전에서 두 차례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는 등 승리를 거두는 데에 큰 일조를 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상위팀 외에도 70년대에만 분데스리가 5회 우승, DFB-포칼 1회 우승, UEFA 컵 2회 우승, 유러피언 컵 준우승 등 압도적인 성적을 거두며 당대 분데스리가의 대표적인 강팀으로 꼽히던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를 상대로도 10경기 5골을 기록했다.[56] 피지컬적인 부분은 차범근 본인 스스로도 공을 많이 들였는데 초창기 독일 무대에서 가장 어려움을 겪었던 유럽의 선수들과의 몸싸움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식사관리를 비롯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애초에 허벅지로 확인 가능한 타고난 피지컬에 노력이 더 해진 것이다.[57] 물론 덜한 편이지 없진 않다. 가히 충격적이라 할 수 있는 데뷔 시즌조차 전반기 이후 차범근에 대한 분석과 대응책이 나오기 시작하자 한동안 부침을 겪었고, 특히 과도한 출전으로 인해 허벅지 부상을 당하고도 1주일 만에 복귀한 25라운드 이후로는 드문드문 4점을 받기도 하며 부진한 평가를 받는다. 이런 차범근의 부진은 팀에 있어서도 큰 타격이어서 시즌 종료 7경기를 남겨둔 25라운드까지 리그 4위에 있던 구단이 내리 5연패를 당하며 9위까지 떨어져 시즌을 마감하고 만다.[58] 애초에 시즌 평점 2점대는 쉽게 받을 수 있는 점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 유명한 공격수들 중에서도 연속은커녕 전체 커리어 동안 시즌 평점 2점을 못 받거나 한두 번 받는 공격수들이 많았다. 일례로 1.FC 쾰른에서만 248경기 159골을 넣고 2년 연속 분데스리가 득점왕과 발롱도르 후보에 오른 디터 뮐러는 분데스리가 11시즌 동안 단 한 번을 제외하고(76/77 시즌 2.88) 모든 시즌에 3점대의 평점을 받았다.[59] 1위는 당시 분데스리가의 독보적인 공격수였던 카를하인츠 루메니게(2.305)이다.[60] 키커의 평점은 공격수와 공격형 미드필더를 구분하는 키커 랑리스테와 달리 공격수 부문(Sturm)에 공격형 미드필더(OFFENSIVES MITTELFELD)로 분류되는 선수들이 포함되어 있다. 당시 미드필더가 공격수보다 평점을 좀 더 후하게 받았던 것을 생각한다면 새삼 차범근의 평점 순위가 대단하게 다가온다.[61] 멀티골을 기록하고도 3점을 받은 공격수도 있었다.[62] 해당 기사는 FC 취리히와의 결승전에 관한 키커지의 기사로 차범근은 이날 2골을 넣으며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타이틀을 직역하자면 "또 돌고 있는 차(범근)"으로 기사 내용상 경기장을 양쪽 가리지 않고 이리저리 휘젓는 차범근의 모습을 표현한 것인데, 당시 차범근의 플레이 스타일을 짐작할 수 있는 제목이다. 링크를 보면 다른 신문사들의 기사도 볼 수 있다. 대충 주요 내용을 적는다면 아벤트포스트에서는 가장 뛰어났던 선수로 차범근을 언급하며 대부분의 공격을 이끌었고 너무 빨라 아무도 따라잡질 못했으며 예술적인 2번의 득점으로 기립박수를 받았다고 쓰여있다. 빌트지의 경우 스위스에서 일명 '터보'라 불리는 Ruedi Elsener라는 선수가 양쪽 날개에서의 빠른 스피드와 갑작스레 골라인으로 나타나 멋진 골을 집어넣는 차범근의 모습을 보며 "정말 무섭다"라고 인터뷰를 한 내용과 파울로도 차범근을 막을 수 없었다는 내용이 쓰여있다.[63] 기사 타이틀을 번역하면 '헤르타 BSC를 폭격하는 차붐'[64] 80년대 중반 대한민국 첫 프로 축구리그인 슈퍼리그가 개막하고 국내 프로팀들이 독일로 전지훈련을 갔을 때 가끔 참가하기도 했다.[65] 국내 기사에서는 82년 1월 실내 축구 대회라고 나와있지만 정확히는 81년 12월 29, 30일동안 벌어진 대회의 이야기이고 당시 팀은 2위를 했다. 참고로 82년 1월 대회에서는 팀 우승과 10경기 5골, 12월 대회 역시 팀 우승과 4경기 12골을 넣었다. 이와 같은 활약 때문에 83년 미국의 실내축구협회에서 동계시즌에 뛰어달라며 20만 달러의 계약금을 제시하기도 했다고 한다.[66] 사진에서 엄지를 치켜든 인물은 당시 프랑크푸르트 팀 골키퍼였던 클라우스 펑크(Klaus Funk)이다.[67] 차범근을 비롯해 베른트 횔첸바인브루노 페차이가 참여했다.[68] 첫 시즌이 끝난 뒤 1980년에 재계약 한 금액으로 처음 프랑크푸르트와의 계약 금액은 연봉 25만 마르크로(당시 약 7,500만 원) 팀 내 4위에 해당했다. 세율이 무려 50%나 되어서 생각보다 수입이 많지는 않았다고 한다.[69] 당시 서독 분데스리가의 평균 연봉은 18만 마르크(당시 5,400만 원 상당)이었고 차범근보다 높은 연봉을 받는 선수는 50만 마르크(약 1억 5,000만 원 상당)를 받는 카를하인츠 루메니게와 45만 마르크(약 1억 4,000만 원 상당)의 파울 브라이트너 정도밖에 없었다. 다만 이는 1980년 재계약 당시에 분데스리가 세 번째 수준이었다는 것으로 이후 분데스리가로 복귀한 베켄바워를 비롯해서 차범근보다 높은 연봉을 받는 선수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범근의 연봉은 당시 분데스리가에서 상위권에 해당하는 수준이었는데 1981년 11월 키커지에서 차범근 관련해 특집 기사를 다룬 내용 중 80/81 시즌에 연이은 치명적인 부상으로 출전 시간이 적었던 차범근에 대해 40만 마르크가 넘는 고액 연봉자 중 하나인 차범근이 작년 한해 동안 22만 마르크 값 밖에 하지 못했다고 표현하기도 하였다.[70] 200평 부지에 세워진 연건평 80평 규모의 지하 1층 지상 3층의 고급 주택이었다. 당시 차범근의 집을 방문한 특파원들의 기사에 따르면 정원 외에 별도로 사과나무숲이 있었다고 하며 이 집으로 이사한 바로 다음날 차두리가 태어났다. 후술하겠지만 프랑크푸르트 부회장이 차범근에게 부동산 사기를 친 집으로 레버쿠젠으로의 이적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71] 다른 것에 큰 욕심이 없던 차범근도 자동차에는 광적인 수집력이 있었다고 하는데 본인 스스로도 자산 관리를 부인이 하지 않았었다면 자동차에 모든 수입을 다 소비했을 것이라고 했을 정도다.[72]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분데스리가 선수들의 평균적인 연봉의 절반이 넘는 당시 한화로 3,775만 원 상당의 자동차였다. 참고로 1980년 대한민국의 중형차 한대 값이 389만 원, 강남 은마아파트 31평 매매가가 2,300만 원이던 시절이다.[73] 베켄바워나 루메니게 같은 선수들은 한 달에만 10회 이상의 팬 사인회를 가졌다.[74] 당시에는 선수의 사진이 인쇄되어 있는 선수 카드가 굿즈처럼 판매가 되었는데 사인회에서도 일반 종이보다 이 선수 카드에 사인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일명 사인 카드라 불리는 이 카드는 각 구단마다 팀 소속 선수들의 해당 시즌 유니폼 사진과 함께 뒷면 디자인을 다르게 하여 시리즈 형식으로 1년 치 씩 생산했고 이 판매가 선수들의 인기를 가늠하는 척도가 되기도 했다. 요즘으로 따지면 유니폼 판매량과 비슷한 느낌으로 볼 수 있는데 차범근은 분데스리가 선수 중 이 사인 카드 판매량이 매년 상위 5% 안에 들어가는 선수였다. 분데스리가 18개 팀의 베스트 11 선수만 따져도 198명에 이르는 것을 생각했을 때 분데스리가 주전 선수들 중에서도 높은 인기를 구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75] 요즘에도 영국에 가서 손흥민 경기를 직관하면 감동이 밀려오는데, 해외 여행도 어렵던 시절에 교민들이 느낀 감정은 대단했을 것이다.[76] 이후 자고 일어났더니 병실에 팬들이 보낸 꽃이 가득했다고 한다.[77] 80년 유로 우승과 82,86 월드컵 준우승 멤버로 수비수임에도 분데스리가 시절 292경기에서 61골을 넣었고, 4년 연속 분데스리가 베스트 11과 랑리스테 WK(월드클래스) 1회, IK(인터내셔널클래스) 14회, 85년 발롱도르 8위, 독일 올해의 선수를 받았으며 이탈리아로 무대를 옮겨서도 세리에 A와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거머쥔 독일 역대 최고의 수비수 중 하나이다.[78] 쉽게 말해 손흥민이 도르트문트에 강했던 것과 비슷한데, 차범근은 카이저슬라우테른을 상대로 9골을 넣었다.[79] 이날 역시 프랑크푸르트의 3:2 승리였으며 팀의 세 번째 골을 넣은 차범근은 부상으로 교체 아웃 되었음에도 평점 1점과 해당 라운드 MVP 및 베스트 11에 선정되었다.[80] 참고로 이 경기는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의 80년대 최다 점수 차 승리 경기로 2021년 기준 역대 최다 점수 차 승리 5위에 해당한다.[81] 당시 프랑크푸르트 홈구장의 이름이다.[82] 80년대 최고의 외국인 수비수로, 분데스리가 255경기 45골을 기록하며 공격면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보인 선수이다. 랑리스테 WK(월드클래스) 3회와 IK(인터내셔널 클래스) 7회를 받았으며 4회 연속 발롱도르에 이름을 올린 오스트리아 레전드 선수[83] 프랑크푸르트 원클럽맨으로, 분데스리가 최다 출전자(602경기)이다.[84] 국내에는 빌트지에서 수여한 페어플레이 상이 널리 알려져 있는데, 아무래도 당시 이 상 소식을 대서특필한 빌트지가 준 것으로 와전된 듯하다.[85] 대한민국 첫 프로 축구 리그 명칭[86] 사실 이러한 언론 보도는 시대 상과도 관련이 있는데, 미디어 매체뿐 아니라 해외리그 이적이 생소하던 시절이라 현지에 사는 교민 회장을 통한 전화 인터뷰나 가끔씩 파견되는 소수의 특파원을 통하지 않는 이상 제대로 된 소식을 들을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머나먼 이국땅의 분데스리가라는 곳이 유명한 건 알겠는데 당장에 아시아에서 제대로 된 프로 리그로 존재하던 홍콩 리그 역시 굉장히 커 보였던 것이다. 무엇보다 당시에는 축구 선수의 해외 진출도 산업 역군으로 취급했었기 때문에 리그의 수준을 고려하기보다 얼마나 돈을 많이 주는가에 초점이 맞춰진 기사도 꽤 보인다. 또한 국내 프로 축구리그가 창설된 83년 이후로는 국내 복귀에 대한 기사가 한 해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였다.[87] 차범근은 프랑크푸르트 시절 전 경기를 선발 출전했고, 10년의 독일 선수 생활 중 교체로 출전한 경기는 레버쿠젠 시절 리그와 컵 대회, 유럽 대회 통틀어 단 세 번뿐이다.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루머[88] 기사가 실린 10월 18일 차범근은 선발 출전해 평점 1점을 받았고 해당 라운드 MVP와 BEST 11에 선정됐다. 그 이전 경기 역시 평점 3점과 2점 기록[89] 이 기사를 작성한 박갑철은 아이스하키 선수 출신의 1세대 원로 스포츠 기자로, 김운용 전 IOC 회장 및 조선일보방우영 회장과도 돈독한 사이일 정도로 스포츠 기자계의 거물이었다#. 1998년에는 학부모로부터 뇌물을 받고 본인의 모교인 연세대 아이스하키 팀에 부정입학을 알선한 혐의로 구속된 전적이 있다# (...) 2023년 현재 생존.[90] 이 경기에서 소쇼 수비진은 차범근을 막기 급급했고 그로 인해 생긴 허점을 다른 프랑크푸르트 공격진들이 파고들어 골을 넣었다. 차범근은 팀이 4:0으로 앞선 후반 12분이 돼서야 중앙에 머물며 골을 노렸는데 차범근을 비롯한 프랑크푸르트 선수들 모두 4:0이란 스코어에 방심한 탓에 소극적인 플레이를 하였고 결국 후반 막판 2골을 실점하고 만다. 심지어 그중 한 골은 자책골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원정 다득점 원칙으로 인해 8강이 좌절된 것을 생각해 보면 뼈아픈 실책이 아닐 수 없다.[91] 함부르크의 경우 생테티엔에 1차전 0:5, 2차전 0:1로 패배하며 탈락했다.[92] 1위 빌헬름 후베르츠(Wilhelm Huberts)(63/64~66/67 시즌)/뤼디거 벤첼(Wenzel Rüdiger)(75/76~77/78 시즌) 47골, 3위 볼프강 솔츠(Wolfgang Solz)(63/64~ 66/67 시즌) 41골[93] 키커 서부지역 편집장으로 2015년 10월 23일 네이버 스포츠에서 차범근의 분데스리가 100경기 출전 33주년을 맞아 인터뷰했다.[94] 다만 해당 링크의 인터뷰 내용은 프랑크 루셈의 기억에 기반한 서술이다 보니 다소 사실 관계가 어긋나는 부분이 있다. 차범근의 시즌 평점을 3점대로 알고 있다든지 헤르타 베를린전에서 활약한 그레고르 콰스텐 골키퍼의 평점이 3점이었는데도 최고 평점을 받았다고 하는 등 기록적인 디테일의 정확도는 다소 부정확하다.[95] 종합 스코어 2:1 프랑크푸르트 승리[96] 간혹 퍼거슨이 선수로 뛸 당시 만난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지만 당시 퍼거슨은 1974년부터 감독 생활을 시작하여 1978년부터는 에버딘의 감독을 맡고 있었다.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바로 감독직에 뛰어든 것인데 은퇴 당시의 나이는 33세로, 현대 기준에서는 조금 빨라보이긴 해도 은퇴를 못 할 나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33세의 나이로 바로 감독직을 수행하는 것은 지금 기준으로 봐도 매우 젊은 편이며, 저 발언을 한 당시 기준인 38세로 잡아도 리그에서 가장 젊은 감독 축에 들어간다. 애초에 40대 초중반만 해도 젊은 감독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97] 프랑크 루셈 키커 서부지역 편집장의 인터뷰에 따르면 '차범근이 분데스리가 최고 수준의 선수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가 폭주기관차처럼 수비진을 향해 돌진할 것도 알았다. 하지만 막을 방법이 없었다'라고 했다고 한다.[98] 오쿠데라 야스히코는 분데스리가에서 열 시즌 동안 234경기에서 26골을 넣었다. 당시 동양인으로서 대단한 활약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흔히들 차범근에 견주면서 오쿠데라는 별 볼일 없다고 여기는 경우가 있는데, 동양인 최초의 분데스리가 진출자로서 아시아 선수로서는 처음으로 분데스리가 우승을 경험했으며, FC 쾰른 소속으로 78/79 유러피언컵에서 골을 넣은 적도 있는 선수이다. 차범근이 거둔 골이나 여러 활약이 엄청났기에 상대적으로 가려졌는데, 84년 일본 축구 전문지 일레븐에서 뽑은 세계 축구계를 주름잡은 스타 100인에 차범근은 들어갔으나 오쿠데라는 제외되는 등 이룬 업적에 비해 여러모로 평가절하를 당한 적이 많다.[99] 차범근의 분데스리가 첫 번째 멀티골에 해당한다. 참고로 차범근은 선수 시절 공식 경기에서만 20회의 멀티골을 기록했다.[100] 참고로 차범근은 분데스리가 14라운드까지 라운드 베스트 11에 5번 선정되며 공격수 중 1위, 전체 선수들 중 2위에 올라 있는 상태였다.[101] 80/81 시즌 분데스리가 11라운드와 81/82 시즌 분데스리가 4라운드, 두 경기 모두 차범근이 부상으로 치료를 받고 있던 기간에 치러진 경기였다.[102] 프랑크푸르트에서만 14시즌을 뛰었으며 강력한 슈팅을 날리는 플레이로 '닥터 해머'라는 별명이 있던 선수로 미드필더임에도 분데스리가 426경기 141골을 넣었다.[103] 76/77시즌부터 88/89시즌까지 감독만 15번 바뀌었다.[104] 해당 사건을 다룬 Kicker 메인 표지[105] 이 때문에 초반 경기에 팀 동료들이 차범근에게 패스를 안 하기도 했는데 이를 본 차범근의 와이프 오은미 씨가 선수들을 불러 음식을 대접하며 선수들에게 남편을 잘 좀 봐달라고 하기도 했다고 한다. 정작 차범근은 말도 안 통하고 첫 진출에 정신도 없어서 그런 상황을 잘 인식하지 못했었다고 회고했다.[106] 축구팀뿐 아니라 테니스, 핸드볼 등 당시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가 운영하던 13개 종목의 스포츠 팀 대표 선수들이 초청된 행사였다.[107] 제네코비치 감독과 함께했던 시기에 차범근은 7경기 3골을 기록했다.[108] 이는 다니모 자그레브의 유일한 유럽 클럽 대항전 우승이기도 하다.[109] 바이에른 뮌헨의 분데스리가 첫 우승이자 최초의 더블이었다.[110] 더욱이 차범근의 이적은 구단의 재정적 어려움도 있었지만 결정적인 이유가 다름아닌 구단의 부회장인 젠커(Zenker)가 차범근에게 행한 부동산 사기였기 때문에 대내외적으로 비난이 거셌다.[111] 이와는 별개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차범근은 음주로 문제를 일으키던 제베츠 감독을 크게 신뢰하지 않았다고 한다.[112] 당시 분데스리가에서는 연봉의 50%를 세금으로 냈기 때문에 같은 연봉을 받더라도 수익적으로 더 많은 연봉을 받게 되는 셈이었다.[113] 심지어 차범근의 리그 마지막 경기 후 진행될 예정이었던 고별 행사까지 일방적으로 취소하기도 했다. 당시 부동산 상황이 수면 위로 오르지 않았던 시점이라 대다수의 팬들은 당황할 뿐이었고 구단 신문조차 '아무리 매정하게 이적을 한다고 하지만 차범근 같은 선수의 마지막을 이렇게 초라하게 만드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라는 기사를 내기도 했다.[114] 애초에 시세보다 비싼 가격에 집을 샀기 때문에 추가금에 해당하는 융자금을 마냥 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집을 팔자니 매입가의 절반 가격에 팔아야하는 금전적인 손실이 있고 무엇보다 남은 융자금이 걸림돌이 되었다.[115] 이후에 젠커는 차범근을 포함하여 분데스리가 선수 80명을 대상으로 이런 사기 행각을 벌인 것이 드러나 결국 고소를 통해 법적 처벌을 받았는데 재판에서 젠커는 본인뿐 아니라 모든 중계업자가 이렇게 거래를 한다고 항변하기도 하였다. 말 그대로 당시 서독에 악질 부동산 관행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인데 이 사건을 통해 당시 재정난에 휩싸인 분데스리가는 건전성 문제까지 더해지게 된다.[116]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차범근이 감당하고 있던 융자금을 처리해야 했으며 이것을 완납했다 하더라도 부동산 처분 및 이적 법안 처리에 따른 추가 시일이 소요되었다. 여기에 개인 합의와 별개로 재정 문제로 최대한 많은 금액을 받고 팔려는 프랑크푸르트와의 이적료 협상까지 해야 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감내할 타 리그 구단이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세리에 A 구단과의 이적 무산은 이적 시장 마감이 얼마 남지 않았던 시점이었던 것도 한몫했다.[117] 분데스리가 시절 내내 러브콜을 보내왔던 대우 축구단은 김우중 대우 회장이 직접 나서서 차범근이 처한 문제를 모두 해결해 줄 테니 한국으로 와달라고 제안을 했다.[118] 사실 레버쿠젠은 차범근이 생각조차 안 하던 구단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레버쿠젠은 차범근이 프랑크푸르트에 입단한 79/80 시즌 2부 리그에서 갓 승격한 팀이었고 차범근이 프랑크푸르트에서 뛰던 기간 동안 10위 안으로 들어가 본 적이 없던 하위권 팀이었기 때문에 굳이 수준이 더 낮은 팀으로 이적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재정난에 시달리던 다른 분데스리가 팀들과 달리 바이엘 주식회사의 재정적 지원을 통해 자금이 충분했던 레버쿠젠은 차범근의 융자 잔액인 약 30만 마르크를 프랑크푸르트에 지불하여 급료 압류 문제를 해결해 줬을 뿐 아니라 부동산 매입에도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는 등 차범근의 문제를 전부 해결해 주었고 여기에 데트마어 크라머 레버쿠젠 감독의 적극적인 설득까지 더해져 차범근의 영입을 성공하게 된다.[119] 브라이트너는 82/83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했다.[120] 슈트트가르트에서만 224경기 81골을 기록했으며 유로 80 우승, 82 월드컵 준우승 멤버이기도 하다. 랑리스테 IK 등급을 7회 연속 받으며 80년대 당시 분데스리가에서 손꼽히는 미드필더였으며 키커 분데스리가 올해의 팀 2회 및 유로 80 올해의 팀에 선정되기도 하였다.[121] 81/82 시즌 9위였던 슈투트가르트는 82/83 시즌 리그 3위에 올랐다.[122] 79/80 시즌 강등 당했던 베르더 브레멘은 80/81 시즌 오토 레하겔 부임 후 전술적인 변화와 체질 개선으로 한 시즌만에 분데스리가로 복귀했고 82/83 시즌 2위를 기록했다. 참고로 브레멘은 이후 레하겔 감독과 함께 81년부터 95년까지 분데스리가 2회, DFB 포칼 2회, 위너스 컵 1회 우승을 경험한다.[123] 당시 헤르타 BSC는 16위를 기록 중이었고 결국 최종 18위로 강등되었다.[124] 결과적으로 이는 굉장한 선구안이 돋보이는 기사였는데 실제로 차범근이 레버쿠젠으로 이적 후 프랑크푸르트는 여섯 시즌 동안 16-12-15-15-9-16위로 곤두박질치며 기나긴 침체기를 겪었으며 특히 팀 내에서 리그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한 선수가 여섯 시즌 동안 단 두 번 밖에 없을 정도로 심각한 공격력 부재에 직면하게 된다.[125] 2014년 분데스리가 선정 한국 선수 역대 Top 10 Goals 3위[126] 당시 바이어 04 레버쿠젠 감독[127] 차범근의 바이어 04 레버쿠젠 이적 후 첫 경기인 바이에른 뮌헨 전과 마지막 시즌 마지막 경기 카이저슬라우테른 전 날짜[128] PK 유도 1회[129] PK 유도 1회[130] 바이어 04 레버쿠젠 역대 분데스리가 득점 6위[131] 레버쿠젠에서 페널티킥 골 없이 50골 이상을 기록한 유일한 선수[132] PK 유도 1회[133] 레버쿠젠 이적 비화[134] 차범근 본인은 이적료 130만 마르크(당시 약 4억 원)였다고 하는데 이는 기본 이적료에 레버쿠젠이 지불한 약 30만 마르크의 부동산 융자금이 합산된 총액이다. 공식적인 금액은 100만 마르크였으며 당시 서독 내에서는 최고 수준의 이적료였다. 유럽 축구 통계 매체인 트랜스퍼마크트가 2020년에 차범근 이적 1년 뒤인 84/85 시즌의 세계 이적료 순위를 발표했는데 1위는 마라도나가 바르셀로나에서 나폴리로 이적할 당시 기록한 700만 유로였고 2위는 루메니게가 바이에른 뮌헨에서 인터밀란으로 이적시 기록한 550만 유로이다. 독일 내의 최고 이적료는 마테우스가 묀헨글라트바흐에서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하며 기록한 120만 유로인데 이는 84/85 시즌 발생한 이적료 중 세계 7위에 해당했다.(트랜스퍼마크트는 단위를 유로로 통일해 발표했다.) 좀 더 비교하기 쉽게 83년 당시 서독의 화폐단위인 마르크로 환산한다면 마라도나의 이적료는 840만 마르크(당시 약 27억 원 상당), 루메니게 650만 마르크(당시 약 21억 원 상당), 마테우스 146만 마르크이다.(당시 약 4억 6천만 원 상당) 참고로 마테우스 이전 바이에른 뮌헨 최고 이적료는 78년 분데스리가 여름 이적 시장에서 기록한 브라이트너의 110만 마르크였다.(당시 약 3억 5천만 원 상당) 이것을 보면 알 수 있듯 80년대 세계 축구 시장 중 재정 규모는 당시 무섭게 성장하던 이탈리아 세리에 A가 압도적이었다.(세리에 A는 막대한 재정을 바탕으로 세계 각지의 선수들을 끌어모으며 84년 UEFA 리그 랭킹 2위를 기점으로 이후 유럽 최정상 리그가 된다.) 반면 차범근이 이적하던 시기의 분데스리가는 대부분의 구단이 재정적인 문제로 큰 위기가 찾아온 상황이었다. 일례로 당시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함부르크조차 프랑크푸르트가 차범근의 이적료로 100만 마르크 이상을 제시하자 70만 마르크 이상은 힘들다며 골머리를 썩기도 했다. 차범근의 레버쿠젠 이적 비화에도 나와있지만 당시 프랑크푸르트 부회장으로부터 부동산 사기를 당한 차범근은 재정적인 압박에 직면했던 관계로 이적료와 급료가 높은 이탈리아로 이적하길 원했으며 인터밀란과 나폴리, AC 밀란 등과 이적 협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폴리와 AC밀란의 제안에 고민하던 중 서독의 이적 관련 법안 변경으로 부동산 문제가 있던 차범근의 해외 이적이 불가능하게 됨에 따라 하는 수 없이 서독 내에서 이적이 추진되었다.[135] 이 기록은 30년이 지난 2016-17 시즌 프리미어 리그 토트넘 홋스퍼 FC에서 뛰던 손흥민이 21골(리그 32경기 14골)을 넣으며 깨졌다. 이후 2020-21 시즌 프리미어리그에서 손흥민이 35라운드 기준, 22골(리그 17골)로 다시 갱신했다.[136] 기본적으로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는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하는 모든 선수+해외 리그에서 활약하는 독일 선수만을 대상으로 후보군을 정함에도 뜬금없이 마라도나가 명단에 포함되었다. 당시 월드컵에서 역대급 활약을 한 마라도나의 위엄이 느껴지는 결과라 할 수 있다.[137] 덴마크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덴마크의 전설적인 미드필더이다. 모든 소속팀에서 주축 선수로 활약하며 AFC 아약스에서 7회 우승(리그 5회+컵 대회 2회), FC 바이에른 뮌헨에서 4회 우승(리그 2회+컵 대회 2회), PSV 에인트호번에서 6회 우승(리그 2회+컵 대회 3회+유러피언컵 1회)를 이끌었는데 특히 87/88 시즌 에인트호번의 트레블 주역이기도 하다. 덴마크 국가대표로는 84 유로 4강과 86 월드컵 16강을 이끌기도 했다.[138] 헤센주에 본사를 두고 1948년부터 1988년까지 발간된 하루 발행부수 약 18만 부 규모의 석간지였다. 1988년 12월 12일 13만 부의 발행부수를 마지막으로 폐간했는데, 당시 주 2회씩 발간하는 키커의 1회 발행부수가 40만에 육박했고 프랑스 최대 축구 전문지였던 풋볼이 22만, 남미 최대의 스포츠 전문 주간지인 브라질의 플라카르가 30만 부였다. 아벤트포스트는 전문잡지가 아닌 신문이었기 때문에 궤를 달리하지만 영국의 타임스의 발행부수가 83년 기준 30만 5천7백74부인 것을 생각하면 지방 석간지치고 마냥 적은 발행부수는 아니었다.[139] 빌트 자이퉁과 빌트 스포츠를 따로 발간했다.[140] 물론 폐간된 언론사의 상인 데다 과거와 현재 모두 훨씬 인지도 높은 상이 많다 보니 이런 상도 있었구나 정도이지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141] 현재 판매 글은 삭제되었지만 게시글 이미지는 남아있다. 이슈가 되자 게시글을 바로 삭제했는데 상의 인지도 때문인지 판매자가 누군지 밝혀지지 않고 금세 묻혔다.[142] 프랑크푸르트 시절까지 포함해서 리그 득점으로만 따진다면 5시즌 연속, 시즌 기록으로 따진다면 7시즌 연속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했다.[143] 당시 UEFA 컵은 리그 우승과 컵 대회 우승 팀을 제외한 상위 4팀이 진출할 수 있었는데 85/86 시즌 당시 FC 바이에른 뮌헨이 리그와 DFB 포칼 우승을 거머쥐고 유러피언 컵에 진출하게 되자 DFB 포칼 준우승팀이었던 VfB 슈투트가르트가 컵 대회 우승 팀인 바이에른 뮌헨 대신 UEFA 컵 위너스컵에 나가게 된다. 그리고 리그 최종 순위 5위였던 슈투트가르트가 위너스 컵 진출로 빠지자 6위였던 레버쿠젠이 UEFA 컵에 진출하게 된다.[144] 리그 2위였던 함부르크 SV가 DFB 포칼 우승으로 위너스 컵에 진출함에 따라 6위였던 레버쿠젠이 UEFA 컵 진출권을 얻을 수 있었다.[145] 1차전에서 3:0으로 지고, 2차전에서 3:0으로 이겨서 승부차기 끝에 우승한다. 이때 극적으로 마지막 세 번째 골을 넣은 선수가 다름 아닌 차범근이다.[146] 87/88 UEFA컵 우승은 2024년 기준 현재까지도 레버쿠젠 구단 역사상 유일한 유럽 클럽 대항전 우승이다. 23/24 시즌에 레버쿠젠이 돌풍을 일으키며 리그, 포칼 무패우승에 유로파 리그 결승까지 오르며 이 기록을 깨나 했지만 아탈란타 BC 상대로 충격적인 3:0 패배를 당하면서 아쉽게도 이 기록은 깨지지 못했다.[147] 당시 외국인 최초의 300경기 출전은 1966년부터 77년까지 뛴 덴마크 출신의 Ole Björnmose이 기록했다. 차범근은 외국인 선수로는 역대 두 번째에 해당한다.[148] 당시 외국인 선수 역대 2위[149] 현재 선수들에 대입을 해보자면 세르히오 아궤로맨체스터 시티 FC에서 3시즌 간(17/18~19/20 시즌) 팀 리그 득점의 19.14%를 기록했으며 리버풀 FC에서 3시즌 동안(18/19~20/21 시즌) 모하메드 살라는 팀 리그 득점의 26.03%를 기록했다. 물론 팀에서의 영향력을 피력하기 위한 지표일 뿐 이들과 득점력이 비슷하다는 것은 아니다.[150] 1986년 기준[151] 당연히 차범근의 소속팀인 레버쿠젠도 포함되었다.[152] 1979년 2부 리그에서 첫 승격한 팀으로 모기업인 바이엘 기업의 지원하에 성장 중인 팀이었다. 차범근이 프랑크푸르트에서 활동하던 네 시즌의 레버쿠젠 성적은 12-11-16-11위를 기록했으며, 분데스리가가 18개 팀으로 이루어졌다는 걸 생각하면 지금처럼 명문이라고 불리기는 힘든 팀이었다. 특히 16위를 기록한 81/82 시즌은 강등 플레이오프까지 치러 겨우 잔류에 성공했다.[153] 경기장을 보면 FC 쾰른의 홈구장인 뮌게어스도퍼 슈타디온인 것을 알 수 있다.[154] 결과는 1,2차전 종합 1:0 레버쿠젠의 승리[155] 83/84~88/89 시즌[156] 온전히 공격수만을 따졌을 때의 순위이고 기존 키커 평점의 분류 방식대로 공격형 미드필더(OFFENSIVES MITTELFELD)로 분류되는 선수들을 포함하여 책정한다면 4위에 해당한다.[157] 이 역시 온전히 공격수만을 대상으로 책정한 순위이고 키커 평점 분류 방식대로 공격형 미드필더로 분류되는 선수를 포함시킨다면 6-15-7-18-6-4위에 해당하는 평점이다.[158] 뒤셀도르프가 70년대 후반에 DFB-포칼 2회 연속 우승을 거두는 등 최전성기를 구가했던 팀이었다 보니 분데스리가 승격 이전에는 밀릴 수 있다 쳐도 80년대 들어서는 레버쿠젠과 비슷한 리그 순위를 기록하던 중하위권 팀이었는데도 상대 전적이 매우 좋지 않았기 때문에 비슷한 수준의 팀에게 승점을 얻어내야 했던 레버쿠젠에게 있어 뒤셀도르프에 대한 약세는 상위 순위로 도약하기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159] 2021년 8월 기준 3위에 랭크되어있는데 레버쿠젠 소속 선수로는 여전히 1위에 해당한다.[160] 외국인 선수로 따진다면 역대 두 번째 선수에 해당하는데 과거 프랑크푸르트 동료였던 오스트리아 출신의 브루노 페차이가 불과 두 경기 전인 86/87 시즌 1라운드에서 수립했다.(프랑크푸르트 141경기+브레멘 100경기)[161] 레버쿠젠 소속으로 분데스리가 100경기 출전 기록을 세운 최초의 외국인 선수는 노르웨이 출신의 아르네 라르센 외클란(Arne Larsen Økland)이다.[162] 아르네 라르센 외클란(Arne Larsen Økland)(80/81~82/83 시즌), 허버트 바스(Herbert Waas)(82/83~85/86 시즌)와 공동 1위[163] 당시 분데스리가 2-5-7-2-6-4위의 성적을 기록하던 팀이었다.[164] 당시 분데스리가 1-10-5-12-4-5위의 성적을 기록하던 팀이었다.[165] 2021년 8월 기준 3위[166] 해당 시점에서 가장 최근 경기였던 84/85 시즌 분데스리가 21라운드 경기에서 차범근의 멀티골로 0:2로 패배했던 만큼 차범근에 대한 함부르크의 주의와 견제는 대단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 3라운드 경기에서 차범근은 1골을 넣으며 팀의 3:1 승리를 이끌었으며 이후 1986년 1월 25일 분데스리가 20라운드에서도 2골을 넣으며 팀의 3:2 승리를 이끌었다.[167] 해당 사진에서 차범근 오른쪽에 안경을 쓴 인물이 구자철VfL 볼프스부르크에서 뛰던 시절 함께 했던 펠릭스 마가트 감독이다. 차범근과 같은 시기에 분데스리가에서 뛰었고 지도자 코스까지 함께 했던 만큼 꽤나 절친한 것으로 보이는데 구자철의 회고에 따르면 명단에서 제외되는 횟수도 많고 출전하게 되더라도 원치 않는 위치에서 뛰는 등 구단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던 시기에 차범근이 방문했는데 대뜸 "마가트 방은 어디냐"라고 물은 뒤 한동안 독대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 경기부터 구자철이 원했던 위치에서 이전보다 더 많은 기회를 얻으며 출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단순히 감독을 만나러 왔다기 보다 구자철에게 많은 조언을 해주고 겸사겸사 감독을 만난 것이기 때문에 마가트 감독이 별안간 구자철을 중용한 것이 차범근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구단을 방문해서 감독의 방에 출입하고 독대를 할 수 있는 차범근의 위상을 알 수 있으며 자신을 이어 분데스리가에서 활약 중인 후배를 위한 마음을 엿볼 수 있다.[168] 당시 구시대적인 관습에 얽매어있던 한국 축구 관계자들과 갈등을 빚고 사퇴하기는 했지만 서정원신태용같은 선수들이 크라머의 축구 철학에 매료되어 스승으로 삼고 지도자 생활을 걷고 있다.[169] 차범근이 지도 받은 감독들 중 가장 많은 경기를 함께 하였다.[170] 미헬스 감독과 함께한 기간 동안 차범근은 27경기 3골을 기록했다.[171] 분데스리가 9경기+DFB 포칼 1경기[172] PK 유도 5회[173] PK 유도 5회[174] 70년대 초반부터 80년대 중반까지. 차범근은 1978년 26세의 나이로 진출.[175] 실제로 활약 당시 독일 신문에 차범근이 부상 중에 팬들에게 전한 한국어 편지가 실리고 구단에서 전광판에 한국어 자막을 띄워주거나 독일 방송에도 출연하는 등 현지에서도 인기가 상당했으며, 차범근이 몸 담은지 30년이 지난 프랑크푸르트를 브라질 월드컵 기념 방송에서 방문했는데 여전한 인기를 자랑했다.[176] 비유럽권 선수로서는 1위에 해당한다.[177] 이 기록은 31년이 지난 2020년 하세베 마코토가 분데스리가 12년 차 만에 경신했다.[178] 여기서 말하는 친선경기란 기본적으로 독일 내 팀들과의 경기는 물론 타국 리그 팀을 초청해 벌이는 친선 토너먼트 대회 등을 포함하는 이야기로 관중 규모를 보면 알겠지만 이런 경기들의 표값이 상당하다 보니 당시 분데스리가 구단들에 굉장한 수익을 가져다 주었고, 너 나 할 것 없이 주전 선수들을 내보내고 팬 사인회를 갖는 등 부가적인 행사를 많이 가졌다. 선수들 입장에서도 수입의 50%를 가져가는 독일 세금 때문에 추가적인 수익이 필요해 뛰는 경우가 많았고 이는 루메니게와 베켄바워 역시 마찬가지였다.[179] 다만 143경기를 모두 풀타임 뛴 것은 아니고 전반전만 뛰거나 교체 출전을 하기도 하였다.[180] 프랑크푸르트는 아카이브로 확인 가능하지만 레버쿠젠은 친선경기 아카이브가 없어 안타깝게도 몇 경기를 뛰었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다.[181] 이와 비슷한 사례로 손흥민과 이재성을 들 수 있는데, 손흥민의 경우 유망주였던 함부르크 시절을 제외하면 레버쿠젠과 토트넘 두 구단에서 등번호 7번을 9년간 유지하고 있으며 이재성 역시 유럽 진출 후 홀슈타인 킬과 마인츠에서 연이어 7번을 달고 있다. 두 선수 모두 프로 데뷔 이후 줄곧 한 번호를 달고 뛴 차범근과 정확히 같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유럽 진출 후 메인 넘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맥락이 같다고 볼 수 있으며 대단히 드문 경우에 속한다.[182] 차범근이 뛰던 시절 분데스리가가 최고에서 내려오던 시절이라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는데, 차범근이 뛰었던 79년부터 89년까지 UEFA 리그 랭킹 1-1-1-1-1-1-3-2-3-3-2위로 여전히 최상위에 해당하는 리그였다.[183] 이 기록은 11년동안 유지되다 이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레전드 스트라이커인 스위스 출신의 스테판 샤퓌자가 99년에서야 기록을 갈아치우게 된다. 추후 FC 바이에른 뮌헨의 브라질 출신 선수 지오반니 에우베르가 기록을 깼지만 몇 년 뒤 당시 베르더 브레멘 소속이던 페루 출신의 클라우디오 피사로가 기록을 경신했다. 그리고 2015년 바이에른의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 2018년 아르연 로번이 차붐의 기록을 넘어섰다. 2021년 8월 기준 외국인 최다득점 공동 8위에 랭크되어 있다.[184] 2021년 8월 기준 55위(3800명 中)[185] 페널티킥으로 골을 넣지 못했다는 게 아니라 시도 자체를 한 번도 안 했다는 얘기다. 쉽게 말하면 98골이 전부 다 필드 골이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일본 vs 파라과이 경기를 해설(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16강, 또는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일본을 참고)할 때, 분데스리가에서 페널티 킥을 하나도 안 찬 사실을 본인 입으로 인증했다. 이유는 실축할까 봐 무서워서...즉 분데스리가 골 기록 중에 페널티 킥은 한 골도 없다는 소리가 된다. 본인 입으로 말하고 쑥스러운 듯 웃었다. 참고로 당시 경기는 너무 재미없어서 오히려 이런 이야기가 더 재미있었다.[186] 근래 들어 유난히 객관성을 빙자하여 선수들이 이룬 업적들을 평가 절하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데, 차범근이 들어 올린 UEFA컵 역시 그 위상에 대해 말이 많다. 우선 기본적으로 현재의 유로파 리그에 비해 수준이나 흥행, 권위가 높은 것은 명백하다. 각 리그 우승 팀과 FA컵 우승 팀을 제외한 현재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에 해당하는 순위의 팀들이 대거 출전하는 만큼 흥행 면에서는 오히려 챔피언스리그의 전신인 유로피언컵을 앞지르기까지 했다. 문제는 이 UEFA컵이 당시에 어느 정도 위상이었는지가 화두로 떠오른 것인 데, 애초에 이런 논쟁 자체가 타인의 위상이나 그에 대한 찬양을 비하하기 바쁜 이들의 고약한 줄 세우기 일뿐, 별 의미가 없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UEFA컵은 유럽 대회 중 가장 권위가 떨어졌으며, 당대 유러피언컵과 위너스컵에 비해 취급이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우승을 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는 궤변까지 일삼는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이런 논쟁이 의미가 없는 이유는 각 대회의 특성이 분명히 나눠져 있다는 것이다. 유럽 리그 우승 팀들끼리의 경쟁 대회인 유러피안컵, 유럽 리그 FA컵 우승 팀들의 경쟁 대회인 UEFA컵 위너스컵, 유럽 리그 상위권 팀들의 경쟁 대회인 UEFA컵까지 애초에 이 셋은 본질적으로 의의가 다르다. 기본적으로 각 대회의 자격 요건에 해당하는 유럽 리그의 모든 팀들이 경쟁을 하는 유럽 축구 역사의 대표적인 대회들로, 특정 대회의 위상이 높고 낮음을 따지며 낮은 대회의 우승은 의미가 없다는 식으로 취급할 수준이 아닌 것이다. 누차 강조하지만 유럽 각 리그 최상위 팀들이 참여하는 유럽 대회의 우승은 분명 의미 있고 위대한 업적이다.[187] 그 중 한 명이 울리 슈틸리케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다. 슈틸리케는 1975년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소속으로 UEFA컵에서 우승을 차지한 뒤, 10년 뒤인 1985년에는 레알 마드리드 소속으로 다시 한 번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다른 인물들로는 데니스 베르캄프(1992년 AFC 아약스,1994년 인테르), 로타어 마테우스위르겐 클린스만(1991년 인테르, 1996년 FC 바이에른 뮌헨), 파울루 페헤이라(2003년 FC 포르투, 2013년 첼시), 호세 안토니오 레예스(2010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2014년 세비야), 마르코 마린(...)(2013년 첼시, 2014년 세비야), 후안 마타(2013년 첼시, 2017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페르난도 토레스(2013년 첼시, 2018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라다멜 팔카오(2011년 포르투, 2012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다비드 데 헤아(2010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2017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케빈 가메이로 (2014년 세비야, 2018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비센테 이보라 (2015년 세비야, 2021년 비야레알) 비톨로(2014년 세비야, 2018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윌리안 (2008년 샤흐타르, 2018년 첼시)[188] 시즌으로 보면 일곱 시즌 연속이다.[189] 당시 분데스리가에서 뛴 선수는 대략 360여 명 정도였는데, 그중 140여 명 정도만 랑리스테 등급을 받을 수 있었다.[190] 공격형 미드필더를 제외한 순수 포워드 기준이며 공격형 미드필더를 포함하면 88/89 시즌 평점 순위는 4위에 해당한다.[191] 공격형 미드필더를 제외한 순수 포워드 기준이며 공격형 미드필더를 포함하면 하반기 순위는 6위에 해당한다.[192] 2021년 대화의 희열3에 출연해 말한 이야기로, 이런 압박감은 선수 시절 내내 느꼈다고 한다.[193] 풀타임 출전이 아닌 유일한 경기인 8강전 2차전에는 86분을 소화하였다.[194] 당시 어시스트 기록이 공식적으로 집계되지 않았기 때문에 차범근의 정확한 어시스트 기록을 알 수는 없지만 차범근의 플레이 스타일 자체가 득점만큼 많은 어시스트와 키패스를 양산해 내었으며 UEFA 컵에서도 마찬가지였다. 79/80 시즌 UEFA 컵에서의 어시스트 횟수도 언론 매체 등에 따르면 5~6개, 유튜브 등 영상으로 확인 가능한 도움도 4개에 이른다.[195] 당시 한 독일 언론사는 차범근을 잃은 프랑크푸르트는 이빨 빠진 호랑이와 같다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196] 결승 2차전에서 극적인 동점골을 성공시켜 승부차기 우승을 이끈 주인공이 차범근이다.[반론1] 그러나 차범근이 우승권 팀으로 이적했다고 해서 득점 순위가 반드시 올라간다는 보장은 없다. 중위권 팀에서는 팀이 경기 주도권을 잡기가 어려워지지만, 대신 팀내 공격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은 압도적으로 높아져 감독의 전술과 동료의 지원이 본인에게 맞춰서 본인이 공격 주도권을 가지면서 공격을 이끌어 대부분의 득점 루트가 본인 중심으로 만들어진다. 또한 중위권 팀에서 뛰면 우승권 팀에서 뛸 때보다 상대의 수비 라인이 높아지는 경향성이 있기 때문에 이를 공략하기 용이해진다. 차범근이 우승권 팀으로 이적한다면, 팀이 점유율을 비롯한 경기 주도권을 가져가면서 많은 기회를 제공받아 득점 기록이 늘어날 수도 있지만, 반대로 과거 레알 마드리드의 벤제마처럼 팀의 에이스 공격수를 조력하는 역할을 맡거나, 심하면 주전 경쟁에서 밀려나면서 골 기록이 하락할 수도 있다. 실제로 맨체스터 시티의 잭 그릴리시나 리버풀 시절의 이아고 아스파스같이 중위권 팀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많은 공격 포인트를 기록했다가 상위권 팀으로 이적하고 공격 주도권을 잃고 주전 경쟁에서 밀려나면서 오히려 공격 포인트가 하락한 경우도 많다.[반론2] 본문에 적힌 논리대로 약팀이었기에 개인 골 기록에 불리한게 사실이라면 같은 수의 골을 기록한 두 공격수가 있다면 약팀에서 같은 스탯을 기록한 선수가 더 뛰어난 득점력을 가졌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전문가들과 축구 팬들의 공격수에 대한 대체적인 평가와 위상을 살펴보면 동일한 골수를 기록했을때 약팀에서 같은 수의 골을 기록했다고 딱히 더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점은 사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쉽게 알 수 있다. 본문의 논리대로라면 중위권팀 셀타 비고 소속으로 2시즌 연속 20골을 돌파하고 꾸준히 두자릿수 득점을 기록한 이아고 아스파스가 20-21 시즌까지 우승권팀 레알 마드리드 소속으로 25골을 돌파한 적이 없는 카림 벤제마보다 월등한 득점력을 가진 선수라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아스파스가 벤제마보다 뛰어난 득점력과 개인기량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전문가, 축구팬이 과연 있을까?[199] 81/82 시즌의 경우 득점 순위 10안에 미드필더만 4명이 들어가 있다.[200] 74년 서독 월드컵 우승 멤버이자 프랑크푸르트 최다 득점 1위(519경기 204골), 분데스리가 역대 득점 순위 14위(420경기 160골)를 기록한 독일의 레전드[201] 분데스리가 247경기 74골을 기록한 레버쿠젠의 레전드[202] 분데스리가 224경기 59골을 기록했고 외국인 선수 최초로 한 경기 5골을 넣은 아이슬란드 레전드 공격수[203] 2018-2019년에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을 맡은 그 안데르센 감독 맞다[204] 122경기 중 100경기(1점 13회+2점 37회+3점 50회)[205] 당시 분데스리가 전체 선수는 360여 명이었으나, 리그 최종 평점 순위는 리그 경기 50% 이상을 뛴 선수만 대상으로 책정하기 때문에, 해당 글에선 79/80 시즌부터 88/89 시즌 사이에 50% 이상 리그 경기를 뛴 선수들의 평균값인 220명을 평점을 받은 총 인원으로 잡았다.[206] 평점 3위를 차지했던 우베 란도 있지만 공격형 미드필더와 센터 포워드를 오가던 이른바 미들라이커였고, 랑리스테(공격형 미드필더)와 수상 경력(84,85,86 분데스리가 올해의 미드필더)에 있어서도 미드필더로 분류되었기 때문에 제외하였다.[207] 나머지 4명은 케빈 키건, 위르겐 클린스만, 카를 알괴버(VfB 슈투트가르트 역대 최다 득점자), 미로스와프 오콘스키(폴란드 역대 윙포워드 8위)[208] 이 11명 중 두 번 이상 30위 안에 들어간 선수는 단 4명으로 루메니게(5회/11-7-11-10-7위), 루디 푈러(2회/10-19위), 차범근(2회/25-20위), 카를 알괴버(2회/27-11위)이다.[209] 당시 분데스리가에서 뛰던 공격수는 100여 명 정도였으나, 리그 최종 평점 순위는 리그 경기 50% 이상을 뛴 선수만 대상으로 책정하기 때문에, 해당 글에선 79/80 시즌부터 88/89 시즌 사이에 50% 이상 리그 경기를 뛴 공격수들의 평균값인 50명을 평점 받은 공격수 총 인원으로 잡았다.[210] 공격형 미드필더로 분류되는 선수들을 제외한 순위이며 공격형 미드필더를 포함하면 전체 공격수 평점 순위는 3-6-7-3-6-15-7-18-6-4위, 팀 내 평점 순위는 1-2-2-1-1-1-3-3-2-1위에 해당한다.[211] 80년대 랑리스테는 독일 국적의 선수들은 포지션 별로 평가를 한 반면 비 독일인 선수들은 전부 외국인으로 분류되어 포지션에 상관없이 평가되었다. 예를 들어 79/80시즌 전반기 WK-1이라는 건 월드클래스급의 활약을 했으며 분데스리가 전체 외국인 선수들 중 포지션 통합 1위라는 뜻으로, 차범근은 포지션 통합으로도 놓고 봐도 10위 밑으로 떨어진 적이 단 한 번 밖에 없다.[212] 유로 80 우승과 82년 스페인 월드컵 준우승 멤버로, 분데스리가 224경기 136골로 역대 득점 순위 20위와 함부르크 SV 역대 득점 3위에 랭크되어있는 함부르크 레전드 공격수이다.[213] 1991년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 수상자. 449경기 179골로 분데스리가 역대 최다 득점 8위에 랭크된 공격수로, 1.FC 카이저슬라우테른 역사상 첫 분데스리가 우승과 포칼 우승을 안겼다.[214] VfB 슈투트가르트 시절 클린스만의 평점 순위는 106-125-150-20-66위[215] 루메니게의 경우 분데스리가에서 뛴 10시즌(74/75~83/84) 동안 무려 9번의 시즌 평점 2점대를 기록했다.[216] 노파심에 말하지만 평점 3점을 받은 선수들을 낮게 보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차범근의 평점에 관한 의의와 평점 2점대를 받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말하기 위한 예시에 불과하다. 이 문서에서 언급하는 모든 선수들은 분데스리가 역사에 이름을 남긴 전설적인 선수들이다.[217] 윙 포워드인 손흥민과 중앙 공격수였던 차범근의 포지션적인 차이를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엄연히 공격수로 분류되는 손흥민이다. 중앙 공격수에 비해 윙 포워드의 득점력이 다소 감안되더라도 골을 넣는 위치이기 때문에 득점력이나 득점 순위에 자유로울 수가 없다. 특히 손흥민이 구단에서 원톱이나 투톱의 역할을 맡기도 하는 것처럼 차범근 역시 정통적인 센터 포워드라기보단 좌우 측면을 휘젓는 스타일을 살려 윙 포워드로 출전하기도 했다. 참고로 이는 비교에 대한 합리성을 드는 것일 뿐이지 차범근의 주 포지션이 윙 포워드였다는 얘기는 아니다.[218] 두번째 골은 71분 이회택이 넣었다.[219] 최순호 감독의 회고에 따르면 차범근은 당시에 타겟맨같은 역할을 해주었다고 한다. 상대팀이 차범근을 집중 마크할 것이 당연하니 역으로 자신이 그렇게 선수를 끌고 다니고 타 선수들에게 공격 기회를 만들어주었다고.[220] 로시는 차범근과 직접 붙어본 적은 없지만 유럽 컵 대회 등에서 차범근의 플레이를 보고 여러 번 감탄했다고 말하기도 했다.[221] 당시 불가리아는 1차전에서 이탈리아와 1:1로 무승부 승점 1점을 거둔 상태였다.[222] 사실 태권킥 역시 절묘하게 찍혀서 그렇지 멀쩡한 플레이 중에 운 없이 타이밍이 겹쳐서 그렇게 나온 것이다.[223] 대한민국은 1950년은 한국전쟁, 1954년은 일본을 이기고 16개국 본선에 첫 진출(월드컵 16위), 1958년 신청서 분실로 지역예선 불참, 1962년은 대륙간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였으나 유고에 패배하여 탈락, 1966년은 북한에 지는 게 두려워서 기권, 1970년은 1라운드 예선에서 호주에 밀려서 탈락, 1974년도는 최종예선에서 호주에 밀려서 탈락, 1978년은 최종예선에서 이란에 밀려 탈락, 1982년에는 1라운드 예선에서 쿠웨이트에 밀려 탈락하였다. 1986년에 들어서야 겨우 최종예선에서 일본을 꺾고 24개국 본선에 진출하였고 2022년까지 10회 연속 진출하고 있다.[224] 최종예선[225] 82년 월드컵은 1차예선에서 쿠웨이트의 편파판정에 패해서 최종예선에도 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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