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0-06 15:18:23

차키르마우트 전투



1. 개요2. 배경3. 전개4. 전투 내용5. 결과6. 여담

1. 개요

1205년에 발발한 칭기즈 칸의 카마그 몽골과 타양 칸의 동나이만 사이의 전투로 칭기즈 칸에 의한 몽골 통일 전쟁의 마지막을 장식하며, 칭기즈 칸이 전술, 전략적으로 완벽한 승리를 거머쥔 전투들 중 하나이다.[1]

2. 배경

1203년, 칭기즈 칸은 제지르 운두르 산에 주둔하고 있었던 옹 칸의 황금 장막을 기습하여 3일 동안 포위한 뒤 케레이트를 정복했다. 이로써 몽골 고원의 3분의 2는 칭기즈 칸이 차지하게 되었으며 이제 칭기즈 칸에게 남은 적은 몽골 고원 서부를 장악하고 있었던 동나이만뿐이었다. 나이만은 튀르크계 유목 부족이었으며, 케레이트의 옹 칸이 여러 번 나이만에게 패해 죽을 위기에 처할 정도로 강력한 부족이었다. 하지만 이난차 빌게 칸 사후 두 아들인 타양 칸과 부이룩 칸 사이의 반목으로 인해 타양 칸의 동나이만, 부이룩 칸의 서나이만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칭기즈 칸은 옹 칸과 동맹하고 있었던 시절에 타양 칸을 공격했으나 자무카의 음모로 인해 철수하면서 승부를 내지 못했었다.

타양 칸은 칭기즈 칸이 케레이트를 정벌한 이후에도 그의 세력을 매우 얕보고 있었으며, 나이만에 의탁하고 있었던 자무카와 톡토아 베키[2] 등은 칭기즈 칸을 선제 공격하라며 부추기고 있었다. 이에 타양 칸은 칭기즈 칸을 치기 위해 금나라의 북쪽 변경을 지키는 역할을 맡고 있었던 웅구트부와 동맹을 맺으려고 했다. 하지만 웅구트부의 족장 알라쿠시 티긴은 카마그 몽골이 막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칭기즈 칸이 타타르 정벌 이후, 금나라의 관직인 '자우우트 쿠리'[3]를 받은 것을 명분으로 삼아 동나이만의 사절단을 억류한 후, 칭기즈 칸에게 웅구트 측 사절단과 함께 보내서 동나이만의 음모를 알리는 동시에 복종의 뜻을 전달했다. 칭기즈 칸은 이에 웅구트부의 공로를 칭찬하고, 그의 딸인 알라카 베키를 알라쿠시 티긴의 아들인 센구이와 혼인시켰다.[4] 칭기즈 칸은 동나이만의 이러한 군사행동에 대응하기 위해 쿠릴타이를 열었다. 쿠릴타이에서 칭기즈 칸의 심복들은 동나이만의 세력이 막강하고, 몽골이 오랜 전쟁으로 말미암아 말과 병사들이 지쳐있다는 점을 들어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온건파와 동나이만이 공격하기 이전에 선제공격하자는 강경파로 나뉘었다. 이때 칭기즈 칸의 이복형제였던 벨구테이가 동나이만의 병사들은 수만 많을 뿐 오합지졸이라는 점을 내세우면서, 선제공격을 하자는 강경파에 군심이 기울자 칭기즈 칸은 벨구테이의 의견을 받아들여 1204년 동나이만의 본거지가 위치한 알타이 산맥으로 진격했다.

타양 칸은 칭기즈 칸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후, 곧장 대군을 이끌고 알타이 산맥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 몽골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매우 기뻐하며, 몽골 따위는 단숨에 무너뜨릴 수 있다는 오만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3. 전개

칭기즈 칸은 동나이만과의 결전을 앞두고, 부장이었던 도다이 체르비의 책략을 수용하여 진영 곳곳에 횃불을 들게 했는데, 이는 병력의 수가 적은 것을 대군을 이끌고 온 것처럼 나이만의 전초병들을 속여 동나이만군이 혼란스러워지는 틈을 타 병력을 정비하려는 위장작전이었다.[5] 동나이만군은 이로 인해 몽골군의 수가 예상보다 많다고 생각해서 혼란에 빠졌고, 전투를 개시하지 못한채 우왕좌왕했다. 이윽고 동나이만군이 정신을 차리고 전투를 시작했을 때는 이미 몽골군은 전쟁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또한 동나이만군에는 문제점이 하나 있었는데, 최고 지도자인 타양 칸의 본대가 정작 전장에서 뒤로 물러나 있었던 것이다.[6]

4. 전투 내용

몽골 초원의 패자를 결정할 전투는 나이만군 선봉대의 진격으로 개시되었다. 이에 맞서 칭기즈 칸은 수적으로 우세한 나이만군을 무너뜨리기 위한 작전을 세웠는데 《몽골비사》에서는 이를
"카라카나 행군으로 진격하여 호수 대형으로 전개한 뒤 끌 전투로 결판을 내자!"
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내용에 따르면 당시 몽골군의 진형은 밀집 대형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나이만군의 주력 부대가 접근하자 칭기즈 칸은 몽골 군대를 넓은 지역에 산개시키고, 산개한 군대가 각 방향에서 신속하고 지속적인 공격과 후퇴를 반복하도록 했다. 이렇게 되면서 나이만군은 병력을 길게 늘어뜨리기 시작했다. 이때 몽골군이 일제사격을 개시했고, 진격해오는 나이만군 선봉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절대로 전 병력이 한꺼번에 공격하지 않고, 선봉대가 진격하면 그 이후에 본대가 진격하고, 마지막에 예비대를 투입하는 선진전술을 구사했다. 나이만군의 선봉대가 화살 공격에 주춤하자 칭기즈 칸은 제베, 쿠빌라이, 젤메, 수부타이로 이루어진 4구가 지휘하는 부대를 먼저 출격시켰다. 4구가 이끄는 몽골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인해 나이만군의 선봉대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칭기즈 칸은 측면에 배치되어 있었던 망고드부 및 오로오드부로 구성된 부대를 2차로 출격시켰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뒤로 물러나 있었던 나이만군의 주력 부대가 출격하면서 격렬한 난전이 펼쳐졌다. 이때 칭기즈 칸은 직접 본대와 나머지 예비대를 이끌고 공격을 개시했다. 이렇듯 기존의 유목민들이 행했던 전투 방식을 탈피한 몽골군의 공격에 당황한 나이만군은 패주하여 절벽까지 몰리게 되었고, 이후 몽골군에게 절벽이 포위당하면서 모조리 전멸하고 타양 칸 등의 수뇌부도 대다수가 전사했다.[7]

5. 결과

동나이만을 마지막으로 칭기즈 칸에게 대항했던 몽골 고원의 유력 부족들은 사실상 모두 멸망하거나 몽골에게 복속되었다. 칭기즈 칸은 마침내 몽골 고원의 통일을 이룩하고 1206년 몽골 제국을 건국했다.[8][9] 이후 타양 칸의 아들이었던 쿠츨루크는 숙부인 서나이만의 부이룩 칸에게 의탁했으나, 몽골군에 의해 서나이만마저 멸망하자 서요(카라 키타이)로 도피했다. 이후 쿠데타를 일으켜 서요를 차지했으나 몽골군이 다시 서요를 공격하면서 쿠츨루크를 비롯한 나이만 잔당은 멸망했다. 또한 이 차키르마우트 전투에서 칭기즈 칸이 보여준 전술과 부대 편성은 이후 몽골 제국 군사제도의 기본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6. 여담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이 전투 직후인 1205년 칭기즈 칸이 군대를 이끌고 서하(탕구트)를 침공한 적이 있었다. 다만 이 침공은 패주한 자무카나 톡토아 베키 같은 잔당들을 토벌하기 위한 추격전의 와중에 벌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1] 차키르마우트 전투는 공식적으로 동나이만과 칭기즈 칸의 전투였지만, 한편으로는 칭기즈 칸과 동나이만에 의탁해있었던 자무카의 최후의 대결이기도 했다.[2] 메르키트부의 족장으로 칭기즈 칸의 아내 보르테를 납치했었던 인물이다.[3] 백호장에 해당하는 관직이었다.[4] 웅구트부는 이후 몽골-금나라 전쟁 때 몽골군에게 금나라로 향하는 길목을 열어주고, 길잡이 역할을 자처하면서 칭기즈 칸에게 계속 충성했다.[5] 위 문단에도 서술되어 있지만 몽골은 동나이만과 비교해 수적으로 열세였고, 케레이트와 벌인 전쟁의 여파로 말들이 풀을 먹지 못해서 야위었으며, 적지로 멀리 원정을 와서 지쳐있었다.[6] 이난차 빌게 칸이 승하하기 전, 아들인 타양 칸에게 나이만부를 맡기는 것을 염려했다. 또한 타양 칸의 아들인 쿠츨루크와 여타 부하 장수들도 모두, 그들의 주군인 타양 칸을 가리켜 궁녀들에게 둘러싸인채, 천막 밖으로 볼일을 보러 갈 때 빼고는 밖에 나온 적이 없다며 모욕했고, 나이만의 장군 쿡세우 사브락은 타양 칸의 모후인 구르베수가 전쟁을 지휘하는 것이 낫다고 말할 정도로 타양 칸은 전쟁을 한 번도 직접 지휘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타양 칸은 겁쟁이였다.[7] 《원조비사》에서는 전투 중 타양 칸이 곁에 있었던 자무카에게 테무진과 몽골군에 대한 자문을 구했는데, 이때 자무카는 몽골군과 테무진의 능력을 과장해서 얘기했다고 하며 이에 겁을 먹은 타양 칸은 점점 군사를 절벽까지 몰게 되었고, 몽골군이 계속 절벽을 포위하게 되면서 궁지에 몰린 나이만 군대가 전멸되었다고 서술했다.[8] 오이라트와 투마트를 포함한 삼림 부족이 남아있었지만 이들 역시 몇 년 후에 몽골 제국에 복속했다.[9] 숙적이었던 자다란 자무카 역시 차키르마우트 전투 이후 도주했으나, 부하들의 배신으로 인해 몽골에 끌려가 처형되었다. 메르키트의 톡토아 베키는 캅카스조지아 지역까지 도망갔다가 추격해온 수부타이에 의해 전사했고, 톡토아 베키의 아들인 쿠두는 간신히 도망쳐서 재기를 노렸으나 11년이 지난 1217년 주치에 의해 메르키트는 완전히 멸망했다.